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꼬리 무는 ‘토익 게이트’ 실체

점수 조작? 난이도 조절 실패?

  • 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3-10-27 17: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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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해 200만명의 한국인이 토익에 울고 웃는다. 토익점수는 기업체 서류전형 통과티켓이자 사법고시 응시 허가증이다. 그러나 토익에 대한 신뢰성, 공정성, 투명성 논란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꼬리 무는 ‘토익 게이트’ 실체
    취업 준비생 정모(23·여)씨는 지난 5월 정규 토익(TOEIC·Test of English for International Communication) 성적을 확인한 후 눈물을 떨궜다. 매일 하루 8시간씩 토익공부에만 매달렸는 데도 5월 성적이 4월에 비해 무려 45점이나 떨어진 것. 졸업을 앞두고 휴학한 정씨는 지난해 10월부터 매달 토익을 치러왔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매번 점수가 조금씩 올랐고, 지난 겨울방학엔 소위 ‘족집게 학원’을 다닌 덕택에 단숨에 50점이나 올리기도 했다. 정씨는 “매달 똑같이 열심히 공부하는데 5월엔 795점, 6월엔 900점이 나왔다”며 “토익이 과연 내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점수를 받은 ‘토익커(토익 응시자)’는 비단 정씨뿐이 아니다. 시험 결과가 발표되자 마자 5000여 개에 달하는 토익 관련 인터넷 게시판은 후끈 달아올랐다. 대부분 ‘5월은 폭탄달(토익점수가 낮게 나오는 달)이다. 결과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글들이었다.

    ‘가채점했을 때 900점이어서 마음을 놓았는데, 방금 점수 확인하고는 경악했어요. 100점이나 떨어졌거든요. 제발 전산장애였으면 좋겠어요.’

    ‘4월에는 백분위(percentile rank·자신보다 점수가 낮은 응시자의 비율)가 64%에 680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5월에는 백분위가 75%로 올랐는데도 점수는 650점으로 낮아졌어요.’

    ‘점수는 30점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백분위는 14%나 오르죠? 올해 1월부터 매달 시험을 보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납득하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한국 토익에 좌절했습니다. 일본에 토익 원정 갈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 토익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더군요. 이거 반 농담으로 던진 말이지만, 실행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점수에 대한 의문은 토익 개발사인 미국 ETS(Educational Testing Service)와 국내 토익 주관사인 재단법인 국제교류진흥회 토익위원회(이하 토익위원회)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특히 토익위원회가 매달 공개해오던 평균점수와 점수대별 인원수를 지난 5월 시험부터 공개하지 않으면서 ‘점수 조작설’ ‘난이도 조절 실패설’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동안 응시자들은 문제와 정답, 문항별 점수 등을 공개하지 않는 토익의 특성상, 평균점수와 백분위 등으로 시험 난이도와 자신의 상대적 실력을 가늠해왔다. 그러나 정보가 공개되지 않으면서 이렇게 짐작하는 것마저 어렵게 된 것. 또 일부 응시자들은 “올해 3월부터 기출문제가 출제되지 않기 시작했다”며 “토익위원회가 이러한 경향 변화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고 질책했다.

    ‘4월 평균점수가 너무 높아서 5월은 짜게 매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좀 얄밉네요.’

    ‘성적 확인하는 데 왜 3주일이 넘게 걸립니까. 컴퓨터로 하면 채점이 금방 끝나잖아요. ETS가 점수 조작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닐까요?’

    ‘900점 이상 득점자가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자 일부 문제를 오답으로 채점한 게 아닐까?’

    ‘점수를 짜게 줘서 사법고시 준비생들이 시험을 많이 보게 해 돈 벌려는 수작이다.’

    ‘다시 한번 촉구한다. 5월 성적 조작 의혹 해명하고 재발 방지 약속하라. 불합리한 약관을 바로잡고 투명하게 거듭나라.’

    ‘기출문제가 나오지 않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공문을 발표하고 바뀐 토익점수환산표를 알려줘야 응시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 겁니다.’

    토익 관련 다음카페의 한 운영자는 이른바 ‘5월 토익대란’이라 불리는 지난 사태가 “대규모 시위로까지 번질 뻔했다”고 전했다.

    “카페 운영자 회의에서 서울 종로에 있는 시사영어사 본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결국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신분이 노출될 게 두려워서였죠. 취업하려면 앞으로도 계속 토익시험을 봐야 하는데, 시사영어사가 마음만 먹으면 시위 주동자들의 토익점수를 낮게 매길 수도 있을 것 아닙니까.”

    많은 토익 응시자들은 ‘토익위원회=시사영어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토익위원회는 ‘국제 문화교류’를 위한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문화관광부 예술진흥과 소속이다. 1982년 시사영어사의 출연금으로 설립되긴 했지만, 영리를 추구하는 시사영어사와는 별개의 기관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법적인 얘기고, 현실적으로 토익위원회와 시사영어사는 매우 밀접하다. 토익위원회는 종로 시사영어사와 한 건물을 사용하고, 홈페이지는 (주)와이비엠시사닷컴에서 대행 제작·관리한다. 응시자들은 각 지역의 시사영어사 분원에서 토익시험을 접수한다. 시사영어사 직원이 토익위원회로 옮겨와 근무하기도 한다. 대다수 응시자들은 토익위원회를 시사영어사란 기업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다.

    다음카페 ‘토익 900을 넘어’ 운영자 강지완씨는 ‘5월 토익대란’이 일어난 요인에 대해 “취업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데다, 사법고시에도 토익이 도입되면서 토익커들이 좀더 민감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하지만 그 동안 쌓여온 응시자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한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토익위원회의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시험 주관이 신뢰성을 떨어뜨려 각종 의혹까지 낳게 됐다는 것이다.

    토익 응시자 수는 해마다 크게 늘고 있지만, 정작 토익위원회는 그에 걸맞은 서비스 개선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게 응시자들의 불만. 널뛰는 점수, 잦은 응시료 인상, 파트별 점수 비공개, 점수 산정방식 비공개, 20일이 넘는 채점 기간, 성적이 발표되기 전에 다음달 시험을 접수해야 하는 불합리한 일정 등이 주요 불만사항이다.

    대학 졸업을 앞둔 김모(25)씨는 “취업을 앞둔 상황에서 토익점수 5점에도 울고 웃는다. 그런데 시험 난이도가 매번 다르고, 점수가 100점 이상 차이 날 때도 있다. 아무런 사전통보 없이 평균점수 등을 슬쩍 없애버리고…. 토익위원회 홈페이지에는 자유게시판조차 없다. 취업의 볼모가 되어 토익에 놀아난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고 말했다.

    “점수 조작설, 터무니없다”

    일부 응시자들이 제기하는 ‘점수 조작설’에 대해 토익위원회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뛴다. 그러나 채점 및 점수산정 등이 모두 미국 ETS에서 비공개로 이뤄지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는 입장.

    토익위원회의 한 임원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적 추측임을 전제로 ‘5월 대란’의 요인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기출문제가 더 이상 출제되지 않으면서 ‘족집게’ 방식으로 공부하던 일부 응시자의 점수가 대폭 하락했다는 것이다. 그는 “ETS가 올해부터 기출문제를 출제하지 않는다고 알려왔다”고 밝혔다. 그는 또 “점수에 불만을 제기하는 대다수는 중하위권으로 보인다”며 “영어실력을 제대로 갖춘 고득점 자에겐 별다른 영향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5월 시험에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전체 평균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5월 응시자의 수가 4월보다 대략 20% 가량 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고시생인 것 같다”며 “리스닝(listening)에 취약한 고시생들은 이질적 집단이라 전체 성적 분포를 상당히 왜곡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올해 1∼4월 응시자 수는 회당 15만명 수준이었으나, 5월에는 19만 2000여 명으로 급증했다. 다음은 이 임원과 나눈 일문일답.

    -백분위가 올라가도 점수는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일례로 이전에는 백분위가 75%이면 755~800점이 나왔으나 5월에는 650점에 그쳤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백분위는 1992년부터 토익위원회가 자신의 상대적 실력을 판단하라는 의미에서 제공하는 데이터일 뿐, ETS가 제공하는 공식 데이터는 아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백분위에 따른 점수는 응시자 집단의 실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최근 토익 평균점수는 550∼600점까지 들쑥날쑥하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게 아닌가.

    “난이도는 늘 고르게 출제된다. ETS는 50점 정도의 점수 등락은 통계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기출문제가 더 이상 출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왜 미리 응시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나.

    “(공표를) 고려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하진 못했다. 사실 그것은 ETS가 할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시험을 관리할 뿐이다.”

    토익위원회는 5월부터 평균점수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ETS의 권고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토익을 도입한 전세계 60여 개국 응시자의 영어 실력은 상당히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각자 통계자료를 제공하면 나라간에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ETS는 각국에 적합한 기준을 제시할 때까지 토익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나라별로 토익점수가 차이 나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것인가.

    “경쟁관계에 있는 한·일 양국간에도 문제가 될 수 있고…. 국내에서도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모 그룹의 성적이 그보다 실력이 낮다고 평가되는 그룹보다 오히려 낮게 나타나서다. 이런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 토익을 없애자는 여론이 일 것이다. 교육사업은 상당히 민감하다.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 토익에 관한 정보가 노출되어서 하등 좋을 게 없다.”

    -토익을 시행하는 나라들은 모두 평균점수 공개를 철회했나.

    “ETS가 각국 토익 주관사의 상전(上典)은 아니다. 권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각 나라가 결정할 몫이다. 일본은 평균점수를 계속 공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꼬리 무는 ‘토익 게이트’ 실체

    전문가들은 고교 및 대학 입시에까지 토익이 활용되는 것에 대해 ‘과도한 토익 확대’ 라고 꼬집는다.

    기출문제가 더 이상 출제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한국 토익에서만 일어난 변화다. 전세계 60여 개 토익 시행 국가 중 정규 시험을 치르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인데, 이 때문에 지난 3월부터는 같은 날 시험을 치러도 한국과 일본 응시자들은 각기 다른 문제를 풀게 됐다. 토익위원회는 “문제 유출이 성행하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몇 년 전부터 이를 우려한 ETS가 아예 한국에서만 기출문제를 출제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토익 소비자’ 사이에서는 기출문제에 관한 여러 가설이 난무했다. 가령 ‘2003년 10월 정규 토익에는 2002년 9∼11월에 나왔던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출제된다’ ‘한국만 정규시험을 치르는 짝수 달에 기출문제가 많이 출제된다’ ‘작년도 짝수 달에 나온 문제는 금년도 홀수 달에 다시 나온다’ 등등.

    이러한 기출문제는 토익 시험장에서 불법적으로 유출되어 일선 어학원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유포된다. 취업 준비생 정모씨는 서울의 한 유명 어학원에서 수강한 ‘족집게 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실전반’이란 강좌들은 대개 기출문제 풀이반이에요. 교재는 따로 없고 매시간마다 유인물을 나눠주죠. 가령 10월 정규 토익 준비반이라면 지난해 9∼11월에 출제된 문제를 집중적으로 푸는 겁니다. 또 시험 전날 특강을 하는데, 자주 나오는 문제를 꼭꼭 찍어줘요. ‘이건 2000년 6월 문제로 작년 8월에도 나왔다’는 식으로 설명도 해주고요. 강사 밑에서 일하는 ‘조교’들이 시험장에서 읽기 문제는 외워오고 듣기 문제는 몰래 녹음해온다고 해요.

    시험 다음날엔 유출해온 문제를 다시 풀면서 정답을 맞춰봅니다. 지난 2월에는 특히 듣기 영역에서 기출문제가 많이 나왔어요. 강사가 ‘우리반 학생들은 듣기 점수가 최소 450점 이상 돼야 한다’고 강조했을 정도죠. 사실 그 강사는 잘 가르치는 편이 아니에요. 단지 기출문제를 얻어내려고 수강하는 사람들이 많죠. 심지어 어떤 수강생은 시험 1주일 전에만 학원에 나와 기출문제를 몽땅 얻어가곤 해요.”

    정씨는 “족집게식 공부가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면서 “영어실력을 향상시키는 것과 토익점수 올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답했다.

    “점수 따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미리 풀어본 문제라서 몇 번이 정답인지 아니까요. 또 그만큼 절약한 시간으로 다른 문제들을 여유롭게 풀 수 있지요.”

    기출문제 강의는 시사영어사에서도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지난해 시사영어사에서 토익강좌를 수강했던 조모(29)씨는 “물론 강사는 시험장에서 문제를 유출했다고 말하지 않지만 수강생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고, 또 그래서 수강 등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시험장에서 녹음해온 듣기 지문을 외국인을 시켜 다시 녹음한 뒤 수업교재로 활용했다”며 “종종 예전 시험에서 내가 틀렸던 문제가 수업교재에 나오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토익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도 기출문제를 유출시키는 주요 통로다. 시험 당일 오후만 되면 회원들이 각자 기억나는 문제들을 게시판에 올려 시험문제를 ‘복원’한다. ‘△△학교에서 시험보지 마세요. 스피커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번 문제는 정답이 두 개예요. 둘 다 맞게 채점할까요?’ 같은 다양한 정보도 모여든다.

    일부 학원강사들은 홈페이지에 정답과 주요 어휘, 문법 등을 정리해 게재한다. 토익위원회는 시험 시작 전에 문제를 유출할 경우 처벌(2년간 응시 금지)한다고 경고하고 있지만,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다.

    토익위원회 관계자는 “국내 응시자 수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아 어깨에 힘을 주고 미국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지만, 이러한 부정행위가 공개적으로 지적되는 바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한 토익 강사는 “연간 응시자가 100만명이 훨씬 넘기 때문에 ETS는 한국시장만을 위해 따로 문제를 출제해도 크게 남는 장사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토익은 국내 도입 첫해인 1982년 1300여 명이 응시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에는 연간 150만명이 응시, 20년 만에 1000배가 훨씬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누적 응시인원 650만명). 올해 들어 회당 15만명을 유지하던 응시자 수가 8월 이후에는 회당 22만명에 육박해 올해 총 응시인원은 20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토익 응시자 규모는 2004년도 대학수학능력평가시험 응시자 60만명, 2003년 대졸자 25만명, 2002년 운전면허취득자 195만명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또한 전세계 228개국에서 실시되는 토플(TOEFL) 응시자(70만여 명)의 세 배에 가까운 규모다.

    토익은 1979년 일본 산업계가 산업체와 무역상사 직원들의 영어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미국 ETS에 출제를 의뢰한 것을 계기로 개발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체 신입사원 선발 평가기준으로 쓰이기 시작해 최근에는 진학, 입사, 국가고시, 승진 등 다양한 분야에까지 확대됐다. 갈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토익점수에 울고 웃게 된 것이다.

    특히 토익이 2004년부터 사법·외무고시, 2005년부터는 행정·기술고시 및 변리사시험의 영어시험을 대체하게 되면서 토익 소비자는 날로 확산되는 추세다. 지난 3월 고시정보 전문지 ‘시사법률신문’이 고시 준비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94%가 “영어 대체시험으로 토플, 토익, 텝스 중 토익을 선택할 것”이라고 답했다.

    토익 응시자 규모의 비약적 성장과 함께 토익 관련 시장도 매우 커진 상태. 어학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토익 시장은 응시료, 학원 수강료, 출판물 판매 등을 합쳐 연간 50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올해 응시료 수입만 해도 640억원(200만명×3만2000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토익 관련서는 서점가의 외국어 서적 부문 베스트셀러를 싹쓸이하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가 집계한 외국어 부문 베스트셀러 10위 안에는 토익 책이 무려 7권이나 포함됐다. 올해 초 대기업에 입사한 김모(29)씨는 “졸업을 앞두고 휴학해 1년간 토익점수 따는 데 든 비용이 학원비, 책값, 응시료를 합해 120만원 정도”라고 털어놨다.

    최근 채용정보업체 리크루트가 구직자 83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5%가 ‘취업할 때 최소 800점 이상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취업할 때 토익점수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란 질문에는 74%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채용 시 토익점수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토익 공부를 계속하겠는가’라는 질문에는 단 5%의 응답자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채용정보업체 휴먼피아가 지난해 5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취업 준비생의 80%가 ‘토익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답했다.

    요즘 서울 신림동 고시촌은 토익 때문에 초긴장 상태에 빠져 있다. 내년도 1차 사법고시에 응시하려면 토익점수가 700점 이상 돼야 하는데, ‘목표 달성’에 실패한 고시생이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점수를 따지 못해 사법고시 응시를 포기한 고시생도 나오고 있다는 소문이다. 고시전문학원 춘추관의 이민수 원장은 “9월부터는 1차 시험에 대비해 법률과목 모의고사 강의를 듣는 게 일반적인데, 등록 학생수가 작년보다 30%나 감소했다. 토익 성적 때문에 본업인 법학 공부는 뒷전으로 미룬 것 같다”고 전했다.

    점수 따로, 실력 따로

    그렇다면 취업 준비생은 물론이고 중·고등학생, 교사, 공무원, 군인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이 매달릴 만큼 토익은 합리적인 영어실력 평가도구인 것일까.

    전문가들은 고등학교나 대학이 신입생 선발에 토익점수를 반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토익은 산업체 종사자들의 영어실력을 평가하기 위해 개발된 시험이지, 학문에 필요한 영어능력을 평가하는 도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일부 외국어고 및 자립형 사립고, 그리고 90여 개 대학이 신입생 선발에 토익점수를 반영하고 있다. 성신여대 최인철 교수(영어영문학)는 “학문에 필요한 영어는 실용영어와는 다르다”며 “토익으로 대학 신입생을 뽑는다는 발상은 토익이 우리 사회에서 과도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꼬집었다.

    ‘법조인의 국제화’를 명분으로 내년부터 사법고시 영어과목을 토플, 토익, 텝스 점수로 대체한다고 하나, 이러한 방침은 현재로서는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 고시생들이 단순히 ‘기준 점수 넘기기’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1차 시험 준비생인 전모(25)씨는 “시험을 네 번 치러 토익 700점을 넘겼지만, 영어 실력이 이전보다 향상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어 공부를 한 것이라곤 족집게 학원을 두 달 다닌 게 전부다.”고 말했다.

    토익 고득점자가 계속 증가하는 데도 기업에서의 토익점수 신뢰도는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1998년 ETS가 내놓은 보고서(TOEIC Report on Test-Takers Worldwide 1997-98)에 따르면 당시 한국 응시자의 평균점수는 480점이다. 그러나 2002년 평균점수는 580.5점으로 4∼5년 만에 100점이나 상승했다. 이는 북아메리카(547점)와 남아메리카(544점)의 1997∼98년 평균점수보다 40점 가량 높은 수준이다.

    취업정보업체 스카우트의 신길자 주임은 “기업들이 토익에 의존하는 이유는, 현재로서는 토익이 그래도 가장 빠르고 간편하게 영어실력을 측정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라면서 “많은 인사 담당자들이 토익점수가 아무리 높아도 영어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신입사원이 많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전했다. 때문에 최근에는 신입사원 선발시험에서 자체적으로 영어 인터뷰를 진행하는 회사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신주임은 기업들이 영어점수보다 회화 실력을 중시한다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했다.

    “한 구직자가 토익점수를 밝히지 않은 채 공기업에 입사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면접관들이 ‘왜 토익점수를 제출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능숙한 영어로 ‘시험점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영어를 좋아해 영어 회화를 열심히 연습했다. 그것이 업무를 수행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지방대 출신임에도 거뜬히 채용됐습니다.”

    서울교대 이완기 교수(영어교육학)도 “토익 시장이 점점 확대되는 것은 토익을 대체할 만한 영어평가 도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토익은 듣기와 읽기로만 구성된 이해능력 테스트다. ETS는 듣기와 말하기, 읽기와 쓰기의 연관성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토익 응시자들은 ‘점수 올리기’식 공부만 하고 있어 토익점수와 실제 영어실력 사이의 괴리가 큰 것이 현실이다. 말하기와 쓰기 등 표현능력까지 평가할 수 있는 시험을 개발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교수는 말하기와 쓰기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영어실력 평가도구의 한 예로 일본의 실용영어기능검정(STEP)을 들었다. 1963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인의 영어능력 측정을 위해 개발된 이 시험은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능력을 모두 측정한다. 유치원생부터 장년층까지 해마다 400만명의 일본인들이 응시, 일본에서는 토익(연간 100만명 응시)보다 일반화된 영어능력 평가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토익의 노예들

    토익위원회의 일방적인 시험 주관, 달라진 시험 경향을 둘러싼 공방, 끊임없이 제기되는 토익점수에 대한 의문, 영어능력 평가도구로서의 타당성 논란…. 토익을 둘러싼 각종 논란은 잦아들 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2030 세대들은 ‘목표점수만 달성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는 태세로 토익 고득점을 향해 매진하고 있다. 토익점수 없이 세상을 향해 나서기엔, 그 선택의 폭이 너무나 좁기 때문이다.

    ‘토익 900점이 넘어도 서류전형 통과조차 힘든 시절이다. 좋은 학점에 제2외국어, 전산 자격증, 어학연수, 대학원 졸업장을 갖춰야 겨우 취업하는 2003년. 도서관에서 소위 ‘잘나간다’는 토익 책만 달달 외우면서 진짜 영어 실력보다는 어떻게 하면 단시간에 고득점 올리고 토익을 때려치울까 고민하는 후배들. ‘토익점수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는 학생들. 과연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걸까?(10월9일, 다음카페 ‘토익뱅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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