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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너

  • 한성봉 |동아시아출판사 대표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너

1990년대 중반. 전북 익산시 어느 수영장입니다. 30대 젊은 아빠인 나는 두 아들을 데리고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운동을 즐기고 꽤 오랫동안 수영을 해온 나는 물이 침대보다도 편안합니다. 물살의 저항을 비웃듯 힘차게 가릅니다. 살짝 옆 레인을 바라보니 대여섯 살 된 둘째 녀석이 아비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팔을 휘젓습니다. 타고날 때부터 건강하고 모험심이 강해서 물속에 처음 던지자마자 수영을 시작한 녀석입니다.

또 한 녀석이 있습니다. 둘째보다 두 살 위인 형입니다. 어쩌면 형제가 저렇게 다르냐고, 첫째 녀석은 몸과 기질이 허약해서 아비인 나로서는 항상 한심한 눈엣가시였습니다. 찌질한 한국 남자들의 레퍼토리처럼 ‘제 어미를 닮은’ 녀석이지요.

그래서 저 녀석을 좀 강하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자마자 저는 권투 글러브를 샀습니다. 권투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때리는 쾌감을 안겨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맞아주었습니다. 일부러 코를 맞아 코피가 나기도 했습니다. 맞는 것보다 때리는 것이 낫다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이기적 가족주의의 전형이었습니다.

수영을 가르치려는 것도 그 프로젝트의 하나였습니다. 물이라면 극도의 공포를 갖는 녀석에게 그 공포를 극복하게 하여, 앞으로의 인생에서 험난한 고비를 스스로 넘게 하려는 심오한(?) 생각이었습니다. 물에 빠졌을 때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법도 가르치면 좋겠다는 생각은 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두려운 사람이 물에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에, 처음에는 수영복만 입혀 수영장 사이드에서 발만 담그고 놀게 했습니다. 물론 저와 동생 녀석은 신나게 수영을 하고 있지요. 물가에 앉아만 있는데도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고 사시나무 떨 듯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물속에 들어오라는 강요가 없어서인지 그나마 감사한 표정으로 녀석은 한 시간 이상을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큰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치며

 주말마다 이 행사를 몇 달 계속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부모가 유념해야 할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인내’라고 말하듯, 그야말로 악문 이가 부서질 정도의 인내로 버텼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아이들은 모두 깔깔거리며 물놀이를 즐기고 훨씬 작은 아이들도 능숙하게 수영을 하는데, 내 아들만이 주눅이 들어 몸을 벌벌 떨고 입술이 새파래져 있다면, 어느 아버지가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저 녀석을 물속에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날 무렵 녀석이 물에 들어오겠다 하더군요. 할렐루야! 세상에 이렇게 소중한 옥체(玉體)가 없습니다. 혹시라도 다시 물이 무서워질까봐 발목에서 무릎까지 넣는 데 며칠, 무릎에서 가슴까지 담그는 데 며칠을 걸려 입수에 성공했습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형제는 수영장에 물고기로 소문났습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사람들에 의해 저는 졸지에 ‘훌륭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부모를 만나거든 그들도 함께 베어라. 그때서야 너는 절대로서 진정한 자유를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선불교에서 화두 혹은 공안이라 말하는 것으로, 깨달음의 한 방법인 돈오(頓悟)를 향해 가는 염두(念頭)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와 부모도 모두 죽이라는 이 화두는, 과거의 체제와 권위를 깨거나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에 다가가는 포효입니다. 이는 선불교에서 많이 쓰이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인도 불교의 아자세 왕 설화를 포함한 인류 공통의 사유이기도 합니다. 주변부적 존재인 ‘타자(他者)’는 운명적으로 기존의 관습적 윤리적 질서에 끊임없이 도전해 혁신을 통한 새로움을 갈구하기 마련이라는 갈파이기도 합니다.

즉 ‘수영’에 관한 제 아들 얘기는 이렇게 미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아들이 지금 수영을 잘한다는 것과, 사람마다 타고난 것이 다르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는 부모 역할, 더욱이 끈질긴 인내를 가지고 교육에 임했다는 점은 잘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타자인 자식을 타자로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일부처럼 생각하고 그 지평 위에서 교육을 했다는 점에선 관습적 기득권의 포악한 독재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녀석이 물속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지루하게도 긴 그 시간을, 주말마다 계속되는 아버지와의 사투를, 물에 빠져 죽더라도 어떻게든지 끝내겠다는 각오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녀석을 바라보며

자식은 부모의 것이었습니다. 천자문에 ‘공유국양(恭惟鞠養)하니 기감훼상(豈敢毁傷)’(살피고 길러주심을 공손히 생각하니 어찌 감히 헐고 다치게 하겠는가)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의 윤리 규범으로 배우고 가르치던 한국식 유교의 가족주의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신체발부가 부모의 은혜이니 감히 헐고 다칠 수조차 없다는, 정말 무시무시한 가족관계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판단력이 없다고 치부되고 의견은 무시되며 부모는 모든 일에 전권을 갖습니다.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체벌이 당연해지고 심지어 ‘사랑의 매’라 포장되기도 하며 ‘내가 맞을 짓을 했다’고 자책하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출판사 편집인으로서 제가 지대한 관심을 갖는 원고가 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였으며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오래 일한 김희경 선생님의 ‘가족과 가족주의’에 관한, 곧 출간될 책입니다. 김희경 선생님은 한국의 모든 사회문제는 가족문제라 규정하고 “나는 이 모든 문제를 연결하는 단어로 ‘가족’을 꼽겠다. 한국만큼 ‘모든 사회문제는 가족문제’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겼고 살아남는 것이 가족 총력전이 돼버리다시피 했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의 자율성은 간단히 무시됐으며 가족주의의 극단이라 할 마음가짐, 즉 아이를 소유물처럼 바라보고 통제하는 행동은 여전하다”고 지적합니다.

저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고 자부합니다. 졸업한 뒤 돈벌이가 쉽지 않을 게 뻔한 철학과를 가겠다고 할 때도, 철학과를 마치자 뮤지션이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어려운 가정 살림 사정을 늘어놓거나, 세상 살아봐서 안다는 식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세상과 질서를 위한, 내가 생각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내 자식 혹은 내 가족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물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교활한 수작을 부려 아이를 힘들게 했습니다. 아이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물에 들어오던 모습을 그려보면 끔찍합니다. 저하고 권투를 하던 아이의 멍든 가슴을 상상해보면 몸서리쳐집니다.

그 아이가 서른이 되었고, 사귀는 여자와 곧 결혼하겠다고 하더군요. 이제 녀석도 가정을 갖고 또 자식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큰 회한이 밀려옵니다. 저는 이제 겨우 ‘내 것인 듯, 내 것이 아닌 너’를 이해합니다.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너

한성봉
● 1960년 전북 익산 출생
● 원광대 문학박사
● 동아시아출판사 대표









입력 2017-08-13 09:00:01

한성봉 |동아시아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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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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