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失鄕記

이역 땅에서의 풍찬노숙(風餐露宿) 27년

  • 입력2003-10-28 17: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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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失鄕記
    1990년 12월 나는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1963년 6월 조국을 등졌으니 실로 27년 만의 일이었다. 고향 제주에서 하는 말로 가시나무에 드러누워도 단잠을 잘 푸른 나이에 이 땅을 떠나 백발이 성성해져 돌아왔다. 누가 내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제 발로 걸어나가 삼십여 성상(星霜)을 이역 땅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한 것이다.

    1953년 6·25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휴전 협상이 무르익어갈 무렵 나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제주시 화북동에 터전을 잡고 6대째 농사를 짓고 있었다.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로 보내고 자식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던가. 아버지는 조부의 명에 따라 서울서 유학하여 동성상업고등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뒤 철도국 회계과에 취직한 아버지를 따라 이북 여러 지방을 전전하던 우리 식구는 평양에서 6·25를 만났다. 그리고 1·4 후퇴 때 어머니와 네 동생을 남겨둔 채 아버지와 나 그리고 형만 월남했다. 부산을 거쳐 제주로 낙향해 보니, 혼자 된 할머니가 소작을 부쳐가며 근근이 농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북에서 철도전문학교 전기과 2년을 다니다 온 나는 교원 양성소 단기 과정을 마치고 이제 막 대정국민학교로 발령받은 참이었다. 스물이 채 안 된 나이였다.

    어느 화창한 봄날,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서는데 김흥태 선생이 나를 불렀다. 김선생은 황해도 출신으로 나이는 나보다 대여섯 살 위였지만 같이 월남한 처지라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김선생은 상기된 얼굴로 자신이 보고 있던 신문(제주일보)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육군 제2기 노어(露語) 통역장교를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대충 훑어보고 고개를 들자 김선생의 열띤 시선이 나를 마중했다. 나는 그 눈길이 무얼 뜻하는지 금방 알아챘지만 짐짓 무관심한 표정을 지었다. 김선생이 “바람도 쐴 겸 부산에 한번 갖다오자”고 했다. 시험 장소가 부산 병사구 사령부였다. 이북에서 제1 외국어로 공부한 터라 노어 구사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나이 제한이 문제였다. 응모 자격란에 만 23세 이상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또 월남 후 입대한 형이 이미 전방에서 소위로 근무중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허락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넓은 세상 진출 위해 통역장교 도전

    그날 저녁 김선생은 하숙집까지 날 쫓아와 “청춘을 이렇게 접장질이나 하면서 썩일 거냐”며 비위를 긁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징집을 기다리고 있었고 제주를 떠나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고 싶었다. 나는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계모를 집에 들였다. “집에는 살림하는 여자가 있어야 한다”고 당신이 늘상 물고 있던 장죽(長竹)으로 놋재떨이를 두드리며 할머니가 부추기기도 했지만 이북에서 부모님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가 책상물림이었던 반면 어머니는 여장부였다. 주말마다 화북 본가에 들르던 내 발길이 계모가 들어온 이후 점차 줄어들 때었다.



    제주를 뜨기로 마음을 굳힌 나는 호적초본의 생년월일을 34년 생에서 31년생으로 변조하고 응모 원서를 제출했다. 김선생과 나는 ‘로서아어 4주간’이라는 일본 책을 구해 같이 공부했다.

    한 달 후 집에는 잠시 출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부산으로 갔다. 필기 시험이래야 기본적인 문법과 간단한 작문, 번역을 하는 것이었다. 구두시험 시간엔 통역 장교를 의미하는 앵무새 병과 배지를 어깨에 단 비쩍 마른 중위가 노어로 성명과 직업 및 통역 병과를 지원한 동기 등을 물었다. 나는 떠듬거렸지만 별 실수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나중에 가까이 지내게 된 그 중위의 이름은 김학수였다. 그는 후일 유명한 노문학자가 되어 내 조카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모두 김학수 번역판으로 읽었노라 했다.

    무사히 시험을 치르고 돌아와 다시 아이들과 뛰놀며 시험 본 사실 자체를 잊어갈 무렵 나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교장은 학교 걱정은 말고 얼른 통지서에 맞춰 출발 준비를 하라며 덩달아 기뻐해줬다. 김선생도 합격했다. 나는 뛸 듯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논밭 팔고 공부시킨 아들이 객지로만 떠돌아 못마땅했던 할머니도 ‘사람은 그저 꼴 베고 소 먹이며 농사짓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얘기를 꺼내지 못한 가운데 김선생과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나는 짤막한 편지를 아버지 베갯머리에 놓아두고 집을 빠져나와 제주시 산지항에서 김선생을 만났다. 배가 출항하기 몇 분 전 “승객 중에 이춘식이가 있으면 찾는 사람이 있으니 하선하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뱃고동이 울리고 닻이 올라갈 때 갑판으로 나가보니 저만치 부두에 우왕좌왕하는 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이 보였다.

    육군 정보학교는 대구방송국 가까이 있는 달성국민학교 교사를 징발해 쓰고 있었다. 교문을 가로질러 ‘we bring light to the darkness’라는 학교 슬로건이 걸려 있었는데, 참 맘에 들었다. 나는 내가 택한 이 길이 내 인생에도 빛을 던져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노통(노어 통역) 2기는 모두 24명으로 대부분 중하사관의 현역 군인인 데다 이북 출신이었다. 3개월 내내 오전에는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군사 훈련을 받았다.

    외출이 허락되는 일요일에는 주로 목욕탕을 찾았다. 일주일 내내 밀린 세탁을 할 목적이었는데, 목욕탕 주인도 정보학교 학생이라는 이유로 눈감아줬다. 팔자에 없는 빨래에 이골이 날 즈음 나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때를 밀고 있는 한 사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철도전문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던 박주병 선생(가명)이었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를 가르치면서도 소련 과학의 우수성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던 골수 사회주의자 박선생을 남한 땅에서 조우(遭遇)하다니…. 우리는 근처 다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후 선생님과 나는 일요일마다 목욕탕에서 만났다. 만날 때마다 박선생은 내게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했다. 6·25 전쟁이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많이 씻어버리긴 했어도 ‘20대에 사회주의를 모르면 하트가 없는 놈이고 40대에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헤드가 없는 자’라는 말이 유행할 때였다.

    후보생 생활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중위 임관을 코앞에 두고 당시 학교장이던 변응오 대령에게 불려갔을 때 나는 박선생 일이 마음에 걸려 가슴이 철렁했다. 교장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변교장 곁에는 교무부장이 긴장한 채 서 있었다. 뭔가 서류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던 변교장이 “호출받고 출두하였다”는 나의 신고에 고개를 들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게 변교장이 다짜고짜 “자네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가?” 하고 물었다. 순간 맘이 놓인 내 입에서 얼떨결에 스무 살이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만으로는 몇 살인가?” “열 아홉입니다.” 교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어떻게 국가의 간성이 되겠다는 사람이 공문서를 위조했느냐”며 취조하듯 물었다. 나는 “장교가 되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교장은 더 이상 물을 것도 없다는 듯이 교무부장에게 “임관 상신 명단에서 이후보를 빼라”고 지시했다. 순간 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어쩔 줄 몰라 서 있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를 계속 넘기던 교장이 지나가는 말투로 내 성적을 교무부장에게 물었다. “전체 성적은 4등이고 노어는 1등”이라는 대답에 변교장은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그럼 그냥 나이를 네 살 더해서 육본에 제출하라”고 했다. 교장실을 나오는 나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다시는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軍 최연소 중위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임관일이 밝았다. 1954년 3월8일이었다. 아침 일찍 정보학교 정문 옆 세탁소에 맡겨놓았던 잘 다려진 정복을 입고 임관식을 마쳤다. 육군 중위 계급장과 나이 네 살을 덤으로 받았다. 전선에서 중증 폐결핵을 얻어 밀양 육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형도 나를 축하해주러 왔다. 임관식이 끝난 후 형은 나를 데리고 학교 근처 중국집으로 갔다. “너희 중대장을 만났는데 칭찬이 대단하더라”며 자장면과 탕수육을 사줬다. 형이 “중위님, 꼬마 중위님” 하며 나를 놀리던 기억이 난다. 형은 아직 소위 계급장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형은 밀양으로 돌아가고 나는 금의환향을 하게 됐다. 수 개월 만에 산지항에 내리는데 검문소의 경찰과 헌병들이 나보다 먼저 경례를 올려붙였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 어린 중위라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했다.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고향 화북까지 여객버스가 있었지만 나는 걸었고 땅거미가 질 때쯤 고향 마을에 당도했다.

    마을 입구에는 돌이 성처럼 쌓여 있었다. 제주도 여타 마을과 마찬가지로 4·3 사건의 그림자가 검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문을 지켰는데 해가 지면 출입을 금했다. 죽창을 들고 문을 지키던 사람이 나의 신분을 확인하기는 해야겠는데 노을 빛에 반짝이는 중위 계급장 위세에 눌려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내가 먼저 “저 이한용 동장의 둘째아들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제서야 그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통과시켜주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동장 일을 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어느새 소식을 듣고 동네 꼬마들을 앞세워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나의 계급장과 휘장을 만지느라 난리법석을 떨었다.

    마을 사람들이 물러간 후 아버지는 농사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의 한숨에 호롱불이 펄럭였다. 우리 집안은 제주시 동쪽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논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라산 줄기로부터 우리 논으로 물이 흘러내려왔다. 논과 접해서는 샘물이 있어 동촌에서 제주시로 가거나 제주시에서 동촌으로 가는 사람들이 잠시 쉬며 목을 축였다. 권농일(勸農日)에는 도지사가 우리 논으로 와서 모를 심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논 건너편 산 쪽에 있는 마른 밭 주인이 자기네 친척 검사의 위세를 믿고 물꼬를 자기네 밭으로 돌려버렸다는 게 아닌가. 아무리 우리가 피난을 왔고 4·3 사건 때 할아버지와 삼촌이 억울하게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지만 그 밭주인이 우리를 업신여긴다고 생각하니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검사라는 사람이 소환장도 없이 아버지를 검찰에 출두시켜 물길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니. 나는 묵묵히 아버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후는 끝모를 추락이었다. 모스크바에 돌아온 지 얼마 안 있어 장군이 나를 불렀다. 최종적인 망명 허가가 났으니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사범대학에 가서 영문학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장군은 매우 안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슈켄트에는 고려인들이 많으니 적당한 고려인 처자를 골라 빨리 결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 광활한 대륙에서 왜 하필 시골 변두리인 우즈벡인가’ 하고 못내 실망스러웠다. 당초 예정됐던 ‘이즈베스챠’ 신문과의 인터뷰도 취소됐다. 장군은 내게 그곳 KGB와 연락을 할 때는 베르크트(노어로 독수리라는 뜻)라는 이름을 쓰라고 했다. 한국에서 학이었던 나는 소련에 와서 독수리가 되었다.

    장군이 나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무진 애를 쓴 사실을 알기에 헤어질 때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망명자에게 주는 무국적증과 타슈켄트 KGB 전화번호, 소련 적십자사에서 주는 2000루블을 받고 울적한 심정으로 타슈켄트행 비행기에 올랐다. 타슈켄트는 무척 더웠다. 타슈켄트의 무덥고 건조한 기후가 나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나는 시베리아 찬바람 대신 무더운 모래바람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타슈켄트 사범대 총장을 찾아갔더니, 총장이 선생을 소개시켜주었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까지 남은 두 달 동안 영어, 노어, 역사(소련과 공산당사) 선생을 붙여준 것이었다. 나로 인해 방학에 차질이 생긴 선생들의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영어 선생은 유태인 여자였다. 한 달쯤 강습을 받자 세 선생이 이구동성으로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총장에게는 3학년으로 편입시키라고 건의했다. 내가 1학년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결국 2학년으로 타협을 봤다. KGB에서 치란차르라고 불리는 주택단지에 12평쯤 되는 집을 구해줬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내가 속한 2학년 B그룹은 나를 빼고는 모두 여학생들이었다. 김 아뉴타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의 고려인 3세 여학생이 한 명, 우즈벡 원주민 한 명, 우크라이나인 한 명 외에는 모두 러시아 처녀들이었다. 모두 술, 담배를 잘하고 건장하며 명랑하였다. 처음에는 외국인이라고 나를 경계했지만 이내 친해졌다. 그들은 공부에는 대체로 관심이 없어 영어 숙제로 내 것을 베끼다 들통난 적도 있고 공산주의 사상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계속되는 KGB의 감시

    고온건조한 기후의 우즈벡은 목화 재배에 최적지였다. 10월 목화 수확기에는 일손이 달려 대학생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이 목화 따는 데 매달려야 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제외된 나는 텅 빈 학교 도서관과 집을 오가며 독서에 몰두하였다. 고려인 모임이 여럿 있는 것을 알았지만 뭘 자랑할 만한 입장도 아닌 나는 일부러 교류를 피했다. 두부와 김치 등 한국 전통 음식을 파는 타슈켄트 교외 ‘꾸이륙 시장’으로 부식을 구하러 갈 때를 빼고는 고려인의 얼굴을 볼 기회가 도통 없었다. 한번은 집에서 밤늦게 책을 보는데 지방 KGB 직원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근처에 있는 친척집에서 놀다 가는 길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잠깐 들렀다는 것이다. 뭔가 부족한 것이 없냐고 해서 나는 조로사전이나 노조사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KGB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이동무처럼 머리를 싸매가며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충고를 했다. 며칠 뒤 그는 “노조사전은 구할 수 없었다”며 대신 야스기가 지은 노일사전을 들고 왔다. 나는 무척 고마웠지만 내가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보다 열 살 아래 급우인 김 아뉴타는 KGB가 나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고하라 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중앙아시아 사막에 유배된 듯한 생활

    잠깐 사이에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졸업을 두어 달 남겨둔 어느 날 KGB에서 나를 부르더니 졸업한 뒤 도쿄나 홍콩에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일단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날 수 있게 북한에 한 번 보내줄 것과 레닌그라드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할 수 있게 해줄 것. 두 번째 조건은 북한행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아 내건 것이었다. 나는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북한은 때가 되면 보내줄 것이고 대학원은 타슈켄트면 몰라도 레닌그라드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타지로 여행하려면 원래 일주일 전 민경(경찰)과 KGB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화가 난 나는 아무도 몰래 모스크바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찾았다. 나의 사정을 들은 북한대사관측은 일단 돌아가 있으면 좋은 소식을 전해 주겠다고 했다.

    타슈켄트로 돌아와 보니 문 안쪽에 김 아뉴타가 집어넣은 쪽지가 있었다. 졸업 시험이 시작됐는데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느냐는 메모였다. 내일까지 안 나오면 학교측에서 KGB에 연락할 것 같은 분위기라고 했다. 일단 나는 졸업 시험을 치렀다. 최우등은 아니지만 우등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북한대사관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하긴 소련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한 북한에 뭔가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다.

    졸업을 했다고 졸업장이 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장학금을 받으며 사범대학을 다닌 나는 의무적으로 2년간 시골학교에서 근무해야 했다. 어느 일요일 나는 내게 배정된 시골학교로 침낭과 가방을 들고 찾아갔다. 학교에서 소사일을 보는 한 노인이 숙소로 안내해줬다. 밤에 잠을 청하는데 숙소 주변에 외양간이 있는지 냄새가 심하고 모기가 극성을 부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침낭 등을 내버려둔 채 타슈켄트로 돌아와 곧장 사범대학 교무주임을 찾아갔다. 나는 다짜고짜 졸업장을 내놓으라고 했다. 교무주임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90코페이카를 달라고 했다. 졸업 배지 값이라는 것이었다. 내던지듯 돈을 주고 대신 졸업장을 받은 나는 집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두문불출하였다. 스스로 내 자신을 중앙아시아 사막에 유배시켰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내 삶에 빛을 던진다고 한 일이 오히려 나를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넣은 셈이었다.

    나는 냉방장치를 모두 꺼버리고 수인(囚人)처럼 갇혀 지냈다. 패널로 벽을 친 집이어서 한여름 밖의 열기가 집 안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자신에게 화가 난 나는 스스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가끔 물만 마셨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김 아뉴타가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시대와 겨루어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며 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젊은 날의 혈기가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던가 하는 자각이 나를 아프게 했다. 가시덤불은 가시덤불일 뿐이었다. 그 가시덤불의 덫에 걸려 내 날개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조금씩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자 나는 닫았던 문을 열고 아령 운동을 시작했다. 때마침 타슈켄트 중앙도서관 외국어과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연락이 왔다. 망설일 것도 없이 그곳에 취직했다. 초봉 120루블에 영어, 일어, 혹은 북한에서 오는 서적, 잡지, 신문 등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 다음해 방을 줄이고 장군이 사준 불필요한 털모 외투 따위를 중고품 매매소에 팔아 돈을 마련해 바이칼호 가까이에 있는 이르쿠츠크행 비행기 표를 샀다. 몽골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르쿠츠크에서는 나의 외모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철도역에서 미리 운임표를 보고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캬흐타행 열차 삯을 알아냈다. 나는 자주 캬흐타를 드나들던 사람처럼 열차에 올랐다.

    얼마 후 순찰대 장교가 사병 둘을 데리고 나타나 검문을 시작했다. 나는 “캬흐타시에 사는 누이가 아이를 낳아서 보러 가는 길”이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계획대로 캬흐타에는 저녁 무렵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시 외곽에 이르자 낮은 산등성이가 파도처럼 펼쳐졌다. 나는 지도를 보며 능선을 타고 남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침내 철조망이 쳐진 국경이 나를 가로막았다. 철조망 건너 잔잔히 흐르는 강이 지도에 나온 대로 셀렌가강인가 싶었다. 철조망 곳곳의 감시탑 눈을 피해 나는 독도법 시간에 배운 대로 달빛을 등에 지고 빈틈을 물색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설령 철조망을 넘어 셀렌가강을 헤엄쳐 건넌다 해도 저쪽 강안에 또 다른 철조망이 쳐 있었다. 그 철조망 사이가 완충지대다. 나는 모든 것이 불가능함을 느꼈다. 계획대로라면 몽골로 건너가 울란바토르의 북한대사관을 찾을 생각이었지만 소련의 위성국인 몽골에서 나를 도와줄지도 의문이었다.

    나는 혹 쓰임새가 있을지 몰라 가져온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만월(滿月)이었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괴었다. 어머니를 다시 못 보는 것은 그렇다치고 마치 임종의 시간을 놓친 자식처럼 어머니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떠나온 것이 뼈에 사무쳤다. 전쟁때 월남하면서 형이 어머니를 기다리자고 하는 걸 내가 그냥 떠나자고 보채지 않았던가. 허기진 배로 추위에 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동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담배를 끄고 오던 길을 되짚어 캬흐타역으로 돌아온 나는 지칠 대로 지쳐 벤치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역을 순찰하던 민경이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난 나는 KGB 지부로 넘겨졌다. 술에 전 한 소령이 나를 심문했다. 나는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국경 철조망에서 내가 버린 담배꽁초를 찾아냄으로써 내 얘기는 사실임이 확인됐다. 나의 협조로 그럴듯한 조서를 꾸미게 된 소령은 내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는 나의 조서를 갖고 모스크바로 가는 행운을 얻었고 나는 타슈켄트로 압송되었다.

    모든 상념 잊기 위해 번역원 일에만 몰두

    나는 타슈켄트의 KGB에서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어련히 때가 되면 북한에 보내줄 텐데 성급히 나서서 자기네 입장만 곤란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 텅 빈 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중앙도서관을 그만두었다. 다들 카레이스키인 줄로만 알고 있다가 이번에 나의 정체가 드러나자 동료들이 같이 일하기를 버거워하는 눈치였다. KGB에서도 나를 도와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다만 돈이 궁하면 적십자 반월협회를 가보라 해서 찾아갔더니, ‘생활이 어려워 재정 원조를 부탁한다’는 신청서를 쓰라고 했다. 일종의 생활보호 신청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왔다.

    나는 그 후에도 몇 번 가시덤불을 헤쳐나오려고 날개를 파닥거린 적이 있다. 일본대사관을 찾아가 속지주의(屬地主義) 원칙에 따라 나를 다시 요코하마항에 데려가달라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고 영국대사관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내가 다시 직장을 얻은 것은 순전히 상공회의소에 다니던 김 아뉴타의 주선 덕이었다. 나는 섬유연구소 정보과에 번역원으로 취직하였다. 주로 화학이나 섬유에 관한 영어 기술서적이나 잡지를 노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다른 번역원들이 빈둥거릴 때도 나는 점심을 먹는 15분을 빼고는 하루종일 쉬지 않고 일에 매달렸다. 한 달 120루블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빠듯하다고 하자 아뉴타가 일감을 더 얻어다주었다. 상공회의소에 번역 의뢰가 들어온 것들 가운데 주로 일어로 돼 있는 것을 내게 넘겼다. 상공회의소와 반반씩 번역료를 나눠 가졌는데 영어 번역은 4만 음절에 100루블, 일본어 번역은 그 1.5배를 받았다. 그 뒤 나의 생업이 된 번역 일에 충실하기 위해 나는 기술 관계 노영이나 영로 사전을 닥치는 대로 사 모았다. 50권이 넘는 이 사전들이 지금도 나에게는 전재산이나 다름없다. 농부라면 한평생 일군 밭이라고나 할까. 이러는 가운데 나는 번역에 요령이 붙었고 이춘식의 번역을 원한다는 의뢰인도 점점 늘어갔다.

    나는 섬유연구소에서 포장설계사무소로 직장을 옮겼다. 나중에 사무소 소장 아들의 영어 과외까지 맡게 되었는데 녀석이 자기 숙제까지 해달라는 둥 버릇없이 굴어서 그만두었다. 다음 직장인 국가기획위원회 산하 과학기술 정보 및 선전연구소는 간섭이 전혀 없어 좋았지만,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마이크로 리더(마이크로 필름을 확대해서 보는 기구)를 보며 번역을 진행하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둘 때는 시력이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그 뒤 내가 번역원으로 일한 마지막 직장은 제육낙농공업부 산하 중앙기술사무소였다. 나는 번역일도 하고 소장이 학위 논문 쓰는 것도 도와줬다. 소장이 이탈리아 파두아에 있는 국제냉동기술 회의에 참석할 때는 보고서를 아예 통째로 녹음해주기도 했다. 연설(녹음 틀어주기)이 끝나고 앞좌석에 앉아 있던 미국 대표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자 소장은 연설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나는 감사의 표시로 소장에게서 2달러짜리 이탈리아 볼펜을 받았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한 호의였다. 나는 그의 신임을 받으며 편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 하지만 마음은 늘 허전했다.

    1975년 초여름 나는 마지막 날갯짓을 하였다. 나는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인 아슈하바트로 갔다. 비행장을 빠져나와 거리를 배회하다 노천에서 커피를 파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중에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역으로 간 나는 노점상에게서 들은 대로 이란 국경과 가장 가까운 마을의 이름을 대며 표를 달라고 했다. 뜻밖에도 역무원이 특별여행 증명서를 요구하는 바람에 나는 한 발 물러서 여행증명서가 필요 없는 완행 열차로 종착역까지 갔다. 마을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하여 국경 경비초소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경비병에게 다가가 이란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지 묻자 초소에는 비상이 걸렸다. 사실 나는 내가 이란으로 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이란 경찰의 잔혹함은 나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새장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새 한 마리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리고 싶을 뿐이었다.

    이리저리 새장의 창살에 부딪힌 끝에 나는 최소한 거주 이전과 여행의 자유가 있어야겠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타슈켄트로 돌아와 시민권을 신청했는데, 이마저 거절당했다. 결혼을 안했고 탈출 경력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렵사리 옛날 유리 장군을 수소문해보았지만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갔다. 번역 일에도 흥미를 잃었다. 나는 머리를 쓰는 일보다 아무 생각 없이 근육을 쓰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소장에게 내 기분을 털어놨더니 냉동 기술자인 고(高)씨를 소개해줬다. 나는 고씨의 배려로 타슈켄트 붉은 광장 20층 정부 청사의 냉방과 150m 분수대를 관리하는 직업을 갖게 됐다. 다섯 대의 터빈과 분수용 펌프의 기본 작동법을 익히고 기계가 제대로 돌아가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나는 진짜 노동자가 되었다. 기계만 제대로 돌아가면 나머지는 모두 자유시간이었다. 나는 결국 노동자가 되기 위해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나라에 온 셈이었다.

    나도 다른 노동자처럼 술에 절어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제대로 된 보드카는 값이 비싸 사지 못하고 주로 값싼 과일주를 마셨다. 나는 아령을 할 때마다 항상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이웃 소년에게 아령을 내주었다. 이 나라에 정착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던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김 아뉴타 알렉세예브나와 결혼하였다. 내 나이 오십, 아뉴타는 사십을 바라볼 때였다.

    어둠의 손 풀리고 한 줄기 빛 던져지다

    10년이 흘렀다. 나는 그 사이 말단 노동자에서 작업반장을 거쳐 안전 기사가 되었다. 아들과 딸도 얻었다. 아들의 이름은 소련식대로 부칭(父稱)을 넣어 이 에두아르드 춘식코비치, 딸의 이름은 이 마리아 춘식코비치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내가 북한에 계신 어머니의 생사를 모르는 것처럼 남한에 있는 형도 내가 어디 있는지는 물론 나의 생사조차 모르리라. 그런데 어쩐지 세상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았다. 내 목을 움켜쥐고 있던 어둠의 손이 풀리고 한 줄기 빛이 던져지는 것 같았다. 결혼식 때 하객으로 참석한 뒤론 만나지 못했던 지방 KGB가 수년 만에 나를 찾아왔다. 1988년 3월이었다. 얼마 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제주에 있는 형에게 편지를 쓰면 전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형에게 ‘나 여기 살아 있소!’ 하고 젖 먹던 힘을 다해 외치고 싶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형에게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올림픽이 다가오면서 한국의 발전상을 알리는 기사가 소련 신문과 잡지에 실렸다. 유럽에서 200년에 걸쳐 이룬 경제 발전을 한국은 20년 만에 이룩하였으며 150여 개의 대학에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고 서울에는 80여 개의 사성(四星) 호텔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올림픽기간 내내 텔레비전을 끼고 살았다. 주요 경기는 녹화했다 한밤중에 보여주는 바람에 없던 불면증까지 생겼다. 그해 10월 고르바초프가 국가 원수인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면서 우즈벡에도 많은 변화가 일었다. 사회가 온통 뒤숭숭했다. 나는 술을 끊고 다시 한번 시민권 신청을 하였다.

    1990년 소련과 한국은 수교를 맺었다. 이번엔 달리 거리낄 게 없다고 생각한 나는 당장 모스크바로 달려가 아직 정식 대사관 없이 모스크바 무역센터에서 영사 업무를 보던 KOTRA를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탈영에 대한 시효는 10년이므로 별 문제가 없고 한국에서 초청장을 보내오면 귀국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흥분하여 미리 작성한 편지를 들고 모스크바 중앙 거리에 있는 우체국으로 뛰어갔다. 수명이 다한 형광등처럼 깜박이는 기억을 좇아 누대로 우리 집안이 살아온 대한민국 제주시 화북동 본적지로 편지를 썼는데 번지수에 자신이 없었다. 타슈켄트로 돌아온 나는 ‘수취인 확인 불가’ 스탬프가 찍힌 내 편지를 도로 받을까봐 불안에 떨었다. 근 30년이 흐르는 사이 우리 집안이 거주지를 옮겼을 가능성은 너무나 많았다. 다행히 나는 한 달 후 형을 대신하여 조카가 쓴 편지와 초청장을 받았다.

    한국어 초청장을 노어로 번역하고 아뉴타가 상공회의소에서 공증을 하여 한국 방문 신청서를 만든 후 민경 외국인 등록 및 여권과에 제출하였다. 원래 출국 비자 신청을 하면 한 달내 사증을 내주는데 당시는 소련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뤄 두 달 뒤 간신히 여권과 출두 통보를 받았다. 들뜬 마음으로 찾아가 보니 비자가 아니라 소련 시민권을 취득하였다며 축하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1990년 9월14일이었다. 며칠 뒤 비자도 나왔다. 새장의 문을 열어주면서 새 다리에 고리를 채워 내보내는 심보가 참 야속하였다.

    나는 모스크바 세레메체보 공항을 출발, 상하이를 경유하여 김포에 도착하였다. 1963년 김포를 떠났다 1990년 김포로 돌아왔으니 27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무리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먼지 폴폴 날리는 시골 대합실 같던 김포공항에는 현대식 청사가 들어서 있었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고 여우도 죽을 때는 제 살던 언덕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더니 나는 환갑이 다 됐을 망정 고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게 해준 운명에 감사했다. 입국장을 나서는데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타고 온 비행기에 처녀 부임하는 주한 러시아 대사가 동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 형과 나는 사람들 눈을 피해 공항 대합실 구석에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딸꾹질하는 것처럼 ‘꺼이꺼이’ 하는 소리를 내던 형님이 마침내 청사가 떠나가라 대성 통곡하였다. 할머니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는 형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고인이 돼 있었다. 조카의 손에 끌려 고려대학교로 김학수 대위를 찾았지만 김대위는 이미 1년 전 세상을 달리한 상태였다. 김흥태 선생도 찾아봤다. 서울 전화번호부에 김흥태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은 백여 명에 달했다. 조카와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하여 50번째 이르렀을 때 ‘내가 노통 2기 김흥태요’ 하는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왔다. 고향 제주에 돌아와 보니 그 옛날 아전인수하던 논엔 근사한 양옥집이 들어서 있었다. 형이 매립해 집을 지었다고 했다.

    타슈켄트로 돌아간 나는 신설된 타슈켄트 사범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직을 수락하였다. 한번은 한국대사관으로부터 노한사전 40권을 무료로 기증받았는데, 학생들에게 한 권씩 나눠주며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구하려고 애썼던 노한사전이 내 손에 40권이나 들려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조금 긴 ‘봄꿈’ 같은 삶

    1994년은 내가 만 60세가 되는 해로 연금을 받기 시작했다. 우즈벡은 한국처럼 경제난으로 IMF의 도움을 받았는데, IMF와의 계약에 따라 직장을 갖고 있는 연금 수혜자는 연금을 반만 수령하게 되었다. 부득이 나는 학교를 그만 두고 우즈벡에 지사를 두고 있는 어느 한국 기업체의 일을 맡게 되었다. 1995년 2월 우즈벡 공화국의 카리모프 대통령이 방한하여 신라호텔에서 한국방적 업체 대표들과 만날 때 마침 제주에 와 있던 나는 급히 불려가 통역을 맡게 되었다. 나는 유리 장군과 함께 들렀던 얄타회담의 리바디야궁이 생각났다. 장군의 말처럼 한 국가의 우두머리와 또 한 나라의 경제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자리에 동석하였지만 기껏 통역으로서였다.

    나는 이제 일 년에 한두 번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한국을 방문하는데, 타슈켄트 공항에 들를 때면 한국 기업체 사람들이 부질없이 VIP룸을 쓰려고 공돈을 날리고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을 보곤 한다. 또 업체들끼리 서로 좋은 통역을 쓰려고 급료를 올리기도 하고 관공서에 뇌물을 잘 쓰기로도 소문이 났다. 한번은 한국에서 알게 된 사람이 법망을 피해 우즈벡 여성들을 한국의 나이트클럽 무용수로 쓰게 해달라고 내게 부탁을 해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맨 처음 한국을 떠날 때 가지고 있었던 환멸이 어렴풋이 떠오르며 얼른 타슈켄트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든다.

    한국에 오면 타슈켄트로 돌아가고 싶고 타슈켄트에서는 제주의 햇살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어쩐지 내가 걸어온 길이 조금 긴 ‘봄꿈’만 같다. 나는 아직도 꿈이 덜 깬 상태에서 어머니가 계신 북한과 형님네가 살고 있는 제주도와 내 처자가 기다리고 있는 타슈켄트 사이를 헤매는 것만 같다.



    다음날 나는 군복 주름을 날카롭게 세우고 군화와 계급장을 구두약으로 번들거리게 닦았다. 옆구리에 찬 미제 권총도 다시 한번 만져보았다. 아버지께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 하고 제주시까지 날 듯이 걸음질하였다. 전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당시는 어찌 보면 무법천지였다. 더구나 정보부대 마크 앞에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나는 검찰청으로 들어가 가로막는 수위를 뿌리치고 대뜸 어느 검사의 방을 찾아들어갔다. 권총을 빼들고 내가 온 사유를 말하자 검사는 벌벌 떨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다 필요 없으니 귀대 전날까지 물길을 원상복구하라고 으름장을 놓고는 검찰청을 나왔다.

    일주일 휴가 동안 나는 고향 앞바다에서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초봄이었지만 물속은 그런 대로 따뜻했다. 어릴 때 이북에서 하던 버릇대로 세수하게 더운 물 좀 달라고 하면 할아버지는 한겨울에도 “저 앞바당에 강 몸 곰고 와라(저 앞바다에 가서 목욕하고 와라)”고 호통치곤 하셨다. 헤엄을 치는 나의 눈길이 자꾸 해변 쪽으로 향했다. 전에는 ‘곤흘’이라는 60여 호 되는 작은 바닷가 동네가 있었는데 4·3 사건 때 초토화되어 그 잔영만 있었다. 호통을 치던 할아버지도 아니 계셨다.

    귀대 전날 논으로 나가보니 다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아전인수(我田引水) 소동이었다.

    동포끼리 피 흘리며 싸우는 현실에 염증 느껴

    휴가가 끝나고 일단 육군 정보부대 인사과로 모였던 우리는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당시 인사과장은 나중에 붕괴된 삼풍백화점의 주인이 된 중통(中通) 출신 이준 대위였다). 나는 제 1군단 군사정보부대 파견대로 발령받았다. 속초 근교 풍광이 수려한 곳에 산등성이를 바람벽 삼아 천막을 4개 친 것이 전부인 파견대에는 영어, 중국어, 노어 통역장교들이 뒤섞여 있었다. 영어 통역장교는 미 고문관들의 존재 때문에, 중국어는 중공군 포로 심문을 위해, 노어는 대부분의 북한군 장비가 소련제인 까닭에 어느 하나 빠뜨릴 수 없었다. 파견대의 주 임무 중 하나인 귀순병 심문이 없으면 우리는 백수 건달이나 다름없었다. 낮에는 사병들을 시켜 하루종일 군화를 닦게 하거나 카빈총을 메고 길 잃은 토끼를 쫓아 숲속을 헤매고 다녔다. 저녁에는 곧잘 술내기 화투 끝에 속초 해변가에 나가 꼴뚜기 삶은 것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마치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오는 러시아 초급 장교들의 무료한 생활과 흡사하였다. 화투도 술도 못하는 나였지만 마지못해 따라 나서곤 했다.

    어느 날 군단 사령부로부터 인민군 사병이 귀순해왔다는 전령이 왔다. 영관급 이상의 포로나 귀순 장교는 즉시 미 고문관을 통해 8군사령부에 보고했지만 위관급 이하는 우리가 맡게끔 돼 있었다. 파견대장인 강소령이 나에게 한 번 심문해보라며 전방 초소 어느 중대장이 작성한 경위 보고서를 넘겼다. 보고서는 오전 10시쯤 휴전선 북쪽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려 한국군 초소가 경계 태세에 들어갔는데 얼마 후 피를 흘리는 인민군 병사 한 명이 흰 수건을 흔들며 뛰어오더란 내용이었다.

    우리 계급으로는 하사인 귀순병은 말투로 보아 내가 살던 평안도 출신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두어 살 더 들어 보였다. 나는 귀순의 자세한 경로와 이유를 깍듯한 경어로 물었다. 귀순병은 인민군에서 당한 인간 이하의 멸시와 생활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얘기가 풀려간다고 생각할 즈음 뒤켠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강소령이 “이중위는 그만 쉬라”며 나섰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려는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소령이 의자에 앉아 있던 귀순병을 걷어차 벌렁 나자빠진 것이다. 귀순병이 엉거주춤 일어서자 강소령은 다시 그의 뺨을 냅다 갈겼다. 코피가 터져 순식간에 얼굴이 피범벅이 됐다. “야, 네가 무슨 귀순병이야! 무슨 임무를 띠고 왔는지 바른대로 불지 않으면 고자로 만들어버리겠어. 저기 전기고문 하는 거 안 보여?” 김 대위는 막사 구석에 쓸모없이 버려진 트랜스(변압기)를 가리키며 엄포를 놓았다. 결국 그 귀순병은 1군단 동태 파악을 위해 남파됐음이 밝혀졌다.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나의 어리숙함은 둘째치고 동포끼리 피를 흘리며 서로 싸우는 현실이 고향에서 보고들은 일들과 겹치며 두고두고 나를 우울하게 했다.

    어학반 장교로 특별대우

    상심 속에 빠져 있던 나를 건져준 것은 한 장의 육본 명령서였다. 정보학교 어학과정 노어반 제1기생으로 53주의 교육을 받으라는 명령이었다. 53주면 딱 1년 코스다. 마치 시집살이에서 놓여나 친정으로 돌아가는 새댁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보학교의 어학과정은 당시 육본 정보국에 근무하던 김종필 중령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육군 사절단의 일원으로 대만에 갔다 장개석 군대 장교들의 영어 실력에 감탄한 김중령이 미군의 도움을 얻어 갓 창설한 것이었다. 교과서, 교관 등 모든 것을 미군이 공급했다. 노통 2기생으로는 단 두 명만이 선발돼 나는 한껏 우쭐해졌다.

    어학반 장교들은 다른 장교들과 달리 특별 대우를 받았다. 보통 정보전투 과정 장교들이 작업복과 작업모에 군화를 신을 때 우리는 정복에 넥타이를 매고 단화를 신고 다녔다. 숙소 선택의 자유도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장교들은 영외에 하숙집을 얻어놓고 출퇴근을 하였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빈주먹뿐인 나는 당연히 영내 숙소에 짐을 풀었다. 또다시 반복되는 일과가 시작됐다. 노통 때와 다른 점이라면 군사훈련이 없고 내내 어학공부만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정규 대학의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지만 대학생이 하나 부러울 게 없었다. 공부에 매달려 나를 우울하게 하는 모든 현실들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교재는 노어 문장에 영어 주해가 달려 있는 미 육군 어학학교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노어 교관 중에 펙이라 불리던 미군 상사가 있었다. 은퇴를 앞둔 그는 부모가 10월 혁명 때 미국으로 이주한 백계 러시아인이었다. 그는 말끝마다 ‘시베리아 찬바람이 남자를 신사로 만든다’는 러시아 격언을 인용하곤 했는데, 그 자신은 전혀 신사답지 않았다. 책상에 걸터앉아 강의를 하다 파리가 날아들면 그 큼지막한 손으로 냉큼 잡아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지에 쓰윽 닦곤 했다. 펙은 교재 강의보다 소년 시절에 겪은 러시아 생활상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어찌나 실감나게 말하는지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시베리아 찬바람에 나를 세워놓고픈 열망에 잠길 정도였다.

    失鄕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노어과 과장이 나를 불렀다. 당시 과장은 김일성대학을 나온 김용걸 소령(나중에 한국은행 근무)이었다. 1953년 8월에 만들어진 중립국 감시위원회가 곧 대구로 오는데 그들에게 한국측 입장을 밝히는 성명문 낭독을 나더러 맡으라는 것이었다.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체코의 대령급 고급 장교로 구성된 중립국 감시위원회는 남북한 5개 도시에서 교체 병력, 군사 장비 등을 감시, 감독, 시찰, 조사하여 그 결과를 군사 정전위원회에 보고하게 돼 있었다.

    김소령이 작성한 선언문으로 수차례 발음과 억양 연습을 했다. 나는 지프에 앉은 채 마이크를 잡고 선언문을 낭독했다. “중립국 감시위원회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 “폴란드와 체코 위원들은 한국에서 간첩 행위를 중지하라” “남한은 볼셰비키화를 극력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체코와 폴란드 위원들이 발코니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날이 저물 때까지 똑같은 내용을 귀가 따갑게 떠들다 돌아왔다. 그날 김소령은 저녁을 사며 김형국 대위(나중에 기독교방송국 근무)가 바싹 좇아오고 있으니 고삐를 늦추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를 했다. 나는 결국 1등상인 육군 참모 총장상과 부상으로 손목시계를 받았다.

    나는 잠시 육본 정보국 제3과에 근무하다 정보학교 노어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를테면 모교의 선생님이 된 셈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군복을 입고 있는 한 나의 소속은 늘 정보학교였다. 포플러가 물샐 틈 없이 늘어선 울타리와 기와를 얹은 낡은 교사들. 지금도 그 포플러 잎들 사이로 영롱하던 햇살을 생각하면 내 눈이 부시는 것 같다.

    김종오 장군 전속부관으로 발령

    1957년 9월 나는 대위 계급장을 달았다. 진급 직후 전후방 로테이션 원칙에 따라 1군 군사정보부대 파견대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행정실에 앉아 책을 뒤적이는데 누군가 전보 한 통을 허공에 휘저으며 들어왔다. “이대위, 서울에 누구 빽이 있나보지. 정보부대 부대장이 이대위 서울로 빨리 보내라는 전갈이야.” 옆자리의 동료들도 “뭐야, 전방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서울이야” 하며 부러워했다.

    서둘러 상경하니 정보부대 부대장이 육본 정보국의 고재일 중령에게 가보라 했다. 고중령은 육사8기로 제주도가 고향이었다. 우리는 육본에 있을 때 처음 얼굴을 익혔고 정보학교에서 다시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 나는 노어 교관이고 고중령은 영어반 학생이었을 때다. 교정에서 우연히 어깨를 스칠 때 경례를 붙이면 씨익 웃으며 알은체를 했다(고중령은 당시 김종필 중령과 막역하여 5·16 이후에 창설된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나중에 건설부 장관도 지냈다).

    고중령은 내게 생각지도 않은 제의를 해왔다. 전속부관을 해볼 의향이 없냐는 것이었다. 전속부관은 용모도 단정해야 할 뿐더러 영어에 능통해야 해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고중령은 말 없이 서가에서 영어 교재 ‘Dixon’을 꺼내더니 아무 페이지나 읽고 해석해보라고 했다. 내가 책을 읽자 5분도 지나지 앉아 고중령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 길로 나는 고중령을 따라 신당동 어느 장군 사택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자 사복 차림의 한 남자가 나를 맞았다. 그 작달막한 키에 시골 선비 같은 풍모의 신사가 바로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종오 장군이었다. 고중령이 나를 소개하자 김장군은 부드러운 어투로 내게 나이와 고향, 인척관계 등 형식적인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그 사이 호적 나이 대신 군대 나이를 말하는 데 익숙해져 27세라고 답했다. 마치 속세 나이 대신 머리 깎은 햇수를 말하는 스님처럼. 어려운 일은 시키지 않을테니 자기 집에서 근무하라는 김장군의 한마디로 인터뷰는 끝났다.

    당시 김종오 장군은 교육총본부 총장이었다. 교육총본부는 대전에 있었는데 육군의 모든 병과별 학교와 제주도 제1훈련소, 논산 훈련소를 관할하고 있었다. 김장군의 서울 일정을 챙기는 것이 나의 주 임무였다. 나 외에도 운전, 전화, 복장 담당의 세 하사관이 장군 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미 8군 PX로 가 보병 병과 배지 대신 별이 세 개 달린 전속부관 배지와 정장 양복지 6마를 구입했다. 양복지 가운데 3마는 내가 입을 것으로 해 을지로 어느 양복점에 맡겼다. 처음 입어본 정장은 옷이 날개라는 말을 실감나게 했다. 나는 잠시 날개를 달고 출세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장군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토요일 오후 서울에 올라왔다 일요일에 대전으로 다시 내려갔다. 주로 동대문 근처의 L-19 경비행기 비행장이나 나중에 KAL로 바뀐 민간 항공 KNA와 같이 쓰던 여의도 군용비행장을 통해 상경했는데, 나는 사전에 대전 비서실로부터 어느 쪽인지 연락을 받고 장군을 마중나갔다.

    서울에서는 주로 사적인 모임이 이루어졌다. 친한 장군들끼리 회식을 할 때는 주로 간판이 없는 요정을 찾았다. 장충동공원 앞 이병철씨 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조선 기와집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공식적인 모임은 반도호텔 뒤 중국집 아서원을 이용했다. 장군의 집으로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보직과 진급 문제를 상의하려는 대령과 준장들이었다. 3월과 9월에 두 번 진급 발표가 있었기 때문에 2월과 8월은 특히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하루는 어떤 대령 부인이 케이크 상자를 들고 왔는데 집에 마땅한 사람이 없어 내가 받아둔 일이 있었다. 며칠 후 사모님이 그 상자를 보지 못했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하루에도 몇 개씩 들어오는 게 케이크 상잔데 전혀 모른다”고 대답하자 온 집안이 그 상자를 찾느라 난리법석이 벌어졌다. 결국 젊은 식모가 기억을 더듬어 동구 밖 쓰레기통에 버린 것을 찾아왔다. 쓰레기 수거차가 제때 안 온 것이 다행이었다. 상자 밑바닥에는 수표가 든 봉투가 납작 엎드려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김장군이 부패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구조의 문제였다.

    1958년 김장군이 육군 참모차장으로 영전하면서 나도 따라갔다. 당시 참모총장은 타이거라는 별명을 가진 송요찬 장군이었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오는 백선엽 대장을 영접하러 김장군을 모시고 공항으로 나간 날의 일화가 생각난다. 한국 장성들은 수 시간 전부터 미리 나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루한 시간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백장군이 탄 비행기가 착륙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1분의 오차도 없이 미8군 사령관의 세단이 비행기 트랩 바로 밑에 가서 섰다. 우리는 모두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미군들은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나도 이때부터 김장군의 일정을 조정하면서 약속 장소에 너무 일찍 도착하여 체신을 잃거나 너무 늦어져 결례를 범하는 일이 없게 노력하였다.

    밴 플리트 장군 군용기 타고 고향 방문

    그해 겨울 나는 오랫동안 찾지 못했던 고향 제주를 찾았다. 제주로 가는 밴 플리트 장군이 탄 군용기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6·25 때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장군은 한국에 대단한 애착을 가져 제주도의 이승만 대통령 별장 근처에 송당 목장을 조성했었다. 은퇴 후 미국에 머무르다 이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한 김에 이를 둘러보려 가는 길이었다. 김장군이 밴 플리트 장군을 수행했는데, 나로서는 형을 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제주공항에는 해역사(海域司) 지프가 대기하고 있었다.

    장군 일행이 목장 쪽으로 떠난 뒤 미리 허락을 받은 나는 주소를 들고 제주시에서 셋방을 살던 형님네를 찾았다. 미 8군 PX에서 틈틈이 사모았던 화장품과 문방구, 과자류를 꺼내자 형수님과 조카들이 모두 기뻐했다. 편지에 쓴 형의 부탁대로 김장군의 명함판 사진 몇 장도 잊지 않았다. 당시 양파 농사를 해서 서울 청과물시장에 넘기던 형은 인천항에 하역할 때마다 애를 먹는 모양이었다. “이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내 삼촌이라고 인부들에게 들이대면 만사 오케이”라며 형이 흐뭇해했다. 군대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빽이 최고라는 데 나는 아연해졌다.

    소식도 없이 찾아온 시숙 점심 준비로 바쁘던 형수님이 “도련님도 얼른 결혼해서 안정을 찾아야 한다”며 “사귀는 여자가 없냐”고 물었다. 퍼뜩 내 머리를 스치는 사람이 있었다. 직위상 육본 부관감실에 자주 들르는 내게 그곳의 김오순(가명) 중위는 친분이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키도 작았지만 눈에 총기가 넘쳤다. 어려운 문제를 갖고 가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나를 도와주려고 애썼다. 늘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결혼 얘기가 나오자 피식 웃고 말았다.

    형네 식구들과 잠시 회포를 푼 나는 다시 제주공항으로 달려갔다. 그게 형제간의 마지막 만남일 줄은 나도, 형도 몰랐다.

    부관으로 근무한 지 2년째 접어들 무렵 정보학교의 어학반이 전략 정보반으로 재편성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는 이번 기회에 꼭 영어를 공부하고 싶었다. 평소에도 손에서 영어사전을 놓지 않던 나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미치자 이를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용기를 내 김장군이 쉬고 있는 응접실 문을 노크했다. 김장군이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찾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부동 자세로 선 채 용무를 말했다. 장군은 “공부하고 싶어하는 그 정신은 가상한데 혹시 나나 집사람이 자네한테 뭐 섭섭케 한 게 있냐”고 물었다. 나는 공부하고 싶은 일념과 참모차장인 장군님 곁에서 참모장이라도 된 듯 거만해지려는 내 마음에 대한 우려를 토로했다.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자리에서 정보학교 교장에게 전화를 해 나를 부탁했다.

    3일 후 신당동 장군 댁을 떠날 때 사모님과 그 외 식솔들이 나를 배웅했다. 사모님이 “그간에 생긴 부관님 별명이 뭔 줄 알아요?” 하시더니 내가 얼굴을 붉히자 “학이에요, 학! 배울 학(學), 두루미 학(鶴)!”이라고 말하셨다. 내 얼굴은 더욱 시뻘개졌다. 사모님은 “열심히 공부하세요”라고 격려하며 전별금이 든 봉투를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다시 노어 교관 보직을 받고 영어를 공부하게 됐다. 선생인 동시에 학생이 된 것이다. 직속 상관인 어학과 과장 권소령은 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남들은 어학과정 하나도 어려운데 둘씩이나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장군을 의식해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했다. 나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빽’ 쓰는 사람이 되고 만 꼴이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학생 신분과 선생 노릇을 오가는데 그해 겨울 교관 중 한 명을 보병학교 고등 군사반에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고등 군사반은 소령 이상 영관급을 대상으로 한 교육으로 이번에는 사실 권소령 차례였다. 그러나 정보학교에서의 입지를 튼튼히 하고 진급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내가 솔선해 지원했다. 나는 소령 진급 예정 대위였으므로 고등 군사반이 가능했다. 구세주를 만난 듯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고등 군사반 훈련을 받고 돌아와도 권소령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나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직속 상관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서울에 갔을 때 부관감실 김중위가 살짝 보여준 인사 고과표(3급 기밀이었다)를 보니 직속 상관이 나한테 부여한 성적이 65점이었다. 그것은 낙제를 겨우 면하는 성적이었다. 나는 당연히 소령 진급에서 누락됐다. 군의관을 군인 취급하지 않고 의사로 대하듯 통역장교를 통역관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군내에 팽배해 있었다. 실력을 따지기보다 우선 육사 출신이 먼저 진급하고 그 뒤를 이어 갑종 장교가 진급했다.

    김오순 중위와의 애틋한 이별

    그러는 가운데 4·19와 5·16이 일어났다. 업무차 상경했을 때 데모대를 만난 나는 어깨를 겯고 시위하는 대학생들이 마냥 부러웠다. 비록 군인이지만 아무데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때였다. 나는 그저 빽도 절도 없는 월남한 외톨이 통역장교에 불과했다. 5·16이 나고 얼마 뒤 김종오 장군은 참모총장으로 발탁되었지만 내가 그의 부관직을 그만둔 지 한참 후였다.

    나는 잠시 국방부 통신보안 중대, 일명 777부대에 파견됐는데 어느날 육본 앞에서 우연히 동기생 정선근 대위를 마주쳤다. 몇 년 만에 본 정대위는 얼굴이 말쑥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미 육군 통신학교 6개월 과정을 마치고 얼마 전에 귀국했노라고 했다. 미국에서 받은 인상을 침이 마르게 늘어놓은 그는 한마디로 미국이 별세계 같았다고 했다. 덧붙여 “나도 시험에 합격했으니 너 정도 실력이면 충분하다”고 나를 부추겼다.

    다음날 당장 통신감실로 시험 일정을 알아봤다. 얼마 후 어렵지 않게 시험에 합격했지만 난데없이 미 육군 통신학교 유학과정이 모두 취소됐다는 연락 이 왔다.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술을 할 줄 알았다면 술이라도 퍼마셨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 미국에 갔더라면 내 속모를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인생 행로가 180도 달라졌으리라 생각한다.

    실의에 빠져 있는 내게 김오순 중위가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미 태평양 정보학교 12주 방첩 전투정보 과정도 있다는 걸 알려왔다.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나는 시험을 봤다. 신체검사와 필기시험을 거쳐 영어회화 시험을 봤는데, 인터뷰가 끝날 때쯤 감독관이 내게 영국에 갔다 온 적이 있냐고 물었다. 발음이 옥스퍼드 발음으로 매우 우아하고 훌륭하다고 칭찬해주었다. 유학시험에 합격하면 일단 부관학교 도미 영어반에서 3개월간 영어교육을 받아야 했으므로 나는 다시 영천으로 내려갔다. 당시는 정보학교를 포함해 많은 군부대가 대구에서 영천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로, 부관학교는 정보학교 바로 곁에 있었다. 부관학교 어학실은 당시 한국에서 링커폰 시설이 가장 잘 돼 있었다. 우리는 마치 교환수처럼 헤드폰을 끼고 어학실에 갇혀 귀와 입이 아프도록 웅얼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어느 토요일 오후 일과가 끝난 뒤 동료들과 야구 경기를 하며 몸을 풀고 있는데 김오순 중위가 나를 찾아왔다. 남자뿐인 이곳에 여군이 나타나자 모두들 휘파람을 불며 환성을 질렀다. 김중위는 부관학교 교장에게 문서를 전달하러 온 김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나는 글러브를 벗고 김중위와 함께 대구로 갔다. 같이 저녁을 먹고 8시에 떠나는 서울행 열차 시간에 맞춰 역전 다방에서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김중위를 붐비지 않는 영관급 객차에 태웠다. 열차가 천천히 플랫폼에서 멀어져갔다. 창가에 앉아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드는 김중위를 바라보며 전혀 생소한 감정이 내 마음속에 움트는 것을 느꼈다.

    교육기간이 끝나고 출국하던 날 김중위는 공항으로 나를 전송하러 왔다. 나는 당시 장교들 사이에 유행하던 미제 라이반 선글라스를 납작한 코에 걸치고 난생 처음 육지 구경 가는 섬소년처럼 들떠 있었다. 나는 김중위와 작별 인사를 나누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잡아본 그녀의 손. 김중위가 살그머니 손을 빼며 “다시 볼 수 있을까요?”라고 뜻밖의 말을 했다. 평소 내가 한국 사회에 대한 환멸과 외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당황했지만 선글라스가 당황한 내 눈빛을 가려줬다. 김중위의 말은 어떤 암시처럼 나를 사로잡았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미군 수송기를 빌려 타고 일본으로 갔다. 아래층에 탱크와 같은 중장비들을 싣고도 비행기가 사뿐히 이륙하는 게 신기했다. 다치가와 비행장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목적지인 오키나와 가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미 태평양 정보학교는 아시아 7개국(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인도 파키스탄 월남) 장교들이 모여서 미국식 방첩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일본군의 자부심은 대단하여 은연중 타국 군인들을 무시했다. 미군에 대해서는 패전국 군인으로서의 열패감과 언젠가 패배를 설욕하리라는 오기가 뒤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성적은 한국군이 가장 우수했지만 미군 교관들은 자기네와 영어 발음이 가장 비슷한 인도군을 편애했다.

    수업은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였고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커피 브레이크 시간이 있었다. 강의는 어떻게 스파이를 육성하고 일을 시키며 거꾸로 적의 첩자를 붙잡아 역공세를 취하는 방법 등 주로 방첩의 기법에 대한 것이었다.

    미군들은 여유 있는 생활을 했다. 하사관들까지 부인이 멋진 승용차로 남편을 출퇴근시켜주었다. 식사는 빵이 주식이었는데 한국전에 참전했었다는 터키 출신 주방장이 한국군을 위해 밥과 김치도 내놓았다. 나는 빵을 고집했다. 영내에 볼링장이 있어 난생 처음 공을 굴려보기도 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빙고게임이 벌어져 미군들이 가족을 데리고 왔다. 때로는 경품으로 밍크코트가 나와 환호성이 터지기도 하였다. 일요일에는 야구 경기가 열렸다.

    조국을 버리고 국경을 넘다

    오키나와에서의 12주는 일종의 유예 기간이었다. 귀국 날짜가 다가오면서 나는 방학이 끝날 무렵의 학동처럼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을 떠날 때부터 다시 되돌아가고픈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귀국 일정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치가와 공항에서 1박한 뒤 김포행 미군 비행기를 타게 돼 있었다. 비행장 내 미군 독신자숙소에 짐을 부친 일행은 친지로부터 부탁받은 물건을 산다거나 “일본에 왔으니 기린 맥주를 마셔야 한다”며 모두들 숙소를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빈방을 서성거렸다. 통역장교 출신으로선 군에서 출세할 수 없다. 불현듯 이북에 있는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6·25 전쟁을 통해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엔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 나는 일단 소련으로 간 뒤 다시 북한으로 가 어머니를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

    자정이 넘어 술에 취해 들어온 선임자 장소령이 골아떨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동이 트기를 기다려 슬그머니 숙소를 빠져나왔다. 채 잠에서 깨지 않은 이국 땅 낯선 거리에 내 발소리만 저벅저벅 울렸다. 가까운 전철역으로 간 나는 역 구내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우동을 시켰다. 한국군 복장을 한 나를 모두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나는 아랑곳않고 천천히 우동을 먹으며 다음 행동 계획을 마음에 그렸다.

    전철을 타고 동경역에서 내린 나는 공중전화 부스 속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소련 대사관의 주소를 알아냈다. 택시 기사에게는 소련대사관이 있는 거리의 다음 번 번지를 일러줬다. 대사관 건물을 지나칠 때 차창으로 출입문 기둥에 붙어 있는 소련 국장(國章)을 확인했다. 차에서 내린 나는 대사관을 향해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이 정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경찰이 지나는 행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나는 빨려들어가듯 정문을 통과했다. 그 순간 나는 조국을 배신하고 국경을 넘은 것이다. 엄청난 일이었음에도 싱겁기 짝이 없었다. 뛰다시피 건물 쪽으로 다가가자 미리 나를 보았는지 대사관 직원이 때 맞춰 문을 열었다.

    잠시 숨을 돌리는데 키가 크고 콧수염을 기른 러시아인이 들어와 영어로 자신은 대사를 보좌하는 무관이라고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노어로 오키나와 정보학교를 수료한 한국군 장교로서 한국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공산주의 혁명에 공감하여 소련에 망명을 신청한다고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무관은 잠시 기다리라며 방을 나간 뒤 두어 시간이 지나 돌아와선 뜻밖에도 “우리는 당신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는데 지금 소련으로 가는 것보다 한국에 돌아가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흥분한 나는 “일단 이 문을 넘어선 순간 한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정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나는 여기서 나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 대사관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잠시 긴장이 흘렀다. 무관이 다시 방을 나갔다. 한참 뒤 돌아온 무관은 이러저런 이유로 소련에 망명을 요청한다는 성명서를 소련 대사 앞으로 쓰라며 내게 펜을 내밀었다. 성명서 작성이 끝나자 정문을 열어줬던 직원이 나를 대사관 본관 뒤 목조 건물로 데리고 가 목욕을 시켰다. 목욕을 하고 나오자 나의 한국군 군복과 가방은 보이지 않고 새 팬티와 속옷에 누군가 입던 해묵은 양복이 하나 놓여 있었다.

    밤이 으슥해질 무렵 무관이 내게 나가자고 손짓했다. 대사관 후문에는 소련제 볼가차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앞차 뒷좌석에 눕자 담요가 덮이고 차는 대사관을 빠져나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차가 급정거를 했다. 담요가 걷히고 대신 곰처럼 건장한 두 사내가 내 양팔을 끼고 앉았다. 차는 다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어느 도시의 외곽을 쉼 없이 돌았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네온 간판들로 보아 요코하마 항인 것 같았다. 배의 출항 시간에 맞춰 시간을 버는 것이라 짐작했다. 이윽고 나는 소련 상선에 태워져 선원의 지시에 따라 선미의 창고 비슷한 곳으로 안내됐다. 잠시 후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더니 일어와 노어가 뒤섞인 대화가 이어졌다. 일본 경찰이 출항 전 선박 검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미동도 않고 숨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배는 미끄러지듯 항구를 빠져나갔다.

    창고 문이 열리고 나는 선장실로 안내됐다. 선장실 유리창으로 새벽빛이 야금야금 기어들고 있었다. 나는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선장과 나는 아침 식사를 같이했다. 메뉴는 검은 빵과 흰 빵에 고깃국, 마카로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빵을 뜯으며 선장이 어떤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당시 일본에서 대유행이었던 뜨개틀(편물 기계) 설명서였다. 다치가와에서 동료들이 자기 부인을 위해 사러 나간다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나는 일어로 된 사용 설명서를 노어로 번역하여 건네줬다.

    소련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63년 10월19일이었다. 배에서 내리자 KGB(Committee for State Security·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과 50대 가량의 카레이스키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KGB 직원이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고 묻길래 나는 “블라디보스토크 같다”고 했다. 그는 히죽 웃으며 “모두들 그러는데 여기는 나홋카”라며 블라디보스토크는 군항(軍港)이어서 상선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고 설명해줬다. 나홋카는 노어로 ‘뜻밖에 얻은 것’이라는 뜻으로 나는 정말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닌 게 이상했다. 공기조차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그럼 이제 이동무가 좋아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자”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주변에 보이는 것 하나 없는 들판을 한나절 내내 달리던 차는 KGB 직원의 배에서 나온 쪼르륵 소리를 신호로 멈췄다. 인가 한 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10월 중순이었지만 기온은 따뜻했다. 일행은 길가에 종이를 깔고 앉아 식사를 했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소수 민족 대이동 때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후 KGB에 협조하고 있다는 카레이스키가 내게 술을 권했다. 술을 못 마신다고 하자 그는 소련에서 살려면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며 보드카를 큰 컵에 따랐다. 내가 입에만 댔다가 잔을 내려놓자 그는 “소련에서는 단숨에 잔을 비워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목구멍이 다 타는 것만 같았으나 잠시 후 명치가 뜨뜻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처음 마셔본 술이 내 체질에 맞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신 뒤 빵이나 소시지 조각에 겨자를 묻혀 코로 냄새를 맡은 다음 안주로 먹는 것이 소련식 주법”이라고 덧붙였다.

    한달동안 계속된 KGB의 심문

    며칠 뒤 나는 젊은 KGB 직원과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날씨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달리 살을 에는 듯 추웠다. 나는 검정 세단에 태워져 모스크바 교외로 실려갔다. 이 차에 한번 타면 다시는 돌아오기 어려워 사람들이 ‘검은 갈가마귀’라고 부른다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통나무로 지어진 농가가 띄엄띄엄 있는 것을 제외하면 사방이 키 큰 침엽수로 뒤덮여 있었다. 시골길을 지나 목조 2층집에 다다랐다. 안내를 받고 들어간 방에는 중년 러시아인과 고려인 영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대로 러시아인은 KGB 중장 유리 게오르게비치, 고려인은 사람들이 그냥 조(趙)선생이라 부르는 KGB 중령이었다. 조선생은 유리 중장 앞에서 거의 부동자세였고 담배도 허락을 받고 피웠다. 나는 근 1개월 동안 이들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내가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놨으므로 심문이랄 것도 없었다. 조선생이 뭔가를 물으면 내가 대답하고 저녁에는 여비서가 타이핑한 내용을 들고 와 내게 맞는지 확인하였다. 단 한번 조선생과 내가 언성을 높여 언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6·25에 대해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1950년 나는 평양 철도전문학교 전기과 2학년이었다. 어느 날 평양역에서 함경남도 삼방(三防)으로 실습을 가기 위해 차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지도교사가 모두 내리라고 했다. 영문을 모르고 하차한 우리 대신 인민군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경로를 통해 삼방으로 갔다. 며칠 전부터 저녁마다 탱크나 대포 등 중무기가 남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던 터라 모두들 뒤숭숭했다.

    6월25일, 실습을 나가기 전 숙소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심상찮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오늘 새벽 미국의 사주 아래 남조선 괴뢰군이 공화국 국경인 38선을 넘어 북침해왔으나 우리 용맹한 인민군들이 이를 물리치고 남으로 반격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먹던 콩나물국이 목에 걸렸다. 염려하던 전쟁이 터진 것이다. 지도교사가 실습을 중단하니 각자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 평양으로 가는 길목의 철교와 터널마다 인민군이 지키고 있었다. 교통이 마비돼 우리는 쉴새없이 걸어서 며칠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시 취죽리에 있는 우리 집도 공습으로 쑥밭이 돼 있었다. 집에 돌로 만든 커다란 절구가 있었는데 반동강이 나 있었다. 가재 도구를 챙기고 있는 동네 사람을 붙잡고 가족들에 대해 묻자 보통강역 주변 철도관사로 피난갔다고 말했다. 다행히 부모님과 동생들은 모두 무사했다. 형은 그해 철도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뒤 졸업장을 준다고 해서 인민군에 입대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론 안주(安州)에서 트랙터 운전을 배웠을 뿐인데 2차 대전 때 쓰던 소련제 탱크 T-34 운전병을 시키더라는 것이었다.

    失鄕記
    거리에는 공산청년동맹의 맹원들과 인민군 순찰대가 젊은 사람들을 붙잡아 전선으로 보내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나는 나이도 어린 데다 키도 작은 편이어서 얼마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평양시 스탈린거리에 있는 어느 국민학교로 끌려갔다. 저녁 식사로 줄을 서서 돼지고깃국을 받는데 국을 퍼주는 녀석이 같은 반 친구였다. 자기는 자진해서 왔기 때문에 별일 없을 거라고 했지만 녀석과 나는 다음날 진남포로 보내졌다.

    진남포 포병부대에서 훈련을 받던 어느 날 몸에 부스럼이 생기더니 가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밤이면 더욱 심해져 피가 날 정도로 박박 긁었다. 군의관이 나를 격리시키라고 했다. 마땅히 따로 있을 곳이 없던 나는 불행 중 다행으로 귀향 조치됐다. 얼마 후 탱크를 버리고 도망쳐나온 형과 함께 우리 식구는 기적적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돼 이제나저제나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데 불길한 소문이 퍼졌다. 설마하던 중공이 개전(介戰)한 것이다. 멀어져 가던 포성이 다시 가까워졌다. 어느 날 배낭을 맨 동네 남자들이 찾아와 “우선 남정네들만이라도 피해야 한다. 어서 나와라. 금세 수복될 거니까 아녀자와 아이들은 그냥 두고 오라”고 했다. 물물교환을 하러 나간 어머니는 저녁이 되어야 들어올 것이었다. 형은 어머니를 기다리자고 했지만 나는 내친김에 일어서자고 했다. 동생들에게는 금방 돌아오마고 했지만 어머니에게는 인사도 못하고 나왔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형은 피난 행렬에 끼여들었다. 그때는 정말 며칠 마실 갔다 오지 하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부서진 대동강 철교에 개미떼처럼 매달려 강을 건넜다. 우리는 운 좋게 부교(浮橋)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런데 어린아이나 노인을 이끌고 월남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형은 자신이 다시 평양으로 가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도무지 되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형을 다시 만난 것은 사리원에서였다. 형은 혼자였다. 국군이 막고 있어 대동강 북쪽으로 건너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절망, 그때 우리는 절망했다.

    그런데 전쟁 직전 스탈린과 김일성의 통역을 맡았다는 조선생은 “정의의 전쟁에서는 어느 쪽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전쟁은 약탈 전쟁과 정의로운 전쟁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한국전쟁은 국토 통일을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정의의 전쟁이라고 강변했던 것이다.

    일사불란한 통일성에 전율 느껴

    모스크바에 오고 2주가 지난 후 외출이 가능해졌다. 레닌그라드대학 일어과를 나오고 갓 KGB에 입사한 로베르토라는 젊은이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처음으로 모스크바 시내로 나가 말로만 들었던 쑨두놉스키 목욕탕에서 목욕을 했다. 수백 명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어슬렁거리거나 탕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로베르토가 나의 이두박근을 만져보더니 돌덩이 같다고 했다. 나는 아직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어느 날 조선생이 아침 일찍 찾아와 나갈 채비를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그 날이 11월7일이었는데 소련의 최대 명절인 사회주의혁명 기념일이라고 했다. 혁명은 서양 구력인 율리우스력 10월25일 터졌다. 그런데 그날이 신력인 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7일이었다. 붉은광장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트럭으로 차단돼 있었다. 승용차로 접근할 수 있는 데까지 간 다음 우리는 레닌 묘 양측에 있는 귀빈석까지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귀빈석에 당도할 즈음 크레믈린궁의 탑시계가 은은한 종소리를 울리며 10시를 알렸다. 동시에 귀청이 터질 듯한 군악대의 팡파르와 함께 육해공 3군의 분열식이 시작됐다. 탱크, 장갑차,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앞세워 마치 미국을 위협하는 듯한 식이 진행됐다. 쑨두놉스키 목욕탕에서처럼 대규모 집단의 일사불란한 통일성에 나는 전율했다. 군인들 대열에 이어 일반 시민의 행진이 뒤따랐다. “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5개년 계획을 조기 완수하자” 등의 구호가 확성기를 타고 규칙적으로 반복됐다. 행사 도중 귀가 멍멍하여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가운데 조선생이 내게 충고했다. “심문이 이제 마무리 단계이다. 장군이 어디에서 일하고 싶냐고 물으면 무조건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라.” 나도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며칠 후 장군이 나를 불렀다. 자신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다 알아봤지만 도무지 한국에서 전도 유망한 내가 소련으로 온 까닭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한국에서 통역장교의 앞길을 몰라서 하는 소리지’ 생각하며 씁쓸히 웃었다. 장군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정식으로 대학을 다닌 적이 없어 대학에서 일본어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공부하고 싶은 대학을 물어 내가 순서대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의 세 지역을 지칭할 때마다 장군은 즉각 네트(노어로 No), 네트, 네트를 반복했다. 세 곳 모두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은 곳이어서 망명객이 있을 곳이 못 된다고 했다. 그러더니 비서를 시켜 일본 신문을 가져오게 했다. ‘요미우리신문’이었다. 한 대목을 가리키더니 해석을 청했다. 일본에 온 중국 경제 사절단의 통역이 술에 취해 통역중에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귀국한 뒤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통역은 소련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는데, 국경 분쟁으로 인해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좋지 않아 거절당했다는 기사였다.

    나의 해석을 들은 장군은 일본어를 그렇게 잘하니 따로 공부할 필요가 있겠냐고 말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중국과의 국경 분쟁이 최대 이슈이자 현안인 듯했다. 장군은 내게 정식으로 망명 허가가 날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최종 결재는 후루시초프 서기장이 한다면서.

    이어 장군은 기분을 풀자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공부는 못하지만 구경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모스크바대학으로 갔다. 대학 총장실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장군은 “이 승강기는 석사는 6명을 태울 수 있지만 박사는 머리가 무겁기 때문에 4명밖에 탈 수 없다”고 농담을 했다. 이어 ‘국제 도서’라는 서점에 들러서 사고 싶은 책을 사라고 했다. 나는 맨 먼저 북한코너로 가 조로(朝露)사전이나 노조(露朝)사전을 찾았지만 온통 김일성 찬양 책자뿐이었다. 저녁엔 페킨(北京)이라는 중국 레스토랑을 갔다. 국경 분쟁으로 중국인 요리사들은 모두 귀국하고 없었다. 임관해서 형과 자장면을 먹던 일이 떠올랐지만 나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평생 가장 높이 비상했던 순간

    한 달여의 심문이 끝나자 숙소가 모스크바 시내의 나치오날 호텔로 옮겨졌다. 레닌을 포함해 여러 혁명가들이 머물던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나는 망명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남는 시간을 이용해 로베르토를 따라 레닌그라드로 갔다. 그 추운 겨울에 학생들이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분주히 걷던 레닌그라드 대학이나 에르미타지를 비롯한 여러 박물관도 인상적이었지만, 네바강에 정박해 있는 전함 아브로라호를 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러시아 혁명을 알리며 겨울 궁전을 향해 발포했던 순양함이기 때문이다.

    레닌그라드를 떠나기 전날 로베르토가 대학 동창이라며 여자 두 명을 불러내 호텔 레스토랑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다음날 호텔 프런트에서 계산을 하는데 로베르토의 표정에 핏기가 가셨다. 모스크바 국영 백화점인 ‘굼’에서 내게 방한화와 스웨터, 털모자를 사주라고 장군이 돈을 줬는데 술값으로 다 날렸다는 것이었다. 빈털터리로 돌아온 로베르토를 장군은 거세게 몰아세웠다. 나는 거의 손찌검을 하려는 장군에게 매달려 같이 술을 마신 내게도 책임이 있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 후로도 망명 허가 소식은 감감하였다. 나는 일정에 없던 키예프 여행을 하게 됐다. 이번엔 장군이 따라나섰다. 키예프역에서 밤 기차를 타 열차 객실에서 하룻밤을 자야 했는데, 장군은 내가 젊으니까 2층 침대로 올라가라고 했다. 열차가 어둠 속의 우크라이나 평원을 달릴 때 장군이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아들은 그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도로스가 되어 세계를 떠돌아다닌다고 했다. 장군과 나는 그 사이 많이 친해졌다. 어쩌면 나를 볼 때마다 자기 아들 생각이 났는지도 모른다. 부관을 했던 덕에 나는 사람을 대할 때 항상 긴장을 놓지 않았고 테이블 매너를 포함한 서구식 에티켓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유리 장군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김종오 장군을 모실 때의 버릇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유리 장군도 그게 싫지는 않은 듯했다.

    한강과 분위기가 흡사한 드네프르강을 건너 키예프대학엘 갔다. 건물들이 온통 우중충한 분홍색이어서 ‘붉은 키예프’라 불리기도 한다는데, 대학을 한번 둘러보고 교문을 나서자 내가 원했던 3개 대학을 모두 졸업한 기분이 들었다. 우크라이나로 간 김에 우리는 얄타의 KGB 별장에서 며칠 쉬기로 했다. 그런데 별장은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차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장군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손님이니까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것이다. 또 자기는 장군이므로 움직일 수 없고 운전수는 운전대를 잡고 있어야 하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클랙슨을 계속 누르자 허리가 반쯤 굽은 노인이 황급히 달려나오며 문을 따주었다. 귀가 어두워 자동차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정중히 사과했다.

    별장은 몇 개의 방과 욕실, 당구장 등을 갖춘 아담한 이층집이었다. 이층에서는 흑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12월이었지만 얄타는 따뜻했다. 얄타를 ‘크림반도의 진주’라 부르는 것이 이해되었다. 나도 모르게 고향 제주가 떠올랐다. 장군과 나는 아침에 주로 당구를 치고 오후에는 관광을 했다. 저녁에 지방 KGB 직원이 가져오는 캐비어와 해산물들을 안주로 보드카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때는 장군이 아버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 장군이 이층에서 당구를 치다 말고 터키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었다. 나는 정남방으로 생각되는 곳을 가리키며 이쪽으로 헤엄쳐 흑해를 건너면 앙카라에 도착하겠다고 대답했다. 다시 오른손 방향을 가리키면서 이쪽으로는 이스탄불이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장군은 웃으면서 내게 풍운아 기질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당구를 쳤다.

    체류 마지막 날 체호프박물관을 구경한 뒤 얄타회담이 열렸던 리바디야궁(宮)으로 갔다. 궁전을 한바퀴 돌고 나오려는데 장군이 나를 알타 삼상(三相) 회담이 열렸던 방으로 안내했다. 회담 당시의 좌석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장군이 내게 한번 앉아보라고 권했다. 장군은 반대쪽 좌석으로 가더니 내게 악수를 청하며 똑똑한 이동무가 언젠가 이런 자리에 앉게 될지도 모르니 한 번 리허설을 해본 것이라 했다. 서울에서 김종오 장군 부인이 나를 학(鶴)이라고 치켜세웠던 것처럼. 내가 만일 학이라면 이 순간이 내 일생 가장 높이 비상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비록 장군이 즉흥적으로 꾸민 것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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