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벼 이삭 나오니 논에서 오리 빼고 무 밭에 씨 뿌리고

  • 글: 장영란 odong174@hanmail.net

    입력2003-07-30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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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말에 ‘오월 농부 팔월 신선’이라 했다. 오월에 열심히 일했으면 이제 곡식이 영그는 걸 지켜볼 때다. 농사일을 잠시 쉬고 논둑에 앉아 다리쉼을 한다. 곡식이 영그는 들판을 바라보며….
    벼 이삭 나오니 논에서 오리 빼고 무 밭에 씨 뿌리고

    뒷간에서 똥장군을 열흘 남짓에 한번씩 비워 거름으로 쓴다.

    한여름 하면 휴가가 떠오른다. 휴가를 가면, 자연을 찾아 떠났지. 시골로 내려온 뒤 우리는 휴가를 따로 가지 않는다. 우리 집만큼 좋은 휴가처가 어디 있겠나. 마음 내키면 언제라도 잠깐 가까운 계곡에 물놀이 다녀오면 된다. 큰 비 오고 나면 물고기 잡으러 가기도 하고.

    아이들 여름방학 때 손님들이 많이 온다. 여름휴가 삼아. 손님 치르다 보면 여름이 훌쩍 지나가곤 한다. 멀리서 일부러 온 얼굴들.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고.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기도 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시골로 데려오고 싶어한다. 도시서 자라는 아이들이 자연을 너무 모른다는 걸 알기에. 바라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 오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들만 보내고 싶어하기도 한다. 어른은 돈 벌어야 하니 아이들을 맡아줄 수 없냐고. 시골 외갓집 노릇을 해달라는 이야기인데…….

    사실 아이들 손님이 가장 어렵다. 어른 손님은, 우리 먹듯 풋고추에 된장으로 대접해도 달게 드신다. 한데 아이들은 어찌 대접해야 하는지 막막하다. 도시 아이들에게 푸성귀 반찬이 입에 맞기나 하나!

    까다로운 아이들 손님



    아이들 처지에서 보면 우리 집에 있는 건 힘든 일이다. 텔레비전이 나오나, 컴퓨터를 할 수 있나. 오줌 똥 누는 일부터 힘들고 모두 낯설다. 이게 벼야, 이게 옥수수야. 어른들은 알려주고 싶어하지만 아이들은 별 관심이 없다.

    어른들은 이 기회에 ‘체험’을 바란다. 그러니까 농사일을 시켜주었으면 하는 건데 우리 처지에선 겁나는 소리다. 아이들이 뭐를 어떻게 할지. ‘그렇다면 김을 매면 되지요’ 한다. 우리도 한여름 땡볕에서 안 하는 일을, 아이들에게 시키라고? 농사 하면 힘든 거만 떠올릴 텐데….

    1996~97년 계절학교를 열어본 적이 있다. 도시 아이들을 맞아 산골 생활을 체험시키는….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어 아이들을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니며 온갖 체험을 시켰다. 아이들은 우르르 들판을 쏘다니며 즐거워했고.

    그런데 농사 하며 살면 살수록 이런 일에 시들하다. 자기 삶을 떠난 ‘체험’에 시들한 거다. 보는 게 안 보는 것보다야 좋겠지. 하지만 자기 부모가 농사일을 안 하는데. 농사일을 안 해도 밥이 입에 들어오는데. 굳이 ‘체험’하자고 온갖 부산을 떠는 일이 내키지 않는다.

    만일 우리 집에 아이들이 온다면 ‘체험’이 아닌 삶을 잔잔히 주고받고 싶다. 자기 손으로 밥 해 먹고. 자기 손으로 빨래하고. 도시는 많은 부분을 나누지만, 자연은 모든 걸 하나로 모아준다. 그렇기에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기본. 자기 목숨을 스스로 부지하는 일. 이걸 스스로 해 보는 거지. 자연은 아이가 끌리는 만큼, 일은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만큼 하도록 해주고. 아이에게 아무런 자발성이 없다면 자연 속에 내버려두면 된다. 심심하게. 굳이 체험을 해야 한다면 ‘심심함’을 체험시키는 게 어떨까?

    서울서 함께 일하던 후배가 ‘방과후 공부방’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다.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자기가 베고 잘 베개를 손바느질로 만들고. 하루 세 끼 자기들이 해 먹어가며. 낮에는 강으로 물놀이 가고. 저녁에는 가마솥 뚜껑에 불 지펴 고기 구워먹고. 논밭 구경 다니고. 유치원 때부터 상추 키우고, 유기농산물 먹으며 자란 아이들이라 잘 지냈다. 하지만 아이들 하나하나와 삶을 주고받지 못했다.

    이런저런 경험에서, ‘우르르’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르르 몰려다니면 재미는 있겠지. 하지만 장소가 바뀌었을 뿐, 아이들끼리 몰려다니다 보면 자연에서 지내보려는 본뜻은 사라지기 십상이다.

    며칠 전 고2가 된 아들을 이번 여름방학에 보내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학교생활에 너무 지쳐 있단다. 단 일주일뿐인 고2 여름방학을 우리 집에서 보내도록 해달라는.

    생각해본다. 혼자서.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아니라, 우리 집을 징검다리로 산 속에서 며칠 지낸다 마음먹고. 비록 텐트이지만 스스로 집도 짓고. 스스로 밥도 해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어슬렁거리고 싶으면 그러고. 단식을 하며 자기 몸을 돌보듯 복잡한 정신을 비울 수 있다면.

    자기 목숨 부지하는 일말고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시간들. 산 속에서 지내며 어려움에 부닥치면 자기 힘으로 풀어보고. 그러다 자기 속에 있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지친 자신을 추스를 수 있다면…. 한번 와서 지내보는 것은 어떨까!

    호박이 시퍼런 잎을 쭉쭉 뻗으며 자란다. 비가 온다니 한 발 앞서 똥거름을 줘야지. 뒷간으로 가서 아래칸 문을 열고 똥장군을 꺼낸다. 장에서 파는 빨간 양동이. 이게 우리 집 똥장군이다. 손으로 들면 번쩍 들린다. 열흘 남짓 식구들 똥오줌 모은 거니 큰 요강인 셈이다. 거름통 바닥에 숯가루를 깔고 똥오줌 눌 때 톱밥을 얹곤 해 보기에 흉측하지는 않다. 어디다 줄까? 잠시 잰다. 집 뒤는 지난번에 주었으니 저 아래 밭에다 줄까. 인심 쓰듯 거름을 부어준다.

    뒷간이 따로 있다. 우리 식구가 사는 살림채, 그 옆에 곳간과 닭장이 있는 아래채, 그리고 조금 떨어져 뒷간이 있다. 하루에도 몇 차례 그 집으로 볼일 보러 간다. 뒷간은 이층으로, 사람은 위층으로 드나든다. 아래층은 똥장군이 드나들고.

    뒷간에 들어가면 한쪽에 책장이 있다. 물을 쓰지 않으니 습기가 차지 않아 책, 신발 따위를 넣어놓았다. 자리에 앉으면 앞에 책을 펼칠 작은 상이 있어 거기에 책이 서너 권 놓여 있다. 식구마다 한 권씩 펼쳐놓은 거다. 나도 시집 한 권 펼쳐놓고 한두 편 읽는다. 읽다 고개를 들면 반달 모양으로 뚫린 창구멍 사이로 앞산이 보인다. 휘어진 나뭇가지가 만든 창구멍이다.

    문득 이 모두가 꿈만 같다. 도시 아파트서 살다 이 곳으로 옮겨와 한동안 마을 빈 집을 빌려 살았지. 요즘은 곳곳에 귀농학교가 있어 준비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준비 없이 이곳으로 내려왔다. 마을 어른 한 분이 빈 집을 소개해 주셨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차례로 돌아가셔서 비어 있는 마을 빈 집.

    처음 그 집에 가 하루 밤을 잔 일이 떠오른다. 부엌에는 가마솥이 두 개 걸려 있고, 하수도가 없어 물일은 부엌 문 앞 수채에서 해야 하는 곳. 한번도 그런 집에 살아본 적 없는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그날 저녁은 남편이 불을 때서 밥을 해주었다. 정말 이런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까치도 집을 짓는데

    농사철은 시작되고. 다른 길이 없어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를 하고. 그 집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불을 때서 방을 데우고. 상하수도가 있는 바깥 수채에 헌 싱크대를 놓고 밥을 해 먹었다.

    그러니 목욕 한번 하려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물을 떠다 가마솥에 부어 물을 데우고. 커다란 고무통에 물을 붓고. 그 속에 들어가 몸을 씻고. 그 물을 퍼다 버려야 했다. 그 시골집에서 하루 세 끼를 꼬박 해 먹었다. 그뿐인가. 손님은 또 얼마나 치렀나. 도시와 달리 손님이 오시면 하룻밤 자고 두어 끼를 대접할 때가 많다.

    귀농 첫해 정말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남편은 ‘도대체 농사로 밥 먹을 수 있을까?’ 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농사에만 매달렸다. 나는 농사도 농사지만 농사 한 걸로 밥상을 차리는 살림살이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결혼한 지 이십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건 도시 살림이었을 뿐.

    시골 살림살이는 새로웠다. 말로만 듣던, 어떤 건 듣도 보도 못한 살림을 살아야 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한 일이 많다. 처음으로 메주 쑤고. 처음으로 엿기름 기르고, 처음으로 지에밥 쪄서 미숫가루 만들고, 두부 끓이고…. 서툰 솜씨. 가르쳐 주실 어른이 계시나. 하다 보면 엉터리 음식이 되곤 했다. 그래도 타박 없이 잘 먹어준 우리 식구들 덕분에 또다시 뭔가를 벌이곤 했다.

    마음이 급했다. 어서 내 집 마련했으면…. 마을에 팔 집이 없나? 집터는 없나? 한 마을이 십여 호 정도로 작은 산골 마을. 결국 새로 집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새 집을 짓고 싶어했다. ‘까치도 집을 짓는데…’ 하면서.

    이 곳으로 올 때 장만한 산을 깎아 집터를 하기로 했다. 본디 마을 어른들이 보리농사를 지어 먹던 양지바른 산밭 자리다. 땅 신에게 술 한 잔 따라드렸다. 그리고 집터를 다졌다. 처음 집터를 다질 때는 곧 짓고 싶었지만 1년 이상을 흘려보냈다.

    그러면서 여름 장마를 두 번, 겨울을 한 번 났다. 그때는 길고 긴 기다림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 잘했다. 큰비에 자연의 물길은 어디로 흐르는지,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지 살펴보고 집을 지을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기다린 끝에 집짓기를 시작했다. 그 첫 시작이 바로 뒷간. 집터 다질 때 나온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산에서 갈대 베어 지붕을 얹고, 집터 흙을 이겨 흙벽을 쳤다.

    뒷간을 짓고 나니. 살림집도 뒷간과 같이 집이기는 마찬가지. 한번 지어보자. 남녀가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둥우리를 한번 지어보는 거지. 한데 집을 어찌 지을까? 멋져 보이는 통나무집을 지어? 간단하게 조립식으로 지어? 한국식 통나무집인 귀틀집은? 집 구조는?

    그동안 종이에 그린 설계가 얼마나 많은가. 집을 짓기로 마음먹은 사람 눈에는 집만 보인다. 영화를 보아도 거기 나오는 집의 문은 어떤지, 지붕은 어떻게 했는지 이런 게 눈에 들어온다. 그때까지 남들이 다 지어놓은 집에 들어가 살아보기만 했지, 내 손으로 집을 지어 본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고 살아왔다.

    공부를 해야 했다. 집짓기에 관한 책을 열심히 보았다. 집 짓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보고 배웠다. 그런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우리가 살던 그 집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낯설기만 하던 집이. 수리를 하지 않고 주인이 쓰던 걸 그대로 살아본 것이 살아 있는 공부였을까.

    우리 식구가 이년 동안 살았던 그 집은 마을 한쪽에 있는 집이다. 산골이라 터가 넓지 않아 대추나무 한 그루 빼고는 과일나무 심을 자리 없지만, 네모반듯한 터에 자리잡고 있다. 집은 나무 기둥에 흙벽을 치고, 지붕에 슬레이트를 얹은 네 칸 집이다. 서쪽 한 칸은 부엌. 부엌에는 가마솥이 두 개 걸리고. 거기서 불을 때면 가운데 방 두 칸을 데운다. 부엌 쪽에 붙은 안방을 데우고 윗방을 지나 굴뚝으로.

    사람만 식구인가 집짐승도 식구지

    불을 때서 밥을 해 먹던 시절. 부엌에서 밥 불을 때면 안방은 따뜻해지고, 윗방은 냉기가 가실 정도만 됐다. 안방은 8자 방으로 작지만 네모반듯해 식구들이 먹고 자고 쉬고. 윗방은 큰애들이 지냈겠지. 안방과 윗방 앞쪽으로 마루가 있다. 지내면 지낼수록 마루는 놀라운 공간이다. 집 안과 밖을 이어주고 집 전체를 하나로 모아주기도 한다. 부엌 반대편에 부엌과 대칭이 되는 길쭉한 방이 있다. 거기는 따로 아궁이가 있다. 식구들끼리 살 때는 잘 안 쓰겠지. 한 여름이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 쓰는 방이다.

    네 칸 살림집에 기역자로 잇대어 아래채가 있다. 아래채 끝으로는 대문이 있고. 아래채는 담 구실도 한다. 한 칸은 광. 다음 칸은 소 막(외양간). 그 옆으로 작은 짐승우리가 있고 그 뒤가 뒷간이다.

    농사 지으며 살아보니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꼭 필요하다. 시골에서는 사람 사는 집만큼 소중한 게 아래채라는 것도 이때 알았다. 사람만 식구인가, 집짐승도 식구니까. 또 곳간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는 갖추어야 시골집이 되는구나. 살아보면서 알게 되니, 집을 어찌 지을까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곡식들 이삭 나오는 입추(立秋)

    여름휴가가 한창인 8월초. 올해 입추는 8월8일. 가을 기운이 일어서는 날이다. 하지만 무더위가 마지막 힘을 쓴다. 한낮엔 너무 뜨거워 일하기 힘들다. 일을 하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옷을 다 갈아입어야 한다. 그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달게 받으며, 곡식들은 영글기 시작한다. 옛 어른들은 무더위에도 자연의 흐름을 읽고 입추라 했으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농사를 지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태풍이 몰려오고. 큰비가 오고. 그 다음날은 논밭에 가기 겁난다. 쓰러지고 꺾이고 곯아빠지고…. 하나하나 애지중지 길렀는데. 논둑이 무너지면 이웃과 말싸움도 하게 된다. 논둑 관리해야지, 김매야지. 고추나 토마토는 익으면 그때그때 따서 저장해야지. 그래도 여기는 산골이라 밤에 덥지 않다. 오히려 서늘해 새벽이면 창문을 닫고 잔다.

    논에서는 경사가 벌어지고 있다. 벼에 이삭이 나와 이삭이 팬다. 5월에 모내기하고, 6월 벼 포기가 자라고, 7월 알차기하고, 이제 성년이 되어 자기 씨를 맺기 시작한 거다. 알이 통통한 포기 사이로 이삭이 나온다. 고개를 내밀고 나와 알 하나하나를 펼친다. 그리고는 이밥 같은 연노란 벼꽃을 피운다. 끼니때면 늘 먹는 쌀밥. 내 몸이 되고 목숨이 되는 벼가 꽃을 피웠으니…. 벼꽃이 필 때 손님이 오면 함께 벼꽃 구경한다. 논으로 모시고 가서 벼꽃을 함께 보고. 벼꽃 자랑을 한다.

    밭에 가 보면 수수가 좋다. 어느새 저리 자랐을까? 고개를 젖혀 올려다본다. 수수 뒤로 파란 가을하늘이 있다. 내가 심어 기른 작물이 나보다 키가 커서 올려다보는 맛. 이게 바로 수수 키우는 맛이다.

    슬슬 김장거리 농사에 들어가야 한다. 아직 무더워 김장이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때를 놓치면 김장거리를 얻을 수 없다. 농사가 모두 그렇지만 김장농사는 더욱 그렇다. 며칠 상관으로 일러도 안 좋고 늦으면 속이 안 차고 만다. 배추는 싹이 여리니 씨를 모종상자에 담아 기른다. 하루라도 물을 안 주면 흙이 마르고,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벌레를 잡아주지 않으면 남아나지 않는다. 어린애 다루듯 조심조심 모를 키우고, 그래도 미심쩍어 한번 더 배추 씨를 넣곤 한다.

    무밭을 장만해 무도 심어야 한다. 무는 뿌리 식품이니 씨를 밭에 직접 뿌려야 한다. 벌레가 무라고 봐줄 리 없으니 씨를 넉넉히 넣는다. 그리고 두어 차례 솎아준다. 무는 작아도 커도 모두 쓰일 데가 있으니 조금 넉넉하게 심는다.

    솔직히 말해 김장배추를 자급한 지는 얼마 안 된다. 그러니까 처음 몇 년은 제대로 못했다. 무에 견주어 김장배추는 참 어렵다. 8월 모종, 9월 어린 배추에 어찌나 벌레가 많이 꼬이는지. 잡아도 잡아도 벌레가 다시 생긴다.

    첫해 꿈도 야무지게 친정집 김장거리, 맞벌이하는 친구 김장거리까지 꼽아가며 배추를 심었다. 넉넉하게. 한데 배추는 안 자라고 벌레는 꼬이고. 밭에 가 보면 배추가 잎이 없어지고. 어찌저찌 고갱이가 차기 시작했다.

    그 어리디 어린 고갱이 사이로 벌레가 드글드글대는데…. 한 포기에서 한번에 스물네 마리까지 잡아보았다. 그러니 배추가 제대로 될 리 있나. 속이 안 찬 배추로 김장을 담가 먹어야 했다. 포기 수가 아무리 많으면 뭐하나. 속이 안 찬 배추는 절여 독에 넣으면 얼마 안 된다. 부드러운 배추에 길들여진 입에 질기기만 하고.

    처음에는 배추 농사가 잘 안 되는 게 유기농을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년에는 눈 딱 감고 비료를 조금만 주어 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씨 뿌리고 어린 싹을 기를 때는 희망을 기른다. 희망이 있으니 또 열심히 해보지. 새벽에 재를 뿌려주기도 하고. 한낮에 식초를 뿌려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배추 농사는 어린 배추일 때 벌레가 먹는 속도보다 배추가 자라는 속도가 빠르게 키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먹을 테면 먹어봐라 하며 쑥쑥 자라도록. 그러려면 뭐니뭐니해도 땅이 좋아야 한다.

    밭에서 일하다 보면 먹을거리 지천이다. 맨손으로 갔다가 한아름씩 안고 돌아온다. 김매고 돌보아준 품값인가. 토마토와 수박이 아직 있고. 풋콩이 하나 둘 달린다. 그걸 따다 밥에 놔먹으면…. 달빛에 박꽃이 하얗게 피고 박이 영글면 어린 박도 먹는다. 파란 박 껍질을 벗기고 속을 긁어낸 뒤 하얀 속살. 그 빛과 촉감처럼 깨끗한 맛이다. 말려두었다 묵나물로 먹어도 좋다. 들깻잎, 호박잎, 호박, 오이….

    이렇게 먹을 게 많지만 이맘 때는 옥수수 철이다. 시장에는 진작 옥수수가 나왔지만, 우리 밭에는 이제 한창이다. 밭에 서 있는 옥수수. 옥수수가 영글기를 기다리며 ‘먹을 만할까?’ 껍질 속사정을 어림짐작하곤 한다. 사람보다 새와 벌레가 먼저 안다. 금세 옥수수 겉껍질을 뚫고 파먹은 자리. 그렇다면 이제 옥수수가 알맞게 영근 게다.

    고추는 비닐 집에서 말려야

    어느덧 여름 기운이 꺾이는 처서(處暑)다. 아침저녁 선선하고 해가 제법 짧아졌다. 풀들도 뻗어나기보다 씨를 맺는다. 길가에 노란 마타리가 하늘하늘 흔들리고. 여기저기 보랏빛 쑥부쟁이 무리지어 피어난다. 검불 뒤덮인 곳에 사위질빵 하얀 꽃이 피어나니 진짜 가을인가 싶다.

    참깨가 벌써 다 자랐다. 5월 말에 심었는데 그 사이 꽃 피고 알 영글어 가을걷이하는구나. 가장 먼저 가을걷이하는 게 참깨다. 참깨는 꽃이 층층이 달려 있는데 밑에서부터 피어오른다. 그러니 꼬투리도 열매도 밑에서부터 익는다. 꼬투리가 익으면 벌어져 알이 다 빠진다. 그러니 제때 안 거두면 참깨 알을 다 잃어버릴 수 있다. ‘참깨 농사는 털어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잘 지었더라도 제때 안 거두면 헛수고다. 그 잘디잔 열매를 주울 수도 없고….

    아래 꼬투리가 다 익으면 참깨 대를 쪄(베어) 단으로 묶어 말린다. 밑에 꼬투리가 익어 벌어져 알이 떨어져도 위 꼬투리는 이제 막 맺혔다. 그러니 말리면서 두세 차례 턴다. 참깨를 쪄놓고 나면 다 털 때까지 비가 안 오시라고 빌고 빈다. 곡식이 알이 잘수록 빨리 자라고 씨를 많이 만들어내는지. 참깨는 수천 배 자기 복제를 한다. 한 움큼 심어 한 포대 얻을 수 있다. 씨 많이 만들고 빨리 익는 참깨. 길러보니 참깨 성질이 보인다. 고추농사를 많이 하는 집은 바쁘다. 때맞춰 붉은 고추를 따야지. 새벽에는 이슬을 털게 되니 못하고. 한낮 땡볕에 딴다. 포대를 하나 들고 고추 포기 사이로 기어다니며 고추를 딴다. 어른만 하나, 아이들도 거들어야 한다.

    붉은 고추를 따오면 그걸 말리는 일이 크다. 우리 동네는 고추를 겁나게 많이 하지만 말리는 기계를 가진 집이 하나도 없다. 모두 비닐 집 속에서 말린다. 바로 ‘태양초’다. 옛이야기에 나오듯 햇살 아래 직접 말리는 게 아니다. 비 가림 해주지, 햇살을 더욱 뜨겁게 모아주지. 햇살 아래 그냥 말리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그래도 고추 말리기는 힘들다. 비가 오랫동안 오면 고추가 다 곯아버린다. 또 잘못 말리면 고추 속살에 곰팡이가 생긴다. 여태껏 잘 길러서 살진 고추를 땄는데 그렇게 되면 헛수고를 한 셈이다. 이맘 때 이웃과 만나면 고추 말리는 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처서가 오니 올벼가 이삭을 숙이기 시작한다. 늦벼는 아직 꽃을 피우고 있다. 저마다 꼬투리 맺은 콩밭에는 꿩들이 푸드덕 날아간다. 옥수수, 수수, 밤, 도토리, 곡식들이 저마다 영글고 있다. 옛말에 ‘오월 농부 팔월 신선’이라 했다. 오월에 열심히 일했으면 이제 곡식이 영그는 걸 지켜볼 때다. 농사일을 잠시 쉬고 논둑에 앉아 다리쉼을 한다. 곡식이 영그는 들판을 바라보며….

    한낮에 햇살을 피해 산에 올라간다. 처서 지나면 아침저녁 찬바람 분다. 그 찬바람에 산버섯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산버섯 하면 먹을 수 있는 건지, 독버섯인지 구분이 안 된다. 겁도 나고. 풀이나 열매와 달리 함부로 입에 넣고 맛보지도 못한다. 확실히 알고 나서야 먹는다.

    찬바람 불면 산버섯 돋아나고

    맨 처음 산버섯은 집 가까이에서 피어나는 큰갓버섯부터 알게 되었다. 냄비뚜껑만하게 크는 큰갓버섯. 한두 포기만 발견해도 한끼 거리다. 그걸 먹어보고 스스로 찾아보고. 그러면서 버섯에 한 발 다가섰다. 지난해 이웃을 따라 버섯을 따러 가보았다. 조선소나무 숲의 외꽃버섯을 시작으로. 참나무 숲에 밤버섯, 싸리버섯이 있다. 사람이 조림하지 않은 자연 숲. 조선소나무와 참나무가 절로 어우러져 자라는 곳이었다. 이 곳에 조금 뒤에 능이버섯도 나온다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집 앞뒤 산은 모두 사람이 조림한 산이다. 자기 복을 자기가 차버린 꼴이다.



    여름 산은 어떨까? 산 들머리에 가시덤불과 풀이 험하다. 하지만 그걸 뚫고 숲에 들어가면 서늘한 숲 기운. 그 속에서 나무와 앉은뱅이 풀꽃이 기다리고 있다. 며느리밥풀 꽃이 드문드문 있다. 버섯을 찾아야 하니 나무 밑동을 보며 가다 고개 들면 도토리 상수리 알이 보인다. 밤나무를 발견하면 어디쯤인지 기억해두고. 오미자가 빨갛게 익어가는 덩굴을 발견하면 노다지를 찾은 기분이지. 산은 이렇게 풍성하게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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