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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 ①

남북 수십 리, 동서 사오 리… 비옥한 토지에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50만 고려인 역사의 첫 장 연 지신허(地新墟) 마을

  • 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남북 수십 리, 동서 사오 리… 비옥한 토지에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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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수십 리, 동서 사오 리… 비옥한 토지에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지신허 마을의 존재를 확인해준 러시아인 시디코프씨와 그의 농장

한편 1910년 연흑룡주지역 일대를 조사한 아무르탐험대의 종합보고서로서 1912년에 간행된 ‘연흑룡지역의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Kitaitsy, Koreitsy, Iaponitsy v Primore)’에서는 최초의 한인이주에 관한 서술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 당시 탐험대의 단장 곤닷치(N. L. Gondatti)는 1911~17년 연흑룡주 총독을 지낸 인물로 한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정책을 취했던 것 같다. 탐험대에 참여했던 그라베(V.V Glave)가 작성한 이 보고서에는 “1863년 이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남부 우수리군(郡)에 소수의 독신 조선인들이 나타났으나, 이들은 여름에 일하고 가을에 되돌아갔다. 1863년에 들어서면서 가족들의 (영구정착을 위한) 이주가 시작됐다. 최초의 13가구가 노보고로드만에 새로이 조성된 포세트구역의 국유지를 점유하였던 것이다”고 기록돼 있다. 지신허라는 마을 명칭이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현재 학계에서 받아들이는 학설의 근거가 바로 이 보고서다.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의 초기 형성과정은 러시아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분석한 고려인 한국사학자 박보리스 교수에 의해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남부 우수리 지역에 최초로 이주한 한인들에 대한 첫 번째 공식보고는 노보고로드 초소 대장인 레자노프(Rezanov)가 연해주 군무지사인 카자케비치(P.V.Kazakevich)에게 보낸 1863년 11월30일자(현재 서력으로 12월13일자)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레자노프 중위는 “한인 몇 사람이 와서 20가구가 노보고로드 초소로부터 15베르스타(약 16km) 떨어진 지신허강 분지에 정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였는데, 이미 이들은 이곳에 대여섯 채의 집을 지어놓은 상태였다”고 보고했다. 이들 한인들은 또한 자신들을 홍후즈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도록 러시아군인 5명을 파견·배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레자노프 중위의 보고를 받은 연해주 군무지사 카자케비치는 한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864년 5월 레자노프 중위에게 홍후즈의 공격으로부터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초소를 지신허 마을 주변에 배치하고, 한인들의 정착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레자노프 중위가 이 명령서를 접수한 것은 1864년 가을의 일이었는데, 이 무렵 지신허강 분지에는 60명 정도의 한인들이 새로 지은 집과 채소밭, 농토를 갖고 가축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카자케비치 군무지사에게 보낸 레자노프 중위의 두 번째 보고서는 1864년 9월21일(서력 10월4일) 작성된 것인데, 지신허 마을의 한인들에 대해 한층 자세하고 공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레자노프는 지신허에 정착한 한인들이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으며 이들이 생산한 메밀을 우선적으로 국고로 구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또 연자매 맷돌을 설치해주고, 중국인 ‘라(La)’로부터 빌린 종자와 양식비용을 갚기 위한 보조금 200루블을 대여해줄 것도 요청했다. 이주 2년 후인 1865년 연해주 군무지사는 지신허강 분지에 형성된 최초의 한인마을의 공식명칭을 노보고로드 초소 대장인 레자노프의 이름을 따서 레자노보(Rezanovo)라 했다.



그렇다면 한인들의 기록은 어떨까. 필자가 확인한 바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은 초기 한인사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자 부호였던 최봉준(崔鳳俊, 1862∼1918)이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창간하면서 쓴 발간사이다. 이 ‘발간하는 말’에서 최봉준은 “서력 일천팔백육십삼년은 곧 음력 갑자지년(甲子之年)이라. 우리 동포 십여 가구가 처음으로 이 아국(俄國)지방 지신허에 건너와서 황무지지(荒蕪之地)를 개척하고 연(連)하야 살음(살게 됨)에 해마다 몇십 호씩 늘어가니…”라고 썼다.

최봉준은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1869년 8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지신허로 이주한 후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 점에서 이 글은 지신허 이주민이 쓴 지신허에 관한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한 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최봉준은 지신허 이주의 시기를 ‘1863년’으로 정확히 기록하고는 있으나 ‘갑자년(甲子年)’, 즉 1864년으로 잘못 계산했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 한인들이 음력에 익숙해 있었고, 또 지신허 출신이자 한인사회의 유력인사였던 최봉준이 ‘갑자년’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정확성 여부에 관계없이 당시 한인들이 최초의 이주시기를 ‘갑자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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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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