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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①

한국적 여인상 연출했던 ‘문예영화의 大家’ 고은아

“화려했던 영화계,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한국적 여인상 연출했던 ‘문예영화의 大家’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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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을 보니 일찍 연기를 시작하셨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어린 시절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꽤 이른 데뷔가 아니었나 싶어요. 홍익대 미대 공예과 재학중에 영화 조연출을 우연히 만나 데뷔한 것으로 돼 있는데요.

“꼭 이른 데뷔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데뷔한 선배님들도 있었으니까요. 제가 1965년 1월 무렵에 첫 영화 촬영을 시작했는데, 그때 대학 1학년 겨울방학이었어요. 어느 조각가의 화실에 갔다가 친구들 크로키의 두상 모델을 한 적이 있었어요. 거기 계시던 조교수 한 분이 술좌석에서 영화 연출 관계자들에게 제 얘기를 했나 봐요. 그분들이 저 모르게 학교에 와서 살짝 보고 가셨다더군요.

얼마 후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설득을 하시더라고요. ‘지금 찍으려고 하는 영화에 네가 딱 적격’이라면서. 그게 시작이에요. 데뷔작 ‘란의 비가’였죠. 사실 그 영화의 소재가 일본영화에서 따온 거라고 해요. 잘 모르긴 하지만 연출부는 그 일본 영화의 여주인공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을 찾아 헤맸던 것 같아요.”

이 작품에서 고은아가 맡았던 역은 골육종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자였다. 지금 보면 흔한 역할이지만 당시만 해도 독특한 설정이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어머니도 없는 홀아버지의 외딸, 그야말로 ‘청순가련’한 처지였던 셈이다. 얼굴 전체가 다 나오는 장면은 영화 서두와 회상 장면밖에 없고, 투병을 시작하면서 얼굴을 조금씩 가리다가 후반부에는 절반 이상을 가리고 연기해야 했다.

-난생 처음 영화를 찍어보니 어떻던가요. 그 전에 연기 경력은 전혀 없었던 건가요.



“제가 원래 집이 부산이거든요. 영화 촬영하는 걸 구경해본 적도 없었어요. 어릴 적 교회 다닐 때 무용극을 연습해서 군대 막사에 위문공연 다닌 게 전부였죠. 첫 촬영부터 육체적으로 상당히 힘들었어요. 일단 겨울 장면부터 찍어야 된다고 해서 초반부터 눈이 쌓인 설악산, 원통, 인제 같은 오지를 훑고 다니며 촬영했거든요. 지금처럼 도로가 좋은 것도 아니고, 밤새 벼랑길을 털털거리며 이동해야 했죠.

회상 장면 중에 대관령에서 스키 타는 게 있었는데, 그때까지 한번도 스키를 타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니 조금 내려오다 보면 넘어지고, 그러면 다시 장비 들고 올라가서 또 내려오고, 그렇게 몇 번 하면 밤이 됐지요. 머리에는 맞지도 않는 가발을 썼지, 순진무구형이니까 옷은 꼭 치마를 입어야지…. 이건 춥다 못해 온몸이 막 얼더라고요. 그렇게 힘들게 촬영을 하다 보니 영화에 대한 동경이나 애정 같은 건 거의 없었어요. 오히려 ‘다시는 안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잊을 수 없는 나소원 조감독

-그런데도 계속 하셨잖습니까.

“글쎄, 그 이유가 뭐였을까….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란의 비가’를 찍은 극동영화사가 명동에 큰 광고판을 갖고 있었어요. 평소에 생각 없이 걷던 명동 거린데, 어느 날 보니까 제 얼굴 사진이 엄청나게 크게 붙어 있는 거예요. 촬영 없는 날 지나가며 흘끗 쳐다보면 사람들이 모여서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극장 간판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만두겠다’는 생각과 ‘계속 하고 싶다’는 묘한 매력이 내 안에 공존했던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제가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죠. 영화사가 저에게 엄청나게 투자를 했거든요. 심지어는 제가 영화에 입고 등장하는 옷을 모두 다 유명 디자이너가 직접 일본에서 천을 끊어다가 따로 만들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그런 대우를 받아본 기억이 없어요.

영화사에서는 제가 미대생이라는 점을 홍보의 포인트로 삼았어요. 그때만 해도 대학생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고, 게다가 연극영화과 학생도 아니었으니 호기심의 대상이 됐던 거죠.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도 항상 맨 얼굴이었어요. 1960년대 여배우들은 흔히 크고 시커먼 선글라스에 항상 흑백영화용 황토색 화장을 하고 다니는 게 보통이었는데, 저는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으니 인터뷰 장소에 나가도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였어요.

그러니 애초에 한 작품만 하기로 했지만 영화사 입장에서는 포기할 수 없었겠죠. 영화사에서 워낙 강하게 나오니까 집안에서도 더 이상 반대를 못하셨고, 저는 저대로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다음 작품을 하다 보니 또 다음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계속 영화를 하게 됐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성공적으로 영화인생을 시작한 고은아는 그 해 가을 영화 ‘갯마을’에 출연한다. 오영수의 동명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한 ‘갯마을’은 1965년 당시 문예영화의 가능성을 최초로 입증한 김수용 감독의 작품. ‘갯마을’은 고은아 개인에게도 의미가 큰 영화였다. ‘그저 얼굴 예쁜 청순형 대학생 배우’였던 그는 이 영화를 통해 한 사람의 배우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영화로 그는 부일영화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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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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