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봄날의 화려한 외출?

  • 글: 남윤인순(여성연합 사무총장)

    입력2003-03-26 08:5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봄날의 화려한 외출?
    파릇한 기운이 비온 뒤에 더욱 완연하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 속에서도 도도한 봄기운은 어김없이 두꺼운 장막을 걷어내고 있다. 봄기운을 이렇게 느껴본 것도 정말 얼마 만인지.

    안식휴가를 얻어 모처럼 주변의 사물을 구체적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여성단체다. 올해로 만 10년째 일하면서 두 달간 안식휴가를 받았다. 그 동안 우리 사회의 여성문제를 대변하고 해결해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밤낮없이 일해왔다. 그러다 보니 변변한 취미생활도 없고, 하나뿐인 딸아이와도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

    남편은 환경연합에서 일하느라 똑같이 바쁘다.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쉬면서 맨 처음 한 일은 고등학교 2학년인 딸과 시간 보내기였다. 비오는 날 마중도 가고, 학교가 끝나고 나면 영화구경 시장구경도 다니고…. 딸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재잘거리며 쏟아냈다. 친구 이야기, 학교 이야기, 먹고 싶은 음식 등. 그동안 엄마를 가져보지 못한 결핍이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콧등이 시큰거렸다.

    다른 미래를 꿈꾸는 엄마와 딸

    여성운동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딸을 생각하곤 했다. 딸이 성장해서 차별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일했는데, 막상 딸에게는 엄마로서 소홀하지 않았나 하고 반성했다.



    딸아이와 대화하면서 미래의 꿈을 물어보았다. 구체적인 꿈은 없고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대학을 가려 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기자 또는 교사가 꿈이라고 했는데, 이젠 ‘돈벌기’라고 이야기하는 딸을 보며 깜짝 놀랐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이 대부분 그렇다고 했다. 여성운동하는 엄마와 그 딸은 서로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할말을 잃고 말았다. 비록 허황된 꿈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몇 년 사이 우리 사회가 정말 많이 변했음을 느낀다. 인터넷 쇼핑몰이 생기면서 딸아이는 이런저런 구매 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인터넷 쇼핑몰에선 공동구매를 통해 물건을 팔고 사기도 한다. 물론 공동구매는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다른 구매자가 활용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딸아이는 매일 인터넷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매정보를 얻어 엄마한테 이야기를 한다. 사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돈이 없어 못 사니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이다. 정말 물질만능사회가 가까이 와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또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딸의 미래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인지 깊이 고민하게 됐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엄청난 빈부격차, 즉 20대 80의 사회로 굳어지면서 20%에 들어가지 못한 대다수 사람은 좌절감에 빠져 있다. 20%에 속하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이미 딸아이는 그러한 경계선을 느끼고 있고 공부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벌어 20%에 속하고 싶어한다. 엄마는 평등사회, 나눔사회, 참여사회, 녹색사회를 외치며 여성운동을 하고 있지만 딸아이는 너무나 현실적인 고민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이미 교육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지 인성과 지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님이 분명하다. 모처럼 얻은 안식휴가를 화려하게 보낼 생각이었지만 나는 여성운동 현장을 잠깐 떠나 있으면서 운동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이를 거부할 강력한 대안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전의 고민이 더욱 뚜렷해졌다.

    딸아이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대안사회는 정부의 정책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학교에서, 가족 안에서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전환하고자 하는 다양한 실천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생활협동운동, 사회연대은행, 공동육아운동, 생태마을 만들기, 지역화폐운동, 대안학교 등 실험적이지만 거대 자본에 대항해 즐거운 생산과 소비를 할 수 있는 대안 만들기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절실함이 가슴을 친다.

    딸아이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아쉽게도 인식휴가가 많이 지나갔다. 뭐라도 한가지 배워야지 했는데…. 운전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계신 친정어머니 아프시기라도 하면 병원이라도 모시고 다녀야겠다는 동기가 강하게 발동했다.

    그래서 운전전문학원에 등록했다. 학과시험을 준비하면서 기능훈련과정에 들어갔다. 학과시험을 보기 전에 도로교통안전협회에서 만든 비디오 교육이 있었다. 그 내용 중에 여성운전자의 특성이 나온다. 여성운전자는 집중력이 약하고 위기 대처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특히 안전운전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실제 상황처럼 보여주었다.

    그 내용을 보면 여성운전자는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도로에서 남성 운전자들이 여성운전자를 무시하고 비하하는 데는 이런 교육도 영향을 미치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학과시험을 보기 위해 도로교통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를 하는데, 도로 위 안전표지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 중 ‘보행자’란 표지를 보면 남자와 어린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다. 반면 ‘어린이 보호’란 표지는 여성이 어린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다. 이런 표지는 어린이 보호는 여성의 역할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물론 초·중등 교과서에서는 고정적인 성역할 분담에 대한 그림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한다. 그런데 운전면허시험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학과시험과 교육에서는 여성비하와 성차별적인 내용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여성주의적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일상 속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와 차별은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런 현상이 지속돼왔기 때문에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뿐이다.

    일상에서 성차별을 말하면 그런 시시한 것까지 따지냐고 한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건다”며 시민운동을 하는 남성들도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이 변하지 않으면 제도가 바뀌고 정책이 바뀐들 무엇하랴. 관행과 인습이 바뀌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차별과 비하로 여성들은 숨막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교육과 미디어에서 생산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다.

    너무나 변하지 않은 남녀 역할

    요즈음 인기드라마인 ‘인어아가씨’를 보자면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구도다. 남편, 시아버지는 모두 너그러운데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한다는 식이다. 그 동안 여성단체에서 성차별적 법과 제도를 바꾸려고 많은 투쟁을 해왔지만 일상에서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식휴가 동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요즘 학과시험을 통과한 후 기능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다. 기능 훈련을 담당하는 남자 강사가 무시하는 말투로 야단치는 것을 참아가면서 운전면허를 취득하려고 애쓰고 있다. 친정어머니께 효도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상에서 여성들이 겪는 무시와 편견을 겪으면서 여성운동이 어디에 천착해야 하는지 온몸으로 느낀다. 화려한 나의 안식휴가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거제도 지심도의 동백꽃도 그립고 섬진강과 산수유 마을도 가보고 싶었는데, 처절한 여성의 일상을 느끼며 내가 보아야 할 것들을 제대로 본 것 같아 다시 길 나설 채비를 한다.

    나의 봄맞이 외출은 화려하진 않지만 푸른빛으로 반짝인다. 딸아이와 나눈 대화, 여성운동에 대한 성찰, 운전연습 등 그 동안 미뤄두었던 일들을 하면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