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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의 조선사회 뒷마당

술 마신 자 임금이 직접 목을 베니…

술문화와 금주령

  • 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술 마신 자 임금이 직접 목을 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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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금주령은 대개, 중앙정부가 명령을 내리면 각 지방 행정기관들이 이를 받아 단속하는 방식으로 집행됐다. 금주령은 개국 초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강력하게 시행된 법령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천편일률적이어서 금주령의 이유(보통 흉년 가뭄), 금주 기간, 금주령의 적용대상 범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중 금주령의 적용대상 범위가 주목할 만하다. 다음은 ‘태종실록’ 7년 8월27일조 사헌부의 말이다.

“① 각사(各司)의 병술(甁酒)과 영접·전송,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다탕(茶湯)을 빙자하여 허비하는 따위의 일은 일절 금지하고, 조반(朝班)과 길거리에서 술에 취하여 어지럽게 구는 대소 원리(大小員吏)를 또한 규찰하게 하되, ② 다만 늙고 병들어서 약으로 먹는 것과 시정에서 술을 팔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는 이 범위에 넣지 않게 하소서.”

①이 금주의 대상이고, ②가 제외의 대상이다. 늙고 병든 사람이 술을 약으로 마시는 경우, 가난하여 술을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는 금주령에서 제외되었다. 물론 금주의 범위는 늘 가변적이다. ‘세종실록’ 2년 윤1월23일의 실록 기록에 따르면, 금주령 기간 이라도 부모 형제의 환영 전송, 혹은 늙고 병든 사람의 복약(服藥), 또 이런 경우에 필요한 술을 매매한 사람은 처벌에서 제외되었고, 오로지 놀기 위하여 마시는 경우, 부모 형제가 아닌 사람을 영접 전송하면서 마시는 것, 또 이들에게 술을 판 경우는 모두 처벌 대상이었다.

금주의 범위는 사회적 상황, 정책 담당자의 성격, 임금의 의지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예컨대 무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할 때 음주를 허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중요한 국정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4년 5월10일, ‘성종’ 9년 5월29일). 음주를 허용하자는 측은 활을 쏠 때 술의 힘을 빌려야 잘 맞는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이 경우 음주 허용과 불가 방침이 반복됐다. 조선시대 금주령은 결론적으로 약을 먹을 때 마시는 술과 혼인·제사 때 마시는 술은 대체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성종실록’ 14년 3월6일).

금주령은 강력했지만 실제 단속에 걸려드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이었다. ‘청주(淸酒)’를 마신 자는 걸려들지 않고, ‘탁주’를 마신 자는 걸려들어 처벌을 받는다 했으니(‘세종실록’ 2년 윤1월23일), 요즘으로 치자면 양주를 마신 사람은 괜찮고 소주를 마신 사람은 걸려든다는 얘기다. “금주령으로 처벌되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이고 고대광실에서 호사를 떨며 술을 즐기는 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세종실록’ 8년 2월23일)거나, “가난뱅이는 정말 우연히 탁주 한 모금을 마시다 체포되고, 세력과 돈이 있는 자는 날마다 마셔도 누구도 감히 입을 대지 못했다”(‘세종실록’ 11년 2월25일)는 데서 알 수 있다.



소주는 조선 상류층의 상징

금주령에서 특히 문제삼았던 것은 소주였다. 조선 건국 이후 체제가 안정되자 술은 점점 고급화되었다. 소주의 소비가 늘어났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소주는 지금과 달리 고급술이었다. 원래 소주와 같은 증류주는 알코올 함량이 높기 때문에 곡식이 많이 소모된다. 세종 15년 이조판서 허조(許稠, 1369~ 1439)는 “내가 처음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는 소주를 보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집집마다 소주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세종실록’ 15년 3월23일). 허조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건국 초기에는 소주가 드물다가 세종 연간에 와서 소주를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종 21년의 자료에 의하면, 세종 때는 사대부가에서도 드물게 쓰는 것이었으나 성종 때엔 연회에도 모두 소주를 사용하였다고 한다(‘성종실록’ 21년 4월10일). 소주를 마시는 것은 관청에서 시정에 이르기까지 풍습이 되었기에 소주를 만들거나 마시는 것에 대한 금지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성종실록’ 22년 2월22일). 그러나 금지령이 지켜지는 것은 한때일 뿐 소주는 이내 다시 음용되었다.

소주의 유행에 ‘신래침학(新來侵虐)’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신래침학은 과거에 합격하여 처음 관청에 보직을 받아 출근하는 사람에게 고참들이 술과 요리를 요구하는 일종의 입사의식(入社儀式)이다. 신참은 고참들에게 값비싼 소주를 바쳐야 했다. ‘중종실록’ 19년 8월1일자에서 남곤은 “민간의 의식이 부족한 것은 술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소주를 만들기 위해 미곡을 낭비하는 것이 가장 심하며, 소주는 특히 신래를 침학할 때 반드시 요구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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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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