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헷갈리지 말자, 골프는 스포츠다

  • 글: 신문선 SBS 축구해설위원

    입력2003-10-28 14: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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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헷갈리지 말자, 골프는 스포츠다
    “몸의 말단 부위인 발로도 볼을 차는데 손으로 치는 골프가 어렵다고요? 살아 있는 축구공을 20년이나 찼는데 죽어 있는 골프공을 왜 정확히 못 치겠습니까.”

    골프를 우습게 알던 시절, 필자는 골프의 무서움(?)을 모르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그때가 1988년 겨울. 가까이 지내던 선배(연세대 아이스하키 감독 이재현)로부터 골프채를 선물받은 직후였다. “족쟁이(발을 쓰는 축구선수를 일컫는 은어)는 평생을 발로 먹고 살아서 손으로 하는 운동은 못하지” 하고 놀리는 선배의 말에 화가 나 연습장으로 달려간 것이 나와 골프의 첫 만남이었다.

    연습장에서 필자는 한마디로 ‘골프신동’이었다. 20년 넘게 축구를 했고 대학 시절 갖가지 종목을 섭렵한 덕분인지 정말 펄펄 날았다. 누가 골프가 어렵다고 불평하기라도 하면 속으로 ‘흠… 도대체 골프가 뭐가 어려워? 본인의 운동신경을 탓해야지’ 생각하곤 했다.

    감히 변명을 해보자면 그게 전적으로 내 탓은 아니다. 초보자의 오만을 뜯어말리지는 못할 망정 부채질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연습장의 한덕일 프로였다. 한프로는 사람들에게 “신위원은 운동신경이 발달해 정말 잘 칩니다. 금방 싱글이 될 겁니다”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마디로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환상에 빠져 있던 필자가 현실을 알게 된 것은 3개월 남짓 연습을 마치고 첫 라운딩에 나섰을 때. 처음 친 티샷은 오비가 나고 세컨드샷은 우로 좌로 마구 휘었다. 정신없이 18홀을 돌고 나니 스코어카드에는 100개가 넘는 점수가 기록되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필자는 그날로 골프채를 팽개치고는 한동안 골프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다시는 치지 않을 것처럼 호기를 부렸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런가. 몇 달 뒤 방송사 고위간부로부터 거절할 수 없는 골프 초청을 받았다. 한숨을 팍팍 내쉬며 필드에 나가 기록한 점수는 94개. 그래도 첫 출전 때보다는 많이 나아진 점수에 위안을 얻은 필자는 이후 골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정행각’을 벌이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예전처럼 골프를 쉬운 운동이라고 생각하거나, 스스로를 골프 천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아마추어 치고는 잘 치는 편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필자가 가진 직업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1989년 이탈리아월드컵 최종예선, 바르셀로나올림픽 예선경기 등을 중계하러 동남아시아에 가야 했다. 그럴 때마다 한 달씩 골프의 천국에서 머물며 집중적인 전지훈련(?)을 받았으니 효과가 없을 리 없다. 경기가 밤에 열리니 중계도 밤에 할 수밖에. 낮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필드에서 라운딩을 하며 체력보강과 더불어 샷 감각을 가다듬었다. 중계방송을 다녀올 때마다 필자는 무서운 골퍼로 변신해 갔고,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필자의 장타와 정확한 아이언샷에 두 손을 들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괌 참사로 한국 관광객이 급감하자 괌 정부에서는 한국의 정상급 여자 프로골퍼들과 인기 연예인들을 초청해 괌 정부 요인들과 함께하는 공식대회를 열었다. 필자는 이 대회에서 원오버파를 기록하며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골프인생 일대의 훈장이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해피엔딩이지만 정작 스토리는 지금부터다. 대회에 동행했던 신문기자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던 것. “밥 먹고 골프만 쳤느냐” “축구 연구는 안 하고 필드에서만 살았나 보다” 하는 오해가 생길까 걱정됐던 것이다. 우승자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기자들의 요청을 극구 사양하고 오히려 기사를 막기 위해 뛰어 다녔던 일은 잊지 못할 사건이다.

    이후 박사과정을 밟으며 골프채는 자연스럽게 멀어져갔지만 필자는 오히려 골프의 참맛을 배울 수 있었다. 필드에 나서면 겸손해야 하고, 자연과의 게임에 순응하는 자만이 승률을 높일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스코어에 연연하던 과거의 습관은 골프장 설계자의 생각을 읽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변했다. 초보자 시절의 ‘오만함’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라운딩을 할 때면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골프는 게임이다. 게임에 나서는 선수가 제 기량을 발휘하려면 편한 옷을 입어야 한다. 화려한 옷, 비싼 골프채를 무조건 선호하는 사람은 스포츠를 모르는 사람이다.” 이는 아마도 체육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일 것이다. 실제로 필자는 지금도 16년 전 선배에게 받은, 이제는 거의 골동품이 된 스틸아이언을 쓰고 있다. 필드에 설 때면 언제나 색 바랜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

    아, 그러면 골프용구상이나 의류상은 뭘 먹고 사냐구요? 글쎄요, 그 질문에는 답할 말이 마땅치 않네요. 그렇지만 필드는 경기장이지 패션쇼장이 아닙니다. 그건 분명하지 않습니까. 헷갈리지 마세요. 골프는 스포츠입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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