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빼앗긴 들에 찾아온 봄의 향기

  • 글: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사진: 김용해 기자 sun@donga.com

    입력2003-03-26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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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욱은 대표적인 봄나물이다. 풋풋한 향내 가득한 아욱은 나른한 봄철 사라진 입맛을 돋우는 데 그만이다. 여름철 영양식품으로도 훌륭하다.
    • 단백질과 지방, 칼슘이 시금치에 비해 두 배 이상 들어 있을 정도로 영양가가 높기 때문이다.
    • 아욱국에 쌀을 넣어 끓인 아욱죽은 별미 중의 별미다.
    빼앗긴 들에 찾아온 봄의 향기
    “처음은 어둠 같다. 문학의 길 44년이 이다지도 벅찬 것인 줄 알 까닭이 없었다.”

    2002년 10월, 고은(69) 시인이 평생 토해낸 시와 산문, 자전소설, 기행, 그리고 평론과 연구의 결과물을 한데 엮어 ‘전집’(38권)으로 펴내면서 그 첫머리에 적은 소회다.

    그에게는 미치도록 힘든 세월이었다. 고은은 1952년 20세의 나이로 입산해 승려생활 10년간 참선과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 1962년 환속한 후에는 또 10년 동안 술과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나의 시가 걸어온 길’이라는 글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옛날에는 눈물이 쓸데없이 많았습니다. 5월인가 6월쯤 등꽃이 필 무렵 문학을 하는 친구의 하숙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등꽃이 흐드러지게 마당에 피어 있고 확 달빛이 쏟아졌습니다. 그 달빛 때문에 새벽 3시까지 울었어요.…이런 울음이 나한테는 오랫동안 있었어요. 울음이 10년씩 가다가 그 다음에는 불면증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껄껄껄 웃으면서 얘기하곤 하는데, 전에는 전혀 이런 걸 용납하지 못했어요. 웃음은 위선자 아니면 생을 거짓으로 살고 있는 자들의 소유물이고,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웃고 하는 것은 속물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여겨져 이해를 안 했어요. 불면증이 10년이나 갔어요. 잠이 안 오니까 밤 12시쯤 되면 막소주를 김치를 안주 삼아 마시곤 했지요.”

    1960년대 초반 고은은 제주도에서 3년 정도 살았다. 살러 간 게 아니라 바다에 빠져 죽으러 갔다가 잠시 머물렀던 것이다. 하지만 죽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술에 취해 살았다.

    고은은 그때의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폐허의 자식’.

    그런 그의 깊은 허무를 깨뜨린 사건이 바로 1970년 벽두에 터진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다. 한 노동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1974년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를 펴내면서 재야운동가로서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중형을 선고받았다가 올해 1월, 23년 만에 비로소 무죄를 선고받아 법률적 명예를 회복했다.

    1983년 감방에서 갓 출소한 그가 터를 잡은 곳이 지금 살고 있는 안성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책 속에 파묻혀 글과 함께 산 지 만 20년째. 절친한 친구인 이문영 고대 교수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간 술독에 빠져 죽을 것 같아서 데리고 내려온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가끔 옛날을 생각하며 ‘아욱죽’을 끓여 먹는다.

    빼앗긴 들에 찾아온 봄의 향기

    20년째 살고 있는 경기도 안성 자택 서재에서 고은 시인이 글을 쓰고 있다.

    ‘아욱죽’은 고은 시인에겐 매우 특별한 음식이다.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맡아 재야운동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 서울 화곡동 그의 집은 운동권 지식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얼마 전 타개한 소설가 이문구를 비롯, 백낙청, 신경림 등 문인들과 이부영, 유인태 등 민청학련 세대 운동권 인사의 집합소였던 것. 그래서 그의 집은 ‘화곡사’로 불렸다.

    암울했던 그 시절 통금시간을 ‘탓(?)’하며 밤새 술 마신 후 고은은 어김없이 ‘아욱죽’을 끓였다. ‘술 동지’들의 속풀이용으로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아욱죽을 만들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쌀을 씻어 2∼3시간 정도 불려둔다. 아욱 잎과 줄기는 연한 것으로 골라 껍질을 벗긴 다음 잘 다듬어 물에 씻어 풋내를 뺀다. 된장은 적당히 으깨 고추장과 함께 섞어놓는다.

    쌀이 적당히 불었으면 물을 붓고 섞어놓은 된장과 고추장을 푼 다음 아욱을 넣고 푹 끓인다. 이때 쇠고기나 새우를 기름에 볶아 함께 넣어 끓이면 영양과 맛이 더욱 풍부해진다.

    아욱죽은 그 자체로 완벽한 음식이어서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향긋한 아욱과 걸쭉하면서 짭짤한 된장 맛, 그리고 쌀에서 우러나오는 담백한 맛이 어우러져 다른 죽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개운함이 느껴진다. 또 아욱의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향은 봄의 생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듯하다. 아욱죽은 애호박전이나 오이지 등과 궁합이 잘 맞아 함께 먹으면 여름철 입맛을 돋우는 데 그만이다.

    다이어트 음식으로도 제격이다. 아욱의 씨가 바로 다이어트차로 각광받고 있는 동규자차의 주성분이기 때문이다. 변비가 심한 사람이 아욱죽을 지속적으로 먹으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욱죽이 과음 후 속풀이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아직 증명된 바 없다. 그러나 고은 시인은 속풀이용으로 이만한 음식이 없다고 자신한다. 술을 좋아하는 그의 말이니 믿어도 될 듯하다.

    빼앗긴 들에 찾아온 봄의 향기
    아욱죽으로 섭생을 잘한 덕분일까. 그는 고희(古稀)를 눈앞에 둔 고령임에도 여전히 건강하다. 그의 지적 탐구에 대한 정열은 아직도 뜨겁다. 그는 하루 종일 책 읽고, 사색하며 지낸다. 술이 낙이라면 낙이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시’를 토해쓰고 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한국 문학계를 흥분시켰던 고은에게 시는 삶의 전부다.

    “시를 쓰지 않을 때에는 폐인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때때로 세상에 대해 판단 정지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아주 멍청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시 한 편이 나오면 눈이 뻔쩍거리고 뭔가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용솟음치곤 하죠. 시를 쓴 뒤에는 뭔가 멍해져서…. 마음속의 지평선을 막막하게 바라보곤 합니다.”

    그에게 “시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답은 뜻밖이었다. “아직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를 생각하면 숨이 막힙니다. 아마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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