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국민투표, 문제는 없는가 : 원칙적으로 무효, 헌법 72조 해석 엄격해야

  • 글: 홍준형 서울대 교수·공법학 joonh@snu.ac.kr

    입력2003-10-27 1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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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치되 그 결과에 따라 대통령의 진퇴를 결정할 수는 있으나, 대통령의 진퇴 자체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은 헌법 제72조에 의해 허용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실시방침은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 제72조와 관련해 헌법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헌법논란과는 별도로 각 정당이 여론조사결과에 따라 재신임 문제에 대한 입장을 180도 번복하는 등 희한한 정치혼돈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당초 헌법유린이라며 극구 반대하던 통합신당이 찬성 쪽으로 돌아섰고, 반대로 즉각 국민투표 실시를 주장하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사실상 재신임 국민투표를 거부하는 쪽으로 선회해 재신임 국민투표 실시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그런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관련 발언 이후 비교적 신중하게 다루어졌던 헌법문제가 각 당의 당리당략을 위한 논리도구로 전락해버린 사실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재신임을 묻기 위한 국민투표의 위헌여부가 여전히 뒤숭숭한 법리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대통령이 밝힌 사유에 따라, 국민에게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기 위해 헌법 제72조의 규정에 의한 국민투표는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국가안위를 재량에 맡길 순 없다



    첫째, 헌법은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지 않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에게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국민투표 부의권을 부여하고 있으나, 여기서 재신임이 국민투표 회부의 요건으로 명시된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포함될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한 법해석이다.

    물론 헌법 제72조의 ‘국가안위’에 대한 해석이 문제될 수 있으나, 이 부분을 아무리 넓게 해석해도 일부 논자들이 주장하듯 대통령의 재신임 여부가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 조항에 대한 광의와 협의의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해도 언어의 문리(文理)적 의미영역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안위’의 해석과 국민투표 회부여부가 대통령의 고유 재량이라는 논거를 내세워 헌법 제72조에 의한 재신임 국민투표가 허용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국민투표 회부여부가 대통령의 재량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 요건 충족여부와 관련된 ‘국가안위’의 해석에 대해서까지 재량을 인정할 수는 없다. 물론 여기서 ‘국가안위’란 해석에 따라 신축성이 인정될 수 있는 불확정 (헌)법개념이지만, 해석은 어디까지나 (헌)법해석이지 재량의 행사는 아니다. 헌법상 요건규정의 의미내용에 대한 해석에, 선택의 여지 또는 자유를 의미하는 재량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은 법해석과 재량개념에 관한 시대착오적 오류일 뿐이다.

    둘째, 헌법 제72조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대한 국민투표와 대통령 자신의 신임을 결부시키는 것까지 금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이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그러하다. 다시 말해 국가안위에 관한 특정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치되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의 진퇴를 결정할 수는 있으나 자신의 진퇴 자체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은 헌법 제72조에 의해 허용되지 않는다.

    재신임 국민투표의 헌법적 허용성이 의문시되자 청와대 비서진 등 일각에서는 의원내각제 개헌이나 이라크 파병, 근본적 정치개혁 등 국가안위에 관한 정책을 결부시켜 이에 대한 국민투표를 통해 재신임 여부를 결정하자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경우 국민투표의 대상이 되는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의 판단이 노무현 대통령의 진퇴와 일치해야 하는데, 노대통령이 밝힌 재신임 사유에 비추어볼 때, 그 가부결정이 대통령의 진퇴여부로 귀결될 만한 중요정책안건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

    설사 그러한 정책을 국민투표의 대상으로 내세울 수 있다 해도 그 결과가 대통령의 진퇴여부에 헌법적인 구속력이 있다고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국민투표의 결과는 확정적이고 구속적이지만 그에 따른 대통령의 진퇴 결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대통령에게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권한을 부여한 헌법 제72조는, 국민투표가 신임투표로 변질되거나 악용되지 않도록 하려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므로 국민투표의 실시요건은 엄격히 제한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설령 ‘국가안위’가 국민투표부의권자인 대통령 자신의 1차적 해석에 맡겨진 불확정법 개념이라 하더라도 그 해석의 당부판단은 어디까지나 헌법재판소에 의해 최종적으로 심사돼야 할 (헌)법적 문제이지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이거나 통치행위라고는 볼 수 없다.

    대안 없이 대통령이 자신의 신임을 국민에게 묻는 신임투표는 선거를 통해 임기동안 안정적인 책임정치를 구현하도록 위임한다는 대통령제의 정신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또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를 무시하고, 우회하여 국민대중에게 직접 호소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유지·연장시키고자 했던 ‘신대통령제적 포퓰리스트 정치’ 등과 같은 역사적 경험이 보여주듯이, 남용의 위험이 크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 헌법은 신임투표를 제도화하지 않은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도 대안 없는 신임투표는 결국 기존질서 유지 쪽으로 기울기 쉽고, 따라서 정치적 남용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우려는 이미 헌법 제72조에 나타나 있다. 즉 헌법은 제72조를 규정하면서 국민투표가 신임투표를 위한 방편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외교·국방·통일 등 그 의미내용이 비교적 명확한 국가생존권 관련 개념들을 사용했고, 아울러 그 밖의 경우도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이라는 척도로 제한했다. 이러한 이유로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일련의 발언들을 통해 밝힌 사유로 자신의 재신임을 묻기 위해 헌법 제72조에 의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은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통령 자신의 사임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전제로 ‘비구속적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까지 금지된 것은 아니다. 재신임 문제와 상관없이 대통령이 사임의 자유를 가진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헌법 역시 대통령의 사임을 막지는 않는다. 대통령이 가지는 ‘사임의 자유’에 비추어, 헌법 제72조가 예상하는 국민투표가 아니라 대통령이 자신의 사임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직접 국민의 뜻을 묻는 수단으로써의 국민투표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성격의 국민투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결론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덕적 신뢰만이 국정을 이끌 밑천인데, 그 문제에 적신호가 와서’ 최도술 전 비서관 문제를 포함해 그동안 축적된 여러 가지 국민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이상, 석연치는 않지만 대통령이 자신의 사임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직접 국민의 뜻을 묻는 선에서 국민투표라는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 헌법상 금지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임의 자유와 비구속적 국민투표

    그렇지만 이러한 성격의 국민투표는 헌법 72조가 예상하는 국민투표가 아니고 따라서 국민투표법에서처럼 투표권자의 자격, 투표의 방법, 국민투표 관련 운동, 그 실시와 결정 방법, 절차도 정해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재신임 국민투표는 그 명칭이 무엇이든 법적 구속력이 아닌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할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과 일정 등에 관해서는 여야 또는 주요 정당들 사이의 합의형성이 필수적이다. 특히 누구나 공정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룰과 기준, 절차 등을 내용으로 한 한시적 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국회로 하여금 대통령의 그와 같은 의사형성과정에 협력하도록 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안이다.

    이 법률에 투표권자의 자격, 투표의 방법, 국민투표관련운동, 그 실시와 결정의 방법, 절차를 국민투표법의 규정에 준하여 정해둘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투표의 구체적인 방법과 일정 등에 관해 여야 또는 주요 정당들과 협의하여 한시적 특별법을 만드는 것이 헌법상 가능하고 안전한 대안이 될 것이다. 물론 그러한 특별법을 제정한다 해도, 헌법이 예상하지 못한 이러한 유형의 재신임 국민투표를 상설 제도화할 것인지, 이를 헌법상 가능케 하기 위해 또는 그 허용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헌법개정이 필요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헌법이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재신임 국민투표의 헌법적 허용성이 의문시되고 이를 둘러싼 헌법논쟁이 재신임 정국의 초기를 이끌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최근 전개된 헌법논쟁의 양상은, 헌법의 지배라는 법치주의의 대명제에 비춰볼 때 대단히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헌법과 정치의 관계가 헌법의 존중이 아니라 정치종속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재신임 국민투표의 위헌여부 그 자체보다 오히려 헌법문제를 목적에 맞게 억지로 짜맞추려 하거나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라 이리저리 동원하고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당리당략적 행태가 더 심각한 문제다. 낙후된 우리나라 헌정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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