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퇴장 ‘동교동’ 맏형 권노갑, 마침내 입열다

“16대 총선 후 정몽준에게 최고위원·대선후보 경선 제의”

  • 글: 조성식 mairso2@donga.com

    입력2003-02-24 17: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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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지원 비서실장, 검찰 소환 발표 이틀 전 통화에서도 귀띔 안 해줘
    • 진승현 사건은 날조, 배후 짚이는 데 있지만 내 입으로는 말 않겠다
    • 김중권 비서실장, 대통령에게 나에 대해 좋지 않은 보고 올려
    • 정권 초기 공직 인사는 김중권 비서실장과 김홍일 의원이 주도
    • 신의 없는 정동영 오래가지 못할 것, 김근태는 경선자금 양심선언 후 사과
    • 한화갑 ‘과욕’ 부려 사이 벌어진 것
    • 이인제 지지한 것 사실이지만 청와대 음모설 주장에 크게 실망
    • 16대 총선 후 정몽준 영입 시도, 최고위원과 대선후보 경선 제의
    • 이수성 입당, 당대표 욕심으로 무산
    • 노무현, 해수부장관 시절 만나 지지율 오르면 도와주겠다 약속
    • 대통령 지시로 16대 공천 개입, 탈락자 22명 공기업체 기관장으로 보내
    • DJ의 외유 강권, 가족들 결사반대로 거부
    퇴장 ‘동교동’ 맏형 권노갑, 마침내 입열다
    우여곡절 끝에 권노갑(73) 전 민주당 고문과의 인터뷰가 성사됐다. 인터뷰는 장소를 바꿔가며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2월 중순 호텔 식당에서 만난 권씨의 표정은 밝았다. 옷차림이 편해 보였다. 검정 재킷에 받쳐입은 베이지색 폴라티가 그가 감당해온 세월의 무게를 덜어주고 있었다. 건강을 물어보았다.

    “많이 좋아졌어요. 다만 당뇨가 아직 조절이 잘 안되고 망막염이 생겼어요. 또 백내장이 왼쪽 오른쪽에 조금씩 있는데 수술할 정도는 아니고. 그동안 걸음을 잘 못 걸었어요. 발이 붓는 증세입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져서 틈나는 대로 산보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 골프도 치고 있습니다. 구치소 있을 때는 불면증,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요즘은 그 증상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가 불편해할 질문을 바로 꺼냈다.

    -그동안 권고문(권노갑씨 주변에서는 그를 이렇게 부른다)을 두고 말이 많지 않았습니까. 국민들에게 긍정적 이미지보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 많이 심어주었는데요. 권고문께서는 자신의 존재가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까.



    “없어요. 나는 당당하고 떳떳해요, 대통령을 위해 내 일생을 바쳤기 때문에. 언론에서 뭐라 떠들어도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믿습니다. 대통령을 위해 버팀목이 되겠다, 내가 무얼 하겠다는 욕심보다 대통령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고 행동지침이었기 때문에 누를 끼친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대통령도 그런 생각을 안 했어요. 밖에서 그런 말이 들어오면 권노갑은 그런 사람 아니라고 말씀해 왔어요. 지난번에 대통령께서 ‘너 외국 나가라’고 하기에 ‘제가 왜 외국에 나갑니까. 무얼 잘못했다고’ 하면서 대통령 말에 처음으로 반대했잖습니까. 나도 가족이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족에게 누를 끼치겠습니까.”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알았다고만 하셨어요. ‘자네가 잘못해 나가라는 게 아니라 왜곡된 여론이 혹시라도 정부에 부담이 되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라며. 하여튼 국정을 농단했다느니 무슨 게이트에 연루됐다느니 비선을 통해 인사를 다했다느니…. 이렇게 헛소문으로 나를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된 겁니다.”

    권씨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됐다. 생각보다 두터운 방어벽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여론의 공격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박지원이 집에 찾아와 외유 권유

    권씨에 따르면 김대통령이 외유를 권유한 것은 지난해 3월. 전 국정원 2차장 김은성씨의 옥중 탄원서로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 의혹이 불거지고 최규선 게이트가 꿈틀거릴 무렵이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집으로 찾아와 대통령의 뜻이라며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박실장에게 대통령 뜻이라면 나가겠다고 말했어요. 성명서까지 준비했지요. 그런데 나도 가족이 있지 않아요? 미국에 있는 아들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무슨 잘못 있냐. 나가면 안 된다’고 만류했어요. 지금 나가면 오히려 국민들한테 더 오해받는다고. 가족들이 강력히 반대해 생각을 바꿨죠.”

    권씨는 청와대에 안 들어간 지 2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소원해진 것이냐”고 묻자 “그런 게 아니라 특별히 만날 이유가 없어서”라고 했다. 대통령에게 할 얘기가 있으면 한광옥(청와대 비서실장 역임) 최고위원이나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측근에 따르면 권씨와 대통령의 관계는 거의 단절된 듯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오래 전부터 만나는 건 고사하고 전화통화도 하지 않는다는 것.

    ◇ 1부 : 국민의 정부 ‘궐밖 실세’의 영욕

    권노갑씨와는 모두 네 차례 만났다. 처음엔 인터뷰를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권씨는 그날 무작정 자신의 집으로 ‘쳐들어온’ 기자와 한 시간 반쯤 대화를 나눈 후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약속했다. 두 번째 호텔에서 만나서는 1차 인터뷰를 진행했다. 세 번째는 그가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인터뷰를 취소하겠다고 통보해와 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만났다. 역시 한 시간 가량 얘기를 나눈 후 그는 인터뷰 재개를 약속했다. 2차 인터뷰는 그의 집에서 진행됐다.

    -구속되기 며칠 전 박지원 비서실장과 통화했다면서요?

    “제주도에 휴가 갔다가 서울에 올라오기 하루 전이었습니다. 박실장이 전화를 걸어와서는 안부인사만 하고 끊었습니다.”

    -검찰 소환 사실을 알려주지 않던가요.

    “전혀 안 해줬어요. 어디 있냐고 묻기에 지금 제주도에 있다고 말했지요.”

    -나중에 꽤 섭섭했겠는데요.

    “그 사람이 알고 있으면서도 말해주지 않았던 건 좀 섭섭하지. 하지만 박실장 입장도 이해해요. 그걸 알려주면 검찰 수사정보를 사전에 누설한 게 되지 않습니까. 또 미리 알려준다고 구속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권씨는 박실장과 지금도 자주 연락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치소에 있을 때 면회는 오지 않았지만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 입원해 있을 때 몇 차례 병문안을 오고 집에도 왔었다고 한다.

    -박실장이 뭐라 하던가요. 항의하지는 않았습니까.

    “항의보다 이미 내가 안 받은 걸 알고 있어요. 억울하다고 그래요. 대통령도 알고 있어요. 권노갑이 그런 돈 먹을 사람이 아니라고.”

    김중권 비서실장 임명에 깜짝 놀라

    -올초 박지원 실장이 대통령의 뜻이라며 동교동계 해체를 언급했을 때 어떤 심정이셨습니까.

    “대통령 말씀이니 다 뜻이 있겠다 싶었지요. 하지만 이미 동교동이라는 조직은 없어요.”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여전히 현실세력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없어요. 그 양반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가 계실 때 내가 내외문제연구소를 활성화시켰습니다. 그런데 귀국해서 국민회의를 만들면서 내외문제연구소 해체를 지시해 곧바로 해체해버렸어요. 그때부터 동교동이라는 특별한 조직은 없어진 겁니다. 어떤 보스가 있어 이끌고 나가야 하는데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민주당 내에서 계속 논란이 되지 않았습니까.

    “내가 최고위원을 그만둔 이후론 문제가 없었잖아요. 한화갑도 동교동 역할은 끝났다고 얘기했잖아요. 동교동계 역할은 대통령 만든 걸로 끝난 겁니다. 각자의 길을 가자고 해 구파니 신파니 분리도 됐잖아요. 나는 평당원이 됐고. 이미 동교동이라는 조직이 없어졌는데 새삼 해체라고 할 필요도 없죠.”

    1997년 12월 DJ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권씨는 병원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해 2월 한보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신병치료차 입원해 있었던 것. 그해 9월 옥중에서 동교동계 의원들의 공직 진출 포기 선언에 참여한 그는 이듬해 8월 8·15특사로 사면된 직후 일본으로 출국했다. 출국하기 전날 대통령을 면담했다.

    “일본 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국제관계, 동북아정세, 통일문제 등을 공부하라고.”

    ◇ 2부 진승현 게이트의 진실게임

    권씨는 지난해 5월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 구속돼 1심에서 징역1년을 선고받았다. 석달 뒤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돼 병원에서 신병 치료를 받기도 했던 그는 그해 12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인데 그의 무죄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의 혐의는 2000년 7월 그의 집에 들른 김은성 당시 국정원 2차장으로부터 진승현씨가 쇼핑백에 담아 전달한 50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홍만표 부부장검사(서울지검 특수1부)가 이틀 동안 조사한 후 ‘권고문을 만나기 전에는 머리에 뿔 달린 악마라는 선입견을 가졌는데 막상 만나보니 좋은 분’이라고 말하더군요. 홍검사는 미국으로 연수 떠나기 전날 구치소로 찾아와 ‘집행유예로 나갈 줄 알았는데 참 안 됐다’고 저를 위로했습니다. 교정당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담당 부부장검사가 구치소에 찾아와 피의자를 만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는 거예요.

    진승현 사건에 민주당 당원인 장성 출신 모 인사가 관련됐잖아요. 그 사람이 선물상자를 들고 우리 집에 찾아온 적이 있어요. 풀어보니 목걸이 반지 넥타이핀 팔찌 등 귀금속이 잔뜩 들어있는 거예요. 비서를 시켜 바로 돌려보냈어요. 검찰 조사 때 홍검사가 먼저 ‘권고문께서 그런 선물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홍검사에게 ‘내가 우리당 당원의 선물도 안 받은 사람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김은성 돈을 받겠소’ 하고 말하자 홍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두 사람(김은성과 진승현) 말이 일치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두 사람이 입만 맞추면 조작한 것도 사실이 됩니까’ 하고 따졌어요.”

    -그 사건에 관련됐다는 걸 언제 처음 알았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기자들 사이에 나에 대한 얘기가 돈다고 비서가 전해줬는데 ‘쓸데없는 소리’라고 무시해버렸어요. 제주도에서 3박4일 휴가를 보내고 4월28일 저녁에 서울로 올라왔어요. 다음날 아침 이훈평 의원이 집에 찾아와 식사 전에 커피를 마시는데 YTN 뉴스 자막에 내가 진승현한테 5000만원을 받았다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저 미친놈들 무슨 소리냐’고….”

    검찰 수사에 따르면 김은성씨가 권씨의 집에 찾아간 것은 2000년 7월14일이다. 권씨의 보좌역이던 최규선씨와 김홍걸씨 관계에 대해 청와대에 올린 보고 내용이 권씨의 ‘분노’를 사자 이를 해명하기 위해, 또는 담판을 짓기 위해 방문했다는 게 김씨 주장이다. 당시 권씨는 민주당 상임고문이었다.

    최규선과 김홍걸을 집으로 불러

    김씨와 진승현씨에 따르면, 진씨가 그날 거기에 나타난 것은 김씨를 통해 권씨를 소개받기로 사전에 약속이 돼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권씨는 그날 김씨가 돈이 든 쇼핑백을 자신의 집에 두고 간 사실도 없고 진씨가 집에 온 적도 없다고 주장한다. 극과 극의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날 김은성이 찾아오게 된 사정은 이래요. 김대중 대통령이 그 일주일 전에 불러서 갔더니 ‘국정원에서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홍걸이와 최규선 문제가 상당히 걱정스럽다고 한다’고 말씀하세요. 내용을 물으니 ‘최규선이 홍걸이를 이용하고 자네를 팔고 다니면서 비리를 저지를 우려가 있다’는 겁니다.

    내가 당장 ‘그 보고는 엉터리’라고 말씀드렸어요. 내가 최규선한테 일을 안 시켰기 때문에 나를 팔고 다닐 수 없었거든요. 대통령은 저에게 보고서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해보라고 시켰습니다. 청와대에 갔다온 후 김홍걸과 최규선을 집으로 불렀어요. 홍걸이한테 ‘지금 국정원 김은성이라는 사람이 너에 대해 엉터리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하는데 보고서 전달자는 임동원 국정원장이다. 그러니까 네가 김은성을 만나 왜 이런 엉터리 보고를 했는지 확인하고 따질 건 따져라’고 말해줬어요.

    내 말에 따라 홍걸이가 김은성 2차장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러자 김은성이 겁이 나 약속장소인 롯데호텔에 혼자 나오지 않고 국정원 정치과장 임OO, 최재승 의원을 동행해 나타났대요. 넷이 롯데호텔에서 만났는데, 거기서 홍걸이가 막 따졌대요. 보고 내용의 근거를 대라고. 그날 김은성이 굉장히 당했다고 합니다. 김은성이 검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 홍걸이는 또 임동원도 만났어요. 일이 그렇게 되니 이 사람들이 굉장히 전전긍긍했어요. 권노갑과 김홍걸이 대통령한테 국정원 보고는 엉터리라고 했으니 이거 큰일 났다, 앞으로 대통령이 국정원 보고를 신뢰할 것인가, 뭐 이런 위기의식을 가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김은성이 나를 만나러 온 겁니다.”

    권씨에 따르면 그날 김은성씨의 방문은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의 지시에 따른 일종의 공무였다고 한다.

    “김은성이 임동원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권고문에게 찾아가 해명하는 것뿐’이라고 말했고 임동원은 ‘권고문에게 예의를 잘 갖춰 설명하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김은성은 사전에 전화도 없이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나는 그날 아침 용평에 골프 치러 가려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웬일이냐’니까 봉투를 보이면서 ‘청와대 보고서 내용의 일부인데 그 일에 대해 해명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명색이 방대한 예산을 가진 세계적인 정보기관이 시내 증권가에서 돌아다니는 설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냐. 증거를 대라’고 호통을 쳤어요. 대답을 못하더군요.”

    -최소한의 근거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없었어요. 김은성이 우리 집에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최규선과 김홍걸이 저지른 비리가 없었어요. 당시 최규선은 홍걸이와 함께 사우디의 알 왈리드 왕자를 만나려 했습니다. 홍걸이가 국제금융을 알고 싶다고 해서였지요. 홍걸이는 미국에서 박사를 못 끝냈어요. 공부하다 지친 거죠. 뭔가 바꿔보고 싶어했습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지만 도움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최규선이 국제금융과 벤처 쪽으로 많이 아니까 최규선에게 소개를 부탁한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김은성이 그런 보고를 하니 내가 좋게 얘기했겠어요. 나쁜 놈들이라고 그랬지.”

    -나중에 최규선이 비리를 저지른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보면 당시 김은성씨의 보고에 일리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아니죠. 그후에 두 사람이 문제를 일으켰지 당시엔 추측이었을 뿐이에요. 시중의 설만으로 보고한 거죠. 자기가 한 일은 덮어두고, 엉뚱한 것만 보고한 거예요. 김은성이 2000년 5월부터 진승현을 만났잖아요. 진승현 돈도 받고 김재환(국정원 전 직원)을 진승현 회사에 취직도 시켜주고 검찰의 내사 정보를 알아내 진승현의 도피행각도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나쁜 사람이죠.”

    권씨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는 매끄럽지 못한 편이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2000년 7월14일 오전 진씨가 권씨의 집에 찾아온 것이 사실인지, 둘째, 권씨가 김은성씨로부터 청탁 명목으로 진승현씨의 돈 5000만원을 받았는지 여부다. 첫째 의문이 풀리면 두 번째 것은 자연스럽게 풀린다. 진씨가 그날 권씨 집에 간 적이 없다면 5000만원이 든 쇼핑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당일 평창동 S빌라 C동 201호 권씨 집 주변엔 모두 3명의 ‘제3자’가 있었다. 김은성씨를 권씨 집으로 안내한 국정원 직원 문아무개씨, 김씨의 운전기사인 박아무개씨, 권씨를 골프장에 태우고 가려고 대기하고 있던 밴 운전기사 정아무개씨 등이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이날 진승현씨는 김은성씨보다 먼저 도착해 차를 권씨 집 앞 도로변에 대놓고 있다가 김씨 차가 나타나자 하차해 김씨 뒤를 따라 권씨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3명의 ‘제3자’의 공통된 진술은 그날 진씨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씨를 봤다는 사람은 김씨밖에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권씨에 대해 가장 유리한 증언을 해준 사람이 김은성씨의 운전기사 박씨라는 사실이다. 항소심 재판과정에 처음 증인으로 나온 박씨는 진승현씨의 주장을 송두리째 흔드는 증언을 했다. 진씨는 사건 당일 김은성씨의 차가 자신의 차 앞쪽에서 다가와 S빌라 단지 앞에 도착한 후 우회전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박씨의 증언은 정반대다. 진씨 차의 뒤쪽에서 달려와 빌라 입구에서 좌회전했다는 것이다. 박씨 말이 사실이면 김은성씨의 차가 앞에서 오는 걸 보고 뒤따라 들어갔다는 진씨의 말은 거짓이 된다.

    또 진승현씨는 검찰 조사과정에 김은성씨의 차가 논스톱으로 S빌라 앞마당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도 같은 진술을 했다. 반면 그의 기사 박씨는 빌라 입구에 도착해 좌회전한 후 경비 초소에서 1차 제지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진승현 본 사람 없어

    진승현씨는 또 김은성씨의 차가 빌라 앞마당에 도착한 후 김씨가 반쯤 뒤돌아서서 자신에게 뒤따라오라고 손짓해 권씨 집으로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씨에 따르면 김씨는 경비 초소 앞에서 제지를 받고 하차했으며 국정원 직원 문씨가 권씨의 집앞까지 안내했다. 문씨도 같은 진술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키 178㎝에 몸무게 100kg대의 거구인 진씨를 현장에서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진씨가 검찰 수사과정에 작성해 증거로 제출한 권씨 집 내부 약도가 실제 구조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진씨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진승현씨는 그날 김은성씨를 따라 권씨 집에 들어가 소파에 약 10초 가량 앉았다가 돈이 든 쇼핑백을 놓아둔 채 곧바로 나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김씨 진술에 따르면 “사전에 권씨에게 진씨가 온다는 얘기를 하지 않아 결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최규선 문제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했을 뿐만 아니라 진승현 얘기를 하는 도중에 권고문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 같아 진승현을 불러들이지 못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권씨는 이 부분에 이르러 “완전히 날조된 사건”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최규선·김홍걸 보고서 문제로 나한테 해명하러 왔다가 혼나고 가면서 청탁용 돈을 건넨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나한테 ‘최규선을 조심하십시오. 비리에 관련되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충고한 그 자리에서 이권을 부탁한다면 아주 나쁜 놈 아닙니까. 자기모순이고 이율배반 아닙니까. 자기 말로도 그날 분위기가 안 좋아 진승현을 인사시키지 못했다면서, 또 나한테 담판 지으러 왔다면서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습니까. 또 그런 부탁을 할 만큼 나와 가깝지도 않았어요. 더욱이 그날 처음 우리 집에 온 사람인데.”

    권씨가 받았다는 돈의 대가성 유무도 쟁점이다. 대가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돈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 해도 뇌물죄가 성립되기 힘들다. 이에 관한 김은성씨의 진술은 오락가락했다. 어떤 때는 청탁용이라고 대가성을 시인했다가 어떤 때는 ‘정치자금 성격’이었다며 부인했다.

    반면 진승현씨는 일관되게 청탁용이 아니라 인사치레였다고 주장했다. 당시엔 자신의 회사에 아무 문제가 없었으므로 청탁할 필요도 없었고 청탁한 내용도 없다는 게 진씨의 일관된 주장이다. 진씨 진술에 따르면 자신이 김씨에게 회사의 어려움을 처음 얘기한 것은 그해 8월 두 사람이 두 번째 만났을 때다.

    한편 권씨의 변호인단은 항소심 재판부에 김은성·진승현씨 및 정성홍씨의 구치소 출정기록 확인을 요청했다. 당시 국정원 경제과장이던 정씨는 진씨를 김씨에게 연결시켜주는 한편 진씨로부터 권씨를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사람이다. 그는 진씨로부터 1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조사 결과 세 사람의 출정기록 횟수는 권씨가 구속되기 한 달 전인 지난해 4월부터 9월 말까지 6개월 동안 각각 44회, 99회, 70회로 드러났다. 권씨의 변호인단은 ‘법원의 증인으로 채택된 수감자를 검찰이 수시로 불러내는 것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그렇게 작성된 조서는 증거능력이 없다’는 헌법재판소 판결(2001년)과 대법원 판례(2002년)를 내세워 검찰의 ‘위법성’을 문제삼고 있다.

    김은성씨가 구속된 것은 2001년 12월이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재판을 받고 있는 수감자 신분으로 뒤늦게 검찰에서 권씨의 ‘비위사실’을 진술한 배경에 대해 권씨는 의혹을 제기했다.

    “검찰이 김은성을 봐줬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김씨가 동방금고 부회장 이경자한테 돈 받은 사실과 검찰 내사정보를 알아내 진씨에게 알려준 직권남용에 대해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또 국정원 전 직원 김재환씨가 검찰에서 김은성의 부하직원인 정성홍으로부터 폭행당했다고 진술했는데도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은성의 음해 가능성에 대해서도 검토했다. 그러나 진술 경위 등으로 볼 때 허위증언이라고 보기 어려운 반면 피고인측 증인의 경우 진술에 일관성이 없어 유죄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권씨측은 항소심에서 김은성씨와 진승현씨를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두 사람은 법정에 나오지 않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10월말 ‘슬쩍’ 가석방된 직후 미국으로 출국해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우선 구치소에 있는 진씨부터 강제소환할 방침이다.

    -김은성씨는 언제 처음 알았습니까.

    “내가 국회 국방위와 정보위에서 활동할 때인 1996년에 김은성이 정보위원회 수석정보위원으로 국회에 파견근무를 나왔어요. 나는 그때 ‘안기부 직원이 국회 정보위 수석정보위원을 겸직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국회 전문위원은 국회 사무처에서 공개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때부터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듯싶습니다.”

    -김씨와 따로 얘기한 적은 없습니까.

    “악수 한번 한 것밖에 없어요. 차 한잔 마신 일도 없고.”

    -2000년 5월경 신라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최규선이 시키지 않은 짓을 했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김은성에게 전화를 걸어 ‘2차장 됐으면 권고문에게 인사해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해 김은성이 나를 만나러 신라호텔로 오게 했다는 거예요. 나한테는 ‘김은성이 인사하고 싶어한다’고 얘기하고.”

    김홍걸, 김홍일 간섭 불편해 해

    -권고문한테 잘 보이려 온 것 아닙니까.

    “그건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날 김은성을 악수만 하고 돌려보냈어요.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거든요. 정보기관에 수십년 근무하면서 야당인 우리한테 못되게 군 사람 아닙니까.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에서 고위층의 신임을 받았으니 2차장까지 올라간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국방위와 정보위에서 활동하는 동안 안기부가 여야 의원들에게 주는 촌지를 한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내가 어떻게 국정원 돈을 받아요.”

    -진승현을 만난 적은 없습니까.

    “한번도 없어요. 이름도 사건 나고 알았어요. 구치소로 가면서 박영관 특수1부장에게 ‘내가 금감원 조사 무마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면 그후 김은성이나 진승현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했을 것 아닌가. 또 금감원 누구한테 부탁했는지 조사하면 밝혀질 것 아닌가. 그런 것도 조사하지 않고 나를 구속하냐’고 분명히 얘기했어요. 하지만 검찰은 이를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진승현 게이트에는 권고문의 측근인 김방림 의원도 관련돼 있습니다. 진씨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지요. 그런데 김의원이 정성홍씨와 절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의원한테 정씨나 진씨 얘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까.

    “정성홍 얘기는 한번도 없었어요. 정성홍 김방림 김홍일 의원 셋이 진승현을 잘 알지, 나는 몰라요. 정성홍도 나는 얼굴도 몰라요. 김방림 말에 따르면 김은성은 내가 자신을 2차장에서 물러나게 하고 김태랑(현 민주당 최고위원)을 그 자리에 앉히려 한다는 시중의 소문을 듣고 부하직원인 정성홍을 시켜 김방림한테 ‘권고문한테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답니다. 김방림이 나한테 그 얘기를 하기에 그런 사실 없다고 말해줬습니다. 기조실장이라면 또 모를까, 2차장은 수사관 출신이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해줬어요. 어쨌든 그때도 김은성은 내가 자신을 좋지 않게 보고 있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2000년 4월 김은성이 2차장 되고나서 얼마 후에 있었던 일이죠. 그후 홍걸이 문제로 또 나한테 당하고….”

    -김은성씨는 “청와대에 최규선과 김홍걸에 대해 좋지 않은 보고서를 올린 후 권고문과 김홍걸이 청와대 민정을 시켜 나를 뒷조사했다”고 주장했는데요.

    “난 그런 적이 없어요. 최규선이 자기와 홍걸이, 나, 그리고 사모님(이휘호 여사)이 한 라인이고, 김홍일 김은성 정성홍이 한 라인이라고 말했다는데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사실은 홍걸이가 형인 김홍일 의원에 대해 너무 간섭한다고 불만을 가졌다는 겁니다.”

    권씨는 자신의 구속배경에 대해 강한 의혹을 제기하면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삼갔다.

    -권고문 얘기대로 조작된 사건이라면 누구의 짓일까요. 검찰이 만든 사건이라는 건지, 김은성의 장난이라는 건지, 아니면 고위층의 개입이라는 건지…. 공교롭게도 외유 권유를 거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사건이 벌어졌잖아요.

    “내가 보기엔 1차적으로는 김은성의 장난이지. 그러나 그 뒤에 누가 있는지는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어요.”

    -김은성씨 혼자만으로 안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권고문 주장대로라면 진승현까지 입을 맞췄다는 얘기인데.

    “그건 모르겠어요. 나중에 배후가 밝혀지겠지만, 지금은 이야기할 단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떳떳하다면 왜 법정에 안 나옵니까. 언젠가 김은성이 스스로 밝힐지도 모르지요, 사람이라면.”

    -검찰이 김은성씨의 거짓진술에 넘어갔다고 보십니까.

    “그건 모르겠고. 최근 이 사건에 관련된 모씨가 주변사람에게 사건 당시 김은성이 내 사건에 대해 ‘위에서 만들라고 했다’고 얘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권씨는 ‘위’가 누구인지 이름까지 들었지만 지금 밝힐 수는 없다고 했다.

    진승현 게이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최택곤씨다. 최씨는 진승현 게이트에 깊숙이 개입된 인물이다. 2001년 12월 신광옥 법무차관은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최씨로부터 300만원씩 6차례에 걸쳐 18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에 따르면 최씨가 준 돈은 그가 진승현씨로부터 받은 1억여원 중 일부라는 것. 하지만 이 사건 항소심 재판부는 2월13일 신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 진승현 강제소환 방침

    흥미로운 것은 검찰이 권노갑씨를 구속하기 전 신광옥씨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씨의 돈이 최씨를 통해서도 전달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최씨를 긴급체포까지 하며 권씨와 연결시키려 애썼다는 점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를 입증하는 데 실패, 김은성씨를 통해 5000만원을 전달받은 혐의에 대해서만 기소했다. 이에 대해 권씨는 “최택곤이 우리 집에 온 사실이 없기 망정이지 김은성처럼 집에 온 적이 있었다면 또 꼼짝없이 엮일 뻔했다”고 말했다.

    -최택곤씨는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원래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 13대 때 내가 국방위에 소속돼 있을 때 자기 발로 찾아와 의정활동을 도왔어요. 나중에 신뢰가 가지 않아 내보냈어요. 현 정권 출범 전부터 그를 멀리했습니다.”

    -최씨가 김홍일 의원, 김홍업씨와 가깝지 않았습니까.

    “세 사람 다 경희대 동문이고 ROTC 출신이잖아요. 하지만 최씨가 그 사람들 팔고 다닌 건 몰랐어요.”

    -최택곤씨가 대통령 아들들과 친하다고 주변에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아니라 우리쪽 의원들이 그런 얘기를 했지요. 최택곤은 권노갑과 가까운 게 아니라 아들들과 가깝다고.”

    -1998년 12월30일에 귀국했는데, 들어올 때 청와대 사인이 있었습니까.

    “당시 한화갑 원내총무가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에게 건의했어요. 나 혼자 일할 순 없으니 노갑이 형과 함께 해야겠다고. 처음엔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어요. 두 번째 건의하고 나서야 대통령이 답했어요. 조용히 들어오라고. 그 사실을 한화갑이 제3자를 통해 내게 연락해왔습니다. 그래서 혼자 날짜를 잡아 들어왔어요.”

    이듬해 2월 권씨는 민주당 상임고문이 돼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 이종찬 국정원장, 이강래 정무수석, 장성민 국정상황실장 등 이른바 민주당 신주류와 갈등을 빚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종찬과 이강래는 괜찮았어요. 김중권이 잘못된 거지.”

    -김대중 대통령이 김중권씨를 중용해 동교동계가 반발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사실 김중권이 청와대 비서실장 되는 게 마땅찮았어요. 왜 저런 사람 시키나 하고. 그렇지만 대통령이 일단 지명했으니 이 사람도 우리 식구라고 인정하고 도와주려 했습니다.”

    -김중권씨가 비서실장 되기 전에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가깝지 않았어요. 민정당 출신 아닙니까. 대통령이 김중권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을 때 다들 놀랐죠.”

    -DJ가 영남 표를 의식해 동진정책의 일환으로 김실장을 중용했다는 분석이 있지요. 김실장이 대선후보로 나선 것도 대통령 의중이었다고 봐야 합니까.

    이 질문에 권씨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이고, 그건 본인 착각이지. 비서실장 하다보니 권력 맛을 알게 된 거겠죠. 우리는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 없어요.”

    한화갑의 오해와 원망

    -김실장이 권고문을 많이 견제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대통령에게 나에 대해 좋지 않게 보고한 것은 사실이에요. 내용은 정확히 모르지만 그 때문에 대통령께서 많이 고민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제3자를 통해 나한테 확인해 알게 됐어요. 그 사람이 내 설명을 듣고 대통령의 오해를 해소시켰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었죠.”

    -1999년 3월 구로을 보궐선거 때 권고문이 한광옥씨를 공천하기 위해 원래 내정됐던 이강래 당시 총재특보를 밀어냈다고 하던데요.

    “이강래가 나가려 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 그런 얘기까지 하고 싶진 않아요. 이강래도 청와대 있을 때 오해도 받고 견제도 많이 받았어요.”

    권씨는 장성민씨에 대해 묻자 “그런 애들 얘기까지 하고 싶지 않다”며 입을 다물었다.

    -상임고문 시절 청와대에 얼마나 자주 들어갔습니까.

    “1999년, 2000년엔 자주 갔죠. 한 달에 한 번 꼴로.”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눴습니까.

    “당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어요. 대통령은 내게 ‘당이 잘 움직일 수 있도록 살피고 공천 때 자문 역할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당 문제 외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어요.”

    -권고문과 한화갑 대표의 갈등으로 동교동계가 분열됐지요?

    “분열된 게 아니라, 한화갑 대표도 커야 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내 밑에서 자꾸 처질 순 없잖아요. 그 사람도 욕심이 있을 것 아닙니까. 부총재도 하고 싶고 최고위원도 하고 싶고 대통령 후보도 하고 싶고. 그 과정에 자기 계보를 만들게 된 거지. 그래서 그쪽에 가는 사람은 신파가 되고 내쪽에 남아 있는 사람은 구파가 된 겁니다. 거기다 내가 자기 최고위원 출마도 도와주지 않으니 갈등이 생긴 거지.”

    -한화갑 대표체제를 달가워하지 않았지요?

    “아니, 나는 한화갑이 당 대표되는 데는 찬성했어요. 대권을 반대한 거지.”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한광옥씨를 대표로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엔 이미 대세가 한화갑이었어요. 나는 한화갑이든 한광옥이든 선의의 경쟁을 거쳐 둘 중 누가 돼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평당원으로 물러섰기 때문에 누구를 특별히 돕지는 않았습니다.”

    권씨와 한화갑 대표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때다. 출마를 포기한 권씨는 한대표를 지원하지 않았다. 대신 이인제 의원을 적극 밀고 정동영 김근태 의원 등 신진세력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8월 최고위원 경선 때 한화갑 대표와의 갈등이 불거졌는데요?

    “갈등이라기보다는 오해에 의해서….”

    -원래는 직접 출마하려고 하셨지요?

    “대통령에게 허락을 받았죠.”

    -결국 출마하지 않은 이유는요?

    “여러 가지 여건이 바뀌었습니다.”

    -대통령 생각이 바뀐 모양이지요?

    “바뀌었죠. 동교동에서 둘이 나오면 어느 누군가는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지요. 그러면 당에 분열이 생길 테고. 그래서 나와 한화갑 둘 중 하나만 나가면 좋겠다고….”

    -섭섭하지 않았습니까.

    “당 대표 욕심도 없었던데다 당 결속을 도모하고 대통령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섭섭하지 않았어요.”

    -한대표가 안 나섰다면 출마 포기는 없었을 것 아닙니까.

    “한화갑도 대통령에게 허락 받았어요. 자기 나름대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출마한 것이지요. 한화갑과 김옥두에게 ‘나는 물러날 사람이지만 자네들은 앞으로 계속 정치해야 할 사람들 아니냐’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한대표는 경선기간에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하며 권고문을 겨냥했지요?

    “그것도 사실 한화갑의 잘못이지.”

    -권고문이 같은 동교동 식구인 자신을 지원해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지원해서 그랬던 것 아닌가요.

    “지원해주지 않은 게 아니라 호남당이 아닌 전국정당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그랬던 겁니다. 김중권이 경북 대구에서, 서울에서는 정대철과 김민석이, 경기도 인천에서 안동선, 충청권에서는 이인제, 그리고 호남에서 한화갑 박상규, 청년층에서 정동영 김근태, 여성 대표로서 추미애…. 이렇게 골고루 최고위원이 나와야 국민들이 볼 때 호남당이 아닌 전국정당이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한화갑의 독주를 막고 각 후보 모두 고르게 표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내가 아는 기자들한테 얘기했어요. 그런데 한화갑 쪽에서 볼 때는 그게 마치 자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행동으로 비친 겁니다.”

    -자기를 견제한다고 볼 수도 있었겠죠?

    “자기가 1등 하는 것을 방해하고 이인제를 1등 시키려 한다고 생각한 거죠. 우리가 이인제를 그만큼 밀었으니까.”

    정동영이 이럴 수가…

    당시 최고위원 경선에서 한화갑 대표와 이인제 의원은 나란히 1, 2등을 차지했다. 권씨와 한대표의 갈등은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다시 표면화됐다. 권씨는 한대표의 호남적자론에 찬성하지 않았다. 호남 출신으로는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권씨는 “아무리 정통성을 잇는 인물이라도 현실적으로 호남 출신이 다시 대통령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당시 내 판단이었다”고 회고했다.

    -한화갑 대표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좇은 것 같습니다.

    “내가 대표로만 나서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들었어요.”

    -권고문도 당대표를 꿈꾸지 않았습니까.

    “나는 아니에요.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만으로 만족했어요.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대표를) 하라는 얘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들에게도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2000년 8월 최고위원 경선을 포기한 권씨는 대신 지명직 최고위원이 됐다. 그해 말 정동영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와 김근태 최고위원을 비롯한 재야파에서 인적쇄신을 요구했다. 대상은 권노갑 최고위원. 민주당 정풍운동의 신호탄이었다. 특히 정최고위원은 12월2일 청와대 최고위원 모임 때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권노갑 최고위원에게 사퇴를 요구해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일주일 후 권씨는 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났다. ‘순명(順命)’이라는 말을 남긴 채.

    퇴장 ‘동교동’ 맏형 권노갑, 마침내 입열다

    권노갑씨는 “진승현 사건 재판이 끝나면 반드시 명예회복하겠다”며 정치재개 의욕을 드러냈다.

    -2000년 말 이른바 개혁세력이 권고문에게 퇴진을 요구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원래는 나를 퇴진시키려 한 게 아니라 김옥두 사무총장이 대상이었어요. 장성민이 김옥두를 ‘제왕적 사무총장’이라고 비판하고 소장파 의원들이 거기에 동조했어요. 그들이 지도부에 사무총장을 바꾸라고 압력을 가했는데 내가 막았어요. 김옥두가 잘못한 게 뭐 있냐,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을 바꾸라는 건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 아니냐고. 그런 후 대통령에 의해 김옥두가 사무총장에 재임명됐지요. 그러자 권노갑이 버티고 있는 한 자기들 마음대로 못하겠다, 권노갑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것이 나중에 엉뚱한 사태로 번진 겁니다.”

    -정동영 의원이 청와대에서 권고문에게 퇴진을 요구할 때 두 사람이 소원한 상태였습니까.

    “아니, 나하고 가까웠어요.”

    -청와대에서 그 얘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겠네요.

    “그렇죠. 그 이틀 전에 정동영과 만나 얘기했거든요. 정동영이 말하길 ‘우리 초선 의원들 중 일부가 권최고를 부통령 또는 김현철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내가 웃었어요. 증거가 있냐고 묻자 증거를 못 대요. 거기서 얘기는 끝났지. 그래놓고는 청와대에서 불쑥 그런 말을 꺼내기에 어이가 없더라고. 나와는 없던 얘기로 해놓고는.”

    -어쨌든 그 일 때문에 최고위원직을 내놓게 됐지요?

    “모든 게 순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한테 연락해 물러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류하지 않던가요?

    “안 했어요.”

    -상당히 섭섭했겠습니다.

    “대통령께 섭섭한 감정은 없었어요. 그저 나를 매도하는 몇 사람에게 섭섭함과 배신감을 느꼈을 뿐입니다.”

    -대통령이 예전만큼 권고문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시 아닙니까.

    “대통령은 지금도 노갑이 안됐다고 생각하는 분이에요. 제3자를 통해 그런 마음을 전해오십니다. 당시 나는 내가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그분에게 부담 주지 않고 도움이 되는 길이라 판단했어요.”

    -정동영 의원에게 많이 섭섭했겠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심정이었어요.”

    권씨는 “당시 나를 매도한 사람들의 인간 됨됨이에 환멸을 느낀다”며 격한 감정을 표출했다. “언젠가는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권씨에 따르면 그후 정의원과는 인간관계가 완전히 끊겼다고 한다. 그날 이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정동영, 최고위원 출마 상의

    -정의원의 입당원서도 권고문이 받았다지요?

    “예. 내가 다 해줬어요. 내가 접촉해 대통령한테 허락도 받고. 최고위원 나올 때도 도와주고. 나도 사실 괴로워요. 젊은 의원들에게 잘해주고 싶었고 도움도 많이 줬는데.”

    -정의원이 그런 말을 한 것은 나름대로 대의를 생각해서가 아니었을까요. 권고문과의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자신도 맘이 편치 않았을 텐데요.

    “말 잘하는 사람이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정치인은 오래 못 가요. 그 사람이 청와대에서 나를 공격한 것을 두고 일부 국민은 대통령 앞에서 용기 있게 말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얘기한 것은 용감한 게 아니죠. 내가 비리에 관련됐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는데 그런 식으로 얘기한 건 어리석은 짓이죠.”

    -뒤에서 당무를 사실상 좌지우지하고 공기업체 기관장 인사에 개입한 것을 비판한 것 아닐까요.

    “현역 의원과 지구당위원장으로서 공천을 자진반납한 사람들을 챙겨준 겁니다. 누군가 뒷수습을 해야할 것 아닙니까. 내가 대통령께 건의해 그 사람들 모두 청와대에서 회식했잖아요. 26명.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여러분이 어려운 결단해줬다, 당을 새롭게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 여러분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겠다고.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 이력서를 청와대에 보내 거기서 스크린한 후 자리를 주게 했습니다. 그것을 언론에서 낙하산인사라고 표현했어요. 그러면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 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지. 또 동지적 입장에서 선배들이 길을 열어줬으면 고맙게 여기고 존경해야지요. 언론에서 낙하산이라고 한다고 자기들도 똑같이 낙하산이라고 매도합니까. 자기들도 공천 받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야지요.”

    -정의원이 최고위원에 출마할 때 반대했다면서요?

    “처음엔 반대했죠. 단계적으로 올라가라고요. 당에는 총무도 있고 총장도 있고 다선도 있고 원로도 있다, 대변인밖에 안 한 사람이 중간단계를 훌쩍 뛰어넘고 가려는 건 좋지 않으니 잘 생각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일주일 후 다시 찾아와서는 자기를 돕겠다는 사람들이 꼭 출마하라고 해 어쩔 수 없다고 해요. 그래서 ‘그러면 나가라’고 했죠.”

    지지했던 이인제, 실망 안기다

    2001년 9월 민주당은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의 당대표 취임을 두고 분란에 휩싸였다. 한광옥 대표체제는 권씨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권씨는 이를 부인했다.

    “그건 대통령이 한 일이에요. 내가 관여 안 했어요. 내가 관여한 것은 김중권이 청와대에서 당대표로 올 때였습니다. 대통령에게 전화해 김중권보다 김원기가 낫다고 추천했지요. 대통령은 알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후 한광옥 비서실장이 김중권으로 내정됐다고 통보해 왔어요. 내가 김중권을 반대한 것은 정통성 결여 때문이었어요. 김원기는 평민당 출신으로 정통성이 있지만 김중권은 민정당에 몸담았던 사람이거든요.”

    -이인제 의원은 언제부터 지원하게 됐습니까.

    “1998년 가을 내가 일본에 나가 있을 때 이인제가 일본에 볼일 보러 왔다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어요. 그때 만나서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일본에서 이의원이 자신의 꿈을 얘기하던가요.

    “이미 그 사람은 꿈이 있었잖아요. 500만표를 얻었기 때문에 다음엔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앞으로 큰 정치 하려면 외국을 많이 돌면서 국제정세를 파악하라’고 코치해줬습니다.”

    -그때부터 호감을 가졌습니까.

    “이런 사람을 키우면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인제 의원이 경선결과에 불복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실망했죠. 청와대 음모설이니 뭐니 하면서 사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하기에 그건 아니라고 몇 번 얘기해줬거든요. 그런데도 고집을 부리더라고요. 대통령과 박지원이 방송을 동원해 노무현에게 유리하도록 했다는데 그런 힘이 어디 있습니까. 그후 이인제는 안 되겠다 싶어 노무현이 잘 되길 바랐지요.”

    -노무현 당선자는 민주당 후보로 결정된 후 당내에서 많이 시달렸잖아요. 동교동계 의원들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탈당도 하고.

    “그건 내가 구속돼 있을 때 일이라 모릅니다.”

    -그래도 동교동계 의원들한테는 권고문의 의중이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구속돼 있었기 때문에 나설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구속집행정지로 병원에 있을 때 탈당하겠다는 사람들을 말린 적은 있어요. 경선을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한 후보인데 당내에서 흔들면 안 된다고.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정몽준과 반드시 단일화해야 한다고 말해줬습니다.”

    -노무현 당선자와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사이였어요. 1993년부터 한 2년간 이기택 등과 함께 최고위원으로 활동했지요.”

    -노당선자를 대권후보로 생각진 않았습니까.

    “노무현이나 이인제 둘 중 하나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사실은 이인제 의원을 지원하지 않았습니까.

    “노당선자가 해양수산부장관할 때 단 둘이 만난 적이 있어요. 이인제가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지만 열심히 해 격차를 좁혀라, 둘 중 지지율이 올라가는 사람을 도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권씨는 ‘국민의 정부’를 실패한 정권으로 규정하는 일부 여론에 대해 유감을 드러냈다. 국민들이 민주당 후보인 노무현씨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것이 그 방증이라고 주장했다.

    “실패라고 보지 않아요. 옷로비사건만 해도 그렇게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지만 결국 주요 관련자들이 무죄를 선고받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왜곡된 여론으로 ‘국민의 정부’에 얼마나 흠집이 났습니까. 그러나 민심은 결국 우리편을 들어줬어요. 노무현이 당선됐잖아요. 전투에선 한나라당에 졌지만 전쟁에선 이겼어요. 총선 지방선거 보궐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이겼잖아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선은 우리가 이겼단 말이에요.”

    -민주당의 승리가 아니라 노무현의 승리라는 평가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말도 안 돼요. 만약 노무현이 우리 당 후보가 아니었다면, 무소속이었다면 됐겠습니까. 어디까지나 민주당 후보 아닙니까.”

    정몽준, 구치소 찾아와 출마의지 밝혀

    -민주당에선 오히려 노무현 당선자를 흔드는 분위기였잖아요. 노사모 등 젊은 유권자들의 적극적 지지 등으로 세대교체 바람이 분 것이 선거에 영향을 미친 것 아닙니까.

    “그건 지엽적인 얘기고요. 노사모가 10만명이라 합시다. 그 10만명을 보고 국민이 노무현을 찍었습니까. 수도권에 많이 몰려 있는 호남사람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됐습니다. 또 호남에서 97% 나왔잖아요. 그 표는 민주당 후보에 던진 거지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민주당에 대한 민심이 언론에 보도된 것과는 다르다는 거지요?

    “게다가 단일화에 성공했죠. 만약 노무현 정몽준 둘 다 나왔다면 안 됐죠. 단일화 성공이 결정적 승인이었습니다.”

    -대선이 끝난 직후 이른바 친노무현계 또는 개혁 성향의 의원들이 민주당 지도부 퇴진을 요구했는데요.

    “떠나라고 하면 안 되지요. 5·16쿠데타도 아니고. 당에는 원로도 있고 다선의원도 있고 경륜 있는 의원도 있어야 돼요. 누구를 물러가라고 인위적으로 체제를 개편할 순 없죠. 국민이 바꿔줘야 해요.”

    -대선과정에 있었던 민주당 지도부의 ‘노무현 흔들기’에 대한 책임 추궁의 뜻도 포함돼 있는 것 아닙니까.

    “다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일익을 했어요. 누가 더 했느니 덜 했느니 따지는 풍토는 사라져야 합니다. 조금 섭섭한 사람이 있어도 포용하고 가야 해요. 예전엔 당권이 바뀌더라도 주류가 60%면 비주류가 40%는 먹었습니다. 올 오아 나씽(all or nothing)은 안 돼요. 편가르기는 분열을 낳을 뿐입니다.”

    -지난해 하반기 민주당의 상당수 의원이 정몽준을 지지한 것은 김대통령의 의중과 관련된 것인가요.

    “관계없어요.”

    -정몽준 의원과 여권의 관계는 몇 년 전부터 관심을 끌지 않았습니까. 권고문도 접촉한 것으로 아는데요.

    “내가 우리 당에 입당시키려 했지. 2000년 8월 최고위원 경선을 치르기 얼마 전 정의원을 만나 입당 교섭을 했습니다. 정몽준에게 우리 당에 들어와 최고위원 경선에 참여하고 나중에 대통령 후보 경선에도 나서라고 제의했어요. 처음엔 정의원도 그럴 뜻이 있었어요. 그런데 뒤에 그대로 무소속으로 남겠다고 입장을 바꿨습니다. 지역구에서 반대한다는 거예요.”

    -지난 대선 때 동교동계 일부 의원이 정몽준 의원 쪽으로 기울었지요?

    “나와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정의원이 내가 구속돼 있을 때 면회 온 적이 있어요. 그때 이미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우리 당으로 들어올 것이냐고 물으니 독자 후보로 나서겠다고 말하더군요.”

    -이수성씨를 대권후보로 검토했다는 얘기도 들리던데요.

    “사실이 아니에요. 이수성씨를 입당시키려 한 적은 있지만.”

    권씨는 1999년 자신의 집에서 이수성씨와 단 둘이 만나 이런 얘기를 했다고 들려줬다.

    “당 대표는 절대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냐 하면 이수성이 당 대표뿐만 아니라 대통령후보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대통령후보로 나서겠다는 사람으로 노무현, 이인제, 정몽준이 있는데 만약 이수성이 대표가 되면 공정한 경쟁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선의의 경쟁을 하려면 그냥 입당만 해라, 그리고 최고위원 경선에 나가라, 그렇게 이야기했죠. 그런데 본인이 안 들어왔어요. 정몽준과 마찬가지로.”

    동교동계 좌장인 권씨는 조직과 자금, 정보, 인맥 등 권력의 4대 요소를 모두 갖춘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권씨는 자신을 ‘국민의 정부 2인자’로 부르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신민당, 민주당을 거쳐 국민회의 시절까지는 2인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해요. 하지만 새천년민주당과 ‘국민의 정부’에 이르러서는 내가 2인자라고 할 수 없죠. 어쨌든 이 정부에서 나는 명예회복도 못하고 국회의원도 못하고 아무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래도 공천을 주도하는 등 엄청난 힘을 가졌었잖아요.

    “그건 사실이지. 내가 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대통령이 인정해줬기 때문이지요. 오로지 당 발전과 대통령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들로 공천했어요. 그것이 대통령의 마음에 딱 든 것이지요.”

    -흔히들 권고문을 ‘동교동 금고’라 부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습니까.

    “당에 들어오는 정치자금을 관리하고 헌금 액수 순으로 전국구 순위 배정을 하고 공천 받은 사람들이 출마할 때 돈을 분배해주고… 그런 일들을 했지요.”

    -언제부터 그런 일을 했나요.

    “13대 총선 때부터 했죠.”

    -물론 당 총재와 교감이 있었겠지요?

    “13·14·15대까지는 교감이 있었어요. 16대 때는 대통령이 전혀 모르셨어요. 당에 들어오는 후원금을 서울과 경기 출마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했어요. 다음 순위가 경상도 쪽이었고, 호남 쪽은 10원도 안 줬어요.”

    -보통 1인당 얼마나 지급했습니까.

    “그건 지금 말할 수 없고요. 하여튼 선관위에서 들어온 돈과 당에 들어온 후원금 범위에서 지급했습니다.”

    -전국구 헌금은 얼마나 들어옵니까.

    “16대 때는 10원도 안 받았습니다. 선관위에서 돈이 나왔잖아요. 그리고 후원회가 있잖아요. 그 전까지는 전국구 후보들에게 후원금을 받아 지역구 출마자들의 선거자금으로 썼어요.”

    -전국구 헌금은 항간에서 말하듯 보통 10억원대가 맞습니까.

    “10억원도 있고 20억원도 있고.”

    -순번에 따라 액수도 다를 것 아닙니까.

    “10번 안쪽으로만 받는데 금액 크기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죠.”

    -10번 뒤로는 어떻게 됩니까?

    “안 받습니다.”

    일부 공직 인사 놓고 김홍일과 충돌

    -16대 총선 때 신라호텔에서 공천에 관여한 것은 유명한 얘기지요?

    “신라호텔에서 주로 한 일은 공천을 못 받게 된 사람들을 불러내 설득하고 달래는 일이었어요. 대통령께서 하실 일을 내가 대신해서 한 거죠.”

    -공기업체 기관장 인선은 대통령으로부터 일임받은 건가요?

    “아니, 대통령이 공천 반납자들에게 자리를 약속한 후 내가 그 사람들의 이력서를 받아 청와대에 보낸 겁니다. 그것을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1차 스크린한 후 비서실장을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한 거죠.”

    권씨에 따르면 26명 중 4명을 빼곤 모두 공기업체로 진출했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한광옥씨였다. 권씨는 “김중권이 비서실장으로 있던 2년 동안은 나는 전혀 인사에 관여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공기업체 기관장 인사에 대해 낙하산 인사는 비판이 있었는데요?

    “비판을 받을 수 있죠.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 가서 지금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일을 못하면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16대 때 어떤 식으로 공천이 이뤄졌습니까.

    “정균환 특보단장과 최재승·김민석 의원 등이 1차 작업을 주도했어요. 그리고 조직강화특별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했습니다.”

    -권고문은 어느 단계에서 개입했습니까.

    “조직강화특별위에서 공천자 명단을 대통령에게 올리기 전 마지막으로 결정하는 과정에 관여했습니다.”

    -김홍일 의원도 공천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요.

    “김홍일 의원은 공천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건 내가 알아요.”

    -언론에 그런 얘기가 보도되지 않았습니까.

    “공천이 아니라 공직 인사를 두고 나하고 갈등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었지. 그리고 내가 일본에 있을 때 홍일이가 정권 초기에 김중권과 함께 공직인사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지요. 그건 사실이에요.”

    -대통령이 ‘어떤 자리든지 사람 앉히려면 먼저 권고문과 상의하라’는 얘기를 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13대 때부터 1997년 한보사태로 구속되기 전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있으면 권최고와 상의하라’는 언급은 있으셨어요.”

    지난해 3월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김근태 의원과 정동영 의원은 2000년 8월 최고위원 경선 때 권씨로부터 2000만원을 받은 사실을 고백해 파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이런 고백은 그러잖아도 각종 게이트 연루설로 시달리며 퇴진 압력을 받고 있던 권씨에게 치명타가 됐다.

    -두 사람에게 자금을 지원한 이유는요?

    “김근태도 좋아하고, 정동영도 좋아했으니. 특히 김근태는 나처럼 물고문도 당한 민주화동지 아닙니까.”

    -김근태 의원 말로는 2000년 최고위원 경선 때 출마한 후보들한테 액수를 차등 지급하셨다면서요?

    “그런 적 없어요. 한화갑한테도 10원도 안 줬지.”

    대선 때 최순영한테는 10원도 안 받아

    권씨는 두 사람 외 다른 사람한테는 준 사실이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김근태는 내가 직접 줬고, 정동영은 부인이 대신 받아갔어요. 우리 집사람이 운영하는 롯데 강남점 비빔밥집에 찾아와선.”

    -그 두 사람이 경선을 앞두고 왜 돈 받은 사실을 공개했다고 보십니까. 그것도 ‘권노갑 죽이기’의 일환이었을까요.

    “그건 아니에요. 김근태 의원이 나한테 와서 사과합디다. 그래서 격려를 해줬어요. 근태에 대해서는 섭섭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근태는 양심선언을 한 것뿐이지 나를 매도하지는 않았어요.”

    -두 사람에게 건넨 돈은 권고문이 개인적으로 준 돈이잖아요. 권고문의 씀씀이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치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십니까.

    “1993년에 최고위원 나올 때도 우리 식당에서 2억원을 마련했어요. 내가 어디서 돈을 구하겠어요. (의원이 아니니) 후원회도 못 여는데.”

    -의원도 아니고 고정적인 수입도 없잖아요. 부인의 식당 수입만으로는 활동을 못할 것 같은데요.

    “그걸 지금 일일이 말할 순 없어요.”

    -기업체에서 받습니까.

    “그건 옛날 이야기지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권씨는 기자가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자 고개를 흔들었다. “조기자가 지나치게 많이 알려고 하는 것 같아요.”

    -지난해 12월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을 인터뷰했는데, 최씨 얘기가 신동아그룹 해체는 DJ에게 대선자금을 안 준 데 따른 보복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권고문을 정점으로 한 동교동계 9인의 비선조직이 신동아그룹 공중분해를 모의했다고 하더군요.

    “최순영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 큰 착각이죠. 우리 대통령이나 나나 그런 저질스러운 짓은 하지 않습니다. 9인 조직은 뭔 얘긴지 모르겠네요.”

    -최씨는 또 92년, 97년 대선 때 대개의 기업들이 비율을 달리해 여야 양쪽에 대선자금을 줬는데 자기는 유독 DJ한테만 안 줘 미운털이 박혔다는 겁니다.

    “안 준 건 맞아요. 그 사람한테는 단돈 10원도 안 받았어요.”

    권씨에게는 F-X사업에 관련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따라다닌다. 이는 그의 아들 정민씨가 F-15K에 장착될 엔진 생산회사인 GE사에 근무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이에 대해 묻자 권씨는 GE사의 신임 회장이 방한했을 때 리셉션 장소에서 만났고 GE사 한국 지사장 엔디 솔렘과 서로 집을 방문하는 등 GE사 고위관계자들과 친분이 있었던 사실은 시인했다. 하지만 자신은 GE사 엔진 도입과 무관하며 그것과 관련해 로비를 받은 적도 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퇴장 ‘동교동’ 맏형 권노갑, 마침내 입열다

    1993년 2월 자신의 목포지구당을 DJ의 장남 김홍일에게 물려주는 권노갑씨.

    널리 알려진 대로 권노갑씨는 묘비에 ‘김대중씨의 비서실장’이라고 새기고 싶어하는 DJ교의 신도다. 지금도 그 뜻에 변함이 없다고 한다. 그는 DJ의 약점이 뭐냐고 묻자 “어떻게 그 양반의 단점을 내가 말하냐”며 쑥쓰러워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과 역사관을 쭉 지켜보면서 그 분이 대통령 되면 우리 국민에게 큰 혜택을 줄 것이다, 사회복지나 노동·인권 분야 개선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 분의 신도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살아온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 양반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몇 차례 떨어지는 걸 보고 어째서 저렇게 똑똑한 분이 국회의원이 못 되냐, 어떻게든 이 양반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심정에서 도왔어요. 이 분이 국회의원이 된 후로는 대통령으로 만드는 게 제 삶의 목표였습니다. 대통령도 되셨는데 더 이상 바랄 게 뭐가 있겠어요.”

    -바로 그게 문제인데요. DJ에 대한 권고문의 지나친 충성심.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가 숙명적 충성주의라고 이름 붙였지요. 정씨의 분석으로는 권고문이 김대통령을 향한 터널시야를 갖고 있어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지조 등으로 자신의 모든 정치적 행동을 합리화한다는 겁니다. 남들이 뭐라 비판해도 자신이 하는 일은 늘 옳다고 여기는 거죠.

    “숙명적 충성주의라는 표현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나에 대한 비판 중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 많아요. 내가 진짜 뭘 저질렀다면 이런 말도 하지 않아요. 비리가 없었는데도 비리에 연루된 것으로 오해받은 채 세월이 흐르고 있어요.”

    -김대통령에 대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많이 서운하지 않습니까.

    “나를 따르는 의원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나에 대해 해도해도 너무했다고. 나는 그런 말 못하게 해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통령께서도 권노갑의 명예를 꼭 회복시켜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런데 결국 당신 임기 동안 내 명예를 회복시켜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재판 끝나면 나 스스로 명예회복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대통령께서 명예회복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까.

    “있어요. 박지원 실장한테도 얘기했고, 김옥두 의원한테도 했어요. 집사람한테도 얘기했어요. 집에 찾아오셔서.”

    권씨에 따르면 김대통령이 권씨의 집을 찾은 것은 그가 한보사건으로 구속돼 있을 때였다. “내가 대통령이 못 되게 하려고 노갑이를 잡아넣었다, 대통령이 되면 반드시 명예회복시키겠다고 우리 집사람한테 약속하셨어요.”

    그는 남매를 뒀는데 아들은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는 GE 본사에 근무하고 있고 딸은 경희대 대우교수다. 그의 아내는 영등포 롯데백화점에 있는 돈가스 식당 ‘오메가’와 롯데 강남점의 비빔밥집 ‘예촌’을 운영하고 있다.

    -자서전 제목이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인데, 가족들은 불만이 없습니까.

    “내가 과거에 물고문 당하고, 고막 터지고, 감옥에 가고 할 때는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원망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장인 내가 민주화를 위해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김대중 대통령이 반드시 뭔가 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인내하며 살아왔어요. 그리고 결국 그 희망이 현실화 됐어요.”

    명예회복하고야 말겠다

    권씨는 인터뷰 말미에 정치 재개의 뜻을 강하게 비쳤다.

    “재판이 끝나면 결정하려 해요. 은퇴를 하든 정치를 재개하든. 가족들은 더 이상 정치하지 말라는데, 나를 따르던 의원과 동지들은 명예회복 차원에서 다시 정치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러나야 할 때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동안 내가 억울하게 당했거든요. 사실이 아닌 각종 설 때문에 일부 국민들 사이에 나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요. 한보사건도 억울해요. 정치자금으로 받은 돈이라 뇌물죄가 성립되지 않자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해 잡아넣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혐의가 바로 포괄적 뇌물죄에 해당합니다. 두 사람 빼고 정치인으로서 이런 죄가 적용된 사람은 권노갑이 유일합니다. 나는 16대 때 공천 탈락자들을 달래느라 지역구(동대문 갑)는 물론 전국구도 포기했어요. 당 결속을 위해 선출직 최고위원도 양보하고 지명직 최고위원으로서 명예회복에 나섰는데 젊은 친구들이 나를 매도하며 사퇴를 요구했어요. 사퇴하고 나서는 진승현 사건으로 나를 엮어 넣었습니다. 그러니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면 명예회복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맥아더가 말한 대로 ‘저스트 페이드 아웃’이라면 모를까, 나는 명예가 더럽혀진 채 물러나게 생겼단 말이에요. 나도 가족이 있는데 명예회복하고 물러나야지.”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면 그것으로써 명예가 회복되지 않습니까.

    “되지요. 그러나 한보사건의 여진이 남아 있어요.”

    -부정적 이미지 말입니까.

    “그렇죠. 완전히 불식해야죠.”

    -당내에서 거부감이 없을까요.

    “정치를 안 하고도 명예회복이 될 수 있는지 그건 재판에서 이긴 후 생각해보겠습니다.”

    DJ의 그림자로서, 민주화투쟁의 한 상징이었던 동교동계의 좌장으로서 ‘국민의 정부’에서 온갖 영욕을 맛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어쩌면 이제 그는 DJ의 버팀목 노릇을 끝내고 독자적인 행보로 정치 생명을 마무리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마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고집 세고 강인한 늙은 어부처럼. 과연 그가 낚아 올릴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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