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재즈 연주자 류복성의 파란만장 음악인생 45년

“미친 듯 살아온 지난날, 그래서 더 짜릿했다”

  • 글: 정우식 기독교방송 라디오국 PD cws74@cbs.co.kr

    입력2003-08-22 18: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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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 연주자 류복성의 파란만장 음악인생 45년
    화성도 없고 멜로디도 없다. 그러나 터질 듯 울려 퍼지는 소리에 머리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그렇듯 타악은 가장 원초적인 까닭에 가장 매력적인 음악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골짜기에서, 남미의 어느 하늘 아래서, 아시아의 어느 나무 그늘에서, 타악기는 온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소리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악기다.

    1970년대의 TV 화면에서 흡사 비라도 맞은 듯 온몸을 땀으로 적시며 미친 듯 봉고를 두드리는 한 사내를 본 일이 있는가. 그 무릎 위에서 울려 나오던 신명나는 리듬에 취해본 기억이 있는가. 그가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퍼커션 연주자 류복성(62)씨다. 그 시절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드라마 ‘수사반장’의 주제음악에서 박진감 넘치는 봉고 연주를 선사했던 류씨는 올해로 음악인생 45주년을 맞는 한국 재즈의 산 증인이다.

    이 나라에 재즈의 혼을 심기 위해 분투해온 그의 인생은 처참한 전쟁의 기억과 씻을 수 없는 가난의 상흔이 깊게 남은 ‘싸움’의 시간이었다. 아무도 몰라주던,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는 묘기처럼 보였던(그 시절 그는 쇼프로 ‘묘기대행진’에 심심찮게 출연하곤 했다) 그의 음악은 이제 원숙의 시기를 맞았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시절만한 열정을 여전히 간직한 채 한결같이 봉고를 두드리고 있는 그를 만나려 그의 집을 찾았다. 날이 무척이나 덥던 8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경기도 남양주 덕소에 자리한 그의 집엔 보기에도 희한한 각종 타악기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이날도 류씨는 자신의 ‘재즈인생 45주년 기념공연(8월19~20일)’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색소폰 주자 이정식, 재즈 보컬 말로, 웅산 등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모두 ‘이름깨나 하는’ 실력파 후배 뮤지션들과 호흡을 맞추는 무대다. 상업성만을 쫓는 우리나라 대중음악 풍토에 일침을 놓기라도 하려는 듯 노장의 손은 잠시도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온통 백발이 된 나이지만 공연을 앞둔 그의 모습은 새로운 관객을 맞이한다는 흥분과 기대로 넘쳤다. 인터뷰 내내 밝고 호탕한 웃음을 잃지 않는 그에게선 여전히 재즈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청년의 모습이 엿보였다. 재즈를 너무도 사랑한, 재즈에 미쳐버린 한 퍼커션 거장의 음악여정 45년을 들어봤다.



    “재즈가 대중화됐다고?”

    -공연을 앞둔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연준비는 잘돼 갑니까.

    “아,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나도 기대가 크지. 1992년에는 대한민국 재즈 페스티벌도 연출했고 1997년과 1999년에도 큰 무대를 열어봤지만 이번에는 좀 느낌이 달라요. 그때는 선후배가 한자리에 모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지만, 이번에는 내 음악인생을 정리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거든. 퍼커션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세계를 이번 공연에서 모두 보여주고 싶어요.”

    알록달록한 글씨체로 ‘JAZZ’라고 써있는 검정 티셔츠와 미군 군복바지 차림의 류씨가 막 연습중이던 여러 가지 타악기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류씨의 ‘주종목’인 봉고를 비롯해 콩가, 초칼로, 클레이브, 귀로, 팀발레스, 마라카스 같은 아프로-큐반(Afro-cuban) 계열 악기들과 아고고 벨, 쿠이카, 스도, 쉐이커, 베림바우 등의 브라질 삼바 계열 타악기들…. 이름을 외기도 쉽지 않은 그 악기들을 류씨는 하나하나 직접 연주해 보였다.

    어린시절 누구나 캐스터네츠나 트라이앵글 같은 타악기를 두드려보았을 것이다. 그렇듯 타악기는 누구나 소리를 낼 수 있고 누구에게나 부담 없는 소리를 내는 악기다. 그런데 왜 굳이 타악기였을까. 피아노, 기타, 베이스가 아닌 타악기에 반세기 가까이 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흔히 타악기라면 그저 신기한 소리를 지닌 악기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여러 악기가 함께 연주될 때는 그냥 쉽게 지나쳐버리기 일쑤고요. 굳이 타악기 연주만을 고집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세계 어느 나라든 독특한 민속악기가 있죠. 내가 주로 연주하는 라틴 타악기, 브라질리안 타악기를 비롯해 아프리카, 아시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봐도 그네들 고유의 타악기가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사물이라는 훌륭한 타악기가 있잖아. 사실 인류의 역사는 타악기로 시작된 거예요. 단순히 두들기는 것 같지만 사람의 감정에 따라 그 울림과 깊이는 달라지게 마련이거든. 88개의 건반이 빚어내는 피아노 선율도 아름답지만, 내가 연주하는 봉고는 단 두개의 ‘건반’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을 강렬히 두드리지요.”

    류복성씨의 연주인생은 그대로 한국 재즈의 역사와 오버랩된다. 해방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주한미군 전파를 타고 흘러나온 재즈연주에 매료되어 음악을 시작한 그였지만, 그가 만드는 음악의 가치를 몰라주는 대중의 외면과 제작자들의 무관심 때문에 숱한 역경을 거쳐야 했다. 이제 그에게는 ‘재즈 1세대’라는 자랑스러운 호칭이 따라다니지만 그는 여전히 재즈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운할 따름이다.

    -그래도 최근 십수년 사이 ‘재즈 열풍’이 불기도 했잖아요. 그 또한 고생하며 음악을 만들어오신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흔히 나나 최세진, 신관웅, 정성조 같은 연주자들을 보고 1세대라고들 하는데, 사실 그 전에 이미 씨앗을 뿌린 분들이 많아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이정식씨(현재 활동중인 색소폰 주자 이정식씨와는 동명이인)는 존 콜트레인식 연주를 멋지게 소화해내시던 양반이었지. 1960년대 이후로 국내에서 열린 굵직굵직한 재즈공연이 대부분 내 손을 거쳐 기획된 건 사실이에요. 그러면 내가 곧 한국 재즈의 역사라고 해도 되는 건가(웃음). 한때는 한국재즈사 같은 책을 써보려고도 했는데 이제는 누군가 그 일에만 집중할 사람이 있어야겠다 싶어요.”

    -그래도 요즘은 토종 재즈음반이 곧잘 나오는 편이지 않습니까. 그 중에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음반도 꽤 있었고요. 실력 있는 뮤지션도 많이 늘어난 것 같은데요.

    “그게 지금 생각하면 참 서운해요. 내가 예전에 냈던 음반들은 반응이 영 꽝이었거든. ‘강병철과 삼태기’에서 기타를 치던 강병철씨 기억해요? 그 사람하고 함께 ‘라틴 코리아나’라는 앨범을 만든 게 31년 전이에요. 몇 년 후에는 ‘류복성과 신호등’이라는 판도 냈고.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어요. 지금 돌이켜봐도 제대로 만들어진 음반은 아니었거든. 완전 실패작이었지.”

    한국에서 재즈를 한다는 것

    재즈를 널리 알리고 싶다는 욕심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TV였다. 앞서 얘기한 ‘수사반장’을 비롯해 각종 프로그램 삽입음악을 만드는 것은 물론, 경음악 프로그램부터 ‘명랑운동회’까지 심심찮게 출연했다. 1960~70년대 활동한 대중음악인 중에 자기만큼 TV에 많이 나간 사람은 없었을 거라는 회고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텔레비전은 재즈를 외면했다. 채널 어디에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개해주는 곳이 없었고, 재즈전문 프로그램 하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런 현실은 아직까지도 거의 변함이 없다.

    “요즘엔 왜 방송에서 모습을 보기 어려우냐”는 질문에 그는 “늘 나가고 싶지만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내 연주를 무슨 동물원 원숭이 재롱인 듯 취급하는 꼴이 보기 싫어 이젠 나가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무렵에는 재즈를 연주할 만한 방송이 전혀 없었습니까.

    “간간이 무대가 생기곤 했지만 조금 지나면 금세 닫히는 거예요. 아마 1970년이었을 거야. 한 방송국 PD가 당시 미국 공보원에서 재즈공연 실황 필름을 하나 구해 방송했어요. ‘뉴 포트 재즈 페스티벌’이라고 아주 엄청난 공연이었죠. 그런데 그 일로 윗사람한테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는 거야. 누가 그런 걸 보겠냐는 거지.

    결국 그 PD가 방송국을 옮겨서 재즈전문 라이브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그 무렵 한다 하는 뮤지션들은 전부 불러모아다가 흡사 재즈클럽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어요. 굉장한 시도였지. 지금도 그 정도 수준의 음악 프로그램은 없다고 봐요. 내가 솔직히 불만이 많아. 클래식 채널도 있고 대중음악 채널도 있는데, 왜 재즈 채널은 없냐고.”

    -요즘은 라디오나 위성채널에 장르음악을 전문으로 방송하는 프로그램도 많이 있는데요.

    “그런 방송에 가끔 나가곤 했지. 위성채널에서 방영하는 재즈전문 프로그램에도 한 여덟 번 나갔나. 조금 지나니 아니나다를까, 프로그램이 없어지더군요. 국장이 바뀔 때마다 편성이 바뀐다나. ‘재즈열풍’이 불었다면서 왜 방송에는 안 나옵니까. 날이면 날마다 10대 어린애들 소리지르는 음악 프로그램만 늘어나고. 30~40대는 도대체 뭘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한국에서 재즈 음악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되고 무모한 일이었노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재즈의 고향이라는 미국은 물론, 가까운 일본만 봐도 이렇지는 않다는 것. 여기에는 국내 뮤지션들의 책임도 있다는 말이 이어졌다. 1950~60년대 유행하던 오리지널 재즈만이 진정한 재즈라 고집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재즈-퓨전, 라틴 등 재즈에서 출발한 보다 대중적인 스타일의 음악도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아쉽다는 지적이었다.

    그가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흡사 종교적인 열정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강력하게 사로잡은 것일까. 그는 무엇 때문에 미친 듯 재즈를 사랑해온 것일까. 그의 지나온 생애가 저절로 궁금해졌다.

    재즈 연주자 류복성의 파란만장 음악인생 45년

    1972년 발표한 ‘라틴 코리아나’ 앨범(왼쪽 위). 재즈드럼의 거장 아트 블레이키와의 기념사진(오른쪽 위). 재즈 메신저 활동 모습(아래).

    -재즈를 처음 만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어요. 다섯 살 때인가, 무작정 동네에 온 풍물패를 쫓아다니던 생각이 나. 주위 어른들이 못 따라다니게 막으면 막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 아마 내게 무당 끼가 있었던 것 같아요. 꽹과리와 징이 댕댕쩡쩡 울리는 소리가 귀에 꽂히는 게 그렇게 예사롭지 않았거든. 나도 모르게 장단에 맞춰 온몸을 흔들어댔지. 그 때는 동물소리 새소리조차도 음악으로 들리곤 했다니까.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AFKN 라디오를 듣는데 나오는 음악이 영 묘한 거야. (입으로 ‘스바라두바 스두비디바라’를 흥얼거리며) 그 리듬에나도 모르게 몸이 막 움직이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일즈 데이비스 퀸텟이 캐논볼 애덜리(알토 색소폰), 존 콜트레인(테너 색소폰)과 함께 연주한 ‘Straight no chaser(1958)’라는 곡이었지. 그 길로 인생이 확 바뀌었어요. 그 자리에서 바로 ‘저런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국내에 재즈를 배울 만한 곳이 없었잖아요. 더군다나 용인 시골에서는 날마다 혼자 뚱땅거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지. 그러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큰집이 있었던 창신동으로 갔어요. 동북고등학교에서 밴드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는 득달같이 달려갔거든. 그때 오디션을 보고 합격하는 바람에 중학교 2학년이 갑자기 고등학교 1학년생으로 껑충 뛰어올랐어. (웃음)

    그러니 고등학교를 다닌 게 아니라 밴드부를 다녔지. 공부에는 눈곱만큼도 흥미가 없었으니 학교에 가면 늘 지하에 있던 밴드부에서 살았어요. 그때는 참 좋았는데. 요즘엔 학교 밴드부도 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가능성을 캐내야 되는데, 요즘 아이들이야 입시공부 하느라 그럴 겨를이나 있나 뭐.”

    20시간 연습, 4시간 수면

    -밴드부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운 셈이네요.

    “그랬죠. 그랬는데, 그게 얼마 못 갔어요. 난 재즈드럼을 배우고 싶어 서울에 온 거였는데, 밴드부에선 만날 행진곡풍 음악만 연주하니 이건 뭐 지루하기가 이를 데 없는 거야. 결국 밴드부를 뛰쳐나왔지. 그러다가 하루는 종로 거리를 지나는 길에 미8군 쇼를 본 거예요. 또 확 빠져버렸지 뭐. 드럼 한번 배워 보겠다고 단장을 쫓아다니며 짐도 날라주고 허드렛일도 했지.

    고생은 엄청나게 하는데 이 양반이 드럼 가르쳐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퉁퉁 부어 있으니까 단장이 버디 리치라는 드러머가 쓴 드럼 교본을 빌려줬는데, 글쎄 그것도 딱 하루 보고 도로 갖다놓으라는 거야. 그 길로 문방구에 달려가 유치원용 오선지 공책을 하나 사서는 한 권을 통째로 옮겨 적었지. 그걸 보며 넉 달 동안 쉬지 않고 연습했어. 하루 4시간 자고 20시간 연습하던 시절이니까.

    그렇게 책을 한 권 떼고 나니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더라고. 여기저기 악단에 드럼을 쳐보겠다고 찾아갔었는데, 경험이 부족해 쫓겨나기 일쑤였어요. 그렇게 일곱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계속 해고당했거든. 어찌 됐건 그것도 경험이라고 이를 악물고 계속하니 결국엔 기회가 오더라고요, 비록 돈은 못 받는 자리였지만.

    그러던 중에 슬슬 이만하면 됐다 싶어 드럼경연대회에 나갔는데, 글쎄 거기서 처음에 날 마구 부려먹던 그 단장을 만난 거예요. 옛 선생과 제자가 대결을 펼친 셈이지. 그분이 하는 드럼솔로야 내가 머리 속에 다 넣고 다니는 중이었으니까. 그때 내가 훨씬 박수를 많이 받았어. 그 광경을 이봉조 선생이 본 거예요. 그분이 권해서 프로 악단에 입문하게 됐죠.”

    -본격적인 프로 뮤지션의 길에 들어선 거군요. 만족스럽던가요.

    “이봉조씨 덕분에 8군 밴드에서 다양한 음악을 접했어요. 하지만 재즈보다는 대중성 있는 스탠더드 팝을 많이 연주했어. 이봉조씨는 그때쯤 ‘잃어버린 태양’이나 ‘맨발의 청춘’ 같은 영화음악에도 많이 참여했는데, 덕분에 나도 거기서 드럼 세션을 맡았지. 생활에는 그런대로 여유가 있었던 시절이었는데 하고 싶은 재즈를 마음껏 할 수 없으니 갑갑했어요.

    그러던 중에 마침 워커힐에서 재즈 드러머를 모집한다고 하더라고. 그 호텔에 ‘힐탑 바’라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생긴 재즈클럽이 있었는데, 거기서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연주를 하게 됐어요. 거기서 만난 색소폰 주자가 정성조였지. 그 친구는 그때 서울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둘이서 ‘류복성과 재즈 메신저’라는 팀을 만들었지.

    그때 작업한 릴 테이프를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옛날 방식으로 녹음한 거지만 CD 다섯 장 분량이나 되거든. 아마 국내에서 최초로 녹음된 재즈 레코딩이 아닐까 해요. 기회가 닿으면 이것도 한번 음반으로 내고 싶어.

    얼마 후에는 경음악 콘테스트에도 나갔어요. ‘Take5’ ‘Desfinado’ ‘타향살이’ 같은 곡을 재즈 3박자로 편곡해서 연주했죠. 그런데 연주할 때 보니 심사위원 13명 중에 9명이 모두 졸고 있더라고. 그러니 결과는 뻔하지 뭐. 보기 좋게 예선에서 탈락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수모를 당하는 와중에도 ‘언젠가 내 음악이 우리나라에서 빛 볼 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가시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곧 ‘빛 볼 날’이 왔나요?

    “어림도 없죠. 제대로 연주할 곳도 마땅치 않았는데. 재즈 연주래야 1년에 석 달이나 했을까요. 그때는 재즈클럽도 이태원의 ‘올 댓 재즈’ 한 군데뿐이었어. 덕분에 재즈 한다는 사람은 거기서 모두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 재즈음악의 산실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공간이었어요. 그 외에는 거의 없었어. 워커힐에서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난 후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기도 했는데 오래가지는 못했어요. 우리 음악이 손님들 춤추는 데 적당하질 않으니까 주인들이 금세 해고하더라고.

    더욱이 재즈를 공부할 데도 없다 보니 교과서라고는 재즈 LP판을 듣는 게 전부였어요. 그때 LP판 가격이 한 장에 5000원이었는데, 그게 쌀 한 가마니 값이었거든.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혹시나 하고 미군 부대 앞엘 가보니 재즈 판이 널려 있더라고. 그때만 해도 재즈 음반은 ‘먹통음악’이라고 천대받기 일쑤였으니까. 미군 중고물건 파는 가게에서도 재즈 음반은 바닥에 굴러다녔어요. 가격도 50원에서 150원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헐값이지 뭐.

    그래서 월급으로 거기 있는 재즈 음반을 몽땅 샀어요. 그게 음반을 처음 모으기 시작한 계기였어요. 조금씩 사 모은 게 지금은 5만장이 넘어요. 다른 친구들에게 빌려주기도 하고 바꿔 듣기도 하고. 그러니 생활비가 남아나겠어. 라면만 먹으며 살았지.(웃음)”

    -기록을 보니까 1970년대 이후에는 대중가요에 퍼커션 세션으로도 많이 참여하셨더군요. 그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많이 했어요. 그 무렵에 나온 대한민국 가수 음반 중에 내가 참여하지 않은 게 없었으니까. 나미의 ‘영원한 친구’(1979), 송대관의 ‘해뜰날’(1976), 한대수의 ‘고무신’, ‘여치의 죽음’(1975)…. 한 달에 1500만원을 벌 정도로 돈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녹음만 했다 하면 꼭 사운드 엔지니어나 편곡자들하고 마찰이 생기는 거예요. 편곡자들은 내 연주에 맞는 악보를 안 그려주기 일쑤고, 사운드 엔지니어들은 내 퍼커션의 톤을 못 잡는 거야. 내가 가서 ‘이렇게 이렇게…’하며 몇 마디 하면 엔지니어들은 그게 월권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녹음이 끝나고 음반을 들어보면 내 연주는 특색 없이 뭉개지거나 저 뒤에서 잘 들리지도 않으니 내가 오죽 답답했겠어. 아무리 돈을 많이 벌면 뭐하나. 그 길로 때려치우고 말았죠.”

    관객이 없으면 재즈도 없다

    1990년대 들어 나이 쉰을 넘긴 후에도 그는 ‘재즈 알리기’에 여전히 열성적이었다. 1992년의 ‘대한민국 재즈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1997년 ‘서머 재즈 페스티벌’, 1999년 ‘아듀 재즈 콘서트’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공연을 기획·연출한 그는, 국내에 활동중인 재즈 뮤지션들을 대거 한 무대에 불러모으는 성과를 거둔다. 그가 연출했던 재즈 페스티벌은 클럽에서의 재즈 연주를 대규모 무대에 올린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될 만큼 한국 재즈 역사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동안 기획해온 무대를 살펴보면 대규모 재즈 공연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재즈는 클럽에서 공연하는 게 제격이죠. 그렇지만 관객 수도 적고 재즈를 좋아하는 애호가들밖에 못 듣는다는 게 늘 불만이었요. 하루라도 빨리, 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재즈를 알리려면 ‘대한민국 재즈 페스티벌’ 같은 큰 공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그 때는 공연마다 전 좌석이 꽉 찰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재즈가 대중화되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연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꼭 해보고 싶은 공연이 있기 마련이죠. 특히 재즈는 관객과의 교감이 중요한 장르고요.

    “한 드러머가 이런 말을 남겼어요. ‘내가 연주하는데 관객들이 발을 움직이거나 손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연주할 필요가 없다.’ 관객들이 리듬을 따라오지 못하는 음악을 어떻게 연주하냐는 거지. 나도 그 말에 동의해요.

    그런 의미에서 나 또한 절대로 어려운 음악은 연주하지 않아요. 이제 웬만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 베터 블루스(Mo Better Blues)’ 정도는 다 알게 됐지. 사실 나는 그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멜로디가 쉬우니까 대중들은 좋아하거든. 그럼 연주하는 거야. 이번 공연에는 그 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도 불러요.

    그렇다고 내가 대중에게 아부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연주자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살리되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조금씩 맞춰나갈 필요가 있다는 거지. 음악을 왜 하나. 관객들의 호응을 얻고 싶어 하는 것 아냐. 재즈는 연주자가 잘난 척하라는 음악이 아니야. 진정한 연주자라면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어야지.”

    -늘 그런 생각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곡을 고르십니까. 이번 공연은 어떤가요.

    “직접 만든 곡도 연주해요. ‘Bongo Fever’ ‘Tequila’처럼 퍼커션 연주가 압도적인 라틴 재즈가 울려퍼지면 관객들 몸이 들썩들썩하는 게 보이지. ‘Summertime’이나 ‘Autumn Leaves’ ‘Antonio’s Song’같이 대중적인 스탠더드도 많이 연주하고. 예전에 만들었지만 녹음이 뜻대로 안 돼 후회스러운 곡, 한 번도 무대에 올리지 못한 곡도 다시 한번 연주해보고 싶어요. 이번 공연은 라이브 앨범도 낼 생각이에요.”

    뻥 뚫린 듯 시원함을 주는 음악

    20대에는 멋모르고 북을 두드렸고 30~40대에는 오리지널 재즈만 고집하느라 세월을 보냈지만, 이제 50대를 지나 예순을 넘긴 나이에 이르자 자신의 음악이 하고 싶어진다는 토로였다. 성성한 백발, 그러나 아직도 열기가 가득한 두 눈은 어느 젊은 연주자 못지않았다. 자신의 북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속시원한 한풀이를 느꼈으면 하는 것이 소박한 바람이라고 그는 말했다. 때로는 폭풍처럼 격렬하게, 때로는 맥박처럼 간절하게, 앞으로 그가 펼쳐보일 ‘소리들’은 어떤 것일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재즈를 연주하며 보낸 45년을 돌아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이제껏 만들어온 음악에 충분히 만족하시나요.

    “후회는 없어요. 한마디로 미친 듯이 살았잖아요. 남들 어떻게 사는지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내 마음대로.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아. 두근두근 북소리마냥 짜릿했거든.

    앞으로도 몸이 부서질 때까지 계속 콘서트를 열고 음반을 만들 거예요. 왜 나이 들면 ‘고려장’해서 산에 갖다버린다고 하잖아요. 나는 고려장당할 때까지 북만 칠거야. 북 들고 무대에 서는 건 그냥 내 삶의 한 부분이거든.

    바라는 것은 딱 하나예요. 세상이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니 누군가는 사람들 가슴을 뻥 뚫어줄 필요가 있다는 거지. 내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런 시원함을 느낄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어. 아 참 또 한 가지, 아직까지 내 뒤를 이어 재즈 퍼커션을 연주할 후배를 한 사람도 기르지 못했어. 퍼커션을 가르칠 공간을 만들어볼까 해요. 이 나이쯤 되면 내 뒤에 아무도 없다는 게 참 쓸쓸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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