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식민통치·집단학살·테러… 피로 얼룩진 분리·독립운동

  • 글: 양승윤 한국외대 교수·동남아학 syyang@hufs.ac.kr

    입력2003-06-24 17:3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다양한 종족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온 군도(群島) 대국 인도네시아에서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종족들과 자바섬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갈등 지역이 바로 동티모르와 아체.
    • 수백 년에 걸친 식민 지배와 내전으로 얼룩진 ‘불행한 땅’의 서글픈 역사를 알아본다.
    식민통치·집단학살·테러… 피로 얼룩진 분리·독립운동
    지난 5월20일 동티모르(East Tim-or)는 독립 1주년을 맞았다. 이 나라가 독립을 위해 투쟁한 나라는 바로 인도네시아. 세계 최대의 천연자원을 보유한 자원부국이자 2억2000만명(2001년 기준)의 인구를 가진 세계 4위의 인구대국이고, 비동맹세계의 지도국이자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강국이다.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Dili)는 인도네시아 발리(Bali)에서 배로 1시간40분 남짓 거리다. 티모르섬은 인도네시아령 서티모르와 구(舊)포르투갈령 동티모르가 동서로 갈려 공존하고 있다. 이 섬은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Jakarta)에서 약 2000㎞ 떨어져 있고 동(東)누사텅가라(Nusa Tenggara Tim-ur)주의 변방에 위치한다.

    티모르섬은 숲으로 뒤덮인 산과 넓은 구릉이 줄지어 있는 전형적인 열대 사바나 지역이다. 호주와 가까운 이 섬은 호주 내륙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사막 열풍의 영향을 받는다. 건기 때는 너무 건조해 섬 전체가 흙먼지로 자욱하고 더위와 갈증에 지쳐 죽는 가축들이 생길 정도다. 실제로 딜리에서 라우템(Lautem)에 이르는 동티모르 북부 해변가에는 그 흔한 갈매기가 발견되지 않는데, 수온이 너무 높아 물고기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기 때는 습한 바람이 서쪽으로부터 불어와 곳곳에 홍수가 진다. 따라서 티모르섬은 전체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다른 도서지방에 비해 농업이나 목축업 등이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다.

    400년 이상 포르투갈의 식민지배 받아

    서구 열강이 티모르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은 17세기 중반이었다. 그 선두주자는 포르투갈. 티모르섬이 위치한 말루쿠 군도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문화적 영향력을 미쳐 가톨릭을 정착시켰다. 지난 1996년 인도네시아 공보성은 동티모르 인구 81만명 중 가톨릭 교도가 91.4%, 기독교 2.6%, 이슬람 1.7%라고 기록하고 있다.



    포르투갈 식민통치 시대 티모르섬이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백단향(白檀香: Sandalwood)의 주요 산지였기 때문이다. 백단향은 가구와 악기, 각종 장식품을 만드는 목재로 사용됐다. 특히 짙은 향기가 나는 뿌리 부분은 향료 조각 세공품을 만드는 데 쓰였다. 백단향은 성질이 따뜻해 가슴앓이, 배앓이, 곽란 등을 다스리는 약재로서 효능이 있다. 17세기 이후 동남아로 진출하는 유럽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향료무역을 독점하는 것이었는데, 향료무역의 으뜸 상품이었던 백단향의 주산지가 바로 티모르였다.

    이를 둘러싼 다툼 끝에 1913년 티모르는 동(포르투갈령)과 서(네덜란드령)로 갈리게 됐다. 그 후 서티모르는 1949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완전 독립하면서 인도네시아령으로 귀속됐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이래 400년 이상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아온 동티모르는 사정이 훨씬 복잡했다. 포르투갈은 동티모르를 독립시키기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가톨릭계 선교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층이 1974년 민족주의 정치세력, 독립운동의 주체로 발전했다.

    동티모르인들은 1975년 포르투갈 정부가 공식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자 제각기 정당을 형성하여 정부 주도권 쟁탈전에 돌입했다. 인도네시아와 합병을 주장한 티모르대중민주협회(APODETI)와 포르투갈과 연방을 결성하되 가까운 장래에 독립을 주장한 티모르민주동맹(UDT),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한 가톨릭계 엘리트 집단인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 등 3개 세력이 독립의 방법과 시기 및 내용 등을 둘러싸고 내전을 벌였다.

    짧지만 격렬한 내전에서 승리한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은 1975년 11월28일 동티모르인민민주공화국 성립을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 해 12월 현지에 잔류해 있던 친(親)인도네시아 성향의 티모르대중민주협회로 하여금 의용군을 조직해 동티모르에 투입하도록 사주했다. 의용군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인도네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인도네시아는 특전사부대를 동원해 동티모르를 침공, 평정한 후 괴뢰정권을 세웠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77년 괴뢰정권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변경하고 자국령임을 선포했다.

    저항운동을 했던 동티모르 원주민들은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참혹하게 희생됐다. 전투기들이 툭하면 민간마을을 폭격했고, 게릴라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살해했다. 의심이 가는 원주민들은 집단수용소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10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당시 인구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소탕작전으로 게릴라 세력은 현저하게 약화됐으며, 일부는 호주와 포르투갈 등 해외에서 동티모르 독립 쟁취 활동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저항조직인 모베레민족항쟁협회(CNRM)는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의 망명지도자들이 집결해 결성한 것이다.

    식민통치·집단학살·테러… 피로 얼룩진 분리·독립운동

    동티모르 초대 대통령이 국가 수장으로는 처음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동티모르 강제합병에 대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 민중들의 염원이 이뤄지고 탈식민지화 과정이 완결된 사건이며, 민주주의 체제에 따른 티모르 민중들의 자결권 행사였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유엔과 대다수 국가들은 “동티모르 합병을 1945년 이후 국제법을 위반한 가장 명백하고도 폭력적인 영토확장이며 국제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유엔 통제하에서 현지 조사를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사회의 법적 도덕적 비난에 대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내문제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고 일축하고 “합병은 이미 완료된 것으로 돌이킬 수 없다”고 못박았다. 동티모르 문제에 대한 초기 국제사회의 시각은 대략 세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 동티모르의 자결권 주장에 동조하는 시각이다. 동티모르처럼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 앙골라, 키프로스 같은 나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인도네시아와 정치·경제적으로 친밀한 아세안(ASEAN) 회원국들이나 일본, 호주, 그리고 이슬람권 국가들은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동티모르의 독립에 반대했다. 미국도 인도네시아의 대(對) 동티모르 군사작전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한 바 있다.

    마지막 부류는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은 유엔에서 동티모르의 자결권을 놓고 표결할 때마다 기권했다. 이는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지배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과 다름없었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합병은 한번도 국제사회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1975년 동티모르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결의안이 유엔총회에 상정돼 77개 회원국이 찬성, 통과됐다. 1978년과 1980년에도 각각 같은 내용의 결의안이 67표와 58표로 가결된 바 있다. 이처럼 유엔은 동티모르 합병은 인도네시아의 침략행위라고 규정하고 수 차례에 걸쳐서 동티모르 자치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인도네시아가 유엔의 결의를 무시하고 강압통치를 계속해왔고, 대다수 나라들도 비동맹운동의 지도국인 인도네시아의 비위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티모르 문제는 유엔 총회에서 자치권 부여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지지하는국가가 계속 줄어들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묻혀 국제사회에서 철저하게 외면됐다. 1982년 이후에는 유엔총회의 의제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독립선언 당시 동티모르 원주민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이 급진적인 사회주의 성향을 나타냈기 때문에 서방세계로부터 외면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의 중심세력이 마오쩌둥(毛澤東) 노선을 표방하는 급진 세력이어서 호의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구스마오 지도자로 부각

    1980년대 동티모르의 독립 움직임은 명분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인도네시아는 국제 인권단체나 서방 언론인들의 동티모르 접근을 철저히 봉쇄했고 동티모르는 점차 고립되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1989년 동티모르 독립투쟁에 활력을 불어넣는 조치를 취하고 만다. 기존의 봉쇄정책을 바꿔 새로운 정착민과 투자가, 그리고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동티모르를 개방한 것. 동티모르 통치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티모르 방문을 허용했고 이듬해에는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대사가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를 방문했다. 이들의 방문은 독립을 갈망하는 동티모르인들의 의지가 전세계에 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특히 1991년 11월12일 대인도네시아 항쟁으로 숨진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한 후 시위중인 군중에게 인도네시아 보안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약 200명이 사망한 ‘산타 크루즈(Santa Cruz) 묘지 대학살 사건’ 이후 동티모르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총격 장면이 당시 현장에 있던 영국의 방송기자 비디오 카메라에 담겨 전세계에 보도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그동안 인도네시아를 지원해온 많은 국가들이 입장을 바꿨다. 특히 미국의 정책이 크게 변화했다. 1992년 미국 의회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국제군사교육프로그램 원조 230만달러의 공여를 철회하도록 결의했다.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UNCHR)에서도 미국은 인도네시아를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고, 10년 만에 인도네시아를 비난하는 결의안이 다시 통과했다. 이는 동티모르의 문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결의안은 산타 크루즈 사건을 포함한 전반적인 인권유린 상황을 조사할 특별조사단을 동티모르에 파견, 그 결과를 1994년 유엔인권위원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이에 유엔 사무총장 주재로 동티모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 간 회담이 성사됐다. 동티모르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공식화된 것이다. 1994년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Bogor)에서 열렸던 제2차 APEC 정상회담 때 29명의 동티모르 대학생들이 자카르타 주재 미국대사관을 월담해 독립을 요구했다. 또 1996년 동티모르 독립지도자인 호르타(Horta)와 가톨릭 주교 벨로(Bello)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동티모르 문제는 다시 한번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때부터 이들과 함께 현재 동티모르 초대 대통령인 호세 알렉산더 구스마오(Jose Alexander Gusmao)가 지도자로 부각됐다. 구스마오 대통령은 가톨릭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오랫동안 교직생활을 해온 온건한 인물로 1979년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인도네시아 정부에 무력 항쟁하면서 민중지도자로 떠올랐다. 1992년 체포되어 20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99년 9월 유엔과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석방됐다. 스스로가 무력 저항운동을 했음에도 구스마오는 수감중 동티모르인들에게 비폭력과 무저항을 통한 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자치파 민병대, 무차별 학살 자행

    1998년에 들어서면서 정황은 독립을 열망하는 동티모르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97년 경제위기에 따른 반(反)정부 시위가 점차 격화되면서 1967년 이래 인도네시아를 통치해 온 수하르토 대통령이 1998년 5월 전격 사임하고 하비비 잠정정부가 등장한 것. 이후 동티모르의 독립투쟁이 본격화했다. 국제사회는 ‘IMF카드’를 십분 활용하여 외환위기에 처해 있는 하비비 정부에 다각도로 ‘동티모르 독립을 허용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하비비 정부는 1999년 5월5일 동티모르 주민투표에 의한 독립허용이라는 유엔 방식에 전격 동의했다. 그해 8월8일로 예정되었던 주민투표는 하비비 정부의 방관 하에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원하는 자치파 민병대들이 조직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8월22일로 1차 연기됐다. 독립파와 자치파의 충돌로 동티모르의 정황이 크게 악화되자, 유엔 주도의 주민투표는 또 한번 연기됐다. 결국 8월30일 국내외 거주 만 17세 이상 동티모르인 유권자의 98.5%에 해당하는 45만명이 투표에 참가했다. 결과는 78.5%가 분리·독립에 찬성.

    주민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독립에 반대해온 자치파 민병대들의 무차별한 학살이 자행됐다. 이들 민병대는 동·서티모르 국경에 산재되어 있는 소수의 티모르인들과 다수의 외래인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 정부의 정책적 특혜를 받아 동티모르의 경제력을 장악한 티모르인과 자바나 수마트라 같은 대도시 주변의 부랑자였다가 군부에 의해서 강제 이주당한 인도네시아인들이었다. 또 인도네시아령인 서티모르 국경에 살면서 경제적 혜택을 받아온 일부 종족들도 민병대에 포함돼 있었다.

    이렇게 독립파와 자치파는 확연하게 다른 배경과 목적 때문에 한동안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전개했다.

    분리·독립을 반대하는 자치파 민병대의 동티모르 주민 학살이 극에 달하자 유엔은 9월13일 7500명 규모의 다국적 평화유지군 파견을 결정했다. 우리나라의 상록수부대를 포함, 총 13개 유엔회원국이 참여한 다국적군의 주력부대는 호주가 맡았다. 유엔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0월25일 동티모르 독립을 위한 유엔동티모르과도행정기구(UNTAET) 설립을 승인하고 세르지오 비에이라 드 멜로(Sergio Vieira de Mello) 인도주의지원담당 유엔 사무차장을 수반에 임명했다.

    이같은 결의에 따라 유엔동티모르과도행정기구는 동티모르가 완전 독립할 때까지 2∼3년간 인프라 시설 건설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입법 행정 사법권을 행사하게 됐다. 1차 활동 시한은 2001년 1월31일로 연장이 가능했다. 또 군병력 8950명, 군사고문단 200명, 경찰 1640명 등으로 구성된 유엔평화유지군이 치안유지를 맡았다가 1999년 9월 호주 주도의 다국적군으로 대체했다. 동티모르 내에서도 총선거와 정부구성, 나아가서 대통령선거와 같은 빡빡한 정치 일정이 진행됐다. 그리고 동티모르는 2002년 5월20일 21세기 최초의 독립국으로 국제사회에 등장하게 됐다.

    이처럼 동티모르 분리·독립운동이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독립’이라는 성과를 일궈내자 인도네시아 군도의 여러 지역에서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실제로 수하르토 군사정부 말기의 강력한 탄압정치에도 불구하고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지역들이 증가했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1945년부터 1957년까지 독자적인 정부를 가졌거나 분리·독립을 시도했던 곳이었다.

    인도네시아는 1948년에 총 6개 자치국과 9개 자치지역으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 형태를 경험했다.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방식에 따른 공화제를 택한 초기 인도네시아는 지역·종교·종족별 추구 이익 형태에 따라 지역과 종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연방제 국가였던 것. 하지만 자바 중심의 중앙집권화 움직임이 일자 다른 지역들이 이에 반발, 무력투쟁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지역은 수마트라와 말루쿠 군도였다. 수마트라에서는 자바섬 중심주의와 자카르타 중앙정부의 포괄적이며 온건한 이슬람 정책에 반대하여 이슬람 국가운동의 일환으로 반기를 들었고, 반면 기독교 문화권인 말루쿠 군도에서는 중앙정부의 이슬람 성향에 반발했다.

    식민통치·집단학살·테러… 피로 얼룩진 분리·독립운동
    1950년 말루쿠 군도의 중심 도서인 암본(Ambon)에서는 남(南)말루쿠공화국이 선포되어 무역 충돌이 벌어졌으며, 1953년 아체에서는 이슬람원리주의자 다우드(M. Daud)를 중심으로 이슬람국가를 지향하는 대대적인 이슬람운동이 전개됐다. 지역 군벌(軍閥)들의 투쟁도 잇따랐다. 1956년 북부 수마트라를 중심으로 심볼론(Simbolon) 중령은 군사평의회를 설치하고 지방자치제를 도입하는 등 개혁정치를 단행했으며, 1957년에는 남부 술라웨시에서 사무엘(V. Samuel) 중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말루쿠 군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1958년에는 남부 수마트라에 혁명정부(PRRI)가 수립돼 3년간 존속하기도 했다.

    가장 오랜 분리주의 운동의 역사를 가진 지역은 바로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Aceh)다. 아체는 정치적으로 이슬람 원리주의 색깔이 선명하며, 확실한 경제적 배경을 갖춘 지역으로 인도네시아 영토의 3%에 해당하는 5만5392㎢의 면적에 400만(2000년 기준) 인구가 집중돼 있다.

    26년간 분리·독립 문제로 유혈분쟁을 겪은 아체에 평화정착을 위한 국제사회의 시도가 최근 다시 무산됐다. 2002년 12월 인도네시아 정부와 아체독립운동조직(GAM)이 체결한 평화협정이 4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무력충돌로 비화되었기 때문. 인도네시아 메가와티(Megawati) 대통령은 2003년 5월19일 아체 반군 점령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정부군이 이들을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이번 군사작전은 전날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정부측과 아체독립운동조직 간의 협상이 결렬되자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전격 단행됐다.

    동남아 이슬람의 메카

    바타크(Batak)족 말레이(Malay)족 미낭카바우(Minangkabau)족과 함께 수마트라의 4대 종족을 형성하고 있는 아체족은 독립심과 자존심이 강한 민족으로 일찍부터 독립왕국을 이뤄왔다. 이들은 네덜란드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1873년부터 1942년까지 처절한 무장항쟁을 벌인 주역이었다. 그러나 아체족의 독립은 냉전체제가 굳어진 신 국제질서에 의해 좌절됐다. 1949년 미국 중재로 이루어진 원탁회의는 과거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관장했던 모든 영토에 대해 수카르노(Soekarno)가 주도하는 당시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가 통치한다는 데 동의했다. 아체는 자동적으로 인도네시아령으로 귀속됐다. 당시 아체족들은 “아체 왕국은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대에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소유였거나 그들의 완전한 식민지가 아니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묵살됐다.

    그 후 자바섬 중심으로 형성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정부는 정부군을 파견해 아체의 항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아체족들은 이를 네덜란드에 이은 외세(外勢)의 침공으로 인식했다. 아체의 무력항쟁은 1953년부터 이슬람국가를 지향하는 다룰 이슬람(Darul Islam) 운동으로 비화되어 독립투쟁으로 이어졌다. 1959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결국 아체를 특별자치지역(DI: Daerah Isti-mewa)으로 격상시켜 종교, 교육, 문화분야 등 비정치적, 비경제적 분야에 한해 자치권을 인정했다.

    동남아 이슬람의 메카로 널리 알려진 아체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 인도네시아에서도 가장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인 곳으로 정교일치(政敎一致)와 신법(이슬람법) 통치국가에 대한 열망이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사실 인도네시아는 판자실라(Pancas ila)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다. 국가의 통일과 국민통합을 목표로 한 포괄적이며 느슨한 이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최고신(神)에 대한 신앙이다. 즉 전체 인구의 88%(2001년 기준)가 무슬림이 염원하는 유일신 알라(Allah)가 아니라 모든 인도네시아 국민을 포용하는 세속화된 신을 말한다. 원리주의 이슬람을 신봉하는 아체족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수하르토 통치시기에 이슬람계 정당의 정치적 역할을 최소화하고 이슬람 정책을 세속화한 것은 아체족으로 하여금 독립 이외의 대안이 없다는 확신에 이르게 했다.

    또 아체는 16세기 이래로 무역왕국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아체 최북단 웨(We)섬의 사방(Sabang)은 유럽시장으로 향하는 후추와 향료 무역의 중간 거점항구로, 이곳을 통하여 양질의 아체산(産) 쌀이 많이 수출됐다. 그리고 1888년부터 이곳에서 쏟아져나온 원유와 천연가스는 20세기 초 인도네시아 경제와 산업구조 변화에 결정적인 몫을 했다. 이는 아체족이 독립을 염원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다.

    아체에서 생산되는 원유와 천연가스는 오늘날 인도네시아 경제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아체의 록스마웨(Lhokseumawe)는 세계 최대의 천연액화가스(LNG) 생산지대로 미국의 모빌사와 인도네시아 정부가 합작해서 만든 아룬(Arun) 유전이 있다. 이 유전의 수익금은 인도네시아 연간 예산의 13%(2000년 기준)를 충당할 만큼 거대하다. 그러나 아체 주정부로 돌아오는 할당액은 기여액의 10% 미만. 아체족들은 “아체의 자원 수출로 자바섬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만 이익을 보고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인 갈등도 매우 심각하다. 아체족들은 인도네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독점하고 있는 자바족들로 인해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 자바족들은 자바 출신만이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실제로 인도네시아는 대통령뿐 아니라 정부의 고위관리나 군부의 지도자 대다수가 자바섬 출신이다. 따라서 아체에 대한 중앙정부의 정책이 아체나 아체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바와 자바족들을 위한 변방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즉 독립 후 자바족에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고 이용만 당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식민지 시절에 벌인 독립투쟁의 의미는 왜곡, 축소되고 경제적 역할은 도외시돼 자신들의 역할과 업적에 비해 너무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확신한다.

    또 중앙정부가 수마트라 여러 지역을 대상으로 실행한 이주정책이 아체족들의 반발을 증폭시켰다. 그들은 자바섬 인구 조밀지역의 주민들을 수마트라섬으로 이주시킨 것은 마치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이나 티베트에 중국인들을 대거 이주시킨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 초 전개된 이슬람국가운동에 참여했던 하산 무하마드 티로(Hasan M. Tiro)는 아체의 분리·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올해 79세인 그는 스웨덴으로 망명해 시민권을 취득한 지금도 후방에서 아체 분리·독립운동을 지휘하고 있다. 티로와 그의 추종자들은 처음에는 중앙정부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투쟁했다. 하지만 인원과 장비의 부족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의 투쟁이 아체독립운동의 모체가 된다.

    1976년 아체족들은 무장독립단체인 아체독립운동조직을 만들어 본격적인 투쟁에 나섰다. 이들의 투쟁에는 외세를 배격하는 이슬람 교리가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1980년 5월 수하르토는 아체 전지역을 군사작전지역(DOM)으로 선포하고(1998년 8월 해제) 폭압적으로 무장투쟁 세력을 진압했다. 하지만 아체독립운동조직을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다. 아체 지역은 험한 산지와 밀림으로 이뤄져 있어 게릴라전을 수행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 또 농사와 사냥을 병행해온 아체족이 신체적, 성격적으로 강인하고 거친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식민통치·집단학살·테러… 피로 얼룩진 분리·독립운동

    지난 5월22일 인도네시아군의 대규모 기습작전에서 포로로 잡힌 아체 주민들

    국제 NGO 단체들은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인도네시아군의 작전으로 최소한 2000명의 아체 주민이 학살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하르토 군사정부는 아체의 분리·독립운동을 강력하게 진압해왔다. 이같은 정책은 하비비 잠정정권 시기까지 이어졌고, 아체독립운동조직의 무장단체인 아체머르데카(Aceh Merdeka) 게릴라 외에도 많은 주민들이 피살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체독립운동조직도 전투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인도네시아군의 고위 당국자는 “2002년 말 현재 아체머르데카는 최소한 5000명의 무장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아체독립운동조직이 아룬 유전을 점거해 천연가스 생산을 한동안 중단시킨 적도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아체의 무장투쟁이 구식무기로 무장했던 동티모르의 경우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02년 한해 동안에만 아체 지역의 테러로 12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인도네시아 정부와 아체독립운동조직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고 2002년 12월9일 인도네시아 정부와 아체독립운동조직 대표들이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합의한 주요 내용은 적대관계 청산, 아체독립운동조직의 무장해제, 정부군의 아체로부터 철수, 자치선거를 통한 새로운 아체 주정부의 구성, 아체 지역에 유엔 감독관 파견 등으로 요약된다.

    평화협정 합의에는 무엇보다도 인도네시아 문민정부의 유화정책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와히드 대통령과 메가와티 대통령 정부가 정치적 타협과 대화를 강조하면서 아체에 특별자치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편 것. 메가와티 정부는 2001년 8월 아체주의 명칭을 이슬람 식으로 개칭하여 낭그루 아체 다루살람(Nanggroe Aceh Darussalam)으로 변경했다. 뿐만 아니라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의 75%를 아체 주정부에 넘겨주고 이슬람법 시행을 허용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특별자치법안을 승인했다.

    하지만 아체의 평화유지에 가장 큰 변수는 자치 허용의 범위이다. 아체는 완전한 분리·독립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는 제한적 자치만을 허용하겠다는 기존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또 다른 변수는 군부의 강경파들이 대화를 통한 아체 문제 해결방식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 오랜 내전 중 무기와 기타 생필품 밀무역으로 엄청난 이익을 취했던 아체의 무장군벌들이 기득권 축소에 대해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아체독립운동조직의 무장해제도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이런 불씨를 안고 있었던 평화협정은 4개월 만에 파국에 이른다. 올해 4월 결국 유혈분쟁이 재연된 것. 이와 관련해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는 아체독립운동조직이 평화협정을 위반한 채 분리·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아체독립운동조직 역시 정부가 불법 군사행동으로 아체머르데카를 무력화하려 한다고 반발했다. 또 분리·독립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아체독립운동조직의 강경파 세력들이 중앙정부의 억압정책을 유도하면서 국제여론을 십분 활용해 동티모르식 독립을 추구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지난 5월17일 일본 도쿄에서 평화협상이 재개됐지만 이틀 만에 결렬되고 결국 평화협정은 파기됐다. 이에 인도네시아 정부군은 5월19일 새벽 아체독립운동조직 진지에 미사일 공격을 시작했고 대규모 기습작전에 돌입했다. 수타르토(E. Soetarto) 인도네시아군 총사령관은 “이번 작전의 목표가 5000명으로 추산되는 반군을 완전히 소탕하는 것”이라며 “1975년 동티모르 침공 이래 최대 규모의 인도네시아군 합동작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인도네시아에서 아체의 위치는 동티모르와 매우 다르다. 한마디로 “아체 없는 인도네시아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나라 정치집단과 군부의 일치된 견해이다. 동티모르는 1970년대 중반 석유로 인해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리던 인도네시아 군부가 정치적 포만감을 만끽하기 위해서 강제 합병했다. 즉 경제적으로 전혀 쓸모가 없는 이곳을 20여 년간 먹여살리다가 독립시키라는 국제사회 여론이 들끓자 떼어버린 정도로 여기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치학자인 이흐라술 아말(Ichlasul Amal)은 “어떤 성향의 중앙정부도 아체를 인도네시아 영토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아체와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의 갈등과 힘 겨루기는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아체와 중앙정부의 갈등은 현재 종교문제로 분리주의 갈등을 겪고 있는 말루쿠 군도의 암본이나, 문민정부 이후 경제적인 이유로 지역주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파푸아(Papua) 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동티모르 독립에 큰 역할을 했던 국제사회도 인도네시아의 국제적 비중과 아체의 분리·독립이 가져올 파급효과를 고려하면서 갈등을 묵시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분명 다양성의 나라이다. 2억2000만의 인구를 가진 이 나라는 192만㎢의 국토가 1만7508개 도서에 펼쳐져 있는 세계 최대의 군도 대국이다. 적도를 중심으로 동서로 5200㎞, 남북으로 1900㎞에 걸쳐 길고 넓게 분포해 있다. 국토와 내해(內海)를 합치면 800만㎢가 되는 영토 대국이기도 하다. 300여 종족이 600여 종류에 가까운 지역언어를 구사하며 독자적이고 독립적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따라서 인도네시아는 처음부터 분리주의 토양 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고, 그만큼 종족간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아체를 비롯한 인도네시아 군도의 여러 지역에서 분리·독립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종족간 갈등으로, 또는 중앙정부의 미온적 정책 집행으로 야기되는 온갖 반민주적·반인권적 폭압행위를 자국의 이익에 반(反)한다는 이유로 ‘그들간의 갈등’이라고 외면하는 현재 국제사회의 태도가 과연 올바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