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세대차 벽 허문 부녀간의 영어 편지

  • 글: 이인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입력2003-06-26 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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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평생 조흥은행에 근무하셨던 아버지는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 귀가하셨다. 어쩌다 집에서 쉬는 날이면 우리와 놀아주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 어릴 적에 배우셨다는 한문을 소리내어 읊으시곤 했다.
    • 그러한 아버지는 신비롭고 범접하기 어려운 분으로 느껴졌다.
    •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어렵게 부탁의 말씀을 꺼내셨다….
    세대차  벽  허문 부녀간의 영어 편지

    ‘솔베이지의 노래’와 ‘모닝 무드’를 작곡한 그리그의 고향 노르웨이의 베르겐을 방문한 이인호 이사장과 부모님 그리고 동생(오른쪽부터). 젊은 시절 이 이사장은 아버지와 영어로 쓴 편지를 주고받았다.

    지난 해 크리스마스 이틀 전, 아버지가 내 방엘 찾아오셨다. 우리집에 와 계실 때에도 없던 일이었다. “오늘은 네게 특별히 부탁할 일이 있다.” 마치 어려운 청탁이라도 하시려는 듯 하도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셔서 나도 좀 긴장이 되었다. “우체국 취미우표 창구에서 나를 도와준 아가씨들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했으면 좋겠는데 화장품이든 뭐든 간단한 선물 세 개만 연말 전에 준비해줄 수 있겠니?” “그럼요. 27일까지는 준비해드릴게요.” 너무도 하잘것없는 일을 그처럼 어렵사리 부탁하시는 아버지께 쉽게 대답을 드렸지만 결국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6일 아침 아버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독서습관 길들여준 아버지의 책 선물

    우리세대 딸들이 대체로 그렇듯 아버지는 내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존재이셨다. 증조부모님까지 한집에서 모시고 살았던 우리의 대가족 구조에서는 어린 아이들의 재롱을 즐기며 그들을 가르치는 일은 어르신들의 특전이었지 젊은 부모들의 몫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주로 증조할머님이나 어머니를 통해 들으셨다. 이따금 빙그레 웃으실 뿐 애정을 직접적으로 표시한다거나 공부를 잘하라느니 어쩌니 하는 교훈조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늘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야 귀가하셨고 어쩌다가 집에서 쉬는 날에는 우리들과 놀아주는 대신 눈을 감고 앉아 어릴 적에 배우셨다는 한문을 소리내어 읊으셔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약간은 신비롭고 범접하기 어려운 분으로 비치기도 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퇴근 시간에 가까운 친구이신 정진숙 선생님의 을유문화사에 들러서 새로 나온 아동문학 책을 한아름씩 가지고 들어오시는 일이었다. 해방 후라 한글로 된 좋은 책이 아주 드물던 시절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하는 소파 방정환의 동화집과 아동 문학, 세계명작을 소재로 한 만화책들은 정말 가뭄의 단비 같았다. 6남매 중 맏이인 나와 바로 아래 두 남동생은 서로 먼저 보겠다고 싸우느라 책을 찢기 일쑤였고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또 새 책을 가져다주시곤 하셨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기 시작한 책에 대한 내 갈증은 무엇이든 한글로 된 것이면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 독서잡식의 습관이 되어 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는 소설이나 야사(野史)류의 책, ‘신천지(新天地)’ 같은 잡지 뒷부분에 실린 연재소설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집어삼키고 드디어 동네 만화가게의 그리 신통치 않은 책들까지 넘보게 되었다. 서울사대부중 입학식 때 아버지께서 내 손을 잡고 데려다주셨는데 입학 선물로 ‘이차돈의 사’를 주셨다. 그런데 내가 그 책을 이미 읽었다는 것을 아시고는 조금 놀라시던 기억이 새롭다.

    평생 한 직장에 봉직한 宗孫

    이제 생각해 보면 해방을 맞이하던 당시(초등학교 3학년) 유창하게 했던 일본어로 책 읽는 능력을 계속 키웠다면 독서에 대한 내 갈증이 조금쯤은 체계잡힌 독서로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사회 전체를 풍미하고 있던 반일 분위기 속에서 나는 해방 전부터 한글을 익혀 해방되면서 곧바로 우리말로 된 책을 읽을 수 있던 몇 안되는 학생이었다는 데 대해 큰 자부심을 느꼈던 한편 초등학교 교과과정의 수준을 뛰어넘는 어른들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눈을 피해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학교 공부를 떠나서 독서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배운 ‘황국신민선서’를 집에 와서 자랑스럽게 외웠을 때 어른들께서 신통해 하면서도 무엇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시던 일, 전쟁에 져 황급히 한국을 떠나는 일본인들이 헐값으로 살림을 처분하니 제발 사달라고 우리 집엘 찾아왔을 때 내가 그처럼 소원하던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르자 아버지께서 “적산은 손 대는 법이 아니다”며 한마디로 거절하시던 일 등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화적 반일주의에 빠져들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나와 바로 아래 두 남동생이 당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면 으레 가는 것으로 알던 경기 대신 사대부중에 진학한 것도 아버지가 경복을, 어머님이 숙명을 나오신 우리 집에 경기는 친일파 자녀들이 가던 곳이라는 약간의 편견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경기여중이 아닌 서울사대부중엘 입학한 것은 내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본래 수줍은 성격 때문에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성적으로는 1등을 하고도 반장 자리는 2등이지만 활발한 친구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내가 남녀공학에 다니게 되면서 남녀 전교생 앞에서 예사로 ‘호령’할 수 있도록 단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1915년 충남 홍성군 홍천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독립투사도 반공투사도 아니셨고 그렇다고 그 시대 많은 지식인들처럼 마르크주의에 심취하셨던 적도 없으신 듯하다. 낙향한 지 오래된 양반집이라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뿌리깊은 남존여비 사상에 젖어 있는 유교 집안에서 종손에 대한 기대와 대우는 유별난 것이어서 어릴 적부터 조용하면서도 총명했던 아버지는 어느 귀공자 못지않은 사랑과 촉망을 받고 자라셨다 한다.

    일찍부터 책을 좋아하셨기 때문인지 그 시골에서 서울의 경복중학교엘 합격할 수 있었고 결혼을 하신 후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대 전신)를 다니셨다. 당시로는 최고의 학벌을 지녔던 셈이지만 아버지는 평생을 조흥은행 한곳에서 봉급 생활자로 일하시며 그것을 만족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기셨고 퇴직한 후로도 아버지의 은행은 그곳이었다.

    내 마음 속의 전지전능한 분

    그렇게 한 우물만 판 덕분인지 아버지는 항상 심리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사시며 우표 수집과 독서 등 조용한 취미를 즐기셨고 겉으로는 자식들에게도 거의 무관심한 듯 보일 정도로 욕심이 없는 분이셨다. 세 아이가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때 어느 자리에서 “요새 대학이 3년이지” 하는 말씀을 하셔서 친구분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시기도 했다.

    그런 욕심 없는 평온한 성격 때문인지 그 분은 그 시대 사람으로는 드물게 굴절이 없는 평탄한 삶을 살다 가셨다.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내면적 야심이나 갈등이 없을 수 있으랴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유달리 평탄한 삶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 한국의 실정에서 어쩌면 그 분의 생애를 오히려 비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식들이 더할 나위 없는 심리적 안정감을 누리며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그러한 생활 철학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아버지의 생애에 단 한 번의 굴곡도 없었던 건 아니다. 6·25 때 우리도 하마터면 아버지를 잃을 뻔했다. 조흥은행 영업부 차장으로 근무하는 35세의 청년으로 이미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있던 아버지는 6·25 전쟁 발발 후 한달 쯤 되었을 때 북으로 강제 이송을 당했다. 다행히 의정부 근처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대열이 흩어지는 바람에 도망쳐서 집으로 숨어들어 오긴 했지만 매일 가택수색이 벌어지는 한달 넘는 기간 동안 마루 밑에 숨어 지내셔야 했다.

    당시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지만 그런 끔찍한 시련과 부산에서의 피란 생활을 겪고 난 뒤에도 부모님을 마치 전지 전능한 존재인 양 믿고 의지하는 내 어린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 작아 보이게 한 미국 유학

    환갑이 훨씬 지나서까지 부모님을 모시는 행운을 지니고 살아온 내가 부모님을 나와 독립된 인격체로 인식하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때 미국 유학을 가게되면서 부터였다. 당시 나는 우연한 계기로 기숙사비를 포함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을 갈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나는 그리도 믿어왔던 아버지의 힘이 실제로는 얼마나 미약한것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내가 입학하게 된 웰즐리대학의 1년 학비와 기숙사비가 1900달러였는데 아버지의 연봉은 그것의 몇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때마침 미국에서 1년간의 은행간부 연수를 마치고 귀국 예정이시던 아버지께서 나를 보스턴 근교의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다. 그리고 얼마간의 용돈을 주셨는데, 이역 멀리 딸을 떼어놓으면서 아버지가 주고 가실 수 있는 돈이란 연수생으로 받은 용돈에서 조금씩 저축하신 몇 백 달러뿐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내가 명문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면서 작별말씀을 하셨다. “나는 네가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미국에서도 잘해낼 수 있으리라 믿고 걱정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 너는 한국의 딸이라는 것만 잊지 말아라.” ‘한국의 딸’이라는 그 한마디는 비수처럼 내 마음에 꽂혔고 나는 처음으로 내 삶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어릴 적 내가 가장 즐겼던 일 중 하나가 아버님의 옛날 앨범과 졸업장, 성적표, 상장 등을 꺼내보는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퍽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안 것은 다른 어떤 경험보다도 사진을 통해서였다. 내 돌 사진에는 ‘Just a Year Old’라고 영어로 써 넣으신 글이 있었고 어머니와 세 식구가 야사쿠라(밤의 벚꽃) 풍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는 사내애처럼 생겨 예쁘지도 않은 나를 아버지께서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안고 계셨다.

    특히 재미있는 사진은 고상(고등상업학교) 시절 아버지가 햄릿 연기를 하시는 장면이었다. 입을 의상이 없어서 체육복을 뒤집어 입고 일본인 연극지도 선생님 부인의 화장품을 훔쳐서 분장을 했다는데 십자가를 목에 건 창백한 얼굴의 아버지는 영락없는 비운의 덴마크 왕자 햄릿이었다. 철이 난 후 나는 일본인이 대다수였던 고상에서 어떻게 한국 학생이 주역을 맡을 수 있었는가 여쭈어 보았더니 대답이 간단했다. 그 연극이 하도 길어서 대사를 전부 외우는 사람이 아버지뿐이었다는 것이다.

    열린 세계 만들어준 아버지의 영어

    셰익스피어 덕분인지 아버지는 외국 유학도 하신 일이 없는데 그 시대 분으로는 드물게 영어를, 그것도 아주 정확한 발음의 고급스런 영어를 하셨다. 핀란드대사로 있을 때 부모님이 한여름 와 계신 일이 있었는데 마침 8·15 축하연 자리에 같이 참여하셔서 귀가 어두우신 데도 여러 나라 대사들과 대화를 나누시며 한몫을 단단히 하셨다.

    젊었을 적 배운 영어를 국제 로타리클럽에 나가시는 것만으로 그대로 유지하신 것을 보면 젊은 시절에 외국어 공부를 제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어를 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동서양의 문화를 고루 접하면서 사셨다는 것을 뜻했다. 문화적으로 개방된 자세를 가진 때문인지 아버지는 당신보다 열 살쯤 아래인 재계 인사들, 옛 은행에 계실 적 젊은 고객들과 잘 어울려 지내셨다. 딸이지만 내가 사회활동을 하는 것을 매우 흐뭇하게 생각하셔서 내가 핀란드대사로 있을 때 한국 여성단체연합에서 주는 ‘올해의 여성상’을 받게 되었을 때 어머니를 제쳐놓고 아버지께서 그 상을 나 대신 받으려 나가셔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그런 한편 아버지는 유교적 가부장제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분이시기도 했다. 아무리 신식 교육을 받았어도 삼강오륜의 가르침이 배있는 집안에서 종손으로 항상 우대를 받으면서 자라난 어릴 적 체험과 교육의 둘레를 깨지는 못하셨던 듯하다.

    정에 있어서는 딸이나 아들, 손과 외손의 구분이 없으셨고 사람을 대하시는 태도에서도 여자라고 없신여긴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이름관리나 재산 분배에서는 출가외인으로 취급받는 딸은 고사하고 아들이나 손자들 사이에서도 차등이 현격했다.

    따라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큰아들이 아닌 다른 아들이나 딸네 집에서 주무시는 일은 안되는 일이라고 고집을 피우시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남녀나 상하를 차별하는 일은 없었다. 예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시고 경우와 분수를 지키는 것을 완전히 내면화하셨던 아버지는 가까운 사람이건, 먼 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윗사람이건 간에 대하는 태도에 자연스러우면서도 정중하게 예를 갖추셨다. 아마도 유일한 예외가 어머님이 아니셨던가 싶다. 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을 본 일이 없고 일 하는 사람에게라도 인정 없이 대하시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당신이 마련해주신 집에 큰아들네와 함께 사시면서도 은행 전무까지 지낸 아들네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보태려고 고집하셨고 장성한 손자들이 식사대접을 해드려도 자신이 애들에게 사줄 일이 있을 때가 오히려 더 기뻤다고 어머니께 말씀하시는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나는 여성운동에 동조하면서도 한국사회에서 그 한계가 무엇인가를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겐 6·25 때 북으로 끌려가다 도망치신 것 외에는 별다른 큰 시련이 없었다. 6남매 자식과 17명의 손자 중 하나도 잘못된 사람이 없고 모두가 아버님 할아버님 하면 싫다는 사람이 없이 자랑스러워 하는 상황에서 88세에 하루 눕지도 않고 자는 듯 가셨으니 지극히 다복하셨던 분이라고 하겠다. 운명을 잘 타고나셨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운 때문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가 당신의 일생을 통해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가장 소중한 교훈은 ‘욕심 없이 한 우물을 파고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분인들 왜 야심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광복 후 일본계 은행에 윗자리가 많이 비어 승진의 기회가 많았을 때도 아버지는 일제시대부터 민족자본의 힘으로 운영되어왔기 때문에 간부진이 조선인이어서 인사 적체가 심했던 동일은행(후의 조흥은행)을 떠나지 않으셨다.

    1971년 유신전야에 전무이사직에 내정되셨다가 갑작스레 정권의 개입으로 간부진 전원이 퇴직해야 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 2년이 지나지 않아 신임 은행장들이 줄줄이 감옥행을 하게 되자 그때의 일괄사퇴는 전화위복임이었음이 드러났다.

    아버지에게 한가지 또 놀라운 일은 일생을 은행에서 일하신 분이지만 개인의 자산운용에서는 이자의 개념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사셨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금전적으로 손해 본 것이 제법 많았고 자식들이 그 때문에 속상해하기도 했지만 아마 그분이 지켜내려 했던 것은 재산보다 훨씬 중요한 어떤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모두 이윤관계로 변질되는 것을 그분은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모만한 자식은 없다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과의 교신은 항상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편지 쓰시는 일이 없었다. 사실 우리말 자체가 세대간의 솔직한 의사소통이나 감정의 교류를 거의 불가능하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나는 집을 떠나면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 생기기 시작한 듯한 의사소통의 벽을 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 긴 보고 형식의 편지를 영어로 써 보냄으로써 그 일을 해냈다.

    아버지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당신께서는 그런 솔직한 대화를 당신의 아버지와 나누어보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이라면서 장문의 답신을 역시 영어로 보내주셨다. 단 한 번의 영어 편지 교환이었지만 그 일로 단순히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신뢰와 존경의 관계가 나와 아버지 사이에 단단히 다져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추리는 과정에서 나는 우체국 취미우표 담당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아마 강남에서 일월우체국으로 옮겨간 모양이었다.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작은 선물을 준비해 찾아갔더니 너무도 좋은 분이셨다며 몹시 애석해하는 것이었다. 한 보름쯤 지나 이번에는 그 아가씨가 초콜릿과 과자를 내게 보내왔다.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순수한 인간 교류가 이처럼 이어지는 걸 보면 아버지께서 완전히 가신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까지 그 관계를 다시 이어나가는 다음 행동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 부모만한 자식이 없다는 말의 진실을 또 한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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