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사교육에 짓눌린 ‘강남 특구’ 초등학생 24시

엄마는 ‘매니저’, 先行학습은 필수 그들만의 ‘로열서클’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03-06-24 11:5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교육에 짓눌린 ‘강남 특구’ 초등학생 24시
    지난 3월초 서울 서초구 서초동으로 이사한 회사원 이모(39)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의 전학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집 근처 A초등학교에 들렀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50명이 넘는 학부모들이 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기 때문. 1시간여 기다린 후에야 접수할 수 있었다는 그는 “나만 해도 2명의 아이를 이 학교에 전입시킨다. 그렇다면 전학 온 학생의 수가 최소 50명은 넘는다는 이야기 아니냐. 서울 강북 초등학교의 경우 전입생 수는 많아야 1년에 10명 정도였다. 말로만 들었던 강남 집중 현상이 무엇인지 새삼 피부로 느끼게 된다”며 혀를 내둘렀다.

    강남구 대치동의 경우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대치동에 위치한 B초등학교의 경우 1년 전입생이 평균 250명 정도. 하루에 한 명 꼴로 전학 오는 셈이다. 이 학교의 1학년 학급 수는 5개지만 6학년은 딱 2배인 10개다.

    이처럼 ‘교육 1번지’ 강남 집중 현상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예전에는 중고등학생의 입시 교육 위주로 강남 열풍이 불었다면 이젠 그 열풍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더욱 거세지고 있다. 초등학생 학부모들이 강남에 오는 표면적인 이유는 ‘1류’ 중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중고교는 전입이 자유롭지 않은 반면 초등학교의 경우 주거지만 옮기면 곧바로 전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강남을 찾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중고교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는 초등학생들에게 좀더 다양한 ‘강남식’ 사교육을 맛보게 하고, 어릴 적부터 비슷한 수준의 상류층 아이들과 어울리게 해 ‘그들만의 로열서클’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강남에만 온다고 해서 이런 목표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매니저’인 엄마가 훌륭한 교육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고 그에 맞춰 아이의 스케줄을 제대로 짤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 ‘훌륭한 매니저’가 되기 힘들기 때문에 대다수 강남 엄마들은 전업주부다.

    학교 앞은 엄마들 차량으로 가득



    대치동 C초등학교 앞. 오후 2시30분 정도만 되면 자녀를 데리러 온 엄마들의 차량으로 가득 찬다. 대다수 차량이 서울 강남구를 뜻하는 ‘서울 52’ ‘서울 55’ 번호판을 달고 있지만 ‘서울 30’ 등 강남 외 서울 차량과 경기 차량 번호도 종종 눈에 띈다. 아이들을 태워 집으로 바로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소한 2개의 학원을 들른 후에야 집으로 돌아간다. 엄마는 아이를 학원 앞에 내려준 후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원 앞에서 기다린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를 또 다른 학원으로 데려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남 엄마들은 평일 오후에 개인적인 시간을 전혀 내지 못한다. 그들에게 아이의 ‘로드매니저’ 노릇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대치동 아파트촌 근처의 D외국어학원. 오후 2시만 되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이 학원 앞에는 30대 여성 1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오랜 친구 같지만, 실제로는 학원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알게 된 사이다. 처음 만난 엄마도 어색함 없이 어울릴 수 있다. 아이 교육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 1시간여가 지난 후 한 무리의 엄마들은 각자의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뜬다. 그러면 또 10여 명의 새로운 엄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수강생이 2000명이라는 D외국어학원은 셔틀버스를 운영하지 않는다. 학원 관계자는 “셔틀버스의 운행비가 너무 비싸 운영하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수업의 질을 높이는 데 사용하고 있다”고 모범답안 같은 대답을 했지만, 한 학부모는 “강남은 물론 서울 전역, 분당, 일산, 수지 등지에서 학생들이 몰려와 셔틀버스를 운영할 수 없는 데다가 웬만한 엄마들은 아이를 직접 픽업하러 오기 때문에 셔틀버스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고 귀띔했다.

    송파구에 산다는 한 학부모는 “예전에는 차 속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아이를 기다렸지만 이젠 항상 학원 앞에서 다른 학부모들과 대화를 나눈다”고 말했다. 또래 엄마들에게서 강남에서 유행하는 최신 교육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개월 전 강북에서 강남 서초구로 이사 왔다는 주부 김모(39)씨는 “매우 짧은 기간이었지만 강남의 교육환경과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강북과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의 학급에서 학부모 총회를 했어요. 전체 학생 수가 40명 남짓 되는데 30명의 어머니가 참석했더라고요. 예전 강북 학교에서는 10명도 채 참석하지 않았거든요. 대다수 어머니가 대졸에, 전업주부인 것도 참 놀라웠어요. 담임 선생님에게 아이에 대한 세세한 것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물어보는데, ‘정말 교육열이 남다르구나’ 싶었죠. 그리고 아이들에게 과외교육을 얼마나 많이 시키던지, 기본적으로 5∼6개 학원은 다니더라고요. 한 과목당 10만원씩만 쳐도 교육비가 50만원이 넘어요. 아이들 아버지 대다수가 교수, 의료인, 법조인 아니면 중소기업 대표, 대기업 이사 등 부유층이었는데도, ‘한 달에 1000만원 벌어도 사교육비 때문에 아이 둘 이상 키우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엄마가 많아요.”

    사교육에 짓눌린 ‘강남 특구’ 초등학생 24시

    초등학교 하교 시간만 되면 교문 앞이나 운동장은 자녀를 데리러 온 엄마들의 차량으로 가득 찬다.

    도대체 ‘강남식’ 사교육에 어떤 특징이 있기에 이렇게 학부모들이 ‘시키지 못해’ 안달을 하는 것일까. 일부에서는 “강남 초등학생들이 받는 사교육은 강북이나 여타 지역과 똑같다. 단지 ‘단가’만 비쌀 뿐”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2003년 5월 현재 강남구에 등록된 학원은 무려 1248개나 되지만 강북구는 305개에 불과하다. 인근 서초구와 송파구의 학원을 합치면 3000개 가까이 된다. 수가 많은 만큼 종류도 다양하고, 학생들이 ‘골라 배우는 재미’ 또한 여타 지역보다 훨씬 크다. 최근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사한 주부 김명신씨는 “조간신문에 들어오는 학원 전단지가 강남에 있을 때는 하루에 10개나 됐는데, 강북은 이틀에 1개꼴이라 매우 놀라웠다”고 말했다.

    강남 아이들에게 영어·수학은 기본. 하지만 학원 한 군데 다니지는 않는다. 수학을 예로 들면, 형편이 넉넉한 아이들은 ‘영재수업을 시킨다’는 학원에서 수학을 배우면서 과외선생에게 다시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즘 강남 일대 학원에서는 ‘3년 선행학습’을 시키는 것이 유행이다. 즉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학교 1학년 수학을 배우기 시작해 중학교 입학할 때쯤 중학교 3년 과정을 마친다는 것. 선행의 정도가 심한 만큼 아이가 잘 이해하지 못하면 과외선생에게 다시 배우며 반복학습을 한다.

    과외선생으로는 서울교육대 학생을 선호한다. ‘전문지식’은 그 과목을 전공한 학원 강사에게서 배우고, 초등교육을 전공한 교대생 과외선생에게는 학습은 물론 보살핌과 같은 전인(全人) 교육을 받는다는 것. 과외비는 최소 월 30만원이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면 학원을 다니면서 주로 ‘눈높이 대교’ ‘윤선생 영어교실’과 같은 학습지를 함께 택한다. 3만∼4만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1주일에 한 번 담당 선생한테 점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 이처럼 한 과목을 배우는 데도 2개 이상의 사교육 기관을 이용한다.

    잘 가르치기로 유명한 학원들은 접수조차 쉽지 않다. 특히 조기 영어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어린이 영어학원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다. 대치동의 E어학원은 지금(6월 현재) 접수하면 10월쯤 레벨 테스트를 볼 수 있고 12월은 돼야 등록이 가능하다.

    이 학원의 가장 인기 있는 강좌는 외국인과 한국인 교사가 함께 가르치는 회화 중심 프로그램 CHESS(Children English Study School)로 초등학교 5학년이 되기 전에 접수해야만 들을 수 있다. 접수 전날이면 밤새며 순서를 기다리는 학부모가 학원 앞에 가득하다. 아이가 다니는 학원에 대한 관심은 등록 후에도 계속 된다. 그냥 맡기는 것이 아니라 수업이 있는 날마다 학원으로 전화해 학습진도나 자녀의 학업성취도를 확인한다. 대치동에서 영어강사를 하는 이모(25)씨는 “학원 강사에게 ‘잘 봐달라’며 선물을 하는 엄마도 꽤 많다”고 귀띔했다.

    오후 8시경 E어학원에서 학원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5∼6명의 학생들에게 “수업이 재미있냐”고 물었더니 대뜸 “사탕을 줘서 좋아요”라고 대답한다. 주로 팀워크 활동을 많이 하는데, 잘하는 팀에는 사탕이나 초콜릿 등을 상으로 준다는 것. 이 중 한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인데 4학년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다고 한다. 유치원 때부터 이 학원 CHESS 코스를 들었다는 아이는 “언니, 오빠들과 함께 듣는 반에서도 잘하는 편”이라며 싱글벙글 웃었다. 학원 관계자는 “기본 CHESS 코스만 마치면 중학교 3학년 이상의 영어 실력을 갖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초등 토익, 초등 토플, 미국 초등교과 과정, CNN 청취, SSAT(미국의 사립 중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요구되는 시험) 준비반도 초등학생들에게 열려 있다. 열성파 아이들은 기본 CHESS 코스에 이 과정들 중 하나를 추가한다고 한다.

    프리랜서 리포터인 박모(32)씨는 최근 강남에 사는 조카에게 영어책을 사줬다가 오히려 ‘무시’를 당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인 조카에게 영어책을 선물했더니 ‘SSAT반에서 다 배웠어. 시시해’라고 말하더군요. 조카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꽤 수준이 있어 보이는 교재를 골랐는 데도 말이죠. 요즘 강남 초등학생들은 고학년만 돼도 자신들이 다른 지역 아이들보다 ‘똑똑하다’는 것을 잘 알고, 그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해요.”

    강남 아이들은 국어, 제2외국어, 역사, 과학이론 및 실험 등 주지 과목은 물론 피아노, 발레, 장구, 성악, 축구, 농구, 스케이트, 수상스키, 승마 등을 배우는 데도 열심이다.

    대치동에 있는 F과학전문학원 실험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 6명이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실험 주제는 “드라이아이스의 원리는 무엇인가”. 1주일에 2시간씩 이론과 실험 수업을 한다는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세 달에 한 번 겨우 실험을 할 수 있어요. 게다가 각 조마다 참가 인원이 많아 조장들만 제대로 실험에 참가할 수 있고요. 하지만 여기서는 배우는 내용 모두 직접 실험할 수 있어요. 무척 흥미롭죠. 또 미리 배우면 학교 실험시간에도 내가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있어 좋고요”라며 매우 만족해했다. “영수 학원도 다니느냐” 물었더니 대다수 아이들이 “당연하죠. 국어도 배워요”라고 대답했다.

    실험과정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개설돼 있고 중학교 진학을 앞둔 5∼6학년 과정이 가장 인기다. 초등학생들만 300여 명이라는 것이 학원측 이야기.

    또 대입에서 면접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토론, 철학 등도 인기를 끌고 있다. 어린이 철학연구소에서 철학 및 토론을 배우고 있다는 초등학교 2학년 강모양의 어머니 송모씨는 “보통 우리들끼리 팀을 짜서 원하는 날짜를 정하면 선생님이 방문해서 철학 및 토론 수업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수업은 1주일에 한번, 1시간 20분 동안 진행된다고.

    어린이 토론 프로그램 ‘주니어 플라톤’에서 7세부터 12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방문 토론 교육을 하고 있는 정모(25)씨는 “아이들이 너무 바빠 조금이라도 늦게 시작하거나 늦게 끝낼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학원이나 과외수업을 13개나 하는 아이도 봤어요(웃음). 초등학교 저학년은 학교수업이 끝난 후 보통 오후 6∼7시까지 학원 수업을 들어요. 5∼6학년의 경우 밤 10시까지 공부하는 것은 기본이고요. 이렇게 촘촘히 스케줄이 짜여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이 어긋나면 큰일나죠.”

    한달 사교육비 100만원 안팎

    이렇게 여러 개 학원을 다니는 아이의 한 달 사교육비는 얼마나 될까. ‘학원이냐’ ‘개인 과외냐’ ‘그룹 레슨이냐’에 따라 교육비가 차이가 나는 까닭에 전체 평균을 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학원 수강료가 보통 과목당 12만원에서 20만원선, 그리고 한 아이가 기본 5∼6개 학원을 다닌다고만 가정해봐도 한 달 사교육비가 100만원 안팎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단순 추정치일 뿐이고 실제로 200만원 이상 사교육비를 쓰는 사람도 강남에는 비일비재하다. 2001년 교육인적자원부 조사에 따르면 서울 강남 지역의 학생 1인당 사교육비가 전국 평균의 2.6배 정도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사교육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방학이라는 특수 상황이 있기 때문.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사는 동민이(10·가명)는 지난 겨울방학 내내 혼자서 놀아야 했다. 친한 친구들이 모두 호주나 뉴질랜드 등지로 영어캠프를 떠났기 때문. “엄마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는 동민이 엄마는 이번 여름방학 때 동민이를 영국으로 영어캠프를 보내기로 했다.

    최근 강남에서는 방학 때 3주 동안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지로 영어캠프를 보내는 것이 대유행이다. 영어캠프는 현지 공립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듣고 외국인 가정에서 ‘홈 스테이’를 하면서 현지 문화도 접하게 하는 프로그램으로 주로 초등학교 3∼4학년생이 많이 참여한다.

    “3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영어가 늘 수 있냐”는 질문에 한 유학원 관계자는 “상당수 아이가 두세 번씩 영어캠프를 다녀오는데, 그러면 확실히 영어가 많이 는다. 또 현지 공립학교에 3개월 이상 전학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학부모들 사이에서 큰 인기”라고 강조했다. 이번 여름방학 때 떠나는 캠프를 신청한 초등학생이 이 유학원만 해도 200명이 넘는다. 단기 전학 프로그램도 현재 수십 명이 신청한 상태. 3주 영어캠프의 비용은 유학원에 내는 것만 400만원 안팎이고 한번 다녀오는 데 600만원은 족히 든다.

    서울 압구정동에 위치한 G초등학교의 이모(50) 교사는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영어 연수를 떠나는 아이도 많다고 지적했다.

    “대다수 영어권 나라들은 6월 중순에 여름학교가 시작해요. 우리나라는 보통 7월 중순에 방학을 하죠. 때문에 외국 여름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방학도 되기 전 외국으로 떠나는 아이가 상당수 있어요. 한 반에 4∼5명은 됩니다. 방학이 시작되면 더 많은 아이가 단기 영어캠프를 떠나죠. 다 합치면 한 반에 50%는 외국에 가는 것 같아요. 영어캠프 보내는 것이 유행처럼 되다 보니까 너도나도 보내는 거죠. 학교 학사 일정까지 무시하고 떠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막을 방법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서울 대치동 B초등학교의 전모(39) 교사는 “방학이 끝나면 영어캠프를 다녀온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벽 같은 것이 생긴다. 특히 부유한 집 아이들은 2∼3번씩 영어캠프를 다녀오는데, 그런 아이들은 개학을 하면 자기들끼리 모여 영어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B초등학교 학부모 오모(41)씨는 “강남에서도 격차는 존재한다. 얼마나 집안이 부유한지, 그리고 엄마가 얼마나 많은 교육정보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이른바 로열층이 형성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이의 나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을 넘어섰을 때 강남권에 진입하는 것은 안 하니만 못하다”고 강조했다. 그냥 이름이 알려진 학원에 대한 정보만 알 수 있지 진짜 좋은 선생님들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한다는 것. 웬만해선 기존 학부모들이 구축한 ‘카르텔’에 낄 수 없기 때문이다.

    “늦어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강남에서 교육을 시켜야 해요. 어중간하게 시작하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죠.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비슷한 수준의 학부모들과 계속 접촉을 해야 인맥을 쌓을 수 있고, 그 인맥에서 좋은 교육 정보를 얻을 수 있거든요. 초등학교 때 어떤 그룹에 속하게 되는지가 중요해요. 그 그룹이 대학입시까지 가기 때문이죠.”

    서울 서초구에 사는 주부 강모(41)씨도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아이가 학급 내의 ‘영재 서클’에 속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고 한다.

    “저희 아이 반에는 다섯 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영재 서클’이 있어요. 2학년 때 그룹이 결성됐는데, 그 아이들 부모들은 자기들끼리만 교육정보를 공유해요. 서초구에는 법조인들이 많이 사는데, 그 아이들 아버지가 모두 검사일 거예요. 그렇게 비슷한 직업을 가진 부모들끼리 모여 자녀들 그룹에게 ‘좋다는’ 과외 선생님을 붙여 그룹과외를 시키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경시대회만 나가면 그 다섯 명이 항상 만점을 받는 걸 보니 참 씁쓸하더라고요.”

    그 다섯 명 아이들은 음악시간에 단소 부르기, 체육 시간에 앞구르기, 미술 시간에 판화 만들기 등의 수업을 하게 되면 이와 관련된 선생님을 불러 미리 그 과제를 접한다고 한다. 초등학교에는 아직 ‘내신’이라는 개념이 없지만 미리 접해본 아이들은 그 과제를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들을 때 자신감을 가지고 임할 수 있다고.

    “그 아이들뿐만이 아니에요. 제 아이가 H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이 학교의 미술 체육 음악만을 전담하는 과외 선생님이 따로 있어요. 학기초에 몇몇 비슷한 아이끼리 팀을 짜서 담당 과외 선생님과 짝을 맺어요. 그리고 1주일에 한 번 정도 레슨을 받죠. 상당히 일반화돼있어요.”

    서울 압구정동에 위치한 어린이 스포츠클럽은 회비만 낸다고 가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1주일에 한 번 1시간20분 정도 기초체육 및 초등체육 수업을 하는 이 클럽의 회원이 되려면 팀을 만들어와야 한다. 학부모들은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아이들끼리 팀을 꾸린 후 클럽을 찾는다. 이럴 경우 달리기, 농구, 배구, 축구 등 일반 체육은 물론 해당 학교, 학년에서 배우는 학교 체육도 미리 접할 수 있다. 한 팀의 인원은 평균 8명 이상이고 회비는 월 8만원 정도 한다. 8명 미만도 팀을 꾸릴 수는 있는데, 대신 회비가 약 2배 가량 비싸진다.

    “엄마들이 원하면 셔틀버스로 아이들을 일일이 집 앞까지 데려다줘요. 주로 압구정초등학교나 청담초등학교 아이가 많이 하는데, 일부는 대치동이나 강북에 있는 사립 초등학교 학생들이 오기도 하죠.” 클럽 관계자의 이야기다.

    현재 500명의 아이가 회원으로 가입돼 있는 어린이 멤버십 클럽 싸이더스 스포츠 리틀즈. 이 클럽 회원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모여 골프, 승마, 수상스키, 산악자전거, 라크로스 등의 레포츠는 물론 영어와 국제 매너, 문화재 답사, 음반 제작 등 다양한 경험을 한다. 연회비는 대략 350만원이지만 매 이벤트마다 일정액의 참가비를 내야 하고 방학 때 열리는 영어캠프에 참가하면 최소 연 1000만원 이상 든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은 편.

    사교육에 짓눌린 ‘강남 특구’ 초등학생 24시

    주말마다 골프, 승마, 라크로스, 산악자전거 등을 즐기게 하는 어린이 스포츠 클럽이 강남 엄마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사진은 본문 내용과 관계 없음).

    싸이더스 스포츠 리틀즈 관계자는 “부모의 대다수가 강남의 40평대 이상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고 법조계, 금융계, 의료계 등에 종사하거나 대기업 오너 이사급, 중소기업의 오너들”이라고 귀띔했다. 또 “다양한 체험활동을 하는 것도 좋지만, 클럽에서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인맥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부모들이 가장 크게 꼽는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어릴 적부터 비슷한 수준의 상류층 아이들과 어울리게 해 ‘그들만의 아주 특별한 이너서클’을 만들게 하는 것이 강남을 찾는 또 다른 이유다.

    그렇다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남식’ 사교육 열풍에 부작용은 없는 걸까.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1학년에게 수학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리고 덧셈, 뺄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수학 지진아’로 분류했다. 분명 초등학교 1학년 정규학교교육과정에는 덧셈과 뺄셈이 들어 있다. 학교에서 배워야 할 내용을 미리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지진아’ 취급을 받은 것.

    강남 일원동에 위치한 대모초등학교의 현모 교사는 “학원 교육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원리가 아닌 공식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초등학교 4학년 수학 교과서에 나온 수열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갸우뚱한 표정을 짓는 거예요. 그러더니 ‘선생님, 왜 그렇게 어렵게 가르쳐주세요? 그냥 공식만 알려주세요’라고 말하더군요. 아이들은 수능을 코앞에 둔 고등학생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원리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공식만 달달 외우며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참 안타까웠어요.”

    3년간 교직을 떠나 있다가 최근 기간제 교사로 교직에 복귀, 강남 I초등학교 6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홍모 교사 역시 “선행학습이 얼마나 공교육 붕괴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수업시간마다 피부로 느낀다”며 한숨을 쉬었다.

    “수학 지도를 하려는데 아이들이 ‘우리가 각자 푸는 거예요?’라고 묻더군요. 미리 학원에서 더 어려운 문제들까지 접한 아이들에게 교과서 수학은 아주 시시한 내용이거든요. ‘설명 필요 없으니까 저희들이 알아서 풀게요’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어요. 그래도 ‘학원에서 배우지 않은 학생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두 명이 손을 들더군요. 그래서 수업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두 아이마저 ‘창피해서 싫다’며 ‘집에서 배워올게요’라고 하는 겁니다. 학교 교육은 학원에서 배운 것을 체크하는 데 불과하더군요.”

    그는 3년 전에 비해서 아이들이 무척 거칠어졌다고 말한다. 뛰어놀 나이에 제대로 놀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스트레스가 많아서인지 말과 행동이 무척 거칠다고.

    똑똑한 엄마, 어긋나는 아이들

    한국아동상담센터에서 가족치료를 담당하는 김성은(40)씨는 “아이들이 우울증이나 지나친 공격성을 보이는 것은 지나친 과외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어릴 적부터 지나치게 사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지능지수는 높을지 몰라도 그 지식을 사용하는 능력은 무척 낮게 나타나요. 응용성, 융통성, 관계파악 등을 거의 못 하거든요. 또 성장기 아이에게는 나이에 맞는 적절한 자극을 줘야 하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필요 이상의 자극을 주니까 소화를 못 시키고 장애를 겪는 거죠.”

    그는 올해 초 상담센터를 찾는 초등학교 2학년인 우경이(가명·서울 강남 도곡동 거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놀 시간이 없을 정도로 빠듯한 과외교육을 받았다는 우경이는 나가 놀려고 하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으며 행동이 느려지는 무기력증 증세로 상담센터를 찾았다.

    “우경이는 지나친 학습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증세를 보인 거였어요. 다행히도 상태가 심하지 않아 공부를 시키지 않고 몇 달만 놀게 해주면 치료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엄마한테 있었죠. ‘공부는 그대로 시키면서 아이의 상태가 좋아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아이에 대한 교육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거죠. 제가 ‘그런 것은 없다. 그냥 쉬게 해야 한다’고 대답하자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1년쯤 지나 만난 우경이는 훨씬 상태가 안 좋아졌고 결국 센터를 다시 찾았죠.”

    김씨는 요즘 강남 엄마들이 너무 ‘똑똑’해서 오히려 아이를 망치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엄마들이 자신이 세워둔 ‘확실한’ 교육관을 웬만한 설득에는 바꾸지 않는다는 것.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강남식 사교육에 길들여진 사람은 오히려 경쟁력이 뒤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의 전효관 부소장이 그 주인공.

    “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아이 스스로 바다를 그리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학습에서는 스스로 동기를 가졌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해요. 최근 강남식 사교육이 아이들에게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게 한다지만 학생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런 교육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창조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지는 못할 겁니다. 나이 들면 ‘과외 선생님’은 없으니까요.”

    두 아이의 엄마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곽희자(42)씨의 이야기는 전부소장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강남의 모 고등학교 학생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어요. 그런데 자유시간 때 아이들이 ‘골든벨’ 퀴즈를 하며 놀았다고 해요(‘도전! 골든벨’은 한 학교의 학생 100명이 50문제에 도전하는 KBS 퀴즈 프로그램이다. 50문제를 모두 맞출 경우 골든벨을 울리게 된다). 즉 텔레비전에서 보던 대로 가만히 앉아 서로 퀴즈를 내고 맞추면서 놀았다는 거죠. 다른 지역에서 온 아이들은 유적지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자연 속에서 뛰놀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등 정말 다양하게 놀았다고 하는데, 그 학교 아이들만 퀴즈 놀이를 했다고 하니…. 이를 칭찬해야 할지 꾸중해야 할지 난감하더라고요.”

    교육 통해 높은 지위 세습

    몇몇 학부모는 사교육에 대한 지나친 투자가 아이로 하여금 제대로 된 경제관념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 급식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1주일에 한 번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를 방문한다는 주부 우모(39)씨는 “먹기 싫은 반찬이 있으면 친구에게 먹어달라고 하면서 보답으로 돈을 주는 아이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또 직장을 다녀 급식 자원봉사를 하지 못하는 학부모들은 ‘아주머니들을 사서’ 학교에 보내더라. 아이나 엄마나 모든 일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데, 참 어이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강남식 사교육, 특히 나이 어린 초등학생에 대한 무리한 사교육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가 속속 나타나고 있지만, 강남 학부모들의 태도는 그다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우선 오늘날 학부모가 학력과 학벌에 따라 삶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한 세대이기 때문에 자녀에게 더 많은 교육기회를 제공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강남 생활권에 들어섰을 정도로 높은 경제적 수준(이는 학력 수준도 함께 의미한다)을 가진 부모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교육을 통해’ 자녀에게 높은 지위를 세습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자가 초등학생이던 20년 전만 해도 동네 놀이터에는 뛰어노는 아이가 매우 많았다. 하지만 요즘 강남 지역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학교를 마친 후 한창 뛰어놀 오후 시간에 학원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취재차 서초구 우면동으로 가던 도중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는 10살 남짓한 아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말이라도 걸어볼 생각으로 아이에게 다가가는데 기자보다 한발 앞서 고급 RV차량이 아이 옆에 멈춰섰다. 엄마인 듯한 30대 중반 여성이 차에서 내려 “학원 늦겠다. 빨리 차에 타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축 처진 어깨로 조용히 차에 오르는 아이의 뒷모습이 무척 안쓰러워 보였다. 그러면서 문득 강남식 사교육을 받는 아이들에게 행복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교육&학술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