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국민투표, 문제는 없는가 : 정책 연계하면 위헌 아니다

  • 글: 장영수 고려대 교수·헌법학 jamta@korea.ac.kr

    입력2003-10-27 13: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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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책과 신임이 연계되려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햇볕정책’처럼 정책에 대한 찬반이 곧 대통령 신임과 동일시될 만큼 밀접한 연관성이 확보돼야 한다.
    국민투표, 문제는 없는가 : 정책 연계하면 위헌 아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과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연계해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점은 국민주권이다. 전제군주도, 대통령도 아닌 국민이 주권자인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군주주권과 달리 국민주권은 실제 행사되기 어렵다. 국가공동체 구성원 전부로 구성된 국민은 하나의 통일된 의사를 가지기 어렵기 때문에 주권을 현실적으로 행사하기 곤란한 것이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는 대표자를 선출해 국가사무를 처리하도록 하는 대의제와 결합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의제 하에서 대표자의 활동이 항상 국민의 의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를 직접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노출되며, 특히 대표자의 국정운영과 관련해 정치적 갈등이 날카로울 경우 대표자의 활동에 대해 정당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국민투표는 이러한 대의제의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해 일정한 경우 국민의 의사를 직접 물어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제도다. 가장 강력한 민주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 국민이 직접 결정하도록 함으로써 더 이상의 시비가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시간과 비용의 문제, 그리고 전문성을 갖는 사안에 대한 부적합성 문제 등으로 인해 국민투표를 광범위하게 실시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현행 헌법은 헌법개정에 대한 최종확정(헌법 제130조 제2항)과 더불어 대통령이 부의(附議)한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헌법 제72조)이라는 두 가지 경우에만 국민투표의 실시를 인정하고 있다.

    국민투표는 크게 정책투표(referendum) 와 신임투표(plebiszit)로 나뉜다. 전자는 중요한 제도의 도입이나 변경 등과 같은 정책의 결정을 국민투표에 맡기는 것이고, 후자는 정치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임여부를 국민투표로 결정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국민주권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장점이 많다. 그럼에도 현대 민주국가들은 국민투표 실시에 상당히 소극적이다. 예컨대 나치의 뼈아픈 경험을 안고 있는 독일처럼 연방영역의 변경이라는 특수한 경우 이외에는 헌법상 국민투표제도를 아예 두지 않는 나라도 있다.

    더구나 신임투표제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부정적이다.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가 인정될 경우 그것이 대통령의 독선 내지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대통령의 권한남용이나 불법행위가 문제가 되어 신임투표를 실시했는데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신임투표가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되어도, 다수의 지지만 확보된다면 상관없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치도 다수의 지지에 의해 집권했고, 독재화됐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임투표는 야당에 의해 남용될 소지도 있다. 대통령제는 의회의 내각불신임권과 내각의 의회해산권이 인정되는 의원내각제 정부형태와 달리, 대통령의 임기중 국정의 안정적 수행이 보장된다. 그런데 신임투표제도를 도입하면 야당이 대통령에 대한 정치공세의 수단으로 신임투표 실시를 수시로 요구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국정의 안정적 수행이 어려워진다면 대통령제의 중요한 장점 하나가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다. 바로 이같은 문제점 때문에 현대 민주국가들은 신임투표제도에 대해 부정적이며, 우리 헌법도 정책투표에 관한 규정만 두고 있는 것이다.

    현재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신임투표의 방법은 여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한 신임투표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미 12월15일 전후로 날짜까지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상당히 구체적인 복안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행 헌법은 신임투표를 규정하지 않고 있으며 그 취지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신임투표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신임을 묻기 위한 국민투표를 강행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보아야 한다.

    헌법은 국가질서의 기본법이며, 정치과정을 규율하는 최고법이다. 모든 정치과정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전개돼야 하며, 이를 벗어나는 정치활동은 위헌·위법한 행위로 간주되어 일정한 제재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국가활동이 법에 따라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기본적 요청일 뿐만 아니라, 헌법제정자인 국민의 의사로부터 도출되는 민주주의의 요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헌법의 요청을 단순히 여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다음에 또 어떤 헌법규정이 정치적 합의라는 미명 하에 무시당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치적 담합이 헌법에 우선할 우려까지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현행 헌법 하에서는 국민투표에 의해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가. 원칙론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그러나 현행 헌법 하에서도 대통령의 신임을 국민투표를 통해 물을 수 있는 일종의 편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통령이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그에 대한 국민의 평가를 신임에 연계시키는 방법이다.

    신임투표제도가 헌법상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처럼 정책투표와 연계시키는 편법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내외에서 이미 그러한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 1969년 헌법개정을 신임에 연계시켰던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헌법개정안 부결과 함께 대통령직을 사임했던 예가 있으며, 국내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 도입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자신에 대한 신임과 연계시켰다.

    물론 이런 식의 신임투표에 대해서는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다. 비록 현재의 여소야대 상황에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 국회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국민투표를 이용하는 것은 자칫 대통령의 독재화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독재정권의 경험을 잊지 못하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정책투표와의 연계 가능성

    또한 정책투표를 신임과 연계시키려면 국민투표의 대상이 되는 정책이 헌법 제72조의 요청에 따라 국가안위에 관한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정치철학과 직결돼야 한다. 실제로 정책과 신임이 연계되려면 그 정책에 대한 찬반이 곧 대통령(내지 그가 이끄는 정부) 신임과 동일시될 정도로 밀접한 연관성이 확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대중 대통령 시절 ‘햇볕정책’에 관해 국민투표를 시행하면서 그에 대한 찬반을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신임과 연계시키는 경우라면 정책과 신임의 연계가 가능할 것이다. 햇볕정책은 대북 문제의 기본틀과 관련한 것으로 헌법 제72조가 명시하고 있는 통일 문제, 즉 국가안위와도 직결되는 사항이다. 또 그 것이 김대중 정권의 정치철학이 집약된 가장 중요한 정책이기에 정책 연계 국민투표가 가능하다.

    그러나 최근 논의되고 있는 이라크 파병문제는 신임과 연계시키기에 적절한 정책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라크 파병 문제 자체가 외교에 관한 중요한 정책으로서 역시 헌법 제72조에 명시되어 있으며 국가안위와도 관련된 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노무현 정부의 정치철학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을 결정하기 위한 순수한 신임투표는 현행헌법상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정치적 합의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되기도 어렵다. 국민투표를 통해 신임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정책투표와 연계시키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위한 전제(정치철학을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서 국가안위에 관한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부터 먼저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제, 그것도 5년 단임제의 특성을 생각할 때 신임투표를 통해 대통령의 안정적 국정수행이 중단되는 선례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만일 여소야대 정국이 문제가 된다면, 이를 정상적으로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다. 신임투표의 힘으로 정국을 돌파하려는 것은 작은 문제를 해결하려다 큰 위험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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