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김태식의 考古野談

1915년 여름 백제왕가 공동묘지서 만난 도쿄제대 교수 2명은 왜?

식민지 고고학의 탄생

  •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문화재 전문언론인

    입력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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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부여 능산리 고분군 출토품 중에 금동투조금구(金銅透彫金具)가 있다. 투조란 주로 납작한 목재나 금속판을 뚫는 장식 기법을 말하며, 금구란 금붙이를 말한다. 따라서 뚫음무늬 장식을 한 금동판을 뜻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 금속 유물은 높이 8.7㎝, 너비 7.0㎝로, 1915년 여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라는 당시 일본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교수가 능산리 고분군 중에서도 중하총(中下塚)이라는 무덤을 발굴해 수습한 것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돼 2015년 여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린 능산리 고분군은 사비도읍기(536~660) 백제시대 왕가의 공동묘지로 간주되는 곳이다. 현재는 봉분 7기가 작은 산 남쪽을 바라보는 기슭에 한 무리를 이룬다. 한가운데 꼭짓점에 해당하는 곳에 무덤 하나가 있고, 그 아래쪽 전면으로 무덤 3기씩이 동서 방향으로 두 열을 이룬다. 그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아래쪽 동쪽이면 동하총(東下塚), 위쪽 줄 중앙에 있으면 중상총(中上塚), 위쪽 줄 서쪽에 있으면 서상총(西上塚)이라 구별하곤 한다.

    꼭짓점에 해당하는 맨 위쪽 고분은 1970년대 이 고분공원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새로 발견돼 7호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들 7기 고분은 현재 제법 큰 봉분을 갖춘 상태지만, 이는 최근 정비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백제시대에는 봉분이 아주 낮고 작았다. 

    지금은 백제가 남긴 유산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명소가 된 능산리 고분군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과 같은 ‘문화재’로 세상에 알려졌을까.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1915년 여름을 주목하게 된다. 이때 공교롭게도 같은 도쿄제대 교수 2명이 각기 조사팀을 이끌고 같은 시기에 같은 능산리 고분군에 나타났다. 이들의 이상한 만남에서 백제왕가의 공동묘지는 비로소 속살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세키노였다. 1902년 이미 대한제국 곳곳을 답사하며 문화재를 조사한 세키노는 한국 병합 이후에도 식민지 조선고적조사에서 실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금동투조금구는 그가 능산리 고분군을 발굴해 그곳에서 수습한 백제시대 왕릉 유물 중 하나다.  



    세키노라는 이름의 등장

    그가 이 유물을 찾아낸 중하총은 양식으로 보면 남북 방향으로 긴 평면 직사각형 석실 앞에 무덤길인 연도(羨道)를 별도로 갖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에 속한다. 단면에서 보면 천장을 안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덮개돌을 올렸다. 이미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본 이곳에서는 그 외에도 목관 조각과 금동제 관못, 금동제 관장식 금붙이 등이 수습됐다. 금동투조금구의 기능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지만, 모자의 일종인 관모(冠帽)의 전면 장식물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 유물을 세키노는 어떤 계기로 발굴하게 됐을까.

    1915년 11월에 나온 ‘고고학잡지(考古學雜誌)’ 제194호에는 세키노가 쓴 ‘백제의 유적’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에는 본문 시작에 앞서 주제와 관련되는 사진 2장이 수록됐으니, 개중 하나가 바로 그해 여름, 세키노 자신이 능산리 고분군에서 발굴한 금동투조금구이며, 다른 하나가 이 무덤 석곽 내부 장면이다. 이 논문 서론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지난 메이지 42년(1909), 한국 탁지부(度支部) 촉탁을 받아 야쓰이(谷井) 문학사·구리야마(栗山) 공학사와 더불어 백제 고도인 공주와 부여의 유적을 조사한 일이 있지만, 금년(1915) 7월, 야쓰이 문학사 및 고토(後藤) 공학사와 더불어 조선총독부 촉탁을 받아 다시 부여에 이르러 그 일대를 답사하고…이번에는 처음으로 분묘 발굴을 시도한 결과 당시 분묘 양식도 분명히 알게 되고 또 부장품이나 성벽 유적 출토 옛 기와의 문양이 크게 우리(일본) 나라(奈良)시대의 그것과 친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됐다.”

    세키노가 말하는 1909년 조사란 세키노가 도쿄제대 공학부 건축학과 제자인 구리야마 준이치(栗山俊一)와 같은 도쿄제대 국사학과 출신인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를 데리고 그해 9월부터 12월까지 실시한 조선고적조사를 말한다. 하지만 그 성과가 시원치 않았음을 다음의 세키노 글에서 확인한다. 

    “우리는 지난 메이지 42년에는 겨우 이틀간만 허락받은 데다 눈까지 내리기 시작해 고분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 후 부여-논산 간 신작로 개설에 즈음해 처음으로 능산리 산상에 고분 석곽이 다수 노출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게다가 올해에 이르러 마찬가지로 능산리에 왕릉이라 부르는 고분이 있음을 알게 됐다. 한데 지금까지 이 왕릉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이 부근에 최씨라는 양반이 있었고, 지방 세력가로서 이 왕릉 부근에 그의 가묘를 만들었으므로 만약 왕릉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알려지면 결국 그 가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어 그 세력을 이용해 그곳 주민들에게 왕릉에 관한 일을 오래도록 비밀에 부치도록 엄명했다고 해서 오래도록 누구도 알지 못하고 지났지만, 우연한 일로 문득 군청에서 하는 말을 들어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두 도쿄제대 교수의 조우와 족적

    이해 그가 어느 기간에 구체적으로 어디를 어떻게 조사했는지는 그의 탄생 100주년에 즈음해 공개된 조선사적유물조사 복명서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다이쇼 4년(1915) 3월 6일, 학술조사를 위해 출장을 명 받아 같은 달 17일 도쿄역을 출발해 동 22일 경성에 도착해 먼저 이곳에서 체재하기를 8일, 여행 준비를 마치고 같은 달 30일 경성을 출발해 사적 연구의 여정에 올랐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답사는 같은 해 7월 말에 종료한다. 개성 조사를 마치고 그달 26일 경성에 도착해 여러 날 머물며 여독을 푼 구로이타는 8월 2일 귀국길에 올라 같은 달 6일 도쿄에 도착한다. 이 여행을 총괄하면서 구로이타는 “조선 체류는 도합 100일, 주로 경상남·북 양도를 조사하고, 전라·충청 네 도의 일부에 미친 후 평양 부근과 개성을 답사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비상한 후의를 베풀었으니, 학무국 편집과 촉탁 가토 간카쿠라(加藤灌角) 씨를 통역으로 삼게 하고, 사진기사 1인을 동행케 해주었으며, 특히 고분 발굴을 허가해줬다. 또한 이왕직(李王職)을 비롯해 여러 관청, 경무부 및 민간의 유지가 각종 편의를 베풀어 예정한 이상의 연구조사를 수행할 수 있었음에 먼저 감사를 표한다”고 했다.

    복명서에서 구로이타는 조사 목적을 “실지를 답사해, 고고학·역사지리학 등의 방면에서 그것을 관찰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일본의) 상대사(上代史) 연구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일본 역사의 보완을 위해 조선 유적 답사에 오른 것이다. 구로이타가 능산리 고분을 발굴한 시점은 복명서를 볼 때 7월 9~16일이다. 복명서에 의하면 구로이타는 중하총과 서하총 두 고분을 조사했다.

    한편, 세키노 일행의 이 무렵 조선답사 일정은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 확인된다. 세키노는 1915년 6월 28일, 도쿄를 출발해 20일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본격 행보에 나선다. 이후 경주에서 야쓰이와 고토 두 제자와 경주에서 합류한 세키노는 7월 15일 저녁 부여에 도착해 이튿날 능산리 고분 조사를 시작해 19일까지 계속한다. 따라서 세키노가 구로이타를 능산리에서 조우한 시점은 7월 16일이었을 것이다.

    이후 상경한 그는 24일 큰비가 내리는 가운데 총독부로 가서 우사미 가쓰오(宇佐美勝夫) 내무장관, 그리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을 면회했다고 한다. 데라우치는 특히 세키노를 아꼈다고 한다. 아마 이 자리에서는 그간 조선 답사 및 조사 성과를 간단히 구두 보고하고 고적조사활동 방향 등에 대한 논의가 오갔을 것이다.



    1300년 만에 드러난 백제왕릉

    도쿄제대 명령을 받은 구로이타와 조선총독부 명령을 받은 세키노에 의해 능산리 고분군은 당시 6기 중 3기가 각각 조사된다. 아쉽게도 이들 무덤은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본 까닭에, 수습한 유물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사비시대 백제 왕릉이 무덤방은 돌로 꾸미고, 그 전면으로는 바깥으로 통하는 무덤길을 마련한 굴식돌방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나아가 무덤 바닥에서는 관을 놓았던 받침대인 관대(棺臺)와 목관 파면 일부가 확인됨으로써, 이 시대 백제 왕릉은 원칙적으로 부부를 같은 무덤방에 묻는 합장분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또한 일부 무덤에서는 두개골을 포함한 인골도 수습함으로써, 그 위치 추적을 통해 시신은 머리 방향을 북쪽으로 두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들이 서막을 연 능산리 고분군은 2년 뒤인 1917년에는 나머지 세 봉분이 발굴됨으로써 현재 능산리 고분군 중앙에 두 줄로 나란히 선 무덤 6기가 1300여 년 만에 모두 속살을 드러냈다. 100년 전, 백제왕릉은 이렇게 출현했다.

    나아가 이 만남은 식민지 조선고고학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싫건 좋건 근대적인 학문으로서의 조선고고학은 제국주의 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이 시작했다. 고건축과 미술사가 주된 관심사인 세키노가 초창기 조선고고학과 미술사를 개척했다면, 뒤늦게 나타난 구로이타는 이후 그에다가 역사학과 고문서학의 중요성을 가미했다. 구로이타는 무엇보다 제도로서의 문화재학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의 문화재보호법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놀랍게도 구로이타가 주도한 각종 법령에 닿는다. 물론 이들이 구축한 학문은 철저히 제국주의 일본의 논리를 뒷받침했다.  





    김태식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학사, 선문대 고대사·고고학 석사
    ●  저서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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