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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 ③

한·러·중 국경지역 한인마을들

집은 크고 튼튼하며 마당엔 잘 자란 가축이 놀고

  • 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한·러·중 국경지역 한인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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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이 방문했을 당시 120가구 600명이 살았던 자레치예 마을은 ‘집들이 잘 지어졌고 풍부한 물화로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주민 600명 가운데 450명이 러시아정교로 개종했다. 자레치예 마을의 주민수는 1914년 일제당국의 조사에는 350명으로 되어 있지만, 1906~07년경 조사한 러시아측의 조사에는 102가구(입적 138가구, 비입적 22가구) 822명(입적 684명, 비입적 138명)으로 돼 있다.

자레치예 마을 외에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마을들은 신천(Sincheni), 향산동(香山洞 또는 香山社), 박석골(Paksekori, 朴石洞), 금당촌(金堂村), 토본가이만가의 토본가이(Tobongai), 타게르치(Tagerty), 탈미 호수[(Ozer Tal’mi, 현재의 프치치예 호수(Ozer Ptich’e)]가의 베르흐네 탈미(Verkhne Tal’mi, 上月峰), 니즈네예 탈미(Nizhnee Tal’mi, 下月峰), 카체기(Kachegi), 칼레발라만[(Bukhta Kalevala, 현재의 시부치에야만(Bukhta Sibuch’ia)]가의 타우토이(Tautoi)와 침부다기(Chimbudagi), 니윤디프치호수(Ozer Niundypty)가의 니윤디프치 등이다.

이들 마을은 대개 호수와 늪, 그리고 작은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이 지역을 답사했던 러시아 지리학자들은 크라베섬에서 포시에트항구로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왼쪽을 내려다보면 자레치예의 집들이 마치 물 속에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자레치예 주변에 크고 작은 호수, 개천과 늪들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마을 가운데 향산동은 후일 한인사회의 부호가 되는 최봉준(崔鳳俊)이 1875년에 개척한 마을이다. 이로부터 20년 후인 1895년, 최봉준의 의형제이기도 한 한인사회의 원로 최재형의 주선으로 러시아정교교당과 학교가 향산동에 세워졌다.

1895년에 작성된 러시아측 기록을 보면 당시 자레치예에는 블라고베첸스크의 2급 신학교를 졸업한 유진율(니콜라이 유가이)씨가 교사로 26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자레치예는 11개 마을을 총칭한 것이고 실제 학교가 있던 곳은 바로 향산동이었다. 이후 러시아문무성의 인가를 받은 이 학교는 성장을 거듭해 1914년에는 교사 2명에 학생수가 75명으로 늘어났다.



비숍은 자레치예를 비롯한 국경지대 한인마을들은 생활조건이 윤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이 지역 한인이주자들의 생활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한인마을들은 3~4마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 이들 마을들의 특징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풍요(prosperity)라고 말할 수 있다. 집들은 크고 튼튼하게 지어졌으며 농가의 마당에는 잘 자란 가축들이 있다. 주민들과 아이들은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며 농토는 제대로 경작되고 있다.”

비숍의 이런 관찰은 러시아 학자들의 기록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러시아 학자들은 비숍의 지적과 달리 자레치예 마을의 한인농민들이 그다지 부유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옅은 흑토층의 모래가 많은 토양이라서 수확량이 많지 않았다는 것. 학자들은 이 지역 한인농민들은 수이푼 지방의 한인농민들에 비해 소득이 형편없었다고 분석했다. 같은 한인마을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비숍이 자레치예를 조선 국내의 농촌과 비교했던 데 비해, 러시아 학자들은 수이푼의 한층 부유했던 한인농민들과 비교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3국이 만나는 요충지 핫산지역

오늘날 북한과 러시아, 중국의 접경지대 핫산. 그 지명은 서북쪽 두만강에 가까이 위치한 핫산호수(Ozer Khasan)에서 비롯된 것이다. 핫산호수의 이전 이름은 우리말로 ‘긴 호수’라는 뜻의 장지(長池)였다.

핫산에 도착하자마자 필자는 러시아와 북한을 연결하는 두만강철교로 향했다. 북한과 소련간의 친선을 상징하여 ‘친선철교’라 불리는 두만강철교는 20~30m 정도의 길이인데, 북한과 소련 철로의 폭이 달라 북한에 들어가려면 이곳 핫산에서 열차의 바퀴를 갈아 끼워야 한다.

핫산 역사 구내 오른쪽에는 장고봉전투 또는 핫산전투를 기념하는 비가 서 있다. 비문에는 “여기 핫산호수지역에서 소비에트군대는 1938년 7~8월 우리의 조국을 배신적으로 공격한 일본 사무라이들을 분쇄하였다”며 65년 전에 벌어졌던 전투를 압축적으로 기록해놓았다. 핫산전투기념비 뒤편 작은 구릉 위에 남아 있는 소련군의 토치카(진지)에는 당시의 치열한 격전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에 총탄자국이 남아 있었다.

장고봉전투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1938년 7∼8월, 신흥 소련군과 조선주둔 일본군이 핫산호수에 인접한 장고봉(長高峰) 일대에서 무력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일본과 소련 간에 벌어진 최초의 국경충돌이었는데 그 전투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대패했다. 그 다음해인 1939년 노몬한(Nomonhan)전투에서 일본군은 한층 대규모의 병력으로 쥬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과 몽골 연합군을 상대로 다시 대결했으나 무참히 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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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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