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외팔이 파이터’ 무에타이 복서 김선기

“신체장애가 별 건가요? 도전정신만이 살 길이에요”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입력2003-10-27 1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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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에타이 복서 김선기는 오른팔이 없다. 그러나 실력은 정상급이다.
    • 1993년 데뷔해 도중에 팔이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했지만 ‘도전정신 하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링 위에 올랐다. “팔이 없지만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보다 행복하다”는 외팔이 파이터의 강인하고 억척스런 라이프 스토리.
    ‘외팔이 파이터’ 무에타이 복서 김선기
    두주먹으로 싸워도 힘들 판에 왼쪽 주먹 하나로 거친 챔피언의 세계를 열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일반 복싱이 아니라 주먹, 팔꿈치, 무릎, 발 등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에타이(일명 킥복싱) 선수로 뛰고 있다. 세계 챔프를 꿈꾸며 강훈련을 하는 동시에 후학을 양성하는 사람, 그는 경기도 이천시에서 설봉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는 김선기씨다.

    올해 나이 만 29세. 외모만 보면 고교생이나 새내기 대학생 티를 못 벗은 미소년 같은 그가 왜 외팔이 되었을까. ‘외팔이 복싱선수가 세계 어느 하늘 아래 또 있을까’ 되새기면서 그를 만나러 갔다.

    설봉 무에타이 체육관은 이천시 버스터미널 근처 한 골목에 있었다. 체육관으로 들어서니 비릿한 땀 냄새가 풍긴다. 어디선가 TV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다가가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낡은 침대에 앉아 있던 반팔 차림의 외팔이 청년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김선기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어서니 김씨의 뭉툭 잘려나간 오른쪽 팔이 덩달아 움직였다. 쓸모 없는 환영의 손짓으로 보였다. 팔이 잘려나간 끄트머리 부분을 지져 살점을 감아놓았는데, 상당히 그로테스크해 바라보기 민망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움직이며 “왜 일찍 왔느냐”고 퉁명스런 반응이다. 약속시간보다 먼저 방문한 것에 다소 마땅치 않다는 표정. 그런 그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게 날카로웠다.

    -눈매가 상당히 날카롭군요.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쉽게 동의한다. 콧등이 튀어나와 상당히 고집스럽게도 보이지만 미남형의 얼굴. 피부도 깨끗하다. 얼굴 전면에 불구자라는 그늘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오만해 보일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그래서 마음 한켠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신체 불구자 특유의 애처로움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프레스기에 가루가 되어버린 팔

    -오른팔이 없다면 왼팔을 잃은 것보다 더 불편할 텐데 어떻습니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왼팔로 힘이 모아지고 있으니까요. 육체란 참 신묘해요.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에서 커버해주고, 한쪽이 부족하면 다른 쪽에서 힘을 더 불어넣어줘요. 제 전적은 30전 23승7패인데, KO승이 19개나 됩니다. 그중 왼쪽 주먹으로 상대방을 녹다운시킨 것이 절반 이상이에요.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이 그 힘을 대신해줍니다.”

    자연스럽게 오른쪽 팔이 없어진 연유로 화제가 옮겨졌다.

    “1996년 4월 경기도 안산의 베어링 공장에서 프레스기(압축기)가 오작동되면서 제 팔 위로 떨어졌어요.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가만히 앉아서 당했죠.”

    -정신을 잃었습니까.

    “아니요. 어디를 맞았다는 느낌만 들지 정신은 멀쩡하더라고요. 그보다는 순간적으로 제 팔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주위를 두리번거렸어요. 그런데 그 무거운 압축기에 눌려 살점 하나 없이 가루가 되어버렸더군요. 동료들이 더 놀라 부랴부랴 저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저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너무 큰 사고여서 작은 병원에선 감당하지 못한다는 거였죠. 광명시 성애병원까지 가서야 겨우 수술을 받았습니다.”

    -출혈이 심했겠는데요.

    “아니요. 프레스기가 떨어지면서 전기를 일으켜 제 팔을 지져버렸대요. 그래서 출혈은 심하지 않았죠. 만약 출혈이 심했다면 병원을 찾아다닐 때 죽었을 거예요. 그나마 프레스기에 감사해야 했죠.”

    -어떻게 정신을 잃지 않았을까요.

    “정신력 때문이었을 거예요. 저는 운동선수잖아요.”

    이후 그는 6개월 동안 병상생활을 했다. 병원에 있으면서 비로소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프레스기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머리통이 으깨지는 상상을 하다 악몽을 꾸기도 했다. ‘이대로 인생이 망가지는가’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그는 이천실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수도 배관 견습공으로 일을 배운 후 안산 베어링 공장에서 방위산업체 근무를 하다 이렇게 변을 당했다.

    “당시 저는 무에타이 선수였어요. 이천실고를 다니면서 정식 데뷔전을 가졌고, 전적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팔이 하나 없으니 복싱을 할 수가 있나요?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하루에도 여러 번 죽어버릴까 하는 마음을 가졌어요.”

    그를 살린 것은 베어링 공장이었다. 배상금을 받아야 하는데 법정에 가도 쉽게 해결이 안 되는 것이었다.

    “분명 회사측의 실수로 사고를 당했는 데도 복직이 안 됐어요. 퇴직금과 보상금 산정마저 제대로 되지 않더군요. 화가 났어요.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2년여의 투쟁 끝에 28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아냈습니다. ‘잃어버린 팔 값’이라고 생각하니 허망했지만 그러면서 죽고 싶은 마음은 싹 가셨어요. ‘좋다, 한번 해보자’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무에타이는 어떻게 다시 시작했나요.

    “고향으로 돌아온 후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장을 찾아갔습니다. 고교 1학년 때부터 무에타이를 익혔던 설봉체육관을 찾아간 거죠.”

    그곳에는 변함 없이 그를 반기는 스승이 있었다. 현 대한무에타이평의회 회장인 이원길(46)씨. 그는 상처받고 돌아온 제자에게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다.

    “초등학교 때 6년간 태권도를 배웠는데 좀 단순하더라고요. 화끈하지가 못하고요.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무에타이 경기를 봤어요. 주먹 팔꿈치 무릎 발, 닥치는 대로 상대방을 공격하는데 너무 남성적이고 멋졌어요. 그래서 곧바로 무에타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고로 제 무기 하나(오른팔)를 잃어버리고 만 거죠. 하지만 이원길 사범님은 ‘무에타이는 좌절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역경을 이기는 것이 무에타이가 주는 교훈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한쪽 팔은 없었지만 남은 무기들로 다시 무에타이를 시작했죠.”

    이렇게 외팔이 무에타이 선수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대회에 나가면 줄창 깨졌다. 팔 하나 없는 비애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인생에서 단 한순간도 풍족했던 적이 없었다.

    “장사꾼인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하셨어요. 저는 할머니 손에 키워졌죠. 늘 외롭게 컸어요.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해 동네 아이들이 저를 많이 괴롭혔죠. 맞기도 하고 공연히 욕을 먹기도 했고요. 가끔 집에 들르신 아버지가 약해빠진 제 모습을 보시더니 바로 태권도장으로 보내셨어요.”

    갑자기 도장에서 카랑카랑한 여자들의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보았더니 20세 안팎의 여자 3명이 리듬에 맞춰 발로 샌드백을 치면서 구령을 붙이고 있었다.

    -여자 관원들도 많습니까.

    “그럼요. 요즘은 여자들이 더 적극적이에요. 대부분 다이어트할 생각으로 체육관을 찾는데, 땀을 한번 빼고 나면 몸이 가뿐해진다고들 말해요. 신체의 노폐물이 모두 빠져나가면서 활력이 생기는 거죠.”

    현재 체육관 관원은 60여명. 그중 성인 관원의 반 이상은 여성회원이다.

    건달 아닌 예의 갖춘 스포츠인 육성

    -경기도 이천 하면 이정재 이석재 임화수 유지광 차지철 등 내로라하는 주먹들이 많지 않습니까. 지금도 이름난 주먹 중에 이천 출신이 꽤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들이 이런 도장을 통해 배출되는 게 아니냐는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먹이 아니라 도인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는 벽에 붙은 관칙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우리 관원은 무도 정신에 입각한 예의, 염치, 인내로 심신을 단련함’ ‘우리 관원은 상호 협력하면서 상경(서로 존경한다는 뜻)하여 관원 상호간에 단결을 굳게 함’ ‘관칙을 준수하고 사범 명령에 절대 복종함’이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

    -이천 하면 지금도 전라도 광주나 목포 주먹들이 숨을 골라 쉬면서 돌아간다고 하던데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는 주먹에 대해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역들이 이천 출신의 주먹이다 보니 세속적인 호기심을 끌지 않을 수가 없다.

    이때, 기다렸다는 듯이 30대의 한 관원이 끼여들었다. 회사원인 김진창(33)씨였다. 그 역시 사고로 두 팔을 잃고 방황하던 중 사정이 비슷한 김관장 이야기를 듣고 설봉체육관에 입관했다고 한다.

    “이천의 건달세계에는 계보가 있습니다. 소멸했다고 하지만 안 그래요. 유지광씨가 작고했을 때 이천에서 10대 소년들이 수계를 받았으니, 그들이 지금은 30대가 되었겠네요. 이처럼 계보가 있습니다. 다만 옛날처럼 노출되지 않을 뿐이죠.”

    ‘외팔이 파이터’ 무에타이 복서 김선기

    김선기씨의 부모는 경기도 이천에서 개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김선기씨는 아버지 김종화씨를 쏙 빼닮았다.

    이 말을 남기고 김진창씨는 체육관을 빠져나갔고 김선기씨가 다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저는 1998년 가을 이원길 사범한테 이 체육관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리 관원들이 조직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폭력에 연루된 적도 없고요. 저는 주먹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예의와 염치를 아는 스포츠인을 육성하고 있어요.”

    -프로 데뷔는 언제 했습니까.

    “1993년 10월 고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인천에서 데뷔전을 치렀는데 판정패했죠.”

    -흔히 킥복싱은 거칠고 부상이 심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잘못된 인식입니다. 부상으로 말하면 복싱이 더 하죠. 복싱경기는 얼굴만을 집중 공략하기 때문에 선수들 얼굴이 찢어지고 코가 함몰되고 망가지잖아요. 신체 중 가장 약한 곳이 면상입니다. 무에타이는 얼굴만 가격하는 게 아니라 복부 옆구리 무릎 궁둥이 가릴 것 없이 공격하죠. 체력을 많이 쓰기는 하지만 부상의 정도는 복싱보다 덜 합니다.”

    ‘愛人의 힘’

    -정식 데뷔한 지 10년이 됐는데 30 경기밖에 안 했군요.

    “무에타이는 인기 있는 스포츠가 아니어서 국내 경기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 못했죠. 게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부상을 당해서 몇 년 동안 쉬었고요. 근래는 무에타이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으니 경기가 자주 있을 겁니다.”

    -개런티는 얼마나 됩니까.

    “지난 8월30일에 있었던 호마 그랑프리 무에타이 대회에서 일본의 유스키 선수에게 판정으로 졌는데, 라이벌전이었기 때문에 대전료는 똑같이 160만원을 받았습니다. 가장 많은 대전료였죠. 사실 선수생활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선수들이 직장을 갖고 있어요. 사설경호원이라든지 공장에서 일을 한다든지 체육관에서 사범으로 뛰죠.”

    그의 체급은 페더급으로 한계 체중은 57kg이다. 그러나 평소 몸무게는 65kg 정도(키는 170cm). 따라서 경기를 앞두고는 2개월 동안 8kg의 체중을 감량한다. 그는 1999년 한국챔피언에 등극했다. 불구의 몸으로 챔피언에 오른 환희를 보통 사람들은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타이틀을 상실했다. 아무래도 불구의 몸이다 보니 허점이 많아 대부분 경기에서 원 없이 두들겨맞고 링을 내려왔기 때문이다.

    -신체의 불구로 한계를 느낀 적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상대방의 주먹은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팔이 온전하지 못하니까 상대방보다 50%밖에 주먹이 나가지 않죠. 상대방보다 왼손 주먹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하니 체력은 바닥나기 일쑤고요. 체력만 뒷받침 해주면 어떻게 해볼 수 있는데…. 지난번 경기에서도 유스키는 사정없이 달려들더군요. 턱을 한대 맞고 그대로 다운이 됐죠. 마음속에서는 ‘KO패하고 말지’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런데 링 밖에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는 소리가 제 귀를 흔들어대더군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일어났습니다. ‘끝까지 버텨 KO패만은 면하자’고 생각했고 역공격에 나섰습니다. 실컷 얻어맞은 뒤 판정패했죠.”

    하지만 이 경기 이후 많은 팬들이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쪽 팔이 없는 선수가 세계적 선수와 맞서 최선을 다해 싸우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던 것.

    -다운 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라’고 소리쳤다고 했는데, 그 중 누구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던가요?

    “물론 애인의 목소리였죠. 근래 저를 지켜주는 힘은 애인 박현희(23)입니다. 체육관에서 킥복싱을 배우다 사귀게 되었지요. 심성이 착하고 차분하며 이해심 많은 여자예요. 현희는 최근 간호학과에 입학했어요.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할 생각입니다.”

    -애인이 이제는 삶의 지렛대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죠. 현희는 항상 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고 저 역시 쓰러져도 현희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납니다. 비록 일어나면 더 많이 두들겨맞지만요. 그래도 안 아픕니다(웃음).”

    -사정없이 얻어맞은 후 링을 내려오면 애인이 뭐라고 합니까.

    “힘들면 그만 하라고, 후학이나 양성하라고 하죠. 하지만 저는 힘닿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에요. 도전정신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관원들에게 모범도 되고요. 불구의 몸인 데도 30대, 40대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 모습 자체가 그들에게 힘과 도전정신을 심어줄 거라 생각해요.”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주가 있습니까.

    “물론 있죠. 페더급으로 프로 데뷔한 박유성, 웰터급의 서상민 선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세계를 내다볼 만한 재목입니다.”

    -성인 선수도 있습니까.

    “전부 직장인들인데, 30대가 많아요. 그래서 선수 생활을 하기는 힘들죠. 대개는 체력단련이나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체육관을 찾습니다. 한 여성 관원은 6개월에 15kg을 감량했어요. 주로 허벅지, 배, 옆구리 등에 살이 많이 붙는데, 무에타이는 그쪽의 운동량이 많거든요. 살빼기로는 최고죠.”

    기본 없는 개성은 기형

    -선수가 될 사람과 일반인들의 지도법이 다릅니까.

    “다르죠. 그러나 초보 단계에서는 같습니다.”

    -초보에서 가르치는 기술은 무엇입니까.

    “우선 스텝을 배웁니다. 리듬이나 구령에 맞춰 스텝을 밟아나가죠. 그 다음 원투 스트레이트 치기, 네 번 연속해서 스트레이트 치기, 발차기, 샌드백 치기를 배우는데, 이 과정을 1∼2개월 동안 반복합니다. 여기까지는 공격 위주의 훈련법이죠. 2∼3개월이 지나면 방어 기술을 배우는데, 공격기술보다 어렵습니다. 고개를 흔들거나 몸통을 흔들며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면서, 발차기나 중단 킥, 상단 킥, 앞차기 등으로 역공격을 해야하니까요. 마지막으로 훅 치기를 익힙니다. 이 기술은 2개월 정도 배워야 합니다.”

    -똑같은 방법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지루하지 않을까요.

    “지루하다고 생각하면 운동이 안 되죠. 4개월부터는 훅 연결동작과 함께 스트레이트, 하단 킥, 어퍼커트 치기를 배웁니다. 이 과정이 더욱 힘들죠. 어느 정도 기초를 다졌지만 예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훈련받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훈련을 기계적으로 잘 따르는 사람들이 나중에 좋은 선수로 큽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배웁니까.

    “5개월부터는 팔꿉 치기, 팔꿉 틀어치기, 올려치기, 잡기, 무릎치기 등 연결동작을 배우죠. 이때는 자기가 응용해도 괜찮습니다. 기초가 다져진 다음에는 무예를 자신의 것으로 익혀가도 무방합니다. 6개월부터는 자기 체형에 맞는 스타일을 개발해서 이것을 중점적으로 키웁니다. 기초가 잘 다듬어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스타일이 구축됩니다. 하지만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겉멋이 든 상태로 훈련하다 보면 평생 이상한 스타일로 운동하게 됩니다. 일부에서는 개성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기본이 없는 개성은 기형이라 할 수 있죠.”

    -탈락자들이 언제 많이 나옵니까.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4∼5개월째에 지루함을 느끼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이 과정을 넘기면 저절로 무예의 길을 닦을 수 있죠.”

    -언제가 가장 힘듭니까.

    “글쎄요. 경기 중 잘린 팔 끝을 맞을 때입니다. 그 부분의 살은 단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 조직이 예민하거든요. 조금만 건드려도 찌르르 전기가 올 정도로 아픕니다. 이 부위를 주먹으로 맞으면 주저앉고 싶을 정도예요. 상처를 건드리면 더 아프다는 평범한 진리를, 잘린 팔 끝을 공격받으면서 절실히 느끼게 돼요.”

    그 다음으로 힘든 점은 후진을 기르는 데 자금이 달린다는 것이다. 촉망되는 선수를 계속 뒷바라지하고 싶은데 체육관 수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그는 안타까워했다.

    사진촬영을 위해 그의 부모가 사는 이천시 신둔면 지성리로 차를 몰았다. 이천시내를 빠져나오는데, 거리에 설봉이란 이름의 상호가 유난히 많았다.

    -왜 설봉이란 간판이 많습니까.

    “인근에 설봉산이 있거든요. 이천은 눈이 귀해요. 눈이 적은 고장인데 설봉산에만 눈이 쌓이니 이천 사람들은 설봉산을 신성시하죠. 그래서 설봉이란 이름의 간판이 많아요.”

    비교적 큰 야산 아래 드넓은 평원이 있고, 그 한켠에 김선기씨의 부친이 운영하는 개농장이 있다. 울타리의 초입에 이르자 개들이 일제히 컹컹 짖어댄다.

    김선기씨의 부친 김종회(62)씨 역시 상대방을 쏘아보는 듯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김종회씨는 “아이가 맞고 들어오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도장에 보냈노라”고 말했다.

    “나는 3대 독자요. 나 역시 맞고는 못살았어요. 나와 싸운 놈은 결국 항복을 해요. 나를 때린 놈 집 앞에 막사를 치고 사흘이고 열흘이고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복수를 하는 거요. 결국은 상대방 놈이 빌면서 용서를 구해요. 나는 지금도 자식놈들하고 팔씨름을 해서 진 적이 없어요. 나도 힘깨나 쓰는 사람이오. 그리고 건달기도 있었거든. 이천 건달들 중에 오랜 친구들도 꽤 있어요. 나는 정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놈들하고는 언제든지 일합을 해왔지. 그런 피가 내 아들한테도 이어지고 있다고 봐요.”

    김씨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대견스럽다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는 3년 전 이곳으로 들어와 개농장을 하고 있는데, 한 달에 서너 마리 정도만 팔리는 등 수입이 신통치 않아 자식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아이를 스파르타식으로 길렀습니까.

    “아이가 맞고 들어오면 혼을 내줬지요. 맞고 올 거면 아예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요. 어떻게든 이기고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하긴 부모는 객지로 나돌고, 나이 든 할머니와 위로 나약한 두 누나만이 집에 있으니 나날이 외롭고 심성도 약해졌을 수 있다. 김선기씨는 스스로 강인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객지로만 나돌던 아버지를 원망해본 적은 없습니까.

    “아버지는 항상 저를 위해 희생해주셨는데 왜 원망을 합니까. 또 아버지는 제게 도전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여건이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도 아버지를 존경하기보다는 비난하고 원망하곤 하는데, 이례적이군요.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죠. 아버지에 대한 존경은 이례적인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잘났건 못났건 제 아버지인데. 아버지가 20년 동안 개장사를 하셨어도 제게는 훌륭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대단히 존경하는군요.

    “물론이죠. 인생의 스승으로 이원길 선생님도 존경합니다. 사고를 당한 후 좌절과 낙망 속에서 사는 저를 일으켜 세워주신 분이에요. 불구의 몸도 활용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분이죠.”

    종합스포츠타운 세울 것

    -신체가 건강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는 더 불구가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정상인 중에 정신적 장애자가 너무 많습니다. 엄살도 많고요. 폐암 걸린 사람 앞에서 자기 감기가 걱정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봤습니다. 신체 불구가 뭐 별건가요. 신체적 장애자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정신적 장애가 더 큰 문제라고 봐요.”

    -장래 희망이 무엇입니까.



    “종합스포츠타운을 세울 생각입니다. 사우나, 헬스를 겸비한 스포츠타운을 세워서 거기서 생긴 수입으로 후진을 기르고 싶어요.”

    -인생 좌우명이 무엇입니까.

    “도전정신이죠. 최선을 다해 도전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저는 해보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먹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도전정신 하나면 헤쳐나가지 못할 것이 없다는 김선기씨.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우는 해는 그의 환히 웃는 얼굴 위로 붉은 노을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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