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노무현 재신임 발언의 수사학

겸손한 척 하지만 오만한 ‘정치 10단’

  • 글: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입력2003-10-27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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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신임을 받는 동안’이라는 말은 재신임을 기정사실로 가정하는 오만함을 드러낸다. 국민에게 자기를 심판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데, 그는 오히려 국민에게 각성이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노무현 재신임 발언의 수사학

    1974년 워터게이트사건에 휘말려 임기중 사퇴한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

    한사람이 변호사에게 물었다. “당신이 훌륭한 변호사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변호사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이렇게 답했다. “저는 그에 대해서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지요.”

    위 상황에서 변호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의 경우의 수는 “네, 맞습니다”라는 긍정이거나, “아닙니다. 저보다 훌륭한 변호사가 많습니다”라는 부정이거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유보적인 대답 세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네, 맞습니다”라고 긍정했을 경우, 변호사는 추가적인 부담을 떠안게 된다. 상대방이 다시 “어떤 근거로 당신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냐?”고 되물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증거 제시의 책임(a burden of proof)’이라는 공을 떠안게 된다. 이때 스스로 훌륭하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거나 제시한 증거가 빈약해서 납득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긍정의 논리는 빛을 잃게 된다.

    그래서 이 명민한 변호사는 생각했다. ‘증거 제시의 책임을 묻는 사람에게 떠넘기자.’ 그리고 답했다. “당신이 말한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지요.” 묻는 사람은 거꾸로 질문을 해놓고 난데없이 자기가 증거를 제시한 꼴이 되어버렸다. 변호사는 자신이 훌륭한 변호사라는 것을 힘들이지 않고 증명했을 뿐 아니라, 상대방 논리를 후하게 받아들여준 너그러운 대화상대로 남았다.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나날이 떨어지는 지지도와 국정 운영의 난맥상에 고심하다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다. ‘국민에게 물어보자. 과연 내가 계속해도 되는지.’



    위 상황에서 고뇌에 찬 결단의 경우의 수를 찾아보자. 먼저 모든 책임을 지고 깨끗이 물러나는 경우가 있다. 가장 자연스러운 순서는 실정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권좌에서 내려가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결정을 내릴 정치인이 동서고금 통틀어 과연 몇이나 될지 의문스럽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지만, 그의 사임연설은 마지막까지 최고 통치자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닉슨은 변호사였다. 그의 현란한 레토릭은 곧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였다. 과잉 사과를 한 후 너그러운 용서를 구하는 동양식 사과에 비해, 서양식 사과는 최소한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기방어술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드러난 잘못에 대해서는 명백한 법적·금전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보편적인 정서이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 가운데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말은 서양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말보다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만 고와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Fine words butter no parsnips)”는 속담이 있을 뿐이다. 닉슨의 자기 발뺌식 사과는 사과를 한다는 행위에 대한 동서양의 수사학적 차이에서도 기인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닉슨은 하야했고, 그럼으로써 책임을 졌다.

    말로써 죄가 탕감되고, 겸양의 미덕이 중시되는 동양 문화권의 정치지도자라면 여기서 사과를 함으로써 국면 전환을 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려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것이다. 반성의 빛이 역력하면 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 고개를 숙이는 최고권력자를 당장 탄핵으로 몰고 갈 정도로 우리 민심은 매몰차지 않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자주 사과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용서받고, 임기도 돌려받았다.

    두 번째는, 대통령이 국정난맥의 원인을 진단하고, 인사 시스템을 바꾸는 등 자신의 주변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후, 혹시 근거 없는 논리나 비방에 자신의 정치생명이 묻히지 않도록 열심히 대국민 설득에 나서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 지도자는 이 방법을 택할 것이다. 정치 지도자의 실력은 그가 난관에 부딪쳤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지도자는 이런 어려운 경우를 대비해 그동안 숱한 노하우를 쌓고, 노련함과 판단력을 길러왔을 것이다.

    난국을 잘 넘기면 성공한 지도자가 된다. 어려움은 장애물이 아니라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아직 임기가 남아 있고,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지지율이 하락한다면, 그에 대한 대책을 정공법으로 마련하는 것이 정치인의 보편적인 상식이며 도리다. 허심탄회하게 여론을 경청하고, 각계 전문가의 의견과 조언을 받아들이며, 적재적소에 인재를 활용하고, 사심 없이 환부에 칼을 들이댐으로써 어려운 상황을 역전시킨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다.

    얼마 전 영화 ‘터미네이터’의 근육질 배우 아널드 슈와제네거를 새로운 주지사로 선택한 캘리포니아주는 여기에 세 번째 경우의 수를 추가한다. 즉 국민소환제 같은 외부의 힘이나 국회를 통한 제도적 장치에 의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국민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을 견제할 정당성을 지닌 또 다른 기구가 ‘국민의 이름으로’ 심판을 내리는 것은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국민이 뽑아 주었으니, 국민이 내려가라고도 할 수 있다. 국민의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자신들이 뽑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기가 내는 세금과 병역으로 유지되는 체제의 지도자라면 독재자라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변호사 출신 대통령은 고뇌에 찬 결단으로 ‘국민에게 묻는 방식’을 택했다. 이제 국민은 그를 평가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국민을 향해 평가를 내리라고 한다. 피고도 원고도 없는 법정에서 국민들은 증거를 스스로 조달하느라 분주하고, 벌써부터 각양각색의 증거와 논리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내가 잘못했습니까? 답변하십시오”의 수사학에는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메타 메시지(meta message)가 담겨 있다. “물러날까요?”라고 물을 때에는 “물러나고 싶지 않다”는 의지도 함께 전달하는 것이다. 잘못했다면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되면 “물러나겠습니다”라고 하면 된다.

    “(대관절) 내가 (뭘) 잘못했는지 평가해주시오”라며 혼자 뚜벅뚜벅 법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에게 제아무리 솔로몬이라도 무슨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판관이 되어야 할 국민이 변호사와 검사로 갈려 증거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고, 그 와중에 변호사 출신 대통령은 혼자 고뇌중이다. 그의 고뇌는 크겠지만, 자기가 뽑은 대통령을 8개월이 지난 지금 다시 뽑거나 제자리를 지키게 해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떠안은 국민만큼이야 할까.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려면 구체적인 혐의가 있어야 한다. 대통령 최측근의 11억원 수수 혐의는 대통령의 직을 걸어 국민투표에 부칠 사안 치고는 어딘지 걸맞지 않는다. 대통령이 직접 받은 것도 아니고, 그다지 놀랄 만한 액수도 아니다.

    부하 직원의 비리에 온몸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대통령은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일이 없다. 사과한 적도 없다. 오히려 실정의 원인을 야당과 언론에서 찾으면서, 우리 정치권에 만연한 “도덕적 마비증상”을 치유하기 위해 “몸을 던져야 할 때라고 판단”해 국민투표를 제안했고, “이를 계기로…더 큰 정치발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누가, 무슨 잘못을 어떻게 했다는 것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는데, 국민한테 선택을 하라고 한다. 대통령이 차라리 원고측 변호인을 자임해 증거제시의 부담을 안고 야당과 언론(의 죄)을 평가해달라고 국민에게 묻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뻔했다.

    대통령의 대국민 제안에는 또 방향성이 결여되어 있다. 선택을 위한 설득과 토론에는 메시지의 방향성이 생명이다. 현상유지(status quo)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이거나 투표를 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서 언급한 세 번째 경우, 즉 외부적인 압력을 견디는 방법으로 국민에게 묻는 방식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열치열, 국민의 힘은 국민의 힘으로 막는 법. ‘국민의 이름으로’ 심판당하지 않기 위해, ‘국민에게 먼저 물어보는’ 선택은 탁월하다.

    주인 대접 받는 게 편치않아

    정치인이 여론에 민감한 것은 미덕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론에 유난히 귀기울이는 정치인이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 때도 그랬고, 대통령이 된 후 이라크 파병 문제를 결정할 때에도 노대통령은 계속 ‘국민이 하라면 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참여정부 슬로건이 이를 웅변한다.

    그런데 막상 주인 대접을 받는 국민들 마음이 편치 않다. 사사건건 국민에게 물어보고, 국민이 하라면 하겠다는 지도자를 바라봐야 하는 마음이 불안한 것이다. 그런 지도자는 국민의 눈높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조금 더 밝은 눈으로, 조금 더 현명하게 국민을 이끌어야 한다.

    여론을 그토록 중시하는 것의 문제는, 대통령보다는 오히려 여론 쪽에 있다. 그가 신뢰하는 ‘여론’이라는 것이, 온전히 기댈 만큼 견고한 절대선이나 절대불변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대통령 자신은 크게 변한 것이 없는데, 후보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를 향한 여론은 죽 끓듯 변했다. 상황에 따라, 국민들의 기분에 따라, 제3의 요소에 따라 변하는 것이 여론이다. 개인 의견(opinion)의 집합체인 여론(public opinion)은 자체적으로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메커니즘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그런 여론을 지혜의 샘으로 삼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여론에서 돌파구를 찾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의견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일찍이 J.S. 밀이 갈파했듯, 모든 의견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여론은 또 목소리 큰 사람은 계속 소리를 높이고 목소리 작은 사람은 계속 침묵한다는, 이른바 ‘침묵의 나선이론’으로 종종 설명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나의 의견과 다를 것이라는 ‘제3자 효과이론’도 있고, 다원적 무지 현상도 종종 나타난다. 정치는 여론을 존중해야 하지만, 여론에 종속될 필요는 없다.

    재신임 요구 자체가 조건 내건 것

    10월13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도덕적 마비증상을 고치지 않고는 미래가 없습니다. 기업의 장부가 압수될 때마다 비자금이 나오고, 비자금이 나오면 당연히 정치권으로 연결되는 이 낡은 사슬은 반드시 끊어내야 합니다. 돈을 받은 정치인이 정치탄압과 야당탄압이라는 핑계로 적당히 넘어가고, 또다시 비자금 사건이 터지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기필코 끊어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를 재신임하거나 불신임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그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질까? 대통령을 바꾸거나 재신임하는 일대 홍역을 치른 국가의 도덕적 기준이 높아질 것이라는 그의 논리는 다음 말로 이어진다.

    “저는 저 자신이 먼저 몸을 던져야 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민의 재신임을 묻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기준이 바로 설 수 있다면 남은 임기 동안 국정운영을 통해서 이뤄낼 수 있는 개혁보다 더 큰 정치발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대통령직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재신임 요구에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재신임을 요구하며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재신임을 요구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몸을 던지는 것과, 재신임을 요구하는 것은 상반되는 개념이다. 몸을 던진다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신임을 요구하며, 거기에 조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재신임 받을 것이라는 오만

    그러면서 그는 아직도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미래의 모양이 그 다음으로 이어진다. “재신임을 받는 동안 얼마간의 국민 불안과 국정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진통은 감수합시다. 저부터 국정의 중심을 잡아가겠습니다. 이를 계기로 정치인과 공직자, 기업인, 언론인 등 모든 사회 지도층에 대해 국민들이 당당하게 도덕적 요구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갑시다.”

    여기서 ‘재신임을 받는 동안’이라는 말은, 재신임을 기정사실로 가정하는 오만함을 드러낸다. 몸을 내던지는 것에서, 재신임을 요구하더니, 이제는 당연히 그리 되리라는 가정하에 ‘~합시다’라는 청유형 어미로 말을 맺고 있다. 국민에게 자기를 심판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데, 그는 오히려 국민에게 어떤 각성이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수사학적으로 논리적인 모순과 비약, 겸손을 가장한 오만의 사례를 보여주는 노대통령의 말에 비해, 닉슨 대통령의 사임 연설문은 차라리 논리정연하고 겸손하다. 1974년 8월8일, 임기를 2년 반 남겨두고 워싱턴의 그의 집무실에서 발표한 사임 연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연설은 대통령이 된 후 서른일곱 번째 국민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중략)…워터게이트라는 길고 어려운 기간을 거치며, 저는 국민 여러분이 선출해준 임기를 마칠 수 있도록 모든 가능한 노력을 하도록 인내하는 것이 저의 임무라는 것을 느껴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며칠 제게 명백하게 다가온 현실은 그런 노력을 계속하기에는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중략)…하지만 그런 기반이 사라지면서, 저는 헌법이 목적하는 바가 달성되었고, 과정을 더 이상 지연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아픔이 있더라도 임기를 마치기를 바랐고, 저의 가족들도 한결같이 그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이익은 그런 개인적인 고려보다 언제나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의회와 그밖의 다른 지도자들과 토의를 거쳐, 저는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제가 앞으로 국익을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더 이상 의회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중략)… 따라서 저는 내일 정오를 기해 대통령직을 사임하려고 합니다. 포드 부통령이 그때 합법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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