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무소불위’ 검찰수사, 이대로 좋은가

무리한 ‘유죄추정’ 이 ‘사법살인’ 주범

  • 글: 김진수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3-10-27 17: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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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심코 던진 돌에도 개구리는 맞아죽는다.
    • 하물며 그 돌을 던진 이가 유난히 돌팔매질에 강하다면?
    • 가까스로 무죄판결을 받아 누명을 벗은 형사피고인들은 개구리 신세와 다를 바 없다. ‘사법피해자’를 양산하면서도 그릇된 기소관행으로 일관하는 검찰, 유죄인가 무죄인가.
    ‘무소불위’ 검찰수사, 이대로 좋은가
    “감사 대상기간 중 대전고검에서 처리한 항소심 사건 중 무죄선고 인원은 모두 12명이고 무죄율은 1.26%로서 2001년도 전국 평균 무죄율 1.23%를 약간 상회하고 있습니다…(중략)…수사단계에서 증거수집을 철저히 하고 공소제기와 유지에 신중을 기하며 정기적으로 산하 각급 청별로 판례와 무죄사례를 분석하는 한편, 중요사건의 경우 항소심 공판에 수사검사가 직접 관여하게 하는 등 무죄방지를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2002년 9월27일 대전고검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국정감사에서 무죄방지대책을 묻는 민주당 조순형(68) 의원의 질의에 대한 명노승(57) 당시 대전고검장의 답변이다.

    조의원은 지난 9월22일 열린 서울고검과 서울지검 등에 대한 2003년도 국정감사에선 비록 같은 내용의 공개질의를 하지 않았지만, 당초 질의요지엔 포함돼 있었다. 조의원은 수년째 이 문제를 꾸준히 지적해왔다. 이는 무죄판결의 상당수가 검찰수사과정에서의 잘못과 직결되는 까닭에 무죄율이 증가할수록 검찰수사에 대한 불신이 커진다는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냉·온탕 오가는 ‘사법피해자’들

    검찰의 수사상 잘못으로 양산되는 이른바 ‘사법피해자’는 ‘필요악’인가 아닌가. 무죄로 확정되기까지 장기간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재산적·인격적 피해를 감내해야 하는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불합리한 우리 형사사법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우선 몇몇 사례부터 보자. 형사피고인이 억울한 옥살이를 겪으며 극(極)과 극(極)을 오가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권모(49·여)씨는 2000년 7월 대마사범으로 몰렸다. 대마를 2회 흡입한 혐의(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위반)였다. 이는 대마흡입 혐의로 잡혀온 장모, 김모씨의 자백 때문. 권씨의 변호인측은 장씨를 증인으로 불러 권씨와 함께 대마초를 핀 적이 없다는 진술을 1심에서 받아냈으나 다른 증인인 김씨가 재판에 출석하지 않는 바람에 검찰 진술조서만을 근거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2심에선 김씨가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그의 증언의 신빙성이 부족하고 권씨의 소변과 모발에 대한 대마흡입 감정결과가 뒤늦게 음성으로 나온 데다 검찰이 피고인(권씨)이 유리해진다는 이유로 1심에서 증거 제출을 꺼렸다는 사실을 적시해내 권씨는 8개월의 옥살이 끝에 풀려날 수 있었다.

    계주가 고소를 당해 낙찰계가 깨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회계업무를 맡은 사람이 계금을 임의로 사용했다며 업무상 배임죄로 몰린 사건도 있다. 최모(57·여)씨는 5년간 무려 58회의 1심 공판과정에서 계주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징역 10월에 법정구속을 당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계주의 부탁으로 회계업무만 담당했다는 사실관계를 새롭게 밝혀내 배임죄를 적용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죄를 인정받아 누명을 벗는 사례는 이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는 물론 공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는 대형사건, 정치인 등 고위층이 연루된 각종 비리사건에선 그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진다.

    최근 사례만 살펴봐도 옷로비사건의 김태정·박주선씨, 인천공항 유휴지 개발 사업자 선정 의혹사건의 국중호씨, 권노갑 수뢰·신광옥 수뢰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의 피고인들이 항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달리 보면, 이는 검찰이 소신에 따라 수사하기보다는 ‘봐주기 수사’란 비난여론을 피하려 공인에 대한 구속수사를 바라는 국민 법감정에 따르거나 스스로 공명심을 앞세워 무리하게 수사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억울한 일들이 빈발할까.

    그 원인의 태반은 검찰의 수사미진에 있다. 이는 통계수치로도 입증된다. 법무부가 이번 국정감사를 앞두고 지난 8월20일 국회 법사위 위원들에게 제출한 ‘법사위 위원 요구자료’에 의하면, 2003년 상반기(1∼6월) 전체 무죄판결 사건 1425건 중 검사의 과오(過誤)에 의한 것이 17%인 242건이나 된다. 과오의 유형별로 살펴보면 수사미진 100건(41.3%), 법리오해 97건(40.1%), 증거판단 잘못 11건(4.5%), 의율(擬律)착오(법규 적용상의 잘못, 예컨대 배임죄로 기소해야 하는데 횡령죄를 적용하는 경우 등으로 수사기관이나 하급심 재판부의 법률 검토가 미진한 것이 원인) 3건(1.2%), 기타(공소유지 소홀 등) 31건(12.8%)으로 나타났다.

    또 2002년에는 전체 무죄사건 2102건 중 268건(12.7%), 2001년의 경우 1966건 중 248건(12.6%), 2000년엔 2285건 중 415건(18.2%), 1999년의 경우 2465건 중 454건(18.4%), 1998년에는 1610건 중 253건(15.7%)이 앞서 언급한 여러 유형의 검사 과오로 인한 것으로 분류됐다. 법무부의 이런 통계는 대검이 무죄감소책을 강구하기 위해 매년 반기별로 무죄가 확정된 사건의 원인을 자체분석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현실의 주된 원인을 법조인 대다수는 우리 형사사법시스템 전반에 걸친 구조적 병폐에서 찾는다.

    “검찰의 구속수사 관행이 무엇보다 큰 문제다. 좀 모호한 사건이다 싶으면 일단 구속시켜놓고 보자는 게 검사들의 일반적 정서다. 고문이 금지돼 있다보니 요즘은 구속수사가 또다른 ‘고문수단’쯤으로 남용되는 경향도 짙다. 경찰에서 불구속상태로 송치된 형사사건의 피의자를 검찰에서 바로 구속하는 것을 ‘직구속’이라 하는데 직구속률이 높으면 유능한 검사로 인정받곤 한다.”

    법무법인 ‘세인’(수원)의 이창현(40·사시 29회) 대표변호사는 “초임검사 시절, 무죄사건을 두고 간부급 검사들이 ‘잘못된 기소’는 생각지 않은 채 무죄판결을 납득하지 않으려는 경우를 종종 봤다. 하지만 20∼30년씩 검사로 재직하며 처리한 무수한 사건들 중 단 한 건도 무죄판결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실제로 형사피의자들이 무죄임을 주장하면 수사검사들이 이를 막기 위해 다른 꼬투리나 약점을 잡는 졸렬한 수단도 심심찮게 쓴다는 게 검사 출신인 이변호사의 귀띔이다. 더욱이 공인이 아닌 일반인의 경우 일단 구속되면 ‘무죄’보다는 ‘석방’이 더 큰 목표가 돼버리고, 그 경우 끝까지 재판을 이어가면 무죄판결을 받을 여지가 충분한 데도 얼렁뚱땅 억지자백을 한 뒤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또 검찰 인사철이면 각 지검장들 사이에 해당 지검의 무죄율이 새삼 민감한 사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보다는 ‘유죄추정’ 관행이 우리 형사사법시스템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 제27조 4항은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며 무죄추정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고, 형사소송법 역시 관련규정을 두고 있다. 주지하듯, 무죄추정은 형사절차상에서 아직 공소의 제기가 없는 피의자는 물론 공소가 제기된 피고인까지도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원칙적으로 죄가 없는 자에 준하여 다뤄져야 하고, 그 불이익은 필요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대원칙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사문화(死文化)된 지 오래다. 특히 재산범죄처럼 복잡하고 유무죄 여부가 애매한 사건의 경우 검찰은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피의자에게 유리하게 법해석을 하기보다는 웬만하면 유죄로 추정해버리곤 한다.

    ‘이용호 게이트’ 특검 특별수사관을 지내고 1998년 변호사로 개업한 이창현 변호사는 지난 8월 ‘형사변호와 무죄’란 사례집을 펴내 형사피고인의 인권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운 바 있다. 이 사례집은 어떤 경우에 무죄판결이 나오는지 실증적으로 분석해보자는 취지에서 살인, 강도상해 등 중범죄에서 단순범죄에 이르기까지 실제 발생한 무죄사건을 수집한 것으로, 이변호사를 포함한 법무법인 ‘세인’ 소속 변호사 5명이 직접 이끌어낸 무죄사건 34건을 포함해 모두 36건의 무죄사건 사례를 담고 있다.

    이변호사는 “범죄유형별로 볼때 살인, 상해치사, 강도상해 등 강력사건 중 특히 2심 재판에서 증거를 엄격히 판단한 결과 무죄로 선고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징역 1∼2년의 단기형이 선고되는 사건도 당사자인 피고인에겐 인생이 걸린 문제이므로 중형일 때와 마찬가지로 증거를 엄격히 판단해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면서 “증거인멸이나 도주우려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수사 초기엔 구속수사 대신 구속영장 청구시까지 48시간이 부여되는 긴급체포제를 활용해 피의자를 수사한 뒤 무죄가능성이 있는 사건은 불구속재판을 원칙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 실제로 48시간이면 웬만한 형사사건은 유무죄가 판가름난다”고 지적한다.

    무죄추정 원칙 누른 유죄추정 관행

    검찰의 기소관행에도 문제가 널려 있다.

    “이유없이 무죄판결이 나진 않는다. 사건 자체가 애매한 경우 1심 재판부와 2심 재판부의 법률적 판단이 달라 무죄판결이 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검사의 수사가 미진한 결과일 때가 많다. 즉 유죄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증인의 일관성 없는 증언만으로 기소하거나 수사검사가 기소 이후부터는 사건이 공판부 소관이란 이유로 공판에 입회하지 않고 사건 입증과 관련해 공소유지를 담당하는 공판검사에게 조력하지 않는 관행 등이 그런 사례다.”

    김일두(80) 변호사는 “수사 미진의 책임은 검찰에 있지만, 그에 앞서 일선 경찰관의 법률지식이 낮거나, 반대 주장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사건 전체를 유죄로 몰고가는 등 경찰의 수사능력과 질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라며 “경찰이 송치한 이런 사건의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은 채 기소 여부를 결정한 뒤 그 기록을 단순히 법원에 ‘전달’하는 ‘지게꾼’ 역할만 하는 검사가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꼬집는다.



    이런 사례는 최근에도 발생했다. 10월8일, 남편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탤런트 오미희씨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공판검사가 수사검사에게서 넘겨받은 수사자료만 보고 구형하는 바람에 징역 2년6월을 구형해야 할 것을 징역 1년으로 잘못 구형해 재판장이 이를 정정해주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

    서울지검장, 광주고검장, 대검찰청 차장 등을 두루 거치며 30년간 검사생활을 한 뒤 1981년 변호사로 개업한 김일두 변호사는 지금까지 국내 최다로 알려진 60여 건의 무죄판결을 이끌어내 ‘무죄판결의 대가’로 통한다. 1992년과 99년에 ‘억울타, 난 죄없어’라는 무죄변론집을 펴낸 그는 1993년 당직변호사제 도입의 산파 역할을 했고, 지금도 무료변론활동을 벌이고 있다.

    검사 과오 걸러주지 못하는 결재라인

    ‘사법피해자’ 양산의 원인을 검사의 자질에서 찾는 법조인도 있다. 법률사무소 ‘청지’ 강지원(54) 대표변호사는 “곧잘 무리한 수사로 이어지는 ‘공명심 수사’야말로 검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며 “검사가 특정 사건에 대해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도 없이 편견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대개 지인(知人)들의 사건관련 청탁 때문으로 부실·편파수사가 되기 쉽다”고 강조한다. 즉 공소권 행사 여부가 검사의 자의 내지 독선으로 흐를 위험성과 외압 등 외부적 요인에 의해 좌우될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변호사 역시 검사의 수사능력과 성실성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명백한 과실이나 착오가 아닌 대부분의 검사 과오는 검사 개개인보다 검찰 내부 시스템의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데 공감한다.

    무엇보다 주임검사(사건담당 검사)에게 사건처리에 대한 전권(專權)이 주어지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주임검사가 1∼3년차의 초임검사일 경우 수사경험 미숙과 편견으로 사건처리과정에서 과오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데도, 부장검사-차장검사-검사장으로 이어지는 결재라인에서 공소장 기입사항 등 형식적 하자만 지적할 뿐 사건기록을 꼼꼼히 읽지 않는다는 것. 그럴 경우 검사의 과오를 제대로 걸러주는 기능은 거의 제로(0)에 가깝다는 것이다.

    강변호사는 이런 관행의 개선을 위해 “1∼3년차 초임검사에게 독자적인 수사권을 주지 않고 법원의 예비판사처럼 보조검사 정도의 지위를 부여해 수사에 참여하게 하되 사건처리에 대한 결정권은 4년차 이상 경력의 검사에게 줘 사건기록을 검토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란 개인적 견해를 밝힌다.

    검사의 과중한 업무부담도 과오를 부추기는 한 요인이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평균으로 따질 때 2003년 상반기(1∼6월) 검사 1인당 1일 사건부담량은 8.4∼8.9건에 이른다. 한 달 평균 200~300여 건을 처리해야 할 만큼 배당되는 사건이 많다. 1993년 초임검사 시절을 보냈던 한 변호사는 “그해에 결혼을 했는데,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에도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거의 밤 12시까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약식사건을 포함해 매월 500건 정도씩 처리했다. 지금도 평검사의 업무량은 살인적이다”고 토로한다.

    이는 물론 민사사건조차도 형사사건화해 해결하려는 사회적 경향 때문에 고소가 남발되는 탓도 크다. 그러나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검찰 내부에서 나온다. 즉 부장검사-차장검사-검사장으로 이어지는 결재라인을 한 단계 줄이는 한편 일반적으로 평검사에 비해 수사경험이 풍부하고 업무량이 적은 간부급 검사에게 평검사가 며칠씩 매달려야 하는 소위 ‘깡치사건’(기록이 두껍고 복잡해 해결이 어려운 사건) 등을 처리하게 하면 수사일선에 있는 평검사들의 업무부담을 대폭 줄여 수사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통상 부장검사에게 배당되는 항고사건이 고참 평검사에게 떠넘겨지는 사례마저 있을 만큼 부장검사의 업무부담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허물어진 ‘공소장일본주의’

    사정은 사법부라고 다를 게 없다.

    법무법인 ‘새얼’(인천) 임판(35·사시32회) 변호사는 “무죄를 다투는 거의 모든 형사사건의 변론과정에서 법원의 유죄추정이나 선입견의 장벽에 가로막히는 경험을 했다. 검사가 제출한 모든 사건기록과 증거자료를 심리 전에 검토한 뒤 재판에 임한 판사를 설득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더욱이 판사의 심증이 이미 한 쪽으로 쏠린 경우 그 사건에 대해 무죄를 입증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다”고 털어놓는다.

    이는 곧 ‘공소장일본주의(公訴狀一本主義)’ 원칙이 완전히 허물어졌음을 시사한다. 공소장일본주의란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때 공소장만 법원에 제출하고 기타 서류나 증거물은 일절 첨부·제출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이는 법관에게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을 갖지 않게 하고 모든 당사자의 주장과 입증은 공판정을 통해서만 하게 하여 법관으로 하여금 백지상태로 공판에 임하게 함으로써 재판의 공정을 기하려는 데 취지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공소장일본주의를 지키는 판사들은 눈 뜨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요즘은 되레 사건기록을 미리 보고 공판에 임하는 판사가 부지런한 판사로 평가될 정도다. 이 경우 결국 확실한 유죄의 증거가 없는데도 피해자측의 증언만 믿고 그럴 것이라 추리하거나 수사기록에만 치중해서 판결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가까운 일본만 해도 마약 투약사건 심리에 30분 정도 걸리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선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왜 공소장일본주의가 지켜지지 않는 걸까. 창원지법 한 소장판사의 말이다.

    “그 이유는 판사가 미리 사건기록을 검토한 뒤 공판을 진행하면 재판 운영의 신속성과 효율성이 높아지고 그 결과 선고 기일이 앞당겨지는 등 피고인에게 유리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판사의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그러나 무죄를 다투는 등의 민감한 사건에서는 판사가 사건기록을 미리 읽고 공판에 임할 경우 예단을 갖게 될 수도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재판부가 많이 늘었으므로 이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이뿐 아니다. 상급심에서 파기당하지 않고 인용될 수 있는 판결, 이른바 ‘모범판결’을 선호하는 법원의 관행도 문제다. 판사라면 누구나 자신의 판결이 상급심에서 파기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상급심에서 파기된다는 것은 판사가 오판을 했다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 고법 부장판사 승진에도 파기율이 높아지는 게 이로울 리 없다.

    대전지법과 인천지법에서 5년간 판사로 근무했던 임판 변호사는 자신이 대전지법 홍성지원에서 판사로 근무하면서 당시 미성년자들을 2개월간 구금시켰다가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강간사건으로 구속된 3명의 소년에 대한 변론을 맡은 한 변호사가 사건 이후 자취를 감춘 피해자를 찾아내 무죄 판결을 받아낸다는 스토리의 법정소설 ‘그림자 새’를 출간한 바 있다.

    ‘타협적 판결’ 선호하는 법원

    임변호사는 “판사에 따라 사실 및 법률관계에 관한 판단이 다른 경우가 없을 수 없지만, 1심에서 무죄판결을 꺼려 유죄를 선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욱이 대부분의 피고인이 유죄를 선고받는 현실에서 무죄판결은 예외적·이례적이므로 판사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것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가 신빙성이 없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는 방법으로 무죄판결문을 작성하던 일제시대부터의 관행에서 비롯한 것으로, 현행법엔 무죄판결에 대한 구체적 방법이 규정돼 있지 않음에도 확고한 관행이 돼버렸다”고 말한다.

    이같은 문제는 세상에 대한 경륜이 부족해 사실관계의 파악능력이 낮은 일부 법관들의 자질 및 인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검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법부 전반에 걸친 구조적 병폐의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판사의 업무량이 과중하다보니 법원에선 유무죄의 경계선상에 있는 사건에서 실체적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보다는 소위 타협적 판결(유죄판결을 하되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해 석방하는 경우)을 통해 피고인이 항소를 하지 않게 하는 경우마저 있다. 즉 피고인이 1심에서 무죄를 주장했는데 실형이 선고되지 않고 집행유예나 벌금형이 선고되면 향후 2심 재판에서 허비되는 시간과 변호사 선임 비용 등을 고려해 항소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대형사건의 경우 검찰과 마찬가지로 법원 역시 국민 법감정을 의식해 죄의 성립 여부를 떠나 피고인에게 쉽게 보석결정을 내주지 않는 일도 적지 않다.

    법관의 법리오해도 종종 생겨난다.

    지난 6월 폭행과 협박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모(37)씨는 피해자 염모(39·여)씨로부터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합의서를 받아내 1심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폭행과 협박 혐의가 2001년 12월부터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에 포함됐다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재판부가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하는 바람에 10월2일 항소심 재판에서야 공소기각 판결을 받기도 했다.

    이밖에도 1심에서 유죄판결을 내렸으나 대법원의 무죄판결 판례와 상치되는 경우, 친고죄일 경우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했는데도 관련기록을 도외시해 유죄판결을 하는 경우도 있다.

    판사 출신으로 사법개혁국민연대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대구가톨릭대 신평(47) 교수(법학)는 “판사, 검사들이 특권의식부터 버려야 한다. 약식사건의 경우 일부 판사들이 ‘검찰에서도 봐주려는 사건 아니냐’며 정확한 심리를 하지 않고 판결을 내리는 등 일종의 검찰-법원간 공생관계가 형성돼 있다”고 꼬집는다.

    이렇게 정의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동안 형사피의자 및 피고인들이 인신구속으로 인한 무고한 옥살이는 물론 엄청난 후유증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근본적인 문제다. 더욱이 소년범에 대한 구속기소는 자칫 진학기회 등을 박탈할 수도 있어 신중해야 한다. 어느 나라나 소년에 대해 쉽게 구속할 수 없도록 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 무차별적으로 구속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법피해자’ 구조활동을 벌이고 있는 전국공권력피해구조연맹(약칭 전공련) 조남숙(50) 집행위원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달 평균 20∼30건의 피해구조 요청이 들어왔는데 참여정부 들어 다소 줄었다. 그러나 여전히 수년씩 재판을 받으면서 이혼·가출 등 가정파탄, 실직 및 사업기반 상실, 생계상 피해, 자살 기도 등 원상복구가 사실상 힘든 피해를 당한 무고한 ‘사법피해자’의 호소가 잇따르고 있다”고 밝힌다.

    사정이 이렇지만, 검찰에서 무혐의처분을 받은 형사피의자와 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형사피고인에게 유일한 피해구제책이라 할 수 있는 형사보상제도에도 허점이 많다. 국가가 지급하는 형사보상금은 구금 1일당 5만원 정도에 불과해 실질적 보상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예산마저 모자란다. 법무부에 따르면 형사보상금 집행실적은 2001년 24억4800만원(290건), 2002년 19억6700만원(243건), 2003년 상반기(1∼6월) 10억4200만원(121건)으로 연간 11억여 원에 불과한 예산규모를 훨씬 웃돌아 예산 확충이 시급한 형편이다.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피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법원이 판결 취지를 관보와 일간지에 게재하는 무죄판결공시제도 역시 법원의 소극성 때문에 유명무실하다. 대법원의 각 법원별 무죄고시 현황에 따르면, 2002년 한 해 1심 법원 등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피고인 1994명 중 3.1%인 62명의 무죄판결 취지만 관보 등에 게재됐다. 2003년 1∼7월의 경우도 무죄를 선고받은 피고인 1585명 중 50명만 무죄사실이 공시됐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무리한 구속수사로 인한 유죄판결의 오류를 사전차단해 최소화하는 것만이 인권을 지키는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검찰의 잘못된 수사로 예측불가능한 상태에서 ‘인격적 사망선고’를 받고 인생행로가 뒤틀리는 ‘사법살인’을 막을 대안은 있을까. 관건은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얼마나 철저하고 적법한 수사를 했는지, 무리한 수사로 구속기소된 사람을 법원이 얼마나 걸러주는지에 달려 있는 셈이다.

    법률소비자연맹 홍금애 실장은 “현행 형사사법절차에서도 수사과정에 녹음·녹화를 의무화한다면 형사피의자와 형사피고인의 인권보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수사과정에 녹음이나 녹화가 가능했었다면 1987년의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나 2002년 10월 발생한 서울지검 피의자 폭행치사사건 등이 발생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인 서울대 조국 교수(법학)도 “피의자 신문 때 녹음을 의무화하고 변호인 입회를 보장하면 수사과정에서 진술번복으로 인한 문제점도 최소화할 수 있고, 지금과 같은 자백위주 수사가 아닌 과학수사를 하게 돼 인권침해 시비가 원천봉쇄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일례로 경찰이 수사권을 가진 영국의 경우 피의자 신문상황을 변호인이 녹음한 뒤 그 테이프를 법원에 제출하면서부터 인권침해 빈도가 줄고 오히려 범인 검거율이 높아졌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현재 피의자가 자백할 때만 녹음을 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강압수사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

    신문과정 녹음·녹화 도입해야

    조교수는 “법무부가 과거에도 ‘피의자 신문시의 변호인 입회권’을 보장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마련한 적이 있으나 입회를 제한할 수 있는 예외적 경우를 둔 전례가 있어 최근 논의되고 있는 변호인 입회권이 법제화되려면 좀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한다.

    그럼에도 정작 검찰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대검찰청 국민수 공보담당관은 “워낙 사건이 폭주하고 검사 수는 제한돼 있는 데다 검찰의 입장에선 증거판단에 대해 법원과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또 피의자의 유죄를 적극적으로 입증하려는 과정에서 의율착오 등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검사들은 이를 최소화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고 답한다.

    대검 공판송무부의 한 관계자도 “언론이 검찰을 너무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죄사건에서 수사상·공판상 문제점이 없지 않겠지만, 그 이상으로 검사들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열심히 일한다. 대검 차원에서는 올해 상반기에 검사 과오로 인한 무죄사건을 최대한 억제하라는 지시를 일선 지검에 내린 바 있다”고 항변했다.

    검찰의 항변에도 일리는 있을 것이다. 수사와 재판은 둘 다 신이 아닌 인간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법피해자’를 양산하는 형사사법시스템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죄없는 사람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은 또다른 범죄다.

    검찰에 기소독점권을 부여한 까닭은 검사가 법률전문가로서 ‘인권의 옹호자’이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죄추정’에 목 매는 잘못된 신념은 자칫 막강한 공권력을 등에 업고 직권남용을 일삼게 할 위험성을 내포할 뿐이다. 검사(檢事)는 ‘검사(劍士)’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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