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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한반도 大위기 시나리오

北통일대전-中강군몽 커넥션 수면 위로 드러나

불붙은 南·北·美·中 하이브리드 전쟁

  • 홍성민|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 samuel-min@hanmail.net

北통일대전-中강군몽 커넥션 수면 위로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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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新봉쇄정책에 고뇌하는 시진핑
  • ●한국은 미국보다 보수적인 레드라인 적용해야
  • ●이스라엘型 핵무장 불가피
북한이 화성-14형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시험발사에 성공한 후 미·중 빅딜설(說), 미국의 군사 공격 임박설 등 국내외 논의가 백가쟁명식으로 번지나, 대전제는 전쟁 없이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한미 공조와 한중 협력 병행이 요구되는데, 평양이 막가파식 핵 개발로 일관하는 상황에서 한중관계와 미중관계는 날로 악화하는 형국이다.

한중 간 뜨거운 감자인 사드 배치와 중국의 경제 보복은 외교에 국한한 문제가 아니다. 비핵화에 대한 온도차,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에 대한 견해차 등 갈등의 이면엔 역사적으로 상존한 군사적 적대성이 있다. 한중 협력이 올바르게 이뤄지려면 군사적 적대성을 해소하는 방안이 마련돼야 하나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논의는 거의 없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베이징이 총력전(Total War) 형태로 6·25전쟁에 개입하면서 시작됐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엔 냉전(Cold War) 관계로 지냈으며,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엔 경제 중심으로 협력을 강화하면서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구축했다.

2015년 9월 3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의 항일전승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하면서 한중관계는 최고조에 이르렀으나 박근혜 정부의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보장에 대한 미국 지지와 사드 배치 결정으로 인해 급속히 냉각됐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미중 간 균형적 정책 기조가 우려를 낳았으나 한미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 한·미·일 공조를 명시했으며 남중국해의 항해 질서와 관련해 사실상 미국을 지지하는 등 한미동맹 강화 조치가 예상과는 달리 빠르게 진행됐다. 북한의 ICBM급 미사일 발사 이후에는 사드 임시 배치를 결정하기도 했다.

한미관계와 달리 한중관계는 악화했으며 미중관계도 우려스럽다. 7월 3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핵 문제와 관련해 대(對)중국 제재 방안을 예고하자, 8월 1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서의 승리를 언급하면서 대(對)미국 강경 대응을 시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중관계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 것인가. 해법을 찾으려면 상존하는 한중 간 적대성을 들여다봐야 한다.

최룡해 북한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의 아버지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은 6·25전쟁 개전 당시 북한군 2군단장으로 동부전선을 담당했다. 1950년 10월 1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할 때 생존한 북한군 대부분은 북쪽으로 철수했으나 최현의 2군단은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철의 삼각지대 중앙지역(이천-평강-금화-철원-화천)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중동부 산악지대를 장악했다. 김일성이 북중 국경지대의 피난지이던 자강도 만포지역에서 초라하게 은거할 때다.

한중관계의 기원 : 항미원조 전쟁   

北통일대전-中강군몽 커넥션 수면 위로 드러나

1954년 10월 1일 중국 톈안먼 광장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5주년 기념 열병식을 지켜보는 마오쩌둥(오른쪽)과 김일성(가운데).[징화시보]

중공군의 1차 공세 후 조기 종전을 낙관한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1950년 11월 24일 총공격을 지시했다.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다. 중공군은 치밀한 계획하에 60여만 명의 대군으로 역습을 감행했다. 중공군 2차 공세(1950.11.25~12.15)가 그것이다. 중공군 제13집단군은 18개 사단을 태천-운산-희천 방면으로 투입해 평양 동남쪽에서 미군을 포위해 격멸하고자 했다. 6월 문재인 대통령 방미 때 세간에 화제가 된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이 이때 동부전선에서 진행됐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기습에 급속히 붕괴했다. 12월 1일 청천강 방어선에서 철수를 시작했으며 12월 15일엔 임진강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한국과 미국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주도나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우라고 권유했을 정도다. 중공군은 15일 동안 청천강에서 평강을 거쳐 임진강까지 250㎞의 산악 종심 돌파에 성공했다. 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기록이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이 간선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철수하는 속도보다 빨랐다. 유엔군은 중공군과 북한군 2군단을 ‘걸어 다니는 공수군단’이라고 일컬었다.

중공군의 산악 종심 돌파를 선도한 부대가 최현의 북한군 2군단이다. 북한군 2군단은 중공군 1차 공세 때는 유엔군 병력의 3분의 1을 후방에 붙잡아뒀다. 특히 경원선을 차단해 미8군과 미10군단 사이 중부산악지대에 80㎞에 달하는 공백을 만들었다. 2차 공세 때는 국군 2군단의 배후를 습격했으며 중공군이 추격으로 전환하자 선도 역할을 맡았다. 최현의 게릴라들은 중공군에 요충지 선점, 도로 보수, 식량 및 탄약 보급, 숙영지 설치 및 경계를 제공했다.

최현은 중공군의 2차 공세 때 이렇듯 혁혁한 공을 세운다. 패전의 궁지에 몰린 김일성을 구원한 것이다. 당시 중국 수뇌부는 정규전을 경험하지 못한 대규모 신생 부대를 세계 최강 미군과의 전쟁에 투입했다. 그러한 중국 수뇌부에 미국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최현은 전쟁영웅 이상이었다. 

1954년, 1959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열병식 때 김일성이 차지한 위상은 최현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현의 아들 최룡해가 특사로 자주 베이징을 방문하는 것은 이 같은 가족사가 배경에 있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중국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중국이 북한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한계가 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은 1·2월 공세에서 한미연합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부산을 점령하는 공격로로 동부전선을 선정했다. 서부전선을 방어하던 미1·9군단 지역보다는 험준한 지형을 방어하던 한국군 2·3군단 지역을 집중적으로 돌파하고자 했으나 연이어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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