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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안기부 동원해 제네바 합의 막으려 했다”

94년 강명도·조명철 기자회견 내막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YS, 안기부 동원해 제네바 합의 막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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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이른바 ‘기자회견 파동’은 안기부 내 정보관리 능력의 부재와 관계부처간 공조부족으로 인해 빚어진 ‘실수’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과연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9년이 지난 지금 당시 안기부 관계자들과 정부 외교안보라인 구성원들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퍼즐의 한 조각을 꺼내놓는다. “강명도, 조명철의 기자회견은 청와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흥미로운 증언이 그것이다. 한국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북미 핵 협상에 반감을 갖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는 게 그 요지. 우선 당시 안기부 핵심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94년 7월18일로 기억한다. 해외에서 오랜 기간 안기부와 접촉했던 김일성대 경제학부 조명철 교수가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서울로 들어오기로 한 날이었다. 이미 2개월 전에 귀순해 서울에 들어와 있던 강명도에 대해서는 청와대에 보고를 올린 터였다. 당시 청와대는 계속되는 북한 고위층 인사들의 망명으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비중이 큰 사건이었으므로 김덕 안기부장이 직접 보고하기 위해 관련파일을 들고 청와대로 향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부장이었다. 대통령이 당장 기자회견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사무실로 돌아올 틈도 없이 청와대에서 바로 전화부터 한 것이었다. ‘이미 넘어와 있는 강명도와 함께 조명철을 기자회견에 내보내면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체제가 흔들리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뜻이라고 했다. 당혹스러웠다. 당초에는 강명도와 조명철 두 사람 모두 망명사실 비공개를 조건으로 데리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 ‘동아일보’는 조명철씨의 귀순소식을 1면에서 특종으로 전한다. 안기부 관계자들과 보고를 받은 청와대 인사들 이외에는 알기 어려운 정보가 상당히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조명철의 이름과 나이, 신분, 성장배경, 아버지인 조철준 전 건설부 부장의 이력까지 담고 있었다. 보고라인에 있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흘리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기사였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그 전날 서울에 들어와 정신이 없었던 조명철씨였다. 현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통일국제협력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조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의 망명사실이 노출됐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도착한 다음날이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공개기자회견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기부 사람들의 설명이었다. ‘그럼 나는 그냥 돌아가겠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관계당국이 절대로 신분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서울행을 결심했는데, 입국한 다음날 바로 신문에 났으니 그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한 방 먹일 수 있는 찬스’

기자회견 준비사실을 통고받은 강명도씨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당시 서울의 안가에 머물며 조사와 적응교육을 받고 있던 강씨도 망명사실을 공개하지 않기로 하고 들어왔다. 요즈음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준비중이라는 강씨는 기자와의 국제전화통화에서 “망명한 지 2개월이 지났고, 알고 있는 사실은 안기부 조사과정에서 모두 이야기했지만 기자회견을 하지 않은 것은 당초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을 갑자기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을 들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북핵문제 때문이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피했다.

결국 일주일 남짓 지난 7월27일 조명철씨와 강명도씨는 기자회견장에 선다. 특히 조명철씨의 경우 망명 후 열흘도 지나지 않아 기자회견을 하게 됐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수 개월에 걸쳐 망명동기와 신분, 갖고 있는 정보 등을 조사하는 것이 당시 안기부의 귀순자 처리 과정이었다.

기자회견 전에 한 차례 만났다는 두 사람은 안기부 담당 직원들로부터 예상 질문지를 건네받았지만 구체적인 발언내용을 상의하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본인의 뜻과는 달리 신분이 노출된 두 사람이 선뜻 기자회견 준비에 응하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 조명철씨는 “기분도 나빴고 위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긴장했던 까닭에 기자회견장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이 때문에 기자들의 질문은 강명도씨에게 쏟아졌고, 강씨는 ‘핵폭탄 보유 발언’으로 기자회견장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렇다면 기자회견을 강행함으로써 청와대가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1994년 7월의 한반도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 해 봄 전쟁위기로 치닫던 북핵문제는 6월16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극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후 7월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중단 위기에 놓였던 북미 대화는 우여곡절 끝에 8월5일 3단계 고위급회담을 열기로 합의함으로써 상황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은 매우 난감했다. 예정돼 있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경호 책임자들이 상호 방문하던 시점에서 들려온 김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은, ‘남북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던 청와대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라인 고위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6월 이후 핵문제 협상은 북한과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한국은 거의 배제된 상태였다. 특히 7월초 합의의 당사자는 미국인 반면 경수로 건설비용 등 경제적인 부담은 대부분 한국이 지는 해결방안이 가시화되자 YS의 불만은 엄청났다. 초기에는 북한에 대한 반감이 컸던 YS는 이 시기 미국으로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회의 때마다 이 얘기로 언성을 높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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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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