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2% 부족한 고건, 정치총리로 거듭날까

  • 글: 김승련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srkim@donga.com

    입력2003-10-27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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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년 행정관료 고건 총리. 대통령 재신임 정국은 그의 역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관운을 타고났다는 그에게 또다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일까. 그동안 검증받지 못한 그의 정치력에 기대와 의문이 엇갈리고 있다.
    2% 부족한 고건, 정치총리로 거듭날까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나온 직후 국무위원 전원회의를 소집한 고건 총리가 회의장을 나서면서 국무위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10월10일 “재신임을 받겠다”며 메가톤급 뉴스를 터뜨린 뒤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고건(高建) 국무총리다. 노대통령 스스로 밝혔듯이 재신임 여부가 결정될 때까지는 ‘레임덕’을 감내해야 할 상황이고, 그 공백을 메우는 일은 당연히 고총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어깨가 무겁다”는 말로 복잡한 심경을 대신한 고총리는 당장 그날 밤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등 사회 각계의 원로들을 만났고, 곧바로 주말인 11일과 12일 잇따라 국무위원 전원을 소집한 뒤 차질 없는 국정운영을 당부했다. 12일 회의는 10시 반부터 오후 2시까지 점심을 걸러가면서 진행됐다.

    고총리를 둘러싼 최대 관심사는, 과연 그가 행정전반을 관장하는 행정총리에서 재신임 정국을 책임지고 밀어부칠 정치총리의 역할까지 해낼 의지가 있는지, 의지가 있다면 제대로 해낼 역량을 갖췄는지에 모아졌다. 그 해답은 고총리가 살아온 행정가 인생 37년, 참여정부의 총리생활 7개월에 녹아들어 있다.

    고총리의 집안에는 세 가지 가훈이 있다. 우리 집안사람들 술 실력이 세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 남의 돈 받지 말라, 누구누구의 사람이란 말을 듣지 말라가 그것이다. 이들 가훈은 행정가 고건의 오늘을 만드는 데 제 기능을 했고, 따라서 인간 고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가 아닐 수 없다.

    술을 얼마나 잘 마시면 이런 가훈이 생겼을까. 고총리의 술 실력은 30대 전남지사 시절부터 알게 모르게 전해져왔다. 1970년대말 읍·면장 220여 명과 대작한 일은 그의 술 실력을 가늠케 하는 유명한 일화다. 이를 고 총리에게 직접 확인해 봤다.



    “만 37세 때인 1975년에 전남지사로 취임했죠. 요즘은 코드를 맞춘다고 하지만, 그때는 주파수란 걸 맞춰야 했어요. 당시 전남지역 읍·면장들은 제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여기선 FM으로 보내는데, AM을 켜고 있었으니까. (새마을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상황에서 그와 관련한) 2박3일간 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진로 소주를 곁들인 불고기 파티를 했어요. 젊은 도지사가 50, 60대 읍·면장에게 친해질 요량으로 차례로 술잔을 따랐지요. 한 10여 명 정도나 따랐을까. 한 분이 ‘그럴 수 있느냐(따르기만 하고, 술잔은 받지 않느냐)’며 술을 권하더군요. 그때부터 반배(返杯·술잔 돌려주기)가 시작됐습니다. 나머지 분들과 주거니 받거니를 시작한 거죠. 당시 전남지역에 읍·면이 230여 개 됐으니까 처음 10명을 뺀 220여 분과 대작한 것이지요. 물론 거의 시늉만 한 것이지만 꽤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어쨌건 다른 사람 신세 안 지고 내 발로 걸어나왔으니까.”

    고총리의 술 실력은 튼튼한 위장에서 나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총리에게는 ‘헬리콥터 현장시찰의 달인’이란 별명도 있다. 고총리는 올 2월 취임 후 전남 고흥지역의 우주기지 시찰, 새만금 간척사업지역 시찰 등에 나설 때마다 헬기를 애용하고 있다. 국무총리실의 한 측근은 “고총리를 수행하느라 헬기를 따라 탔다가 멀미를 해서 토하는 간부들이 여럿 있었다”고 귀띔한다.

    역시 전남지사 시절의 이야기 한 토막. 전남지역은 다도해 지역 섬의 생활고, 특히 식수해결이 큰 과제였다. 고총리는 헬기나 소형 프로펠러가 달린 일명 ‘잠자리 비행기’를 타고 도서지방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 시절 고총리는 신장결석을 앓고 있었다. 요즘처럼 레이저시술 기술이 없던 때여서 물이나 맥주를 마신 뒤 오줌으로 밀어(?)내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방법. 그런 상황에서도 고총리는 헬기 출장을 강행했다. 흔들리는 헬기 안에서 결석은 조금씩 흘러내렸고, 결국엔 빠져나왔다. 주치의인 오내과 원장은 “헬기 물리치료로 해결한 전무후무한 사례”라며 감탄했다는 전언이다.

    고총리의 신조 ‘知者利廉’

    이런 사안은 고총리의 일처리 방식을 드러낸다. 현장을 꼭 방문하고, 현장에선 주마간산(走馬看山)격 점검이 되지 않도록 구석구석을 살피는 훈련을 쌓았다. 한 측근은 “섬마을을 방문할 때면 민가에 들러 꼭 부엌을 들어가봅니다. 솥뚜껑을 열어보고, 쌀뒤주를 살펴보는 겁니다. 제대로 먹고 살 것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지요.”

    고총리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전남지사 시절 입문했다가, 한 차례 쓰라린 경험을 한 후 그만뒀다.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골프장에 가던 길이 몹시 막혔어요. 비서관을 시켜 알아봤더니 농민들이 양수기를 동원해 물을 퍼내느라 그렇다는 겁니다. 그때가 한창 가뭄이 심했던 때였어요. 망치로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곧바로 약속을 취소하고 관사로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 골프는 잊었어요.”

    이런 이야기들은 행정가 고건에겐 경쟁력이다. 민생 현장을 챙기고, 국민의 시각에서 적절치 않은 상황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바꿔놓을 수 있는 의지와 감각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고총리가 단순 행정직을 넘어선 대국민 행정 정치활동을 하는 데도 더할 나위없는 경쟁력이다.

    두 번째 가훈인 남의 돈 받지 말라는 덕목은 고총리가 신조로 삼고 있는 지자이렴(知者利廉), 즉 지혜로운 자는 돈을 멀리하는 것이 결국엔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잘 안다는 경구에 녹아있다. 그는 야당 정치인의 아들로 처음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첫 발령지에서 한동안 무보직 사무관 생활을 해야 했는데, 야당 정치인의 아들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 고총리의 회고다. 그때 돈 안 받고 청렴을 유지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임명직 서울시장 시절인 1980년대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서울시 소속 사무관 이상 공무원 4000명을 상대로 훈시를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일반직 공무원이 박봉에도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목민심서 율기(律紀)편에서 ‘지자이렴’이란 말을 찾아냈고, 창창한 장래를 돈과 바꾸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누구누구의 사람이 되지 말라는 세 번째 가훈은 고총리를 ‘주위 사람에게 완벽하게 배려하지만, 작은 정은 부족하다’고 평가받도록 한 원인이 됐다.

    2001년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을 펴내면서 주목을 받았던 정두언(鄭斗彦) 서울시 정무부시장의 글에 고총리를 평가하는 대목이 나온다. 잠깐 옮겨본다.

    “직업 관료답게 매사가 조심스럽고, 꼼꼼하며, 항상 상사(대통령)의 입장을 깊이 헤아리며 처신을 했다. … 하지만 자기관리에 엄격해서 술 때문에 실수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고총리는 이처럼 자기관리가 너무나 철저한 만큼 인간미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고건의 사람’은 없다

    장관급 고위직을 30년 가까이 지내는 인물에겐 정치적 무게도 쏠리고, 그러자면 복심(腹心)으로 불릴 만한 인물이 생기게 마련이다. 고총리의 속내를 가장 잘 꿰뚫는 측근은 누구일까? 아쉽게도 이렇다 할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누구누구의 사람이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했던 고총리답게, “그는 고건의 사람이다”는 말을 들을 사람도 만들어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고총리의 스타일은 그가 직접 쓴 저서 ‘행정도 예술이다’라는 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책의 절반 가까이를 읽어봐도 기관이나 사람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특정인, 특정그룹을 칭찬할 경우 다른 그룹의 질시를 살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 라는 것. 대체로 이런 식이다.

    “한 구청은 노력한 결과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민간기업이나 호텔을 밀어내고 1등을 차지했다…(위에서 언급한 전남도청 소속 헬기조종사를 가리키며) 그처럼 고생했던 조종사가 고향인 서울에서 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나는 서울시 소방본부에 자리를 마련해줬다… 어떤 학자는 내 행정스타일을 가리켜 권위주의시대의 비권위주의적 행정이라고 평가했다….”

    국무총리실 주변에선 이를 두고 “부정적인 내용이라면 실명(實名)을 밝히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만, 긍정적인 대목에서도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고총리의 결벽증일 수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고총리측은 “책에서 거론되는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해명하고 있다.

    이처럼 ‘깔끔한’ 고총리의 스타일은 현 정국을 걱정하는 주변 인사들이 아쉬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 관계자는 노대통령과 고총리의 관계에 대해 “신뢰는 쌓여 있지만, 썩 가깝지는 않다. 하지만 과거 인연을 맺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사이다. 한마디로, 고총리가 대통령을 상대로 ‘눙치면서’ 필요한 사항을 요구하지 못할 뿐이다. 앞으로도 고총리가 이런 역할은 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고총리와 노대통령의 인연은 1998년 서울시장 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 사이의 인연은 ‘서울시장 선거의 당내 경쟁자에서 목욕탕 친구를 거쳐 국정 최고 동반자까지’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1998년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자체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 당시 전 의원이 고 전 총리를 근소한 차로 앞섰다. 그러나 청와대는 ‘당선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노 전 의원에게 양보를 요구했고, 그는 흔쾌히 수용했다. 노 전 의원은 선거기간 동안 고 전 총리의 서울시장 선거 캠프를 찾아가 잘 싸워달라고 인사했고, 고 전 총리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한 뒤 노 전 의원을 찾아가 저녁을 함께 하면서 ‘감사 인사’를 드렸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통합신당 이강래(李康來) 의원은 “고총리가 (노대통령에게) ‘신세를 톡톡히 졌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목욕 친구이기도 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살았기 때문인데, 노대통령이 살고 있던 서울 명륜동 빌라와 고총리의 혜화동 집은 직선거리로 1㎞가 채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울시장 선거 이후 고 전 총리가 20년간 매일 아침 다니는 ‘동네 대중목욕탕’에서도 몇 차례 만났다. 30대에 도지사가 된 이후 공직자로 승승장구해온 고총리가 허름한 동네 목욕탕을 즐겨 찾는 것을 노대통령이 높이 평가했다는 후문이다.

    노대통령은 1999년 해양수산부 장관이 된 뒤 고건 당시 서울시장과 국무회의에서 간간이 마주쳤다. 노대통령은 올 초 “고총리가 국무회의 배석자 신분인 서울시장으로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두 마디 던지는 것을 들었을 때 ‘행정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천만근의 무게로 느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총리에 대한 노대통령의 신뢰는 한때 흔들리기도 했다. 지난해 11월말 후보시절 단일화를 앞두고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자 노대통령은 민주당 김원기(金元基) 고문을 특사로 보내 ‘지지 선언’을 요청한 적이 있는데, 그때 고총리는 난색을 표했었다.

    현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올 초 책임총리제 논란이 빚어지자 기자들에게 “고총리는 실세총리가 될 수 없다. 지난해 그렇게 어렵게 민주당 영입을 시도하면서, 지지선언을 해줄 경우엔 ‘진짜 실세’ 총리로 대접하겠다고 요청했지만, 끝내 거절했다”는 이색 논리(?)를 내놓기도 했다.

    고총리는 올 6월 초 기자를 만나 노무현 선거운동 캠프의 영입제의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노대통령측이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 10일 전에 김원기 고문을 내게 보냈어요. 김고문은 피난시절 부산에서 다녔던 학교의 1년 선배로 가까운 편입니다. 서울 여전도회관에 있는 사무실에서 김고문을 만났는데, 노후보가 당선되면 총리로 쓰겠다고 제안하면서 지지성명을 내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총리도 할 수 없고, 지지표명도 할 수 없다고 했지요. 당시 난 서울시장을 그만두고 국제투명성기구(Tran sparency Interna tional Korea) 한국지부장을 맡고 있었거든요. 이 조직은 정치성을 배제해야 하는 곳이에요.

    나는 당시까지 내가 당적을 유지했는지도 몰랐어요. 서울시장 입후보 할 때 국민회의에 입당하고 공천 받았는데, 민주당으로 당이 바뀌었으니까. 당적 여부를 확인하려고 유인태(柳寅泰) 정무수석(당시 민주당 종로지구당 위원장)에게 전화했는데, 유수석은 나보다도 모르더라고요(웃음). 내가 여차여차해서 당적 정리해야겠다고 말했었습니다.”

    이런 곡절을 거쳤지만, 노대통령은 당선 이틀 후 신계륜(申溪輪) 의원을 고총리에게 보냈고, 1개월쯤 지나서 거듭된 요청 끝내 총리직을 결국 수락했다는 것이 고총리의 설명이다.

    고총리에게 부친은 거의 절대적인 존재다. 총리 제의를 받은 직후 부친이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고총리에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 운전기사밖에 모를텐데. 내가 혼 좀 내야겠네(웃음). 아버님은 올 98세, 내년에 만 99세인 백수(白壽)를 맞으십니다. 아버님은 ‘신동아’ 기자를 지내셨어요.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를 나오고 대학원을 다닐 때 신춘문예에 당선됐지요, 소설가 염상섭 등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아버님이 처음에 반대하신 건 사실입니다. 아들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를 따지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맡아서 하라”고 하셨어요. 그땐 아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대통령이 몽돌이면 총리는 나무받침

    다시 재신임 정국을 맞은 고총리 문제로 돌아가보자. 고총리는 그동안 의전총리를 넘어선 수준의 일을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을까. 노대통령은 “내가 몽돌이라면, 총리는 나를 안정적으로 보필할 나무받침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며 행정의 달인으로 통하는 고건을 일찌감치 참여정부의 첫 총리로 점찍은 바 있다.

    고총리가 국정을 주도하는 상황은 취임 3개월 후인 5월22일 시작된 ‘국정현안 정책조정회의’라는 다소 긴 이름의 회의체가 구성된 때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회의에는 교육 법무 재정경제 건설교통 행정자치 환경 노동부 장관 등 사회적 갈등요인을 안고 있는 사안과 관련된 장관들이 참석해 대책을 논의한다.

    이 회의가 시작된 계기는 1차 화물연대 파업이다. 화물연대 소속 지도부가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을 때 그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건설교통부 간부에 대한 면담신청도 거절됐다. 그 결과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고, 뒤늦게 TV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노대통령은 국무위원을 질책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총리가 노동 환경 교육 복지분야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직접 챙기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고총리가 의전총리를 넘어섰다고 평가받는 것은 헌정사상 최초로 총리의 헌법상 권한인 국무위원의 임명제청 및 해임건의를 문서형태로 하게 됐다는 점때문이다. 허상만(許祥萬) 농림부 장관 임명 때부터 시작된 관행이다.

    물론 고총리가 허장관을 낙점해 건의했고, 노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원래 노대통령이 점찍어둔 사람은 민병채(閔丙采) 전 경기 양평군수. 실제로 7월23일 윤태영(尹太瀛) 청와대 대변인은 민 전 군수가 농림부 장관에 내정됐다는 비공식 발표까지 마쳤다. 그러나 최종 발표 직전 노대통령은 “더 생각해보자”며 보류시켰다. 앞으로 닥칠 도하개발어젠더(DDA)와 자유무역협정(FTA) 등 국제통상 현안에 대한 협상능력을 민 전 군수가 갖추고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당시 고총리가 미국 박사 출신인 박상우(朴相禹) 전 농림부 차관을 추천한 것도 인선 지연 이유의 하나였다.

    결국 고총리는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과 함께 23일 밤 민 전 군수, 박 전 차관, 허장관 등 3명을 ‘시내 모처’에서 최종 인터뷰 한 뒤 ‘형식적이나마’ 허장관에 대한 서류상 임명제청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정치적 제스처일 뿐’이라는 비판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고총리가 올 6월 출입기자단에게 들려준 1997년 김영삼(金泳三) 정부의 내각 구성 비화와 비교할 때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YS, “부를 테니 받아 적으라”

    고총리는 1997년 YS 정부의 마지막 총리로 지명됐다. 다음날 청와대를 방문한 고총리는 YS로부터 개각대상자 명단을 통보받았다. 복사본을 하나 주면 좋았을 텐데, YS는 “부를 테니 받아 적으라”고 했다.

    당시 개각의 핵심은 강경식 경제부총리를 포함한 경제장관의 전면 교체. 고총리는 당시 “경제장관의 면면은 문제가없으나, 경제팀 수장인 강부총리가 팀워크가 맞는지 동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문제는 그때가 개각발표 예정시각인 오전 10시를 30분 앞둔 9시반이란 점.

    고총리는 이어 유임이 확정됐던 법무장관의 교체도 요구했다. 당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에 대한 수사가 논란이 됐는데, 경남(PK) 출신인 정씨에 대한 수사를 앞두고 PK 일색이던 수사라인을 바꾸기 위해 법무장관 교체를 요청한 것이다. YS는 “누가 적임이냐”고 물었고 고총리는 “깊이 생각은 안 해봤지만, 조간 신문에 최상엽씨와 XXX씨가 물망에 올랐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자리 옆에 있는 벨을 눌러 비서를 부른 뒤 “최상엽씨 연결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법무장관은 교체됐다.

    고총리는 같은 자리에서 그해 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선거 주무장관인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도 교체할 필요성이 있다고 건의했다. “정당에 몸담았던 적이 있는 장관으로는 대통령선거를 치르기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YS는 즉각 “하려면 지금 하자”고 답했다. 적임자를 대보라는 질문에 고총리는 OOO씨와 강운태 전 농림부 장관(현 민주당 의원)을 꼽았다. YS는 “이번에는 두 번째 사람을 불러볼까”라며 비서를 통해 연결을 지시했다. 이 역시 결국 교체됐다. 고 총리는 당시 “이왕 교체하려면 명분을 줘야 하니까, 서정화 장관(현 한나라당 의원. 고건 총리가 내무부 장관 시절 차관으로 일한 인연이 있음)에겐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에 당직을 주겠다는 이유를 대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개각발표는 오후 2시로 연기됐고, 강경식 부총리의 “팀워크에는 아무런 문제 없다”는 답변을 들은 뒤 법무부와 내무부 장관이 추가로 교체됐다는 것이 고총리의 술회다.

    이제 남은 건 ‘당신의 결심’

    고총리 주변 인물들은 “고총리에겐 2%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은 뒤집어보면 98%는 갖췄다는 뜻이다. 국민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그곳을 어루만질 줄 아는 정치감각, 민심의 출발점인 언론을 상대하면서 세일즈할 것과 겸손할 대목을 가려가며 홍보할 수 있는 능력, 지하철 민심 탐방 때 어느 누구를 만나도 화제가 끊이지 않는 현장감과 순발력, 또 다양한 국정경험이 98%에 해당한다.

    주변 인물들이 말하는 부족분 2%는 윗사람, 즉 대통령을 거스를 수 있는 배포를 말한다. 노대통령에게서 불안감이 느껴진다는 민심이 감지될 때면 대통령에게 ‘고건의 느낌’을 가감 없이 전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고총리의 주변인들은 “고총리는 현행 헌법상 총리의 권한을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있고, 또 오랜 관료생활에서 배어난 자제력 때문에 그런 모험은 강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결단력이나 의외성에 비춰볼 때 고총리의 ‘정제된 고언(苦言)’은 먹혀들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도 많다.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노대통령의 민주당 탈당에 따른 무(無)여당 상황과 재신임 의사표명으로 고총리의 활동반경이 전에 없이 커졌다는 점이다. 4당 원내총무, 정책위의장을 만나는 것도 고총리의 몫이다. 10월15일에는 여의도에서 국회의장단을 상대로 ‘국정설명회’를 진행했다. 어쩌면 재신임 정국에서 대국민 담화문 발표 등의 형식으로 고총리가 국민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더 이상 행정총리가 아닌 정치총리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총리를 만나는 지인들은 “이제 남은 것은 당신의 결심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고총리가 현행 헌법상 총리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자세를 유지할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행정가 고건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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