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三國志 속 三國志’ 읽어야 三國志가 보인다

  • 글: 표정훈 출판칼럼니스트 medius@naver.com

    입력2003-08-25 18: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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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志 속 三國志’ 읽어야 三國志가 보인다
    바야흐로 삼국지를 둘러싸고 일진광풍이 일 모양이다. 삼국지에 따르면 천하는 나눠지면 합해지고 합해지면 반드시 나눠진다고 했던가. 대결은 이미 시작됐다. 삼국지 천하를 평정하고 십여 년 이상 도전을 허락치 않던 이문열(민음사)의 아성에 황석영(창작과비평사)이 도전장을 냈다. 그런가 하면 잊혀져가던 김구용(솔출판사)이 권토중래를 엿보고 장정일(김영사)도 출사표를 던진 상태다. 중국 연변대 교수 10여명이 10년에 걸쳐 번역한 것을 우리말 어법에 맞게 고친 ‘삼국지’(현암사)도 올 가을을 기약중이다.

    삼국지를 말하는 ‘삼국지학’

    일대 결전에 나선 작가들과 출판사들로선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결전을 지켜보는 관객들이야 흥미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더욱 재미있는 관전을 위해 일독을 권하고픈 책들이 몇 권 있는데, 그 가운데 야마구치 히사카즈(오사카시립대 문학부 교수)의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이학사)가 1순위다.

    삼국지를 주제로 한 많은 책들 가운데 본격적인 ‘삼국지학’ 수준에 도달한 책은 드물다. 그 수준을 성취했다고 볼 수 있는 이 책에서 우리는 도원결의의 사상적 배경, 망명 지식인들이 모인 형주학파, 삼국지의 지정학, 유비의 제갈공명에 대한 신뢰의 정치적 배경, 오나라가 강동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 유교 이념에 대한 의도적 도발자로서의 조조 등 무게 있으면서도 흥미로운 주제들과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유비를 어떻게 평가할까?

    저자는 유비에게서 헤겔의 ‘이성의 간지’와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을 읽어낸다. 유비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인간적 매력으로 무능력을 보충하면서 협객 무리를 이끈 지배자였다는 것. 요컨대 그는 교활한 간지의 소유자이자 그 간지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교묘하게 도구화했다. 유비가 아들 유선을 제갈공명에게 부탁하고 세상을 떠나는 장면은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이른바 탁고(託孤)의 고사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유비의 탁고는 촉나라의 신구세력간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전술이었다.



    구전된 이야기가 삼국지 모태

    본격적인 삼국지학의 사례로 김문경 교수(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의 ‘삼국지의 영광: 베스트 소설 천년의 역사’(사계절)를 빼놓을 수 없다. 관우는 오늘날까지 사당에 모셔져 신으로 추앙받는다. 왜일까? 저자에 따르면 관우의 고향이 유명한 소금 산지인 산서성 해주(解州)였다는 데 그 까닭이 있다. 전국을 떠돌며 활약하는 소금 상인들이 고향의 영웅 관우를 숭상한 탓에 관우는 상인들의 신으로 추앙받게 됐다는 것.

    삼국지의 형식상 주인공인 유비는 도무지 남자다운 구석을 찾기 힘든 못난이 같다. 눈물도 자주 흘리는 유비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받는 주인공인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유비는 물론 ‘서유기’의 현장, ‘수호지’의 송강 등이 모두 여성적 지도자란 점에 주목한다. 지도자는 온순하지만 주위의 유능한 인물들이 큰 활약을 펼치며 지도자를 보좌하는 구성을 중국인들이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실제 역사서에서는 박망파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은 공명이 아닌 유비였고, 독우를 회초리로 때린 사람도 장비가 아니라 유비였다는 지적, 삼국 중 오나라는 삼국 대결에 큰 흥미가 없었고 남방 개척에 더 신경을 쓴 파이어니어 같은 나라였다는 주장, 소설 ‘삼국지’가 탄생한 데는 역사서 ‘삼국지’가 어렵다 보니 여기에 쉽게 접근해보려는 당시 과거 수험생들의 수요도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설명 등이 눈길을 끈다. 김문경 교수는 ‘삼국지’의 작자 문제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1494년에 처음 간행된 ‘삼국지’엔 원나라의 나관중이 작자로 돼 있다. 그러나 이는 흥미를 끌기 위해 당대 최고 이야기꾼의 이름을 빌린 것일 뿐, 실제론 구전되던 이야기가 연극 공연 등을 통해 다듬어져 탄생한 것으로 보는 게 옳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인이라면 예외 없이 삼국지를 재미있어 하는 것은 이런 집단창작 과정을 거치며 중국인의 정서가 짙게 배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삼국지를 읽는 것이 중국 문화와 역사, 중국인의 국민성, 사고방식 등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김문경 교수는 대표적인 재일교포 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모국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부모의 신념에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부모의 남다른 의지에도 불구,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보안이 강화된 현실 탓에 일본으로 돌아가 교토대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양학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누리는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가 됐다.

    神으로 추앙받는 관우

    삼국지 마니아든 그렇지 않든, 삼국지의 등장인물 가운데 어떤 인물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주고받을 때가 많다. 적잖은 이들이 관우라 답한다. 대적할 자가 없는 탁월한 무예와 용맹, 긴 수염으로 대표되는 범상찮은 용모에 변함없는 의리까지 갖췄으니 그럴 법하다. 그런데 ‘관우: 삼국지의 영웅에서 의리와 부의 신이 되기까지’(이마이즈미 준노스케 지음, 예담)에서 우리는 관우의 다른 모습, 즉 중국과 동남아시아 화교권 국가에서 널리 추앙받는 신으로서의 관우를 만날 수 있다.

    말레이시아의 법정에선 판사나 검사들이 관우상 앞에서 공정(公正)을 서약한 뒤 재판을 시작하는 일이 보편적이다. 대만에선 인구의 20% 가량이 관우신을 숭배한다. 홍콩의 한 경찰서에서는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서 안에 모셔둔 관우상 앞에 가서 사건의 조기해결을 기원한 후 출동한다. 삼국지의 등장인물 가운데 유독 관우만이 오늘날까지도 널리 신으로 추앙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저자는 국가적 신앙이 필요했던 역대 중국왕조의 정책적 지원을 이유로 든다. 어느 시기까지 관우는 물론 유비, 장비도 거의 신의 반열에 함께 있었다. 그러나 11세기초 송 왕조가 관우 신앙을 국교로 인정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역대 중국왕조들은 관우를 국가적 차원에서 신으로 모셨다. 백성들의 충성심을 고양하고 나라의 부강을 바랐기 때문이다. 관우가 일종의 사회통합기능을 하는 상징으로 부각된 셈이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에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짓는 등 관우 관련사업에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지원이 넉넉하며 주민들의 참여 열기도 높다고 한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관우 숭배 현상이 상인들 사이에서 더욱 뜨겁다는 점이다. 충의의 화신인 관우가 사후엔 부와 의리를 지켜주는 재신(財神)으로 변모한 것이다. 저자는 관우가 재신이 된 사연을 삼국지 내용에서 찾는다. 관우는 한때 조조에게 항복했다 유비에게 돌아간 적이 있다. 이때 다섯 관문에 걸쳐 여섯 명의 장수를 벴다는 오관참육장 이야기가 나온다.

    관우는 조조로부터 떠나면서 ‘조조에게서 받은 금은보화를 일일이 봉해 모두 곳간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의 경제관념에서 볼 때 고가의 선물을 고스란히 돌려준 관우는 신용과 이익을 동시에 중요시하는 상인들 사이에서 귀감으로 삼을 만한 표본이다. 더구나 조조로부터 무언가를 받을 때마다 날짜와 품목을 일일이 장부에 기록했고, 뛰어난 암산 능력을 갖고 있는 등 상인으로서의 재질도 탁월했다는 것이다.

    흥미 끄는 등장인물 評

    정치학자 최명 교수(서울대)의 ‘삼국지 속의 삼국지’(인간사랑)도 일독을 권할 만하다. 이 책의 특징은 삼국지 이야기를 인물별로 풀어가는 데 있다. 모두 두 권인 이 책의 1권에는 영웅론, 공명론, 봉추론, 선비론, 주유론, 노숙론, 관우론 등이, 2권에는 미인론, 쪼다론, 장수론, 모사론, 사마의론, 정통론 등의 인물평이 실려 있다. 삼국지의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도 설명이지만, 시대 배경과 중국역사의 흐름 및 인물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다. 예컨대 제자백가의 사상 및 인물, 유방과 항우, 모택동 등에 이르기까지 삼국지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필요한 다양한 사항들을 망라했다.

    최교수가 삼국지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은 정통론에 대한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많은 삼국지 마니아들이 촉한(蜀漢) 정통론이니 조위(曹魏) 정통론이니 하는 것에 대해 다분히 비판적이다. 왕조의 정통이란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상대적 정통일 뿐이며, 절대적이고 보편적 의미의 정통이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것. 삼국지의 주요 등장인물들을 한 나라에 대한 충신과 역적으로 가르는 것도 그렇다. 다만 각 인물이 역사 속에서 행한 역할과 업적에 따라 합당하게 평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알게 된다고도 했다. 삼국지도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고, 재미있게 즐길수록 더 깊이 알게 된다. 삼국지를 주제로 한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삼국지를 한 번 이상 통독한 사람이라면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에 초발심을 낸 사람이라면 삼국지 이해의 길잡이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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