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거리의 철학자 칸트의 웃음

21세기에도 계몽은 진행중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입력2003-10-28 16: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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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철학자들은 삶과 역사의 현장인 길거리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어둡고 답답하며 어지러운 세상을 밝혀야 한다. 무엇보다 거리의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쉽게 말해야 한다.
    • 칸트를 아이들이 알아듣도록 말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엉터리 철학자다.
    거리의 철학자 칸트의 웃음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꽃과 더러운 부정의 더미에 대해 아무런 비판 없이 침묵하는 시대에, 공공성의 확보나 자유로운 이성의 판단은 불가능하다. 나 자신 최근 그런 경험을 하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 새삼스레 손에 쥔 것이 칸트였다. 물론 칸트라고 해서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철학은 진통제도 마취제도 아니니까. 진정한 철학은 되레 우리에게 이성의 용기를 가지라고 권할 뿐이다. 그래서 칸트를 다시 읽는다. 다시금 이성의 용기를 갖고자.

    칸트(1724~1804)라고 하면 당장 난해하고도 엄격한 이성철학이 떠오르고, 고리타분한 철학자의 전형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그의 주저(主著)라고 하는 3대 비판서(책 이름은 몰라도 좋다)를 즐겨 읽는 사람은 아마 철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칸트는 팔십 평생 쾨니스버그(지금은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에서 단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자의 독특한 기행(奇行)이 아니다. 칸트는 언제나 산책을 하며 세상살이의 지혜를 찾는 것이 철학이라 했지 대학에서 연구하는 철학을 참된 철학이라고 보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대학에 시체처럼 안치된 그를 길거리로 불러내 일상의 언어로 대화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칸트 하면 당장 튀어나오게 마련인 ‘물자체(物自體)’니 뭐니 하는 철학자끼리만 통하는 암호 같은 말들은 일절 사용하지 않도록 하자. 칸트 자신 ‘모든 철학서는 통속화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또한 철학이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음미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직 이성을 공공적으로 사용하는 용기를 가지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철학의 할아버지 소크라테스와 함께 칸트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자. 이들은 모두 비판적 사고를 통해 편견이나 음미되지 않은 의견 또는 신념을 수정하고, 이를 통해 공공적인 공간을 열려고 했다.

    자유롭고 공개된 음미



    학파를 형성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대화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반(反)권위주의적이었다는 점도 이들의 공통점이 다. 두 사람은 또한 비판적 사고에 의해 자신을 ‘자유롭고 공개된 음미라고 하는 시험’에 들게 하는 시도를 한 사상가로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인권으로, 다원주의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보았다. 지금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만큼 절실한 것이 또 있는가. 소크라테스와 칸트로 돌아가라. 철학은 그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칸트의 고향 쾨니스버그는 그가 살았을 때부터 ‘학문의 시베리아’로 불릴 만큼 후미진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평생을 보낸 칸트의 삶은 너무나 단순하다. 1724년 가난한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춥디추운 고향에서 어렵게 공부하고 가정교사로 겨우 연명하다 고향 시골대학의 철학교수로 부임해 41년 간 재직하고 그곳에 묻혔다.

    칸트는 다른 나라는커녕 독일의 다른 대도시에 유학한 적도 없다. 심지어 논문 발표를 위해 출장 한 번 간 적 없다. 아마 평생 초라한 집과 학교 외에는 다닌 곳이 없으리라. 그래서 도대체 전기를 쓰려 해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하나도 없다. 기껏 점심식사에 항상 손님들을 초청해 자신이 직접 만든 겨자 소스를 먹였으나 자신은 한 번도 먹지 않았다는 이상한 에피소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독신이었으니 그 흔한 사랑 이야기도 없다.

    쾨니스버그는 당시 러시아와 마주보는 독일 북쪽 끝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런던, 파리, 베를린 등 당대 국제도시와 비교하면 세계화나 근대화로부터 뒤떨어진 변방이었다. 그런 만큼 칸트는 자신이 산 전근대적인 봉건과 싸우기 위해 계몽과 이성을 추구했다. 그렇다고 오늘날 흔히 오해되듯이 역사를 넘어 인류에게 공통되는 추상적인 보편 이성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풍부한 감정의 이성’에 입각한 다원주의를 주장했다.

    흔히 칸트를 독일 관념론의 아버지라 하여 피히테(1762~1814)나 헤겔(1770~1831)과 같이 분류하지만 칸트는 그들의 국가주의 철학과 분명 다르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라고 해야 한다. 쾨니스버그는 칸트가 34세였던 1758년부터 4년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독일에 의해 탈환되었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그는 당연히 평화를 갈구했고, 세계시민주의와 반식민지주의 및 국제연합의 이념을 제기했다. 오랜 식민지와 분단을 경험한 우리에게 칸트가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어디 우리뿐인가. 20세기를 ‘야만의 시대’로 규정하는 모든 인류가 필요로 하는 이념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역사 뒤에 숨어 어려운 말만 늘어놓는다. 이제 철학자들은 삶과 역사의 현장인 길거리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어둡고 답답하며 어지러운 세상을 밝혀야 한다. 무엇보다 길거리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해야 한다. 칸트를 아이들이 알도록 말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엉터리 철학자다.

    칸트는 ‘이성의 용기’를 가진 탓에 정치적 핍박을 받기도 했다. 1781년 출간된 ‘순수이성비판’은 위험한 무신론자의 책이라는 이유로 빈에서 금서가 됐다. 또 독일 유태인 해방의 아버지이자 독일의 소크라테스라 불린 멘델스존조차 칸트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그 후로도 그는 여러 차례 검열을 당했다. 물론 칸트는 직접 정치권력을 비판한 적도, 이로 인해 투옥당한 적도 없다. 하지만 이미 40대부터 그의 사상은 반체제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세기가 지난 뒤에도 ‘신칸트학파’의 거점이었던 마르부르크대학에 칸트 강의가 금지됐을 정도였다.

    칸트를 흔히 철학의 아버지라 하지만, 철학자라면 칸트부터 비판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오늘날 칸트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모던, 즉 근대철학의 상징으로 여겨져 이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 인간성이나 인간의 해방과 진보, 인류 전체에 미치는 지식과 도덕 등의 보편성, 특히 과학의 객관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칸트는 문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간사회가 도덕화되어 참된 행복이 실현된다고 보지 않았고, 도리어 그것을 비판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지만 문제는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상황이 정말 우리 시대에 맞느냐는 물음이다. 어쩌면 ‘프리모던’이라고 부를 정도로 근대 이전의 봉건적 야만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한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이 땅에까지 유행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휴대전화나 인터넷 또는 퓨전요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인가.

    그러나 막상 그것을 만지고 먹는 우리의 정신은 여전히 프리모던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칸트가 살았던 모던 계몽보다도 더 뒤떨어진 야만이나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역시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책을 번역하고 소개한 적이 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도리어 우리 현실이나 심성은 프리모던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더욱이 젊은 세대마저 공사의 기본적인 구분도 하지 못하고 이기주의나 가족주의, 나아가 자국중심주의와 사대주의의 묘한 야합에 빠져 있는 것은 너무나도 걱정스럽다.

    죽은 철학은 버려야 한다

    칸트는 철학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즉 학교 개념으로서의 철학과 세계 개념으로서의 철학이다. 전자는 대학을 비롯한 학교의 철학연구자들이 만드는 철학이고, 후자는 세계 또는 세상의 철학으로 칸트가 말하는 본래의 철학인 ‘지혜’를 뜻한다. 사실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래 본래부터 지혜를 뜻했으나 차츰 지식이나 정보로 변했고 지금은 콘텐츠로 표현되기도 한다.

    지혜와 지식 또는 정보의 차이는 인간의 주체적 사고에 의한 것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즉 인간이 신이나 교회, 국가나 재산 등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판단하는 자율적인 태도, 자기교육의 태도가 곧 지혜다. 요컨대 자신을 철저히 반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종래의 제도화된 학문인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한다. 아니 우리는 이제 그런 죽은 철학을 버려야 한다. 대학의 전유물인 철학을 버리고, 교양이랍시고 외우는 칸트의 이름이나 3대 비판서도 깡그리 잊어버리자.

    그런 쓰레기 지식이야 지금 컴퓨터를 켜면 당장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다. 따라서 지혜야말로 정보의 바다 인터넷을 헤매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강제나 구속 및 속박 하에 살고 있다. 가정에서 처리해야 할 사적인 문제임에도 불륜, 가정폭력, 아동학대, 노인보호 등 국가의 법과 행정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영역이 너무나 많다.

    가장 내면적인 사상의 자유도 여전히 제한되고 있고, 표현의 자유 역시 구속되는가 하면, 포르노와 원리주의의 극성으로 방종을 낳고 있다. 또한 인터넷에 의해 사적인 공간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사이버 폭력은 언제나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파괴할 수 있다. 이처럼 최소한의 인권조차 지켜지지 않는 프리모던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고, 동시에 다양한 법과 인권 사이의 충돌도 생겨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보편적 인간성이라는 구호로 해결될 수 없다. 나아가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진행되면서 국가간, 개인간 빈부 차이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여기서 이성적 비판과 정보의 윤리, 세계의 평화 등 칸트가 고민한 문제는 우리에게 더욱 더 절실한 것이 되고 있다.

    거리의 철학자 칸트의 웃음

    러시아의 서쪽 끝에 위치한 칼리닌그라드

    칸트는 누구인가. 한마디로 그는 계몽의 철학자였다. 계몽이란 무지몽매를 깨친다는 뜻이다. 19세기말 일본에서는 영어의 enlightenment를 ‘대각(大覺)’으로 번역했다. 대오각성의 준말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내면적 각성을 뜻하지 않는다. 칸트는 도리어 종교를 반대했다. 무지몽매란 말은 무엇보다도 기적을 믿는 계시종교를 겨냥하고 있다. 깨달음이라는 뜻의 계몽은 이교도 박해나 억압과 같은 불관용(不寬容)에 대한 비판과 종교의 자유를 의미했다. 18세기에는 그 대상이 가톨릭이었으나 지금은 극단적 종교를 뜻한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특히 반공이나 민족이 국시처럼 여겨지는 우리의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따라서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는 다원주의인 계몽주의는 우리와는 너무나 멀다.

    자연과 세계를 초월하는 신이나 영혼을 부인한 점에서 계몽주의는 과학적 자연주의나 유물론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과학주의에는 극단적인 것도 있었으나, 적어도 칸트는 과도한 과학만능주의를 비판하여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정신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자각과 반성, 그리고 자연과의 공존가능성을 모색했다. 따라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이었다. 즉 사회나 국가를 포함한 종교적인, 또는 초월적인 권위나 세속의 권력에 대한 복종을 배척하고 인간성에 근거한 자유의지의 윤리를 구축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했다.

    이는 이성적인 자연법 또는 사회적 공리성에 국가나 사회의 성립 근거를 구하는 견해와 관련된다. 인간 개인의 자립성, 주체성, 자유의지의 존중에 근거하여 사회와 국가를 인간의 의도나 공동 생활에 의해 형성하고 개조한다는 개혁과 혁명의 사상으로도 연결됐다.

    이처럼 신의 섭리를 부정하고 인간에 의한 역사의 창조를 믿는 계몽주의는 당연히 진보사관으로 나아갔다. 진보사관은 신학적 요소를 갖는 헤겔 철학을 거쳐 과학임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로 이어졌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친 탓에 지금 그것들에 대한 비판은 왕성하나, 여전히 환경 파괴 등을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경제성장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은 뿌리깊다. 이는 위기감의 결여에 의한 것일 뿐 아니라, 시대의식이나 사회구조, 그리고 인간정신에 대한 비판적 기능과 판단력의 쇠퇴로 인한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서양에서 비롯된 현대문명이 끝나고 이제는 동양사상이나 한국사상 또는 일본사상 차례라고 하는 계몽 이전의 반계몽적 사고가 횡행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칸트는 단순히 문화나 문명의 전개에 의해 인간성이 개선되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된다거나 인간사회가 무조건 진보하고 발전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부정적인 측면까지 고찰했다. 그러나 문명을 타락이라고 보고 문화를 멸시한 루소와 달리 문화를 중시했다.

    칸트는 문화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즉 개인적인 문화인 교육을 중시하여 그것을 연구했고, 전체적인 문화에 대해서는 개인의 자유와 모순되는 점을 비판했다. 계몽에서 그 수단인 교육과 문화는 당연히 중요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에게 이성의 용기를 계몽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칸트의 말은, 여전히 개인을 억압하는 한국의 수험지옥과 문화산업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칸트가 60세이던 1784년에 쓴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칸트사상의 핵심이 무엇인지 짚어보자. 칸트는 그 글에서 당시를 계몽이 실현된 시대가 아니라 계몽이 진행되는 시기라고 보았다. 흔히 역사책에서는 1784년이라면 이미 계몽사상이 끝날 무렵으로 보기 때문에 칸트의 이러한 설명에는 의문이 생긴다.

    누구나 세계시민이 돼야 한다

    일반적으로 역사책들은 계몽사상은 17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서 발전하고 독일에서 완성됐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점은 그로부터 200년도 더 지난 지금, 우리가 과연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칸트가 18세기 말을 계몽이 진행되고 있는 시대라고 말한 것처럼 지금도 계몽은 완성되지 않았다.

    칸트는 계몽을 미성년을 벗어나 성년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물론 여기서 성년은 육체적 성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년을 의미한다. 미성년이란 자신의 이성이 아닌 선입견이나 권위에 의존하는 것, 성년이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정체불명의 선입관이나 암묵의 사회적 규제 또는 폭력적 질서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가 바로 칸트가 말하는 미성년이다.

    칸트는 계몽의 완성을 위한 표어로써 자신의 이성을 공공적으로 사용하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했다. 이는 서재나 자택에 고립된 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지식 획득이나 사고 능력 개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세계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처럼 칸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데, 그런 사회성을 무시하고 수신용 명심보감쯤으로 곡해해서는 곤란하다.

    칸트는 계몽을 촉진하는 이성의 사용을 공과 사로 구분한다. 공적 사용이란 세계시민의 입장에서 의견을 말하거나 논평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세계시민이란 직업적인 학자나 지식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반면 사적 사용이란 하나의 작은 공동체나 조직 내의 경우를 말한다.

    예컨대 장교가 군대제도의 모순을 말하는 것은 세계시민으로서의 공적 사용이고, 군대 규율을 지키는 것은 사적 사용이다. 여기서 공적 사용은 사적 사용에 우선한다. 따라서 공적 사용이 사적 사용과 모순되면 자신에 대해 정직하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그 직책을 사임해야 한다.

    칸트는 세계시민으로서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제한 없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당대의 어떤 철학자들보다 현대적이다. 따라서 칸트는 계몽을 방해하는 것으로 당시의 권위를 체현한 교회제도를 비판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막는 교회의 검열제도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범죄라고 규탄했다. 반면 군주제에 대해 국민의 의지에 입각한 계몽군주를 주장하면서 당시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그렇게 평가했다. 이 때문에 칸트에게 보수라는 낙인이 찍혔다.

    반쪽짜리 사상의 자유

    그러나 당대의 독일에서 칸트만큼 계몽군주에 대한 원칙적 판단에 입각하여 정권을 인정한 사상가도 드물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면 국민의 의지에 입각한 정권이라면 지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하튼 칸트는 현실정권을 인정하되 그가 주장하는 계몽주의에 합치된다는 전제에서 인정한 것이므로, 그것은 동시에 정권비판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여러 가지 한계가 있음에도 칸트의 세계시민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첫째, 모든 권위에 대한 개인의 독립과 자유, 특히 사상, 출판 및 언론의 자유를 강력하게 주장한 점이다. 여기서 칸트가 말한 사상의 자유란 내면적 정신의 자유에 그치지 않고 사상의 자유를 타인에게 공적으로 전하는 자유까지 포함한다. 우리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아직도 내면의 자유로만 인정하는 학자나 관료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이미 칸트 시대에 부정된 그런 알량한 논리가 지금 이 땅에 버젓이 살아 있다. 사상의 자유에 대한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천박한지를 웅변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내면의 자유란 기껏 이불을 덮어쓰고 꿈꾸는 자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이야 그런 것에 만족하고 평생을 살지 모르지만 그래서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현실에서도 이성의 공공적인 사용이라는 사상의 자유가 그리 충분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 칸트가 자신의 시대를 아직 계몽된 시대가 아니라고 보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도 아직 계몽된 시대가 아니다. 어쩌면 무수한 군사독재자를 경험한 우리는 칸트 시대의 계몽군주조차 가져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표현의 자유를 내용으로 하는 사상의 자유를 우리는 완벽하게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라이제이션이나 인터넷에 의한 정보혁명이 국경을 넘는 세계시민주의를 실현하기는커녕, 서양문화나 최근 대두하는 중국문화에 대한 사대주의와 함께 자국문화중심주의라는 배타적인 독단론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칸트는 공정하고 영속적인 국내질서와 함께 세계평화가 계몽의 추진을 위해 필요하며 따라서 폭력에 의한 혁명을 부정하고 착실한 개혁을 주장했다. 다시 우리의 현실을 보자. 남북분단이라는 모순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평화통일의 합의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남북 혹은 남남 대결에 지쳐가고 있다.

    거리의 철학자 칸트의 웃음

    칼리닌그라드에 있는 칸트의 동상

    다원주의란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가 하나가 아니라 다수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일원주의이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진리나 가치 기준, 혹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와는 다르다. 칸트는 다원주의를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기주의와 구별했다. 칸트는 이기주의의 행복 추구를 인정하면서도 타인의 행복 추구를 무시하는 인간은 도덕에 반한다고 보고, 도덕에 따르는 것을 다원주의로 이해했다. 칸트는 미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앞에서 말한 세계시민주의의 관용 정신과도 당연히 관련된다.

    관용은 오류주의와도 관련된다. 오류주의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변함없는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언제나 틀릴 수 있기 때문에 수정되고 변경될 수 있다고 보는 태도다. 그러나 이는 누구나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관용해야 한다거나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타인과의 공공적인 사고공간을 통하여 오류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타인이 중요하다. 그러나 전쟁이나 분쟁은 개인이든 국가든 적대적 상대인 타인의 존재를 말살하거나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타인의 입장에 서는 것을 거부한다.

    클라우제비츠(1780~1831)는 ‘전쟁론’에서 전쟁을 정치의 수단이라고 보았는데, 그 말이 옳다면 정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전쟁도 끊이지 않는다. 현실도 분명 그렇다. 그러나 칸트의 다원주의를 잇는 아렌트는 정치를 전쟁에서 떼어내 적극적 의의를 주장하고, 나아가 타인의 입장에 서는 사상을 주장했다. 유태인이었던 아렌트는 가혹한 대접을 받았지만 시오니즘에 빠지지 않고 ‘민족애’가 아닌 ‘인류애’를 주장하여 칸트를 계승했다. 바로 칸트의 ‘판단하는 관찰자의 시각’, 즉 스스로 생각하여 편견으로부터 해방되는 계몽, 넓고 유연하며 확대되는 시야의 사고방식, 모순 없는 일관된 사고방식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칸트 철학의 핵심은 자유에 있다. 아렌트는 칸트의 자유 가운데 ‘상상력의 자유’를 중시한다. 이는 각자가 자신의 판단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으로,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갖는 타인과의 잠재적인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아렌트는 이러한 다원주의적인 반성적 판단력을 ‘정치적 판단력’이라고 부른다. 정치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갖는 타인과 만나 싸우며 공존하기에 다원주의가 당연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타인은 지금 눈앞에 있는 타인만이 아니라 어딘가에 있을 타인, 또는 과거나 미래의 어떤 시점에 있었거나 혹은 있을 타인도 포함한다. 이는 환경오염이나 사회보장이 미래 세대에 초래할 위험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에 선다면 당연히 지금의 당파나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판단해야 한다. 아렌트는 이를 ‘공공권’이라고 하고, 여기서 사상이나 표현의 자유가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해도 사상의 자유는 남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자기와 타인을 분리시킨다는 전제하에서 사상을 공공적인 것이 아니며, 표현을 2차적 도구로만 보는 생각이다. 이에 반해 칸트와 아렌트는 표현의 자유를 금지당하면 사상의 자유 그 자체도 금지된다고 보았다. 즉 자신의 사고와 타인의 존재는 분리될 수 없고, 따라서 사상과 표현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국제법과 세계시민법 제안

    지구의 환경악화만 보더라도 역사는 진보한다고 낙관적으로 보기 어렵다. 도리어 인류는 그 땅을 파괴하여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비관론이 더욱 설득력 있다. 냉전 후 세계정치에 대한 낙관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위기를 말하는 비관론은 언제나 있었다. 칸트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인류는 진보가 아닌 퇴보를 하고 있다는 루소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칸트도 루소의 영향을 받아 파라다이스의 타락으로부터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법에 의한 인간의 자유와 질서, 즉 법치국가와 국제법, 그리고 세계시민법의 실현에 따른 정의의 공존에 의해 인류는 진보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칸트는 당시 대다수 계몽주의자가 믿은 문화의 진보에 의해 도덕성이 완성된다고 보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법질서의 진보를 믿었다. 그에 의하면 역사의 목적은 법질서의 완성이다.

    칸트는 국내법은 물론 국제법이 완성돼야 평화가 가능하다고 본 최초의 철학자였다. 즉 전쟁은 법에 반하는 불법 상태이므로 금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법질서의 실현을 위해 도덕적 행위가 필요하다고 보았기에 도덕과 자유의 최대 걸림돌인 전쟁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주의자 톨스토이는 칸트의 애독자였고 그의 ‘전쟁과 평화’에도 칸트의 영향이 나타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영향은 20세기의 국제연맹과 국제연합 및 EU의 결성이다.

    거리의 철학자 칸트의 웃음

    칸트의 사상을 계승한 철학자들. 왼쪽부터 한나 아렌트,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따라서 종래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로 평가받은 것과 달리, 칸트는 혁명이 아닌 세계시민법에 근거한 점진적 개혁을 제기했고 마침내 실현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 물론 현재의 국제연합이나 국제법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만큼 칸트의 세계시민과 세계시민법의 주장은 그 이념으로서도 중요하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식민주의 비판을 의미하는 칸트의 ‘방문권’이다. 이는 그가 세계시민법에서 외국인이 다른 나라에 가는 경우 적대적인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이는 특히 데리다가 ‘환대’를 말하면서 그 선구로서 중요성을 부여한 개념이다. 데리다만이 아니라 현대의 여러 사상가들이 전쟁의 억제를 위해 칸트가 강조한 비폭력과 진리, 조약의 성실한 준수, 그리고 정부의 비밀정책의 억제를 다시 주목하고 있다. 칸트는 신뢰 구축을 위한 정보 공개 및 정책의 공개성을 이미 강조한 바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칸트의 철학 자체에 대한 설명을 일부러 자제했다. 이래서야 이게 무슨 칸트에 대한 글인가라고 욕할지도 모르니 이제 마지막으로 철학자들이 철학책에서 말하는 칸트를 잠시 살펴보자.

    흔히 칸트는 유럽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결합했다고 하나, 사실은 양자를 뛰어넘는 새로운 비판철학을 수립했다. 합리론은 사고에 의해 신이나 영혼 또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검증될 수 없는 독단론에 빠진다. 반면 경험론은 확실한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여 회의론에 빠진다.

    칸트와 그 적들

    따라서 칸트는 그 두 가지를 넘어 인간의 인식이 갖는 원천, 범위, 한계에 대한 이성의 비판을 ‘순수이성비판’으로 시도했다. 이어 정신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사회의 도덕적, 법적 질서를 발견하기 위해 엄밀한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는 도덕, 신의 명령도 경험칙도 아닌 도덕성의 기준으로 ‘실천이성비판’을 추구했다.

    마지막으로 미에 대해 ‘아는 만큼 보인다’고 보는 합리적 취미론이나, 경험적 감각에 근거한다고 보는 취미론을 부정하고 순수이성이나 실천이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개별판단이 성립하기 위한 보편적인 조건을 ‘판단력비판’으로 추구했다.

    칸트의 3대 비판은 이 정도 설명으로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그 자신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자. 어찌 보면 칸트에 대한 비판은 칸트 이후 철학사 전체를 말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칸트와 계몽주의 비판은 칸트 사후에 제기됐다. 낭만주의는 칸트의 자연관을 비판하고 초자연적인 신과 영혼, 생명과 정신이 내재하는 유기체적 자연관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칸트의 자연관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이자, 과학적 인식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칸트가 엄밀히 구별한 존재와 당위,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을 서로 애매하게 만들어 혼동하게 하는 위험성까지 나타났다.

    낭만주의가 비판하는 계몽사상의 이성 편중에는 그 자체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이성을 버리고 감정에 편중한다는 낭만주의에도 분명 문제는 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도 결코 이성을 버리고 감정에만 빠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자각했고 이성과 감정의 통합을 추구하여 ‘풍부한 감정의 이성’을 주장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낭만주의가 계몽주의의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까지 비판하고, 대신 개인에 앞선 국가나 전체, 민족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즉 칸트가 말한 인류나 보편적 이성을 추상적이고 실체가 없는 이념이라고 하며 그것에 근거한 세계시민주의를 비판하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민족과 국민성에 근거한 민족주의, 특히 순수한 독일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낭만주의는 자연법사상도 추상적이고 비실증적이며 비역사적인 허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19세기에는 경험과 관찰로 증명할 수 있는 실정법을 주장하여 실증법학과 역사법학이 주류를 형성했다. 이러한 19세기 독일의 정신풍토가 20세기에 와서 히틀러의 나치즘으로 연결됐음은 이미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바다.

    계몽사상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비판은 헤겔이 했다. 헤겔은 19세기 초엽 독일의 현실에서 계몽이 필요함을 인정했지만, 그것이 계산적인 공리주의에 그쳐 인간의 영혼을 높이거나 선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헤겔의 결론은 계몽주의에서 비롯되는 시민사회는 욕망의 체계라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런 결론이 타당한 만큼 19세기 헤겔의 지적은 날카롭지만, 칸트 대신 자신을 해결사로 내세운 헤겔에 대해 적어도 지금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헤겔을 잇는 마르크스나 레닌 등은 칸트의 이성을 노동자 계급을 배제한 부르주아의 그것이라 보고, 시민사회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불평등한 계급을 낳는 가장 비이성적인 질서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책은 호르크하이머(1895~1973)와 아도르노가 쓴 ‘계몽의 변증법’(1947년)이다. 호르크하이머가 주도한 비판이론은 본래 칸트의 비판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즉 판단의 가능성이 항상 이성적이고 자유로우며 성숙한 사회를 실현하려는 노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들은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문화산업’이 모든 것을 조작하고, 파시즘의 권위주의가 개인을 ‘민족’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계몽은 본래 그것이 극복하고자 한 신화로 다시 타락했다고 주장했다. 변증법이 정-반-합의 논리인 것처럼 이 위 책은 정(正)인 계몽의 반(反)인 그 부정적 측면, 즉 신화로의 타락을 다룬다. 무지몽매를 극복하고자 한 계몽의 이성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며 수량화하는 도구적 이성에 불과하여 도리어 무지몽매에 빠졌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해결인 합(合)을 결국은 신(神)에게서 찾아 계몽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하는 하버마스(1929~ )는 ‘계몽의 변증법’이 이성에 대한 불신을 낳을 뿐이라고 비판하며 칸트의 계몽이 사회적, 비판적 기능을 갖는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대화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의사소통의 이성을 주장했다. 즉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논의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진리 발견의 전제조건이며 계몽은 이를 실천적으로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 칸트의 가르침을 고수하면서, 지금보다 훨씬 광범한 자유와 정의를 목표로 삼는 저항이 사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저항은 공공의 의사소통에 근거하여 이성을 사용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사소통을 통한 상호이해를 보편적으로 만들려는 이념이 바로 칸트가 말한 이성이다. 칸트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 평가는 만년의 푸코(1926~84)나 들뢰즈(1925~95)에게서도 나왔다. 특히 들뢰즈는 니체의 영원회귀나 힘에의 의지가 칸트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했다.

    이성으로 돌아가라

    요컨대 칸트 이후 지금까지 서양철학은 칸트가 비판한 합리론과 경험론을 잇는 보편주의(또는 定礎주의)와 상대주의(회의주의)의 분열을 반복하고 있다. 후자로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꼽을 수 있는데 그 이름과는 달리 근본은 전통적인 상대주의와 다름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담론과 해석의 다원성을 주장한다.

    이는 계몽주의의 초역사적인 보편성 주장을 반대하지만 회의주의에 빠진다는 문제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합리성이나 이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은, 우리 생활 구석구석까지 침투하고 있는 부당한 권력관계를 시정하기 위해 이성의 비판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현실에서 함부로 승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칸트 철학을 비롯한 모더니즘을 보완한다는 의의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즉 모더니즘이 말하는 강력한 보편성에 대한 신뢰의 근거는 없으며, 역사와 문화의 다원성을 부정하여 독단에 빠진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그런 비판 역시 회의주의에 빠져 결국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기 쉽고 끝없이 비판이 악순환하는 상태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역시 서로에 대한 관용이다. 관용을 거부하는 원리주의는 흔히 이슬람 과격주의에 적용되는 말이나, 그런 사고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특히 민족주의나 자국중심주의라는 프리모던과, 해체주의라는 포스트모던이 혼재하는 우리의 정신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칸트가 주장한 소크라테스적인 이성에 대한 신뢰, 다원주의·오류주의와 연결된 세계시민주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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