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이라크전쟁의 풀리지 않는 의문, 대량살상무기(WMD)의 진실

증거도 실체도 오리무중… 정보 독점한 부시와 네오콘(neocon)의 음모?

  • 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3-08-22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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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는 과연 어디에 있나.
    • 부시와 블레어는 관련정보를 가공해 자국민을 속인 것인가.
    • 이라크 침공론을 편 강경파들과 신보수주의자들의 공작인가.
    • 이들은 ‘제2의 워터게이트’로 몰락할 것인가.
    •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의 존재 유무를 둘러싼 진실게임을 들여다봤다.
    이라크전쟁의 풀리지 않는 의문, 대량살상무기(WMD)의 진실

    지난 1월28일 국정연설을 마친 뒤 손을 들어 답례하는 부시 미 대통령. 그는 현재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레드 라인(red line).’ 지난 4월초 미군이 바그다드로 진격할 때 이라크 공화국수비대가 화학무기를 사용할 것으로 예상됐던 경계선을 뜻한다. 그러나 이라크군은 ‘레드 라인’을 설정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3·20 이라크 침공 보름 만인 지난 4월5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 진입하기까지 생화학무기로 죽은 미군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뒤 미국은 생화학무기와 핵무기 등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WMD: weapons of mass destruction) 찾기에 나섰다. 그것은 곧 이라크 침공의 주요 명분을 확보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미국과 영국, 호주의 정보기관요원 및 생화학무기 전문가 1400여 명으로 구성된 ‘이라크 조사그룹(ISG: Iraq Survey Group)’이 중심이 돼 문제의 WMD를 찾는 작업을 벌여왔다.

    정치적 위기 직면한 부시와 블레어

    부시 미 대통령의 5·1 이라크전쟁 승리선언이 나온 지 4개월. 텍사스목장에서 여름휴가 한 달을 보내는 동안 부시의 안테나는 이라크 WMD에 쏠렸지만, 허사였다. “우리는 그것(WMD)을 찾아냈다. 2대의 트레일러가 이동식 생물무기연구소다”라는 지난 6월초 부시의 주장은 이미 코미디 로 전락했다. 그 트레일러들은 기상관측기구에 필요한 수소를 생산하기 위한 장비들이고, 오래 전에 이라크가 영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이라크 WMD 프로그램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이라크 과학자들은 구금상태에 놓여 있다. 이들은 “이라크엔 WMD가 없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후세인 체제가 무너진 지금 이들이 후세인의 보복을 두려워해 입을 다물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미 CIA(중앙정보국) 간부로서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WMD 수색작업을 지휘감독해온 인물은 데이비드 케이다. 지난 7월말 미 상원 군사위에 출석한 케이는 이라크 과학자들로부터 아직 쓸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음을 실토했다. 케이는 이라크에서 4명의 고위 과학자 및 10여 명의 관계자들과 접촉해 정보를 캐내려 했지만 허탕을 치고 워싱턴으로 막 돌아온 길이었다. 그는 이라크 과학자들에게 모종의 반대급부를 제시하며 ‘거래’를 하려 했지만,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후세인은 1998년 유엔무기사찰단(UNSCOM)이 떠난 뒤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다시 추진하지도 않았고, 생화학무기를 비밀리에 만들어 숨기지도 않았다.”



    이라크 WMD 보유설과 더불어 후세인을 테러 배후자로 낙인찍기 위해 제기된 이라크-알 카에다 연계설도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다. 부시 미 대통령은 1·28 국정연설에서 “이라크가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을 구입하려 했다”고 말함으로써 미국민들을 속였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이로써 부시 미 행정부와 영국 토니 블레어 정권은 이라크 침공 결정을 내린 석연찮은 과정에 대해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명분 싸움인 전쟁에서는 졌다’는 비난이다.

    ‘WMD게이트’ 터지나

    이는 부시와 블레어 모두에게 정치적 부담이다. 영미 의회는 이 문제를 놓고 청문회를 비롯한 조사를 진행중이다. 부시가 애국주의를 표방하는 언론과 의회 다수파인 공화당의 방탄(防彈) 덕을 보고 있다면, 블레어는 그런 이점조차 없이 고전중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라크 생화학무기 사찰에 깊이 관여했던 과학자 데이비드 켈리의 자살 배경을 둘러싸고 조사위에 불려다니는 형편이다. 신뢰도 높기로 정평이 난 공영방송 BBC와의 갈등도 그에겐 큰 짐이다.

    부시에 대한 비판자들은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사임으로 몰고간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에 빗대 ‘WMD게이트’가 터진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미 강경파들은 “결과가 좋으면 된 것 아니냐”는 투다.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자마자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을 쳐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던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副)장관이 바로 그런 논리를 펴는 인물이다. 그는 1차 걸프전쟁(1991년) 이래 줄곧 이라크 침공론을 주장해 워싱턴의 국제정치평론가들 사이에서 ‘아라비아의 월포위츠’로 통한다. ‘이라크 침공 나팔수’ 월포위츠는 지난 7월 이라크를 다녀온 뒤 가진 미 공영방송 PBS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더라도 이라크인들이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한다면 그것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 주장했다.

    부시와 블레어의 방어논리도 월포위츠와 맥을 같이한다. “독재자이자 위험인물인 후세인을 축출한 것만으로도 이라크전쟁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라크 침공의 두 주역은 이제 ‘역사론자’가 된 듯한 모습이다. 블레어는 “이라크의 WMD 문제에 대해 오류를 범했어도 후세인 정권을 축출함으로써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으며, 역사의 용서를 받을 것”이라 주장했다(7월17일 미 의회 연설). 부시도 비판자들에게 ‘수정주의 역사가들(revisionist historians)’이란 수사학적 멍에를 씌웠다. 그가 말하는 ‘수정주의’란 비판자들이 지난날 이라크가 WMD를 개발했다는 사실을 부인(수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부시에겐 9·11 애국주의 바람을 타고 판매부수를 늘린 매파 언론(hawkish journalism)이란 든든한 바람막이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주간지 ‘위클리 스탠더드’다. 부시가 이라크 우라늄 구입설로 옹색한 처지에 몰리자 ‘위클리 스탠더드’의 편집인이자 신보수주의 진영의 이론가임을 자처하는 윌리엄 크리스톨은 부시 비판자들을 공격했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에 대해선 ‘남의 추문을 퍼뜨리는 험담꾼(scandalmonger)’으로, 비판적인 언론의 보도성향에 대해선 “사실을 부풀리고 성급히 판단하며, 최악의 시나리오를 믿고 싶어한다”며 독설을 퍼붓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후세인은 그동안 주장해왔던 대로 WMD를 모두 폐기했는가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이라크 WMD 보유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나 ▲부시와 블레어는 정보기관의 불확실한 정보 탓에 잘못 판단한 것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국민을 속인 것인가 ▲일명 ‘네오콘(neocon)’이라 일컬어지는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을 비롯한 이라크 침공론자들은 처음부터 그릇되고 부풀린 주장을 펼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이룬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후세인이 미국 안보에 얼마만큼 위험한 존재인가를 강조하며 한창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던 2002년 10월 미 CIA는 ‘2002년 10월 현재 이라크의 생화학무기 위협’이란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라크가 지니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학무기(CW)와 생물무기(BW)에 관한 보고서였다. 이에 따르면 19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는 다량의 화학무기와 그 생산시설들을 지니고 있었으나, 유엔무기사찰단의 활동으로 4만개의 화학무기탄과 5만ℓ의 화학무기, 180만ℓ의 화학물질을 폐기했다. ‘그럼에도 이라크는 상당량의 사린가스와 겨자탄을 숨겨두고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고 보고서는 적고 있다.

    나아가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이라크는 화학무기의 계속적 개발을 위해 그 제조법을 담은 다량의 서류와 생산설비들을 감춰뒀을 가능성이 높다. 이라크는 그동안 화학무기 생산체제로 곧 전환할 수 있는 설비들을 재건하거나 확장해왔다. 이라크는 합법적인 백신과 살충제 공장을 신속히 생물무기 제조공장으로 바꿀 능력을 갖추고 있고, 이미 그렇게 전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런 보고서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WMD의 전쟁 억제력

    후세인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둔 시점에서 생화학무기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을까.

    1999년 유엔 안보리는 “중요한 일부분이 아직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이라크의 불법무기 프로그램은 제거됐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문제는 생화학무기의 높은 살상력을 감안할 때 후세인이 숨겨뒀을 것으로 믿어졌던 소량의 WMD였다.

    이라크는 제1차 걸프전쟁 당시만 해도 상당한 양의 WMD를 보유했던 게 사실이다. 1980년대에 있었던 이란-이라크전쟁 때, 그리고 일부 친(親)이란계 쿠르드족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해 많은 인명피해를 낸 전력이 있다(이란에게는 1983∼88년 전쟁 당시 10번에 걸쳐 화학무기를 사용했다). 이라크가 사용한 화학무기는 겨자탄과 신경가스탄, 사린(sarin)과 타분(tabun) 독가스였다. 이라크군은 이들 화학무기를 공중폭격하거나 122mm 로켓탄과 대포 탄두에 실어 살포했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이라크는 다량의 화학무기와 그 생산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걸프전쟁 패배 뒤 유엔무기사찰단의 사찰을 받아 다량의 화학물질을 폐기했지만, 일부 사린가스와 겨자탄은숨겨두고 있을 것으로 여겨져왔다.

    후세인이 생화학무기를 폐기했다면 그 시기는 언제쯤일까. 타리크 아지즈 이라크 부총리는 2002년 말 미 공영방송 PB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었다. “이라크는 (제1차 걸프전쟁 직후 이라크 WMD 사찰을 결의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687에 따라 우리 손으로 모든 대량살상무기를 파괴했고, 일부 남아 있던(숨겨뒀거나 미처 폐기하지 못한) 것들도 1991년 유엔무기사찰단에 의해 파괴됐다. 사찰단은 1992년 초부터 1998년 말까지 이라크 안에서 1갤런의 생화학무기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라크전쟁의 풀리지 않는 의문, 대량살상무기(WMD)의 진실

    2002년 12월 유엔무기사찰단은 이미 폐기된 이라크의 화학무기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WMD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후세인의 사위 카멜 알 마지드는 1995년 가족과 함께 요르단으로 망명했다가 후세인의 사면 약속을 믿고 다음해 귀국한 뒤 곧 죽임을 당했던 인물이다. 유엔무기사찰단은 이라크 생화학무기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1995년 여름 망명지인 요르단에서 그와 접촉했었다. 마지드는 당시 “1991년 걸프전쟁 당시 이라크군은 화학무기인 VX가스를 준비했으나, 핵공격 위험이 있다고 보고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화학무기는 걸프전쟁 뒤에, 생물무기는 유엔사찰단 활동을 계기로 모두 폐기됐다”는 증언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라크가 유엔 경제제재를 피하기 위해 생화학무기를 스스로 폐기하고도, 명확한 폐기 근거자료를 보여주지 못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02년 11·8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새로운 유엔무기사찰단이 이라크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라크는 “이미 모든 생화학무기를 파괴했다”면서 방대한 근거자료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 문서는 검증이 어려운 부분들을 담고 있었다. 이를 두고 “후세인이 실제론 WMD를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미국의 침공을 피하려 일부러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는 그럴 듯한 추론마저 나온다. AP통신은 후세인의 ‘한 측근’의 말을 빌려 “후세인은 외국인들은 오직 힘을 중요시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가 강하다고 믿게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미 국방부 관리들로 하여금 이라크가 WMD를 갖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이라크가 거짓정보를 흘렸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부시 행정부에게 이라크 침공의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후세인이 “제 꾀에 넘어가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가설로 이어진다.

    “이라크 관련정보 선택적 활용”

    현재 미 의회 정보위원회와 군사위원회는 미 행정부의 이라크 WMD 관련정보가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졌고 부시 행정부가 미국민을 속였다는 혐의를 둘러싼 조사를 진행중이다. 지난 6월18일 첫 청문회가 열린 이래 이 문제는 여름 내내 워싱턴 정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정보위원회 소속 위원과 보좌관들은 CIA가 제출한 방대한 양의 관련문건들을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오는 가을까지 조사작업이 마무리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상원 정보위 위원장 팻 로버트 의원(공화당·캔사스주)은 “정보위 위원들은 천장 높이만큼의 엄청난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고된 일을 해야 한다”고 푸념했다. 정부가 후세인이 생화학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아프리카에서 핵무기 제조물질을 손에 넣으려 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정보를 조작 또는 부풀리고 국민을 속이려 했는지 여부를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미 의회 조사의 핵심 사항 가운데 하나는 “영국 정부가 최근 후세인이 상당량의 우라늄을 아프리카에서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 부시의 1·28 국정연설이다. 백악관은 그 내용이 국정연설에서 빠졌어야 했다며 잘못을 시인했다. 조지 테닛 미 CIA 국장도 문제의 연설문을 챙기지 못한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며 주군(主君)인 부시를 감싸안는 모습을 연출했다.

    미 CIA는 부시 대통령의 1·28 국정연설이 있기 거의 1년 전인 2002년 2월 이미 전 가봉 대사였던 조지프 C. 윌슨을 비밀리에 니제르로 파견, 영국이 제기한 이라크 우라늄 구입 ‘정보’의 사실 여부를 파악했다. 윌슨은 지난 7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내가 아프리카에서 찾아내지 못한 것’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아프리카에 다녀온 ‘전직 외교관’이 자신임을 밝히면서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공 명분을 얻기 위해 정보를 선택적으로 이용했다”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아울러 그는 이라크전에서 200명이 넘는 미군 병사들이 희생됐다. (전쟁이) 과연 올바른 근거에서 결정됐는지를 밝혀야 하며, 그런 주장이 부시가 말하듯 ‘수정주의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뼈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CIA의 WMD 정보도 잘못

    미 CIA는 이라크 WMD 정보 분석에서 펜타곤(미 국방부)보다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2002년 10월7일 부시 대통령은 신시내티주에서 이라크가 미국 안보에 미치는 위험성을 강조하고 후세인 정권 붕괴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연설을 했다. 그때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부시의 연설문안 작성자는 초안에 “이라크가 아프리카에서 (핵무기 원료로 쓰이는) 상당량의 우라늄 산화물(uranium oxide)을 구입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났다”는 문구를 넣었다. 그러나 이 문구는 테닛 CIA 국장의 요구에 따라 빠졌다. 테닛은 10월5일과 6일에 걸쳐 메모를 보낸 뒤 백악관 국가안보 부(副)보좌관 스테판 헤이들리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했다고 알려진다. 그렇게 거듭 메모와 전화로 당부한 것으로 미뤄볼 때 테닛은 우라늄 발언이 미칠 파장의 심각성을 잘 헤아리고 있었던 것 같다. 2002년 12월20일 유엔 안보리에서 미 유엔대사 존 네그로폰트가 연설할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우라늄 관련 문구가 빠졌다. 지난 2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유엔 안보리 연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CIA가 이라크 WMD 정보 분석에 정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2002년 10월1일 CIA가 낸 ‘이라크 무기 프로그램 백서’는 ‘이라크는 화학 및 생물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겨자, 사린, 사이클로사린 및 VX 등 화학전 물질을 다시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미 의회는 이 보고서를 믿고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 침공 권한을 안겨줬다.

    “CIA 정보를 믿고 의회에서 (부시의 이라크 침공정책에 대해) 찬성표를 던졌는데 정보가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면 앞으로 북한 핵과 이란 문제에 대해서 어느 누가 (부시 행정부의 주장을) 믿을 수 있겠는가”(제인 하먼 민주당 상원의원)라는 볼멘소리가 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부시의 측근들은 1·28 국정연설에서 우라늄 발언은 ‘실수’였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국정연설 전후에도 그들은 “이라크가 아프리카에서 우라늄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1·28 국정연설 무렵 백악관이 내보낸 공식문건 가운데 적어도 2개가 문제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나는 1월20일 의회의 대(對)이라크 군사력 사용 인준과 관련해 백악관이 제출한 문건이고, 다른 하나는 1월23일 이라크의 WMD 은닉에 관한 보도자료다.

    네오콘(neocon)의 음모?

    이 문건들은 이라크가 2002년 12월 유엔무기사찰단 활동에 즈음해 유엔에 제출한 서류들이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우라늄 구입건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담고 있었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은 이라크 침공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1·28 국정연설을 전후해 앞서 백악관이 지적한 것과 같은 논조의 발언들을 하고 다녔다. 이를테면 부시의 국정연설 하루 전날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펜타곤 기자회견에서 “후세인 체제는 핵무기 보유를 꾀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상당량의 우라늄을 구입하려 했던 게 최근에 드러났다”고 주장했다(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지난 7월 럼스펠드에게 “무슨 이유로 CIA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우라늄 구입건을 말하고 다녔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했지만, 아직껏 그로부터 신통한 답변을 받아내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현 상황을 ‘WMD게이트’로 몰아붙이는 부시 비판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결론이란 “WMD 진실게임의 핵심은 이라크 침공론자들의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CIA는 큰 잘못이 없다. 책임은 부시와 그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측근 강경파들, 그리고 ‘네오콘(neocon)’이라 불리는 신보수주의자들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들이 엉터리 정보를 ‘가공’해 이라크 침공에 악용했고, ‘어떻게든 후세인 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자기망상(self-delusion)에 빠진 나머지 국민을 속였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테닛 CIA 국장이 부시의 1·28 국정연설문 원본을 읽지 않았다고 말했던 점이다. 이라크 침공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정보기관의 우두머리가 왜 그와 같은 주요 문건을 읽지 않았을까.

    워싱턴의 정치분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는다. 즉 테닛 국장은 집요할 정도로 이라크의 핵무장 위협을 강조해온 부시 측근 강경파들과 더 이상 맞서 싸우기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 강경파의 수장이란 바로 딕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이다. 체니 부통령은 2002년 말 이라크 침공론으로 논란을 거듭하던 시기에 두 차례에 걸쳐 CIA를 방문, 이라크 WMD 프로그램을 분석하던 CIA 분석가들에게 ‘심리적 압력’을 행사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체니가 민감한 시기에 CIA로 가서 WMD 프로그램 분석가들을 만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여겨진다. 그는 ‘이라크 침공’이란 부시 강경파들의 정책목표(policy objectives)를 CIA 정보 분석에 반영하도록 일종의 ‘지침’을 주려 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800파운드 고릴라’

    현재 부시 행정부 내엔 암기류가 흐르고 있다. 강경파들이 ‘정보처리’를 잘못하고 그 덤터기를 CIA가 쓰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들이 밖으로 새나오는 상황이다. 여기엔 9·11테러 뒤 CIA와 펜타곤 사이에 누적돼온 묘한 갈등이 깔려 있다. CIA 요원들은 펜타곤을 ‘800 파운드 고릴라’로 여긴다. 부시 행정부에 들어와 독선적인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영향력이 타 기관장들을 압도할 만큼 커진 것을 일컫는 말이다. 럼스펠드의 펜타곤은 아프간전쟁과 제2차 걸프전쟁(이라크전쟁)을 치르면서 군사부문뿐 아니라 외교 정보분야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클린턴 행정부 때와 달리 펜타곤은 미 행정부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처가 됐다.

    럼스펠드는 9·11테러 뒤 이를 미리 막지 못한 미 CIA와 FBI에 대한 불신 분위기를 타고 펜타곤 안에 ‘특수작전국’이란 직할 정보조직을 만들어 가동해왔다. 특수작전국은 부시 행정부 안에서 이라크 문제에 관한 한 CIA나 국방정보국(DIA)을 제칠 만큼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미국의 폭로 보도 전문 언론인인 시무어 허시가 지난 3월 미 주간지 ‘뉴요커’에 기고한 기사에 따르면 DIA의 전 중동지국장 패트릭 랑은 허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펜타곤은 (특수작전국을 통해) 현 정부의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똘똘 뭉쳤으며 결국은 성공했다. DIA는 협박을 받았고 아주 물렁물렁해졌다. CIA 친구들은 (펜타곤에 맞서 제 밥그릇을 챙길) 배짱이라곤 전혀 없다.”

    문제는 이 특수작전국이 그동안 미 강경파가 밀어온 아흐메드 찰라비(이라크국민평의회 의장) 등 일부 이라크 망명세력과 손잡고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및 보유설 등을 유포함으로써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논리를 뒷받침해왔다는 점이다. 이라크 침공 직전 미국민의 70% 가량이 ‘후세인이 9·11테러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믿은 것도 특수작전국이 언론에 배포한 자료의 영향이 크다고 보여진다.

    특수작전국은 럼스펠드 장관과 월포위츠 부장관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들의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이른바 ‘맞춤정보’를 만들어냈다는 혐의를 받는다. 후세인이 알 카에다와 긴밀히 연계해 왔고, 엄청난 양의 생화학무기를 숨겨뒀으며, 중동지역은 물론 미국까지 위협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을 것이라는 정보들 말이다. 럼스펠드에게 적대감을 품은 일부 CIA 정보요원들은 우라늄 관련 1·28 국정연설 파동도 결국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긴다.

    1·28 국정연설 초안을 작성했던 부시의 한 스피치라이터는 ‘국가정보평가(NIE: 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 보고서와 2002년 9월24일에 나온 영국 정보기관 문건을 참고자료로 삼았다고 알려진다. NIE는 미 CIA 국장 주도 아래 국방정보국(DIA), 국가안보국(NSA), 국무부 정보분석국(INR) 등이 공동으로 작성해 대통령에게 올리는 비밀정보분석보고서다. 현상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미래의 전망까지 담아내 가장 권위 있는 정보보고서란 평가를 받아왔다. 2002년 10월에 작성된 90쪽짜리 NIE 보고서엔 “이라크는 우라늄과 우라늄 염(鹽, 이른바 yellowcake)을 입수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그러나 CIA는 NIE 문안 작성 당시 그같은 정보가 신빙성이 약하다는 판단 아래 NIE의 요점이라 할 ‘주요 판단들(key judgments)’ 속에는 우라늄 구입 항목을 넣지 않았고, 이라크가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구축하고 있다는 판단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문제의 9·24 영국 정보기관 문건은 이라크 우라늄 구입설에 대해 이렇게 간단히 적고 있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이라크가 우라늄을 필요로 하는 어떠한 민간용(civil) 핵에너지 개발계획이 없음에도 아프리카로부터 상당량의 우라늄을 구입하려 했다.”

    미 CIA와는 달리 영국 블레어 정권은 아직도 ‘이라크 우라늄 수입설’이 잘못됐음을 시인하지 않는다. 그 정보를 그들 나름의 ‘정확한’ 정보원으로부터 얻었다고 우기는 상황이다.

    이라크 WMD 논란과 관련,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부시 미 대통령에 비하면 매우 고단한 처지에 내몰려 있다. 부시가 애국주의 성향이 강한 미 언론의 ‘부시 구하기(Saving Bush)’ 덕을 보고 있다면, 블레어는 거의 ‘알몸’으로 맞서고 있는 형국인 것. 부시와 마찬가지로 의회 조사를 받는 처지이지만, 영국민들의 따가운 눈길은 블레어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블레어 비판자들의 주장은 “블레어와 그의 몇몇 측근들이 이라크 반체제 그룹과 연결돼 있는 ‘믿기 어려운(unreliable)’ 정보원에 의존해 영국을 이라크전쟁에 끌어들였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이라크 침공을 합리화하려 엉터리 정보를 그럴듯하게 ‘가공했다’는 비판이다.

    지난 7월 자살한 영국 국방부 고문이자 생물무기 전문가로 이라크 무기사찰에 관여했던 데이비드 켈리는 이라크 WMD 진실게임의 희생자로 꼽힌다. 지난 6월 영국 공영방송 BBC가 아프리카 우라늄 구입설이 담긴 이라크 WMD 관련보고서(2002년 9월)가 틀렸고 블레어 총리의 공보수석 앨러스테어 캠벨이 ‘이라크는 공격명령을 내린 뒤 45분 안에 생물·화학무기를 실전배치할 수 있다’는 내용을 통합정보위(JIC: Joint Intelligence Committee) 보고서에 삽입하도록 했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하자, 영국 국방부는 켈리를 ‘발설자’로 지목했다. 켈리는 결국 이라크 침공 명분이 옳았느냐를 둘러싼 BBC 방송과 블레어 정권간 싸움에서 진실과 국가이익을 두고 고민한 끝에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블레어는 문제의 ‘WMD 45분 배치설’ 정보 제공자가 이라크군의 한 고급장교라고만 밝혔다. 미 CIA도 영국 정보기관 M16에 JIC가 ‘45분 내 생화학무기 공격설’이 담긴 문서를 발표한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는 뜻을 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공신력 높기로 정평이 난 BBC의 그같은 보도는 블레어 정권의 도덕성에 결정적 타격을 가해 ‘거짓말 정권’이란 비판이 일었다. ‘정보 조작자’로 꼽힌 캠벨 공보 수석은 기자 출신이다. 1997년 블레어 정권이 출범한 이래 그는 ‘부총리’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캠벨이 정보보고서를 조작했는지 여부는 현재 진행중인 조사결과가 나오면 밝혀질 것이다. 일부 영국 언론들은 취재원 보호와 관련한 BBC의 보도태도에 대해 비판적이고 다른 일부는 양비론을 펴지만, BBC는 의연한 모습이다(BBC는 총리실을 비난하는 켈리의 육성 녹음 테이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라크 WMD 정보의 진실성을 둘러싼 논란은 M16의 우두머리가 사표를 내려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1999년 9월 이래 M16 국장으로 일해온 리처드 디어러브 경(卿)은 늦어도 내년 초에 M16을 떠날 예정이다. 이라크 WMD 보유 여부를 둘러싼 판단에서 블레어는 디어러브 국장의 M16보다는 스칼레트 의장의 통합정보위 판단에 더 의존해왔다. M16 간부 출신인 스칼레트는 블레어의 측근이자 언론보좌역 앨러스테어 캠벨과 매우 가까운 인물로, 캠벨로 하여금 이라크 침공 명분을 합리화하는 일련의 문서작성 관련모임을 이끌도록 했다. 정보분야 경력이 전혀 없는 캠벨이 그런 모임을 주도한 것은 영국 정보기관의 전통에 비추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래저래 스칼레트와 캠벨은 사임해야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엉터리 정보로 전쟁 일으켰다”

    현재 미 상원 정보위와 군사위는 부시 미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전 발언과 관련, CIA와 DIA를 비롯한 정보기관들이 작성해 올린 여러 기밀 보고서들을 검토중이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문서가 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공에 앞서 여론의 지지를 얻으려 애쓰던 시점이던 2002년 9월 DIA가 작성한 ‘작전지원연구(Operational Support Study)’ 보고서다. 이 보고서의 요지는, 이라크가 새로운 화학무기를 생산, 저장하고 있거나 생산설비를 새로 설치할 것이라는 ‘그 어떤 신뢰할 만한 정보(no reliable information)’도 없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이라크가 2002년 중반 이례적으로 군수품을 대거 이동시킨 점으로 미뤄, 후세인이 앞으로 벌어질지 모를 전쟁에 대비해 화학무기(CW)를 각급 부대에 나눠준 것으로 보인다”는 추론을 덧붙였다. ‘우리가 어떠한 직접적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Although we lack any direct information)’이란 꼬리표를 단 채였다.

    이로 미뤄볼 때 부시 비판자들이 ‘WMD게이트’라 일컫는 이즈음의 상황은 정보를 독식해온 권력자가 정책적 필요에 맞춰 정보를 가공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곧 권력자가 어떤 의도된 정치적 목적(이를테면 이라크 침공)을 이루기 위해 국민에게 그릇된 정보(disinformation)를 전하는 ‘권력의 남용’이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은 ‘국민 기만으로 소환돼야 할 부시 대통령’이란 칼럼에서 “이라크전쟁을 지지하도록 대중을 조작해왔다. 거짓 발표와 기만이 부시 행정부의 기준 행동방식이다. 부시 행정부는 미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진실을 조직적으로 철면피하게 왜곡시키고 있다”고 부시를 강력 비판하면서 헌법에 규정된 대로 국민소환으로 심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에 하나 이라크에서 WMD가 뒤늦게 발견될 경우 부시는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부시에 대한 맹목적 지지자들은 “그것 봐라, 내가 뭐랬냐”며 반기겠지만, 부시 비판자들의 입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불확실한 정보임을 알면서도 이라크 침공 명분을 쌓으려고 단정적으로 말해 의회와 국민을 속인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비판적 인식 때문이다.

    ‘워터게이트’ 복사판 될까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우라늄 구입설이 담긴 부시의 1·28 국정연설을 가리켜 “(우라늄 구입설은) 단지 한 문장 속에 든 16개 단어일 뿐인데…”라며 그냥 넘기고 싶어한다. 이를 두고 CNN의 ‘십자포화(Crossfire)’ 프로그램 진행자인 정치평론가 폴 비게일러는 “‘단지 16개 단어일 뿐인데…’란 말은 내게 (1972년 민주당 선거사무소가 들어 있던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사건으로 끝내 닉슨의 사임을 몰고 왔던) 워터게이트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때도 닉슨 대통령 쪽에선 ‘단지 3류 도둑질(just a third-rate burglary)일 뿐’이라며 사건을 덮으려 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처음엔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고 따라서 스캔들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WMD게이트’의 끝은 어떤 모양이 될까. 이라크 WMD 관련정보를 부풀렸고 미국민을 속였다는 의혹으로 말미암아 2004년 말 대선에서 부시는 상당한 감표를 각오해야 할 듯하다. 각종 여론조사 지표는 부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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