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한강의 로렐라이’ 백제 도미설화 재조명

“도미는 바닷가 어부 아닌 서울에 거주한 귀족”

  • 글: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 tohsh@chol.com

    입력2003-10-28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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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미전은 실존했던 백제시대 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다. 역사성, 문학성을 갖춘 장대한 스케일의 고대 설화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주마간산 격으로 알고 있다. 최근엔 학계와 행정기관에 의해 도미설화가 왜곡되기도 한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아 사람들이 도미설화의 가치를 깊이 음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한강의 로렐라이’ 백제 도미설화 재조명

    두눈을 잃은 남편을 찾아 배에 몸을 실은 도미부인. 조선 삼강행실도.

    결혼은 남녀 배우자 모두에게 정절을 요구한다. 그 당위성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불륜이 일상화되고, 이혼가정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는 지금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이러한 때에 백제 시대 한 부부의 운명적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듯하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면 춘향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춘향은 소설의 주인공일 뿐 실존 인물은 아니다. 한국인이 소설의 주인공에 불과한 춘향을 추앙하면서도 그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던 실존 인물 도미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도미설화는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진주와 같다.

    도미전(都彌傳)은 고려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 열전’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모 대학 교수가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서 도미전설을 수집하여 서울의 모 유력 일간지에 그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교수는 여기서 열전의 주인공 도미와 도미의 부인이 살았던 곳이 충남 보령이었다고 주장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황당한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보령시는 열녀비각을 짓고 그 안에다 열녀 도미처(都彌妻)의 영정을 모셨다. 물론 열녀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송덕비를 세우고 전각을 짓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도미설화의 발생지가 충남 보령이라는 잘못된 주장에 근거해 보령시가 기념물을 만든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최초의 기록인 ‘삼국사기 열녀전’의 내용으로 보아 도미 부부가 살던 곳은 한홀(漢城, 현 경기도 광주) 지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뮤지컬 ‘도미전’이 제작중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동안 잘못 알려진 도미전의 내용이 뮤지컬에선 어느 정도 바로잡아지기를 기대해본다. 무엇보다 ‘도미전’은 허구가 아닌 백제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실화(實話)란 점이 부각되어야 한다. 그리고 원전에 적혀 있는 대로 역사적 사실과 배경이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현대에서 거듭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1500년 전 실존인물의 러브스토리

    조선 세종은 ‘삼국사기’의 도미전을 ‘삼강행실도’(1432년)에 수록하여 열녀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 이야기는 ‘동사열전’을 비롯, ‘동국통감’ ‘오륜행실’ ‘신속동국행실’ 등에도 한결같이 수록되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국인은 도미전을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열녀전으로 꼽아온 셈이다. 먼저 ‘삼국사기 도미전’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자.

    도미는 백제 사람이었다. 비록 벽촌 소민(編戶小民)이지만 자못 의리를 알며 그 아내는 아름답고도 절행(節行)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백제 개루왕(蓋婁王)은 이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무릇 부인의 덕은 정결(貞潔)이 제일이라 하지만, 만일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 좋은 말로 교묘히 꾀면 넘어가지 않을 여인이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미가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의 아내는 죽더라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개루왕의 복수

    그러자 왕은 도미의 부인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왕은 도미를 궁궐 안에 머물러 있게 하고 신하에게 왕의 옷을 입힌 뒤 말과 몸종을 딸려 밤에 도미의 집에 가게 했다. 그에 앞서 왕은 사람을 보내 도미의 아내에게 왕이 온다고 기별했다.

    가짜 왕은 도미의 집에 도착하여 도미 부인에게 “내가 오래 전부터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네 남편과 내기 장기를 두어 내가 이겼다. 내일은 너를 왕궁으로 데려가 궁인으로 삼을 것이니 이제 너의 몸은 나의 소유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짜 왕은 도미의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서려 했다.

    그러자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께오서 망령된 말씀을 하실 리가 없사온데 어찌 제가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하옵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곧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 모시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물러나와 미모의 몸종을 곱게 단장시켜 대신 들어가 수청을 들게 하였다.

    후에 왕이 속은 사실을 알고 격노하여 남편 도미에게 속인 죄를 물어 두 눈을 뽑은 뒤 조각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버렸다. 그리고 그 부인을 다시 강제로 범하려 하자 부인은 “지금 저는 남편을 잃은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대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하오나 지금은 월경으로 몸이 더럽사오니 다른 날에 목욕 재계하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해 왕이 믿고 허락하였다.

    부인은 그 길로 도망쳐 남편이 버려진 강가에 이르러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때 홀연히 조각배 한 척이 떠내려왔다. 부인은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거기서 도미 부부는 풀뿌리로 연명하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蒜山) 아래로 가니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차스럽게 살면서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는 내용이다.

    왕의 짓궂은 장난과 부부의 열정적 사랑이 잘 대비된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부부의 행동이 감흥을 부른다. 이야기의 결말도 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삼국사기’ 원문을 중심으로 도미전을 조명하려 한다. 이 원문에서 파생한 전설, 전기, 구전설화는 마음대로 보태고 뺀 허구가 많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통해 “도미전의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언제인가, 전설화(전기화)한 시기는 언제인가, 도미 부부가 살던 곳은 어디인가, 도미는 과연 편호소민이었던가, 체형(體刑)을 당한 뒤에 버려진 강안(江岸)은 어디인가, 도미 부인의 배가 도착하여 남편과 해후한 천성도(泉城島)는 어디인가, 망명하여 여생을 마친 산산은 어디인가” 하는 7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 일곱 가지의 요소는 곧 도미전을 바로 알 수 있는 사안들이다.

    도미전은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후 전국에 걸쳐 아류작들이 파생되어 전해져온다는 점이 특징이다. 도미전은 여러 고문헌에 기록되어 전해오기도 하고, 구전(口傳)으로 유포되어 있기도 하다. 구전되고 있는 도미전설로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蘇城里)의 전설, 경남 진해시 청안리(晴安里)의 전설,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창우리(倉隅里)의 전설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충남 보령시 도미기념물은 오류

    보령시의 전설은 1990년 앞서 언급한 모 교수가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낚시하러 갔다가 소성리에서 수집하여 서울의 모 유력 일간지에 발표한 도미전설이다. 보령시에 ‘도미항(道美港)’이 있고, 도미 부인이 남편을 그리던 ‘상사봉(相思峰)’이 있으며 ‘미인도(美人島)’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보령 일대가 도미 부부가 실제로 살던 곳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지명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오해로, 전공영역을 벗어난 위치에서 흔히 범할 수 있는 억측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원본의 내용에 강진(江津)은 있어도 항구(港口)는 없다. 즉, 도미설화의 발생지는 바다를 낀 항구가 아니라 큰 강변이었다는 것이다. 천성도(泉城島)는 있어도 상사봉과 미인도는 없다. ‘도미항’ ‘상사봉’ ‘미인도’는 전국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이곳들을 모두 도미전설의 발생지로 보아야 하는 모순이 나온다.

    도미 부부가 진해에 살았다는 진해시의 전설은 ‘삼국사기’의 도미전에 나오는 지명 천성도와 경남 진해 가덕도(加德島)의 마을 이름인 천성도(天城島)가 동일한 발음이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다. 더구나 진해 해안 청안리에 도미묘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도미전의 결말 대목은 “도미 부부가 고구려에 가서 살았다”로 되어 있다. 이 대목은 경남 진해에 도미묘가 들어섰다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당시 진해는 신라의 영토였다. 진해의 어부들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출항하기에 앞서 도미의 묘에 제를 올리는 의식을 전통적으로 행하여왔다.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모신 가묘일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경기 광주군의 전설은 ‘도미진’(渡迷津 또는 斗迷津)이란 지명이 도미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발생한 듯하다. 두 눈동자를 잃은 도미가 버려진 강변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에 전설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곳은 도미전의 사건이 발생한 무대인 한홀(廣州)과 인접한 지역인 것은 사실이다.

    도미전은 백제 민간에 암암리에 유통되어오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 통일신라기 때 구전 또는 문헌으로 전승되던 것을 고려 시대에 수집·정리하여 ‘구 삼국사기’ 열전에 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다시 김부식이 ‘삼국사기’ 제 48권 열전 도미전으로 옮긴 것이다. 결론적으로 경기 광주군의 전설이 ‘삼국사기’의 도미전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는 도미를 백제 개루왕 때 사람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백제의 제4대 왕과 제21대 왕의 이름이 똑같은 데 있다. 제4대 개루왕은 서기 128년부터 165년까지 38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제21대 개루왕은 서기 455년부터 475년까지 21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무려 300년 이상의 시대 차이가 발생한다.

    ‘한강의 로렐라이’ 백제 도미설화 재조명

    조선 삼강행실도의 백제 도미설화 삽화.

    삼국 시대 왕명을 보면 같은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백제만 예로 들어도 제4대 개루왕과 제21대 근개루왕, 제5대 초고왕과 제13대 근초고왕, 제6대 구수왕과 제14대 근구수왕 등과 같이 선대의 왕명을 되풀이하여 사용하던 관습이 있었다. 물론 선대왕과 구별하기 위하여 ‘근초고왕, 근구수왕, 근개루왕’과 같이 호칭 앞에 근(近)자를 일부러 붙였다. 이 ‘근’은 ‘大’를 의미하는 ‘근’(>큰)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도미의 사건은 언제 발생한 것인가. 제4대 개루왕 때는 백제 건국 초기라서 도미전의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사회적인 상황이 성숙되지 않았다. 당시 백제는 부족국가에 가까운 작은 나라였고, 고구려 역시 초기 부족국가로 졸본에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 사이엔 대방·옥저·예맥이라는 나라들이 건재하여 있었다. 따라서 도미전의 내용 중 “고구려의 산산 아래에 피신하여 여생을 마쳤다”는 대목은 제4대 개루왕 때에는 실현되기 매우 어려웠던 일인 것이다. 또한 “제4대 개루왕은 품성이 공손하고 조행이 있었다(性恭順有操行)”는 기록이 있어 가능성을 더욱 흐리게 한다. 이 기록이 맞다면 제4대 개루왕은 ‘도미의 두 눈을 뽑는’ 그런 잔인한 사건을 자행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남침과 내기 장기

    제21대 개루왕 때를 면밀히 살펴보자. 이때의 백제는 영토가 황해도·경기도·강원도 영서(嶺西)·충청도·전라도에까지 확대된 최강의 시대였다. 왕권은 강력했고 왕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도미전의 사건과 같은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을 만큼 시대적 배경이 여러 모로 성숙해 있었다. 도미전의 배경이 된 지명인 도미진·천성도·산산이 모두 제21대 개루왕 이후에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미진은 현재 경기도 광주시 한강변에 위치해 있다. 그 이전에는 도미진, 산산 등 한자지명 우리말은 없었고 고유지명인 ‘얼매곶, 매시달’만 쓰였다. 지명은 도미전이 4대 개루왕 때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제21대 개루왕은 성품이 호탕하고 호전적이었다. 개루왕 15년(469) 백제는 고구려의 남변을 침범할 정도였다. 그러나 말년에 급격히 국세가 기울어 개루왕 21년(475)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서울인 한홀(漢城)은 함락되고 개루왕은 비참하게 전사했다. 겨우 망국을 모면했을 뿐 나머지 부분은 의자왕과 다를 바 없다. 절대적 패인은 개루왕이 고구려에서 밀파한 간첩 도림(道琳)과 바둑을 즐긴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대목은 도미전에서 왕과 도미가 내기장기를 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볼 때 도미전의 사건은 제21대 개루왕 재위 21년(455∼475) 동안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루왕 재임기간 중에서도 후반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천성도(泉城島)·산산(蒜山) 그리고 고구려에 망명하였다는 대목과 관련이 있다.

    도미전에는 도미가 체형을 당한 후 배에 실려 떠내려가다 도달한 섬이 천성도이며, 망명하여 여생을 마친 곳은 고구려의 산산이라고 적혀 있다. 이 두 곳은 백제 시대에는 얼매곶과 매시달로 불렸던 곳들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장수왕이 남침하여 백제 영역을 점령한 이후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정하였다. 여기서 고구려가 백제 중부 지역의 지명을 개정한 시기는 장수왕이 강점(백제 문주왕 1년, 475)하고 나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시기가 무작정 늦춰질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가 진흥왕 12년(551) 고구려의 점령지역에서 10군의 땅을 약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자왕 때(492∼518)에 얼매곶이 천정구(泉井口)로, 매시달이 산산(蒜山)으로 개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천정구가 후에 천성도(泉城島)로도 불렸거나, 아니면 천정구 부근에 있는 섬 이름이 천성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명이 동일한 ‘천(泉)’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도미전은 배경 지명인 ‘천성도’와 ‘산산’이란 지명이 발생한 시기 이후, 즉 문자왕 말년(518) 이후에 전기화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흔히 노래나 전설에 등장하는 지명은 세월이 흘러도 잘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지어진 시대를 알리는 징표로 남는다. 가령 정읍사,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양산도가 등도 앞에 붙어 있는 지명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경우와 같다.

    도미전은 도미의 신분을 편호소민(編戶小民)이라 하였다. 일부에선 도미가 평민으로 직업은 어부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편호’는 호적을 말함이니 ‘편호소민’은 ‘호적에 오른 평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도미의 신분을 이처럼 비하한 것은 그 아내의 절행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적인 꾸밈인 듯하다.

    이번엔 ‘삼국사기’ 원본이 위작(僞作)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를 원본의 내용에서 확인해 보자. 첫째, 당시 상황에서 “벽촌의 촌부가 의리를 안다”는 표현은 현실성이 없다. “두메에 묻혀 사는 아낙네의 절행이 널리 알려져 칭찬이 자자하였다”는 내용도 현실성이 없다.

    둘째, 도미전에 왕과 도미 부인 사이에서 벌어진 공격과 방어는 도미 부인의 승리로 끝났다. 이 공방의 과정에 등장하는 조역들은 왕을 대신한 신하와 도미 부인을 대리한 여종(婢女)이다. 만일 도미가 ‘편호소민’이라면 어떻게 종을 거느릴 수 있었을까. ‘편호소민’과 ‘종을 거느림’은 어느 한 쪽이 위작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자가 사실이 아니면 도미전은 그 스토리가 파괴되지만 ‘편호소민’이란 신분은 다른 신분으로 바꾸어도 큰 차이가 없다.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도미라는 사람은 백제나라 벼슬을 하는 사람(도미라 사은 백졔나라 벼 사)”이라고 밝혀 도미의 신분을 격상시켰다. 세종대왕 때 지어진 ‘삼강행실도’에는 도미의 벼슬에 대한 내용이 없다. 영조 때의 ‘삼강행실도’가 ‘삼국사기’의 원문에 나타나는 ‘편호소민’을 삭제하고 오히려 ‘벼 사’으로 바꾸어놓았음은 ‘삼강행실도’의 저자 역시 도미전의 전체적인 구성과 그 내용으로 보아 앞뒤가 안 맞기 때문에 이를 부합하도록 하기 위하여 위작인 듯한 부분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셋째, 도미가 백제의 ‘소민’이었다면 그가 입궐하여 느닷없이 ‘아내’를 걸고 왕과 장기를 두는 장면도 자연스럽지 않다. 왕과 내기 장기를 두는 행위는 조석으로 왕과 대면하는 고관이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상의 여러 정황을 종합하건대 도미는 ‘편호소민’이나 어부가 아니었다. 그 후예인 성주 도씨의 족보를 비롯한 여러 문헌이 밝히는 바와 같이 도미는 백제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던 지배계층 신분이었음에 분명하다.

    경기 광주 한강변에 ‘도미진’ 지명

    그렇다면 도미 부부의 거주지는 어디였을까.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첫째 전설은 도미의 고향을 충남 보령 지역으로 추정하였고, 둘째 전설은 경남 진해시 웅천 지역으로 추정하였다. 만일 이 두 지역에서 도미 부부가 거주하였다면 저녁 무렵 왕의 옷을 입은 신하가 종들을 거느리고 궁궐을 나서서 그 날 밤 도미 집에 도착했다가 다시 궁궐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당시 교통 여건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경남 웅천 지역의 경우 백제 땅이 아니라 신라 땅이었다.

    이런 점으로 미뤄 도미의 거주지는 당시 백제의 수도인 현재의 경기도 광주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에서 하룻밤 사이에 왕래가 가능한 거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한 궁궐이 광주(廣州)에 있었고 왕이 도미를 내친 강안 역시 궁궐에서 멀지 않은 한강변의 도미진이었기 때문에 도미의 거주지도 광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백제 전기 시대의 서울인 경기도 광주엔 한강이 북부와 서부를 굽이쳐 흘렀다. 한강변엔 네 개의 큰 나루가 있었다. 도미진, 광진, 송파진, 삼전도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 네 나루 중에서 어느 곳이 과연 도미가 버려진 나루였을까. 도미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네 나루 이름 중에서 주인공 도미와 발음이 동일한 것이 곧 ‘도미진’이다. ‘용비어천가’는 광주(廣州)의 북쪽 검단산 기슭으로 흐르는 한강변에 두미진(渡迷津)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조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이 나루를 두미진(斗迷津)으로 한자만 두(斗)로 다르게 적었다. 이 나루 이름 ‘두미’, ‘도미’와 도미설화의 주인공 ‘도미’(都彌)는 발음상 닮은 꼴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도미진은 광주의 동북부에 있는데 나룻배로 왕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도 광주 검단산(黔丹山) 아래의 한강변에 도미진이 있다고 소개했다. ‘대동지지’는 광주의 동북 20리에 ‘두미진’(斗迷津)이 있다고 했고 그 북안(北岸)을 두미천(斗迷遷)이라 불렀다.

    특히 도미진이 검단산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곳이 주인공 도미를 방기(放棄)한 강안일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한다. 검단산은 일명 군월산(軍月山)으로도 불린다. 군월산은 ‘곰달뫼’로 추독할 수 있고 아울러 이것의 대응기록인 검단산도 ‘곰달뫼’로 추독할 수 있다. 그런데 광주의 검단산은 현재 공주(熊州)의 배산인 공산(公山), 부여의 배산인 부소산(扶蘇山)과 거의 같은 위치에 있다. 공산과 부소산이 모두 백제 수도의 진산(鎭山)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에 검단산이 백제의 세 수도 중에서 첫 번째 수도인 경기 광주의 진산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고 하겠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서 검단산은 광주의 동쪽 7리에 위치한 진산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도미진’과 ‘검단산’이 광주 동북방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도미진’은 광주의 중심부, 즉 궁궐에서 검단산을 넘어 그 산기슭에 위치한 강변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미진’의 곁에 있는 벼랑(遷)의 이름까지 도미천(渡迷遷)이라 불렸다. 왕은 검단산 너머의 산기슭 강안에 체형당한 도미를 방기(放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눈이 뽑힌 채 신음하는 도미가 그 곳에 버려졌고, 또한 도미가 조각배에 실려 떠내려간 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도미의 성명이 그곳 지명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지명을 바탕으로 나루도 ‘두미진’으로 명명되어 내내 전하여오는 것이라 하겠다.

    속설에 따르면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앞 나루터는 건넛마을 팔당으로 가는 팔당나루인데 이곳을 ‘도미나루’라고도 부른다. 도미를 내던진 강변이라고 구전되어온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건너편을 도미천(渡迷遷)이라고 하는데 신라어로 강가 벼랑의 돌길을 천(遷)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도미천의 어원은 신라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다.

    이런 점을 근거로 개로왕 당시 백제 왕궁의 위치는 도미나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할 것이며, 도미와 그 부인이 흐르는 강물 따라 떠내려가서 해후한 천성도(泉城島)는 한강 하류의 어떤 섬일 것이다.

    ‘한강의 로렐라이’ 백제 도미설화 재조명

    서울·수도권 일대 고지도.

    그동안 여러 학자가 천성도가 어딘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진해 전설의 발생 근거지인 ‘천성(天城)’은 ‘삼국사기’ 도미전에 등장하는 ‘천성(泉城)’과 그 발음이 동일하기 때문에 혼란을 줬다. 그러나 천성(天城)은 왜구의 가덕도 침범을 막기 위하여 마을 안에 쌓은 돌성(石城)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일 뿐, 현재로는 축성 연대를 알 수 없고 삼국 시대에도 이 지명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 없다. 따라서 도미전의 천성도와 진해 가덕도의 천성도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보다는 천성도(泉城島)가 한강 하류의 어느 섬(島)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두미진’에서 출발한 배가 떠내려 가 닿을 수 있는 지역은 한강의 하류지역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천성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강 하류와 임진강 하류가 합류하는 지역의 지명이 교하(현 경기도 파주 交河)다. 이 지명은 백제 시대 지명 ‘얼매곶(於乙買串)’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구려는 남침하여 이 지역을 장악한 뒤 이곳을 ‘천정구(泉井口)’로 한역하여 불렀다. 이후 신라 경덕왕(757)이 교하(交河)로 개정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쓰고 있다.

    흔히 암·수의 교미(交尾)를 고유어로 ‘어르다’라고 한다. 백제어로 물을 ‘매’라 하였고 교미를 ‘얼-’이라 하였다. 두 강물이 얼르(交合)는 곳이기 때문에 백제어로는 ‘얼매’라 불렀고 고구려는 이것을 ‘泉井(천정)’으로 한역한 것이다. ‘얼=泉’ ‘매=井’의 관계다. 신라 역시 얼=交, 물=河로 한역하여 불렀다.

    여기서 잠시 살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천성(泉城)’이 얼매(於乙買)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의문이다. 문제의 ‘천성(泉城)’은 천정구(泉井口)에서의 ‘천(泉)’과 바로 이웃한 진임성(津臨城-현재의 임진)에서의 ‘성(城)’을 절취하여 합성한 지명(‘泉+城→泉城’)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交河(교하)의 옛 이름인 천정구(泉井口)에서 천성도(泉城島)가 파생한 것일까. 아니면 이웃한 천정구와 이웃한 임진현(臨津縣)에서 파생한 것일까. 여기서 다시 제기되는 문제는 그것이 ‘천성(泉城)’이 아니라 ‘천성도(泉城島)’와 같이 ‘도(島)’가 끝에 붙어 있다는 점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성도(泉城島)’는 천성(泉城)의 한 섬(一島)으로 풀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하(交河)를 중심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위치(河口)에 있는 섬(一島)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문제의 ‘천성도(泉城島)’를 찾는 데 길잡이가 되어 줄 기록은 여러 지리지에서 발견된다. 두 강물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일미도(一尾島)가 바로 천성도일 가능성이 있다. 여러 지리지의 기록은 일미도가 교하면의 서쪽 20리에 있는 섬인데 그 둘레가 15리라 하였다. 이 섬은 조수나 홍수로 물이 불면 잠겼다가 물이 빠지면 제 모습을 드러내는(水漲則沒) 섬이다.

    도미가 떠내려간 곳은 한강 일미도

    일미(一眉)의 ‘일’은 천(泉)의 백제 말인 ‘얼’과 비슷하고 ‘미’는 ‘매’와 비슷하기 때문에 가능성은 충분하다. 앞서 백제어 ‘얼매’가 고구려에 의해 ‘천성’으로, 신라에 의해 ‘교하’로 개명됐다고 밝힌 바 있다. 더욱이 떠내려가는 조각배가 서해 바다에 이르기 전 마지막으로 멈출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일미도일 수밖에 없다. 이 섬에 도미가 먼저 도착하였고, 이어서 그 부인이 도착하여 극적으로 만났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산산은 천성도에서 다시 만난 도미 부부가 도피하여 안착한 고구려의 영토라고 되어 있다. 이와 관련, 도미사건이 발생한 이후의 역사적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래지 않아 백제 개루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개루왕의 아들 문주왕은 서울인 경기도 광주(廣州)를 버리고 공주로 피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도미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고구려 땅에 머물러 안주하는 셈이 된다. 고구려 장수왕이 살매(현 충청북도 청주)까지 점령하였기 때문에 도미가 머물러 있던 지역은 자연스럽게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런데 사실 ‘산산’은 함경남도의 남부와 강원도 북부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다. 반면에 필자가 추정한 ‘천성도’는 한강 하류 교하 부근으로 두 지점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과연 도미 부부가 그토록 먼 곳으로 피신하였을까. 도미 부부는 ‘천성도’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백제 궁궐 부근에서 끔찍한 참사를 겪은 만큼 궁궐로부터 되도록 멀리 도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천성도’와 가까운 곳에 또 다른 ‘산산(蒜山)’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은 충남 당진의 북쪽 바다 가운데 둘레가 9리인 산도(蒜島)가 있다고 했다. 또한 ‘대동지지’는 교하와 이웃한 파주에 산봉(蒜峯)이 있다고 하였다. 이 두 지명에 ‘산(蒜)’자가 들어 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한 곳이 도미 부부가 최종 정착한 ‘산산(蒜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개루왕이 전사한 후 충남 당진, 경기 파주 역시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됐다.

    결론적으로 도미전의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백제 제21대 개루왕 말기(475)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도미전이 전기화된 것은 문자왕 말년(518) 이후일 것으로 추정한다. 도미의 신분은 평민 어부가 아니라 백제 귀족계급의 고위 관료였다. 도미의 거주지는 백제의 수도(王京)에서 가까운 경기지역이었다. 도미가 체형으로 두 눈을 잃고 배에 실려 띄워진 강안(혹은 河上)은 현재의 경기도 광주 동북부에 위치한 검달산 아래(黔丹山下)의 한강변 도미진이었다. 도미 부부가 재회한 천성도(泉城島)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현재의 교하면 일미도였다. 도미 부부는 다시 만난 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파주나 당진으로 가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 삼강행실도, 도미설화 찬미

    도미전을 최초로 기록한 문헌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1145)에 그 전에 있던 ‘구 삼국사기’의 내용을 옮겼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조선 세종이 충신·효자·열녀를 선정하여 그 행적을 글로 싣고 각각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하게 한 책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다. 이 책의 열녀 편에 백제 도미 부인이 가장 먼저 소개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삼강행실도’엔 6명 열녀의 사례만이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세종은 도미설화를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출중한 러브스토리로 인정한 듯하다.

    독일 라인강이 로렐라이의 전설로 유명하다면 서울의 한강엔 도미의 전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에 현대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인색했다. 사실 도미전에 대해선 “백제 왕이 가난한 어부의 부인을 굳이 탐했다는 것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스토리 전개며, 폭군의 횡포라는 느낌만 줄 뿐”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상당부분 오해에 기초한다. 필자가 도미전을 조명한 바에 따르면 도미전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왕과 귀족 도미가 내기 장기를 두게 되는 과정이 이해가 되고, 도미 부인이 왕의 전령을 속이는 장면도 이해가 된다. 왕이 도미 부부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에선 어떠한 권력 투쟁적인 배경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상상도 가능하다. 백제 왕과 도미 부부가 이내 전쟁에 휩싸이게 되는 시대적 배경도 흥미롭다. 도미전은 상상력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스스로 창조해내는 원전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많은 문학적 영감을 준다.

    특히 수도권의 여러 지명과 역대 역사서가 도미전 이야기와 얽혀들어 있어 도미전의 가치를 한층 높여준다. 이는 도미전이 단순히 가공의 얘기가 아니라 실제의 얘기라는 점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서울 주변 지역과 한강 곳곳에서 도미전의 자취가 배어나는 것 또한 도미전에 대한 흥미를 더욱 높여주는 요소다.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잊혀진 옛이야기를 제대로 복원해볼 필요성이 크다 하겠다. 도미전의 복원에 문화예술계, 연예계는 물론 문화관광부, 서울시, 광주시가 적극 나서기를 기대해본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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