2003년 2월호

민족·종교·역사 ‘복합 갈등’이 낳은 30년 유혈사태

북아일랜드

  • 글: 안병억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과정·유럽통합 전공 anpye@hanmail.net

    입력2003-02-04 1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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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천여 명이 희생을 치르고도 북아일랜드엔 좀체 훈기(薰氣)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화해의 조짐을 보이던 정치권은 다시 얼어붙었고, 신교파 영국인과 구교파 아일랜드인이 수백 년 동안 쌓아올린 불신의 벽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벨파스트의 봄’은 언제나 올 것인가.
    민족·종교·역사 ‘복합 갈등’이 낳은 30년 유혈사태
    2002년 10월 초,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있는 자치정부와 의회(스토몬트·Stormont)가 출범 3년 만에 4번째로 영국 정부에 의해 ‘기능 정지’를 당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를 직접 통치하게 됐다.

    자치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신페인당의 준(準)군사조직인 아일랜드공화군(IRA) 요원이 스토몬트에서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경찰이 신페인당의 스토몬트 사무실을 수색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간부가 체포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신교파 민주연합당은 이 사건을 빌미로 자치정부에서 철수했고, 그 결과 자치정부는 붕괴됐다.

    2003년 봄 총선이 예정돼 있지만, 날짜조차 확정되지 않은 데다 선거 후 자치정부가 다시 들어선다 해도 얼마나 지속될지는 불투명하다. 민주연합당, 얼스터연합당 등 영국과의 연합에 찬성하는 구(舊)제국주의자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교파 정당과 신페인당 등 구교파 아일랜드인 정당 간에 불신의 벽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신교파 영국인과 구교를 신봉하는 아일랜드인 사이의 민족적·종교적·역사적 갈등의 골도 깊다. 따라서 서로간의 불신을 떨쳐내려는 시민사회의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 한 ‘벨파스트의 봄’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1969년 8월 영국군이 북아일랜드에 주둔하고 이에 맞서 아일랜드공화군이 결성된 이후 1994년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테러행위는 끊이지 않았다. 영국인 축출과 아일랜드 통일을 목표로 하는 IRA는 영국 주둔군과 영국인에 대해 테러를 감행했고, 북아일랜드에 정착해 살아온 신교파 영국인들은 자위대를 결성, IRA 테러에 대한 보복테러 혹은 경고성 테러를 일으켰다. 지난 30여 년에 걸친 양측의 테러로 3100여 명이 사망했고, 3만6000여 명이 다쳤다.



    원주민과 정복자

    이같은 유혈테러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려면 800여 년에 걸친 영국과 아일랜드의 분쟁사, 그리고 20세기 들어 이뤄진 두 나라의 관계 변화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30년의 유혈사태는 표면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수백년간에 걸친 뿌리깊은 민족적·종교적·역사적 갈등이 상속되면서 증오의 싹이 자라난 것을 알 수 있다.

    지도에서 영국과 아일랜드를 살펴보자. 커다란 섬나라 영국에 인접한 또 하나의 작은 섬나라가 아일랜드다. 국토 면적은 영국이 24만㎢가 좀 넘고 아일랜드는 7만㎢ 정도로, 영국이 3배 이상 넓다. 아일랜드에서도 그 윗부분에 자리한 북아일랜드는 1만4000㎢에 불과하다.

    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북아일랜드는 영국 국토의 일부가 됐다. 영국의 공식 명칭인 ‘UK(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에서도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Great Britain’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의미한다). ‘커다란 섬나라에 붙은 조그만 섬나라’라는 지리적 위치는 800여 년에 걸친 두 나라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는 작은 실마리다.

    1066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윌리엄공(公)이 영국을 점령했다. 그후 14세기 중반까지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조와 노르만 왕조는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번갈아 영국을 통치했다. 플랜태저넷 왕조에 속하는 헨리 2세는 1170년, 현재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 인근 지역을 점령했다. 당초 그는 아일랜드를 영국에 부속시키려고 점령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부 지역만 통치하게 됐다.

    하지만 그후 영국은 아일랜드의 더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다스렸다. 그래서 1558년에서 1603년까지 영국을 통치한 엘리자베스 1세 때는 아일랜드 대부분의 지역이 영국 지배하에 들어갔다. 단지 얼스터(Ulster·현재의 북아일랜드 지역)만이 영국의 점령을 면했다. 얼스터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이 휴 오닐(Hugh O’Neill)의 지도 아래 내분을 종식하고 영국군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동맹을 결성한 덕분이었다.

    민족·종교·역사 ‘복합 갈등’이 낳은 30년 유혈사태
    그러나 결국은 얼스터도 영국의 위세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영국의 본격적인 식민이 시작된 것은 스튜어트 왕조 초기인 제임스 1세 때부터. 특히 1609년부터 얼스터에 대한 대규모 식민이 시작됐다. 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에 살던 주민들에게 북아일랜드에 정착할 경우 넓은 땅을 유리한 조건에 주겠다며 끌어들여 대대적인 식민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1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703년에는 전체 토지의 5%만이 구교를 믿는 아일랜드 원주민의 소유로 남았고, 나머지는 신교를 신봉하는 영국인이 차지하게 됐다. 아일랜드인 원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지녀온 옥토를 빼앗기고 야산과 변두리로 쫓겨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은 언어(영어와 아일랜드어)와 종교(신교와 구교)는 물론 거주지역도 서로 달랐다. 피맺힌 한을 품은 아일랜드인은 점령군이자 제국주의자인 영국인들에게 거세게 저항했고, 영국인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시기에 굳어진 갈등구조가 3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일랜드는 1801년 공식적으로 영국의 일부가 됐다(Act of Union).

    독립 후에도 사실상 식민지

    19세기 들어 아일랜드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합법적, 불법적인 운동이 이어졌다. 1840년대의 ‘Act of Union’ 철폐운동, 의회를 통해 자치권을 회복하자는 1870년대의 ‘홈룰 (Home Rule)’운동 등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전개됐다. 반면 아일랜드공화국형제단이나 페니어 회원(Fenians·아일랜드 독립쟁취를 위한 비밀결사로 미국 거주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됐다)들은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싸웠다. 홈룰 법안은 하원에서 두 차례나 통과됐으나, 대지주이자 아일랜드에 상당한 이권을 소유한 상원의 반대로 좌절됐다.

    1835년 더블린에서 일어난 신교도 영국인과 구교도 아일랜드인 간의 대규모 충돌 이후 10년에 한번 꼴로 두 나라 사람들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빚어지면서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숨지거나 다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부활절을 기해 더블린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대규모 무장투쟁이 전개됐다. 당시 1차대전에 정규군 병력을 대거 투입한 영국은 죄수들을 주축으로 구성한 임시군을 아일랜드에 파견했는데, 카키색과 흑색 제복(Black and Tans)을 입은 이들은 잔혹하게 반란을 진압해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1차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에도 반란이 발생하자 결국 영국은 1920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반란 당시 신페인당의 게릴라 군사조직으로 결성된 것이 아일랜드공화군이다.

    북아일랜드에 정착한 영국인들은 홈룰과 무장투쟁을 거치면서 아일랜드의 독립이 불가피하다고 봤다. 그래서 독립을 묵인하는 대신 북아일랜드는 계속 영국의 지배하에 두기로 영국 정부와 밀약을 맺었다. 당시 북아일랜드 주민의 70%가 영국인이었다. 아일랜드의 경우 영국인의 비율은 10% 남짓했다.

    영국에서 독립한 아일랜드에선 무장투쟁을 통해 북아일랜드도 아일랜드로 통합해야 한다는 정파와 이를 반대하는 정파 간에 충돌이 빚어졌다. 그 결과 아일랜드인들끼리 파가 갈려 1923년까지 내전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됐다. 물론 IRA는 북아일랜드의 영국 잔류에 반대했다. 이 때문에 IRA는 1950년대에 아일랜드 정부에 의해 불법단체로 규정됐고 그후 지하로 숨어들었다.

    영국에 잔류한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정복자 영국인이 원주민 아일랜드인을 사실상 지배하는 사회였다. 아일랜드인의 처지에서 보면 독립을 하고서도 현대판 식민지가 된 셈이다. 여당인 얼스터연합당이 경찰, 교육, 사회복지 부문 등에서 자치권을 행사했다. 경찰은 대개 영국인으로만 충원됐고, 비상법안이 도입돼 아일랜드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아일랜드인은 ‘2류 국민’에 지나지 않았다.

    18세기 초의 식민지 시절과 마찬가지로 거주지역도 철저하게 양분됐다. 이처럼 차별되고 격리된 사회에서도 교육을 받은 아일랜드인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1960년대 들어 미국식의 평등권(Civil Rights) 운동이 전개됐다. 이 운동을 벌인 아일랜드인은 북아일랜드가 아일랜드로 통일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 “북아일랜드의 영국 잔류를 인정할 테니 대신 아일랜드인도 영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해달라”고 요구했다.

    1967년에는 북아일랜드 평등권운동연합이 결성됐다. 이들은 직업과 주택 할당에서의 차별과 비상법안, 그리고 영국인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의 철폐를 요구했다.

    이들은 그 무렵 미국에서 열기를 더해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평등권 운동을 모델로 시위와 연좌농성, 언론매체를 통한 의견개시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지배층인 신교파 영국인은 소수층인 구교파 아일랜드인이 벌이는 어떠한 운동도 영국과의 연합을 가로막는 것은 물론 무장투쟁을 위한 서곡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평등권 운동을 탄압했다. 그래도 사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1969년 8월 영국군이 북아일랜드에 주둔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북아일랜드에서도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쟁취를 모토로 내건 IRA가 재결성됐다.

    영국군이 북아일랜드에 주둔하고 IRA가 테러를 자행하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했다. IRA의 테러를 빌미로 영국인이 결성한 자위대도 아일랜드인에게 테러를 저질렀다.

    1972년 1월30일에는 북아일랜드 제2의 도시 런던데리에서 영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며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던 구교도 시위대에 영국군 공수부대가 발포, 13명이 숨지는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발생했다. 두 달 뒤인 3월30일에는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의 자치권을 접수하고 직접통치를 시작했다.

    1972년에 벌어진 무장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그해 1년 동안 테러로 사망한 사람이 468명에 이른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1997년 5월 취임한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이 사건을 재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 지금까지 당시 발포자와 발포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다.

    이처럼 피의 악순환이 거듭되던 북아일랜드 사태에 일종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 벌어졌다. 투옥된 IRA 죄수들의 단식투쟁이었다. 1981년 3월1일 메이즈 감옥에 수감된 IRA 지도자 보비 샌즈가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5년 전에 폐기된 IRA 죄수들에 대한 정치범 대우 부활, 평복 착용과 감옥내 결사의 자유 허용, 감옥내 노역 금지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투옥된 다른 죄수들도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10월3일까지 계속된 단식투쟁으로 IRA 죄수 10명이 사망했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는 이들을 테러범으로 규정, 숨지도록 방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IRA는 북아일랜드내 구교도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된 것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IRA는 약자이고, 영국 정부는 탄압자인 것으로 인식됐다. 이후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신페인당이 승리하면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영국과 협력하자고 주장해온 사회민주노동당을 압박하자 영국 정부는 다급해졌다.

    영국 정부는 신페인당이 북아일랜드 구교 원주민의 제1 정당이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일랜드 정부와 비밀협상을 시작, 1985년 11월15일 ‘영국-아일랜드 협정(아일랜드의 힐즈버러성에서 체결돼 ‘힐즈버러 협정’이라고도 불린다)’을 맺었다.

    역사적 합의 도출

    신페인당의 급부상과 더불어 미국의 대화 권고도 영국-아일랜드 협정 체결의 기폭제가 됐다. 1984년 10월12일 보수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던 동부 항구도시 브라이튼의 한 호텔에서 IRA가 설치한 폭탄이 터졌다. 이 테러로 영국 보수당 장관 4명이 숨졌고, 대처 총리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낌새를 알아차리고 관련 정보를 영국 정부에 전해줬다고 한다. 이 사건 직후 대처 총리와 특별한 관계에 있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철의 여인’에게 아일랜드와의 대화를 촉구했다. 미국 국민의 20%를 차지하는 아일랜드계 이민의 강력한 로비가 레이건을 움직인 것이다.

    영국-아일랜드 협정은 북아일랜드의 어떤 정당과도 협의를 거치지 않은 두 정부 간의 협정이다.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와의 국경을 잘 단속하고 자국으로 도주한 IRA 테러리스트를 영국에 인도하는 대신,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해 영국 정부로부터 발언권을 인정받았다.

    이 협정에 대해 영국과의 연합을 적극 지지하며 어떤 타협도 이를 희석시키는 것으로 본 연합주의자(Unionists), 특히 민주연합당의 반대가 거셌다. 이들은 대규모 시위와 연좌농성을 벌여 협정 폐지를 요구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후 북아일랜드 문제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구교도에 대한 신교도 연합주의자들의 마구잡이식 테러가 극성을 부려 IRA의 테러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낳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신교도의 테러가 IRA 테러에 대한 방어행위라는 주장이 명분을 잃었다. 이에 따라 신교도의 자위대인 얼스터방위연합(Ulster Defence Association)도 1992년 영국정부에 의해 IRA처럼 불법단체로 규정됐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 11월 영국 총리에 취임한 존 메이저는 신페인당의 게리 애덤스 당수와 수차례 비밀 협상을 벌이는 한편, 아일랜드의 앨버트 레이놀즈 총리와도 협상을 가졌다. 그의 노력은 1993년 12월15일 다우닝가 선언으로 결실을 봤다. 이 선언은 신교도와 구교도가 똑같이 무력투쟁을 종결한다는 조건으로 신페인당을 포함한 모든 정파가 북아일랜드의 미래에 관한 논의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사상 처음으로 신페인당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한 것이다.

    또한 북아일랜드의 미래는 주민 과반수의 동의로 결정한다고 합의, 신교 58%, 구교 42%인 북아일랜드의 현실을 인정했다. 즉 영국 정부는 인구의 58%를 차지하는 영국의 연합주의자에게 북아일랜드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안심시키면서 평화를 위해 자위대에게 무력행사를 포기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신페인당 게리 애덤스 당수와 사회민주노동당 존 흄 당수도 IRA를 줄기차게 설득, 결국 1994년 6월 IRA의 일방 휴전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신교도 과격파도 이에 호응했다. 1969년부터 시작된 피의 악순환이 드디어 끝나고 머지않아 평화의 봄이 오리라는 기대감이 일었다.

    봄으로 가는 험로

    1997년 취임한 토니 블레어 총리도 전임 보수당 총리로부터 상속받은 북아일랜드 문제에 매달렸다.

    1998년 4월10일 평화협정(부활절 직전의 금요일에 체결돼 ‘굿프라이데이 협정’이라 불림)이 성사될 때까지 연합당과 신페인당 사이엔 협상을 계속하기 위한 선결조건을 놓고 논란이 거듭됐다. 강경 친영파인 민주연합당은 IRA의 무기 폐기를 선결조건으로 내걸었고, 신페인당은 IRA 정치범 석방을 무기 폐기와 연계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 때문에 평화협상은 수차례 교착상태에 빠졌다.

    우여곡절 끝에 1997년 말 사상 최초로 신페인당과 민주연합당이 평화협상에 함께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조지 미첼 상원의원을 특사로 임명, 북아일랜드의 평화협상이 타결되도록 지원했다.

    30여 년에 걸친 피의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는 평화협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총선을 통해 108석의 북아일랜드 의회를 구성한다. 둘째, 선거를 통해 각 정당 비례대표 12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가 행정부 기능을 수행한다. 셋째,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가 자국의 영토라는 헌법조항을 삭제한다. 넷째, 준군사조직, 특히 IRA와 신교도 자위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정치범을 석방한다. 다섯째, 대부분 신교도로 이뤄진 경찰에 아일랜드인도 참여하도록 경찰 구조를 개혁한다.

    평화협정에는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 그리고 얼스터연합당과 민주연합당, 사회민주노동당, 신페인당 등 북아일랜드 8개 정당이 공동 서명했다. 이 협정은 1998년 5월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북아일랜드에서 71%, 아일랜드에서 94%의 지지를 얻었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국민 대다수가 평화를 갈망했음을 알 수 있다.

    그해 6월25일 실시된 총선은 북아일랜드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됐다. 연합주의자이지만 평화협정에 반대하지 않은 얼스터연합당이 108개 의석 가운데 28석을 얻어 최다 득표 정당이 됐다. 이어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외친 아일랜드인 중심의 사회민주노동당이 24석을 획득했다. 평화협정에 반대했던 강경파 연합주의자 민주연합당은 20석, 강경파 민족주의자 신페인당은 18석을 차지했다. 신교도 자위대와 연계된 인민연합당도 5석을 얻는 등 소수파 정당도 합법적인 정치공간을 확보했다.

    신교도 영국인과 구교도 아일랜드인이 공동 참여해 최초로 구성된 ‘권력 공유형’ 의회와 자치정부에선 득표 비율에 따라 얼스터연합당 당수 데이비드 트림블이 수석장관이 됐다. 득표율 2위를 기록한 사회민주노동당 부총재 시머스 맬론은 부수석장관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벨파스트의 봄은 짧았다. 1998년 7월 초 첫 의회가 개원하자마자 구교도 거주지역을 관통하는 신교도의 행진을 허용할 것이냐는 난제를 놓고 논란에 휩싸였다. 마침내 벨파스트 인근 포터다운시(市)에 있는 오렌지 교회의 신교 신도들이 길 건너 구교도가 거주하는 지역을 가로지르는 행진을 감행했다. 구교도와의 충돌을 우려한 경찰은 이를 저지했고, 경찰보다 훨씬 많은 신교도들이 모여들여 경찰과 충돌, 몸싸움과 방화가 빚어지면서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민족·종교·역사 ‘복합 갈등’이 낳은 30년 유혈사태

    벨파스트 북부의 구교도계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와 학부모들이 신교도 거주지역을 통과해 등교하다 폭탄테러가 발생하자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대피하고 있다

    평화협정에 반대한 민주연합당은 이를 빌미로 라이벌인 얼스터연합당 흔들기에 혈안이 됐다. 평화협정에 반대하지 않은 얼스터연합당도 이런 민족간 갈등에선 신교도 영국인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한계에 봉착했다.

    뒤이어 8월15일에는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IRA의 극렬파 ‘리얼 IRA’가 저지른 오마 폭탄테러가 발생, 29명의 시민이 숨졌다. 이 테러로 자치정부 구성은 무산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영국정부가 자치정부 구성 시한으로 정한 1999년 6월30일을 6개월 넘긴 그해 12월2일 초당적 자치정부가 구성됐다.

    그러나 자치정부는 평화협정의 핵심조항 중 하나인 IRA의 무장해제가 제대로 진전되지 않음에 따라 2000년 2월 첫 기능정지를 당했다. 이후 지난해 10월 네 번째 기능정지를 당해 영국 정부의 직접통치가 이제껏 계속되고 있다.

    IRA의 무기 폐기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케임브리지 앵글리아 공과대학에서 영국 현대사를 강의하는 데이비드 와이겔 교수는 “리얼 IRA는 조직원의 일부가 마약 등 범죄행위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만큼 쉽사리 무기를 폐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30여 년의 상황을 감안할 때 북아일랜드의 평화정착은 상당 수준 진전됐다”며 “최악의 상황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1980년대에 IRA 요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수감생활을 했던 앤소니 매킨타이어씨는 “상당수의 IRA 구성원은 평화를 바라지만, 문제는 테러행위를 벌이는 극소수 강경파를 통제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신페인당 게리 애덤스 당수도 강경파를 제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정치적 요인 외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신교도 영국인과 구교도 아일랜드인 간의 증오와 불신이 그것이다. 그들은 수백년간 서로 격리돼 살면서 증오심을 키워왔다. 현재 북아일랜드에는 이들의 통합 거주지역이나 통합학교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신교도나 구교도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정당간 합의를 거치고 자치정부를 구성했다 해도 주민들의 진정한 상호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평화가 지속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해 11월 초 필자가 공부하고 있는 케임브리지대에서 북아일랜드 관련 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에 참석한 한 아일랜드 사람에게 한국전쟁과 남북한의 최근 교류 상황을 알려주면서 “당신들은 왜 대화와 사회통합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학교에서도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외국인의 이같은 지적에 당혹스러워 하면서 “북아일랜드에서 수백년간 가톨릭을 믿어온 아일랜드 사람들은 성당을 중심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왔고, 문화와 역사를 배웠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주의자인 영국인과 함께 사는 거주지역이나 함께 배우는 통합학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토니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 정부도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해 전임 보수당 정부와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다. 즉 북아일랜드의 미래는 주민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결정한다는 것이다. 주민의 58%가 신교도 영국인이기 때문에 북아일랜드가 영국에 잔류한 채 신교도와 구교도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백 년에 걸친 잔혹한 제국주의 지배와 이에 대항하는 반란이 이어졌지만, 역사의 시계는 되돌릴 수 없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이 풀뿌리 시민사회에서부터 서로를 이해하고 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벨파스트에선 진정한 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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