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韓·中 관계의 과거와 미래

‘우호’ 착각 버리고 ‘자주’로 활로 찾아야

  • 글: 고성빈 제주대 교수·정치외교학 ksb@cheju.ac.kr

    입력2003-11-26 15: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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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中 관계의 과거와 미래

    베이징 교외에서 2001년 기갑부대 등을 동원해 1964년 이래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을 벌이는 중국인민해방군(오른쪽). 중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 발사되고 있는 모습(왼쪽).

    바람직한 한중관계 수립을 위해선 우선 중국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석해볼 필요가 있으며 그와 함께 이론적 대응력을 갖춰야 한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중국은 한국에 대해 상당히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다. ‘중국이 한국의 종주국’이라는 선입견이 그 예이다. 한국은 이러한 중국측 인식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다. 필자는 이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싶다.

    실질적 성과는 별로 없었지만 그동안 일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많았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선 지나치게 막연했다. 지정학적 관점에서 한국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 불리한 여건에 있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세 나라 국민의 지적 수준만큼은 비슷하다고 보는데 왜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학문적, 문화적으로 세계 무대에서 뒤처지고 있는지도 반성해보아야 할 대목이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서구인들은 그들이 그리고 싶은 조망으로 동양을 바라보며 동양인들에게도 그러한 동양관을 심어주는 데 성공하였다”고 비판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인은 혹시 중국인이 세워놓은 중국관과 한국관을 은연중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타성적이고, 막연하고, 감정적이며, 혼재되어 있는 상태다. 우선 한국인은 “중국은 한국과 우호적인 관계며 일본은 한국의 잠재적인 적”이라는 타성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거대한 영토와 유구한 문화에 대한 비논리적인 경외심, 거대소비시장이라는 점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유교문명을 오랫동안 공유해왔다는 동류의식 등이 얽혀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미국 등 서구의 대(對)중국관이 한국인의 의식 속에 내재화된 측면이 있다. 중국은 공산주의 독재국가이며 최근의 개혁과 경제발전으로 인해 패권주의국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흔히 우리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우리보다 수준이 낮은 것으로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비해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친근감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과거의 의존적 타성 탓인지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탈냉전시대에 들어서 중국 학문의 성격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채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이 이를 잘 나타낸다. 반면 한국에서 공부하는 중국 학생은 수 백 명에 불과하며 그나마 대부분 조선족이다. 학술과 문화교류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한국이 중국을 대접하고 있는 셈이다.

    1994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베이징대 강연에서 “한국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오랜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다. 그 예로 한국인은 아직도 한자를 쓰고 있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한국 유학생들은 국가원수의 발언치고는 유치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중국학생들은 동방의 작은 나라가 아직도 중국을 경배하고 있다는 데서 자부심을 느끼며 새삼 한국과의 친근함 혹은 한국의 왜소함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정치인의 덕담으로 가볍게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사례는 한국의 일반적인 대중국 인식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한국인의 대 중국 인식은 양국간 국교가 맺어진 199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호감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 대한 호감도를 능가할 정도다. 한중간 인적·물적 교류의 지속적 증대, 지나친 대미 의존에 대한 한국 내부의 성찰, 한중 양국의 문화적 친밀성 등이 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웃 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호감이 일방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상대방은 과연 한국에 대해 대칭적 의미에서의 친근함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측의 비합리적인 호감으로 인해 중국이 한국에 대해 여전히 갖고 있는 종주국으로서의 인식을 무감각하게 넘겨서는 안 된다. 실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경험을 비롯해 문화, 학술, 정치적 교류를 통해 중국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감지된다.

    “중국인이 ‘고조선’ 건국했다”

    중국(대만을 포함)에서의 학술세미나에 참가할 때면 중국 학자들로부터 받는 질문이 있다. 그 전형적인 것이 “중국인 ‘기자’가 고조선을 세운 것을 아느냐”는 것이다. 또 “중국은 역사적으로 한국을 여러 번 도와주었으니 중국과 한국은 서로 잘 지내야 한다”는 덕담도 자주 듣는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임진왜란과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이다. 심지어는 중국이 한국전쟁 때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구출해 주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중국은 일본과는 달리 한반도의 왕조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이 역사적으로 우호적 관계이기만 했을까. 사실(史實)을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다. 우선 한사군(漢四郡)의 수백 년에 걸친 한반도 지배는 사실상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 식민지배였다. 또한 명(明) 태조는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고려에 요구했었다.

    중국은 긴 역사를 통틀어 한국에 무수히 내정간섭을 시도했다. 그러므로 양국의 우호관계는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한국이 묵종한 데서 기인한 것이었을 뿐, 진정으로 두 나라가 ‘평등하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본질은 외면한 채 한국이 중국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친근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필자의 명함에 한자가 씌어 있는 것에 놀라며 한국인들이 한자를 아주 세련되게, 빨리 쓰는 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양국인의 이와 같은 불평등한 상호인식은 단순히 정치 군사적 힘의 우열에 의해서 생성된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사상적, 문화적, 학술적, 정치적으로 뿌리내린 구조화된 인식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진지하고 분석적인 접근과 노력이 필요하다.

    달라이 라마 방한 막는 이율배반

    한국인은 오랫동안 중국의 문화를 한국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어떤 면에서는 한족의 문화를 이민족 통치하의 중국(청, 원 왕조)보다 더 동일시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미국 하버드대 페어뱅크와 라이샤워 교수는 공저에서 “중국과 조선의 문화는 거의 비슷하여 구분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원인으로 “한국인은 외국어인 한자어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공부하고 과거시험의 교과서로 사용하면서 융통성을 상실했고 사상과 문화가 고착화 내지는 교조화된 결과”라고 평가했다.

    현대에 와서도 한국은 전통적 사상과 이념들에 대한 회고와 반성의 기회를 놓쳤다. 일제의 강점과 이후에 찾아온 냉전논리가 새롭고 자주적인 사상과 이념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버린 것이다.

    중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최근 불거져나온 한반도 역사인식에 잘 나타나 있다. 근래에 중국학계에서 고구려를 중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전혀 놀랄 일도, 더구나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들이 왜 한국에서는 이제야 논란이 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만큼 우리가 중국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1996년 11월 방한한 고원동 베이징대 교수와 필자가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한다.

    필자 : 한국이 분단으로 인해서 발해(渤海)의 영토, 역사와 소원해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고원동 : 발해는 중국의 일부분이었다. 중국은 예로부터 다민족 국가였다. 발해는 소수의 고려인(고구려인)과 다수의 말갈(靺鞨)족이 연합한 다민족 국가였다. 그리고 이후에 그 말갈족은 중국에 흡수되었다. 그러므로 발해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와 만주족인 청나라 역사도 중국의 정통역사로 인정하고 있는데 중국에 동화된 말갈족이 다수였던 발해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인정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필자는 2003년 10월2일 제주대학교에서 열린 리빈(李濱) 주한 중국대사 초청강연(강연주제 : 한중 양국의 역사적인 관계와 청년의 사명)에서 리대사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필자 : 최근 보도에 따르면 중국 내에서 지식인들이 고구려사(高句麗史)와 발해사(渤海史)를 중국사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한다는데 이러한 논의는 지금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필자는 10년 전 베이징대에서 연구할 때부터 이러한 인식이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대한국 인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견지에서 21세기 한-중 양국의 우호관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는 것은 ‘중국의 세계관과 동아시아관에 대한 한국의 복종을 전제로 한 우호적 관계’라고 보는데 이에 대한 대사의 견해는 어떤가.

    리빈 : 어느 나라나 이웃나라와의 국경문제라든가 과거의 역사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학술적인 논쟁과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지 이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지금 선생이 제기한 문제를 정치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한중 양국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리라고 생각한다.

    아마 중국의 대다수 공직자들도 비슷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공식적 견해는 상당히 합리적이고 호혜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 같이 보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중국은 인도 및 베트남과의 국경문제에 대해서는 학술적, 과학적인 논쟁으로 보지 않고 무력을 행사, 국경분쟁으로 비화시켰다. 왜 그랬을까. 2000년 티베트 망명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한국 불교계의 초청을 받았을 때 한국정부는 중국의 눈치를 보다 비자발급을 거부해 그의 방한이 무산됐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종교적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한국 고대사에 대한 자국의 일방적 인식에 대해서는 학문적, 과학적 토론의 문제라고 둘러대고 있다. 우리가 중국측 논리에 쉽게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할 대목이다.

    韓·中 관계의 과거와 미래

    동북아시아 허브항으로 급부상중인 중국 상하이.

    중국의 자국중심주의적 사고와 우리의 묵종적 태도는 역사적으로 구조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 교육위원회 황우여 의원이 2003년 9월2일 중국인민교육출판사 간행 ‘중국역사’ 등 중국 중고교 역사 교과서 29권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중국 역사교과서 대부분이 한국사를 일방적으로 왜곡하거나 축소한 사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조선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으며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발해는 당나라의 속방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대다수 중국학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인민교육출판사간 ‘세계역사’는 한글창제의 독창성을 부정하고 “15세기 조선은 중국어와 결합시켜 28자의 자모를 제정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다른 역사교과서도 ‘한자’ 음운을 참조해서 표음문자인 언문을 창제했다며 한글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대한국 인식에 정치적 영향력까지 고려하면 고구려는 앞으로 중국이 되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한국인들이 공식석상에서 중국 손님들과 함께 무심코 “한국과 중국은 수천년 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다”고 건배할 때 그들은 어쩌면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중 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은 한국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 쪽에 있다. 중국의 한국에 대한 ‘종주국 인식’이 양국 관계의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이다. 한국은 이를 극복해나가야 한다. 필자와 개인적으로 친한 한 중국학자는 조공(朝貢)문화에 기인한 중국의 종주국 인식을 거침없이 밝히고 있다.

    “흔히 과거의 중국이 조공제도를 이용하여 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 경제적 이해를 획득하려고 한 현대의 패권주의와는 달리 보아야 한다. (조공제는)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러한 조망에서 보면 중국은 우호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 즉, 중국은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도 주변 ‘야만국’들을 정복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중국은 야만국에 의해 정복당하였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영토적 팽창을 이룬 것은 몽골의 중국통치 때가 유일하다. 오늘날 중국의 국제적 행태의 지침은 평화주의이다.”(Yongnian Zheng, Discovering Chinese Nationalism in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 106)

    위 내용은 중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견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이 중국과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중국의 문화적 패권에 복종하여 조공을 바치거나 아니면 그들이 표현하는 야만족들처럼 중원으로 진출하여 나라를 건국하여야 한다. 중국은 이웃에 어떤 형태로든 ‘복종의례’를 치르라고 강요해온 습성을 가진 나라라는 뜻이다.

    盧의 동북아구상에 반감

    중국은 미국과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언제든 이웃 나라에 어느 한편으로의 선택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한반도문제 해결을 둘러싸고 자국의 지분을 확보하려고 할 것이다. 이 경우 중국이 얻게 되는 지분은 한국인의 손해와 같은 개념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확실히 인식하고 대비를 서둘러야 한다. 중국이 우리에게 ‘마음씨 좋은 이웃’인지 아니면 1979년 베트남전쟁의 경우처럼 언제든지 무력을 사용하려 드는 무서운 이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막연히 중국을 일본보다는 호의적인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2003년 2월12일 북핵문제를 유엔안보리에 회부하자는 안에 대해 러시아는 반대한 반면 중국은 북한정권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라는 통념을 깨뜨리고 이에 찬성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 확고한 외교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한반도의 비핵화를 지지함으로써 미국의 NMD 구상에 북한핵이 구실로 떠오르는 것을 차단한다는 예방외교적 차원의 의사표현이기도 했다.

    중국은 1992년 한국과 국교를 맺으면서도 북한과의 국교를 계속적으로 유지하여 대한반도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때로는 남북한에 대해 외교적 오만함도 유감 없이 발휘했다.

    한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는 가운데서도 중국은 북한의 위기가 벼랑 끝에 다다르면 북한에 식량과 연료를 공급하며 한반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남북한을 동시에 견제했다. 그리고 마늘분쟁과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입국비자 발급을 거부한 사례, 주한 중국외교관들의 오만한 발언과 태도, 중국 주재 외국공관으로 난입한 탈북자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중국경찰이 한국외교관을 폭행한 사건 등에서 중국의 대한국 인식과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은 중국이 후견자로서의 우월적 인식을 유지하고 있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과신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최근에도 중국은 베이징에서의 6자회담을 적극적으로 중재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영향력과 위상을 만방에 과시했다.

    중국의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은 단기적으로 볼 때 한국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여러 방면에서 한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은 이미 미국, 일본 등과 함께 경제대국에 올라섰다. 중국에 대한 우리의 무역의존도도 갈수록 높아질 것인데 중국의 대한반도 정치적 영향력을 함께 고려하면 실로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은 한국이 추구하는 ‘동북아신질서’와 ‘동북아 경제허브 국가건설’에 대해 아무런 호의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China cool to Rho’s regional vision’, 2003년 9월7일자 ‘코리아해럴드’지) 중국은 한국을 21세기 자국이 주도하게 될 동아시아경제권의 일부분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차이나타운’ 신중해야

    국제화시대를 맞이하여 국내에 차이나타운의 설립을 허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국내 어디에선가는 이의 설립이 현실화될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종주국이란 인식에서 나오는 중국측의 오만함을 고려해볼 때 한국 내에 중국 세력을 확대시켜주는 조치가 과연 미래의 한국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 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세계 주요도시에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정작 중국에는 ‘외국인타운’이 없다. 심지어 중국 내 조선족이 한곳에 모여 사는 것도 중국당국은 내심 경계하고 있다. 근래에는 한반도 통일 이후의 민족주의 등장을 우려해 중국이 조선족에 대한 사상교육을 강화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홍콩은 영국에 의해서 강제로 개방되어 국제자유도시가 되었다. 싱가포르는 독립된 주권국가이다.

    중국이 스스로 외부세계에 완전 개방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내에 차이나타운을 설립하는 게 혹시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접해 있다. 평소엔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한번 화가 났을 때 이를 제대로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중국은 1979년 베트남에 대해 교훈을 준다는 구실로 공격을 감행했다. 표면적으로는 베트남정권이 자국내 화교를 탄압한다는 구실을 댔지만 실제 이유는 베트남이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자 이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중국은 21세기 미국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 또한 중국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팽창해 점차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패권적 지위에 도전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것이 미국과 서구의 소위 ‘중국 위협론’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중국위협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국은 자국의 입장에서 중국위협론을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데 소홀한 것 같다. 무엇보다 중국에 대한 막연한 인식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한국은 대체로 ‘중국은 일본보다는 한국에 우호적이며 미국보다 문화적 동질성이 높아 한국에 위협적이지 않다’는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이 지금부터라도 중국위협론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고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적 패권의 교체에는 상당한 세월과 거대한 규모의 힘의 전이가 필요하다. 군사력뿐만이 아니라 문화, 학문, 정치, 경제 분야 등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중국이 21세기 안에 미국의 패권을 대체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20~30년 내에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증대된다면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패권에 도전세력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문화와 학문 영역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대체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소위 ‘연성의 힘’에서 중국이 미국의 수준을 따라가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또한 군사적 영역에서도 중국 공산당은 과거 유럽의 파시스트에 비해 훨씬 냉정하여 세계적 패권을 차지하려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모험주의에 빠질 것 같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대국들은 서로 전쟁을 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전쟁의 결과로 어느 한쪽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에도 미국과 소련은 산발적 충돌을 제외하면 대리전을 벌였을 뿐 서로가 직접 전쟁을 벌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미국과 중국의 경쟁 과정에서 가장 위협을 받게 될 나라는 양대 세력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베트남이 중국위협론의 직접적 대상국이 될 개연성이 크다. 특히 4대강국이 치열하게 영향력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한반도가 가장 취약한 지역이 될 수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틀어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가장 피해를 본 나라는 바로 한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은 북핵 위기와 관련하여 북한에 대한 외교적 지렛대를 보유한 나라라고 여겨지고 있다. 북한도 한반도의 일부분인데 이른바 ‘지렛대론’을 남한까지 확대시켜서 생각하면 중국은 한반도에 대해서 어느 강대국보다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가상적 상황이지만 미·일 동맹축과 중국이라는 양대 축이 북핵 위기, 대만문제를 둘러싼 힘 겨루기에 돌입한다면 아마도 한반도가 최대의 피해국이 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적당한 선에서 각자의 몫을 챙기며 상황을 끝내려 할 것이다.

    한국전에서의 중국의 역할을 회고해보자. 이 전쟁에서 미국은 세계 평화를 지켜낸 것이고 중국은 형제국인 북한의 안보를 대신 지켜준 셈이다. 만일 미국과 중국이 세계적 패권 경쟁을 벌인다면 한반도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거나 혹은 가만히 있더라도 중간에서 큰 피해를 볼 것이다.

    물론 중국이 현상을 유지하려 한다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속성장을 계속하는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고분고분하리라고 예상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대중국 자주노선 절실

    중국의 ‘종주국적’인 대한국 인식에 대해 우리는 감정적 대응을 자제해야 한다. 역사관은 정치적인 문제라기보다는 학술적인 토론의 문제다. 그러나 중국은 적당한 순간이 오면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한국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삼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책으로서는 다음 몇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중국이 상투적으로 하는 것처럼 한국도 정치적인 사안과 비정치적인 사안을 분리해 대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무산된 것은 중국의 압력과 우리 정부의 눈치 보기의 결과인데 이런 점은 고쳐져야 한다. 한국은 대중관계에 있어 비정치적인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자주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와 같은 사례가 자주 반복되면 중국의 한국에 대한 오만한 외교적 자세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인정하더라도 비정치적인 사안에서는 자주적 인식과 태도를 확대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둘째, 중국의 한반도 역사서술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지금 당장 이뤄져야 한다. 그런 작업을 통해 중국측의 역사인식을 파악하여야 한다. 여기서 북한 학자들과의 협조 문제가 대두된다. 발해, 고구려사 등의 연구에는 북한학계와의 공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셋째, 정부나 정치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부분-중국 중심의 역사인식, 외교적 오만함-에 대해서 민간차원에서의 토론과 비평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중국은 그들의 일방적 역사인식을 학술적 논쟁거리라고 얼버무리고 있다. 같은 논리로 한국도 중국의 일방적 인식에 대한 대응논리를 개발해 비정치분야에서 적극적으로 대내외에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넷째, 중국의 자국중심 이론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한국의 문화 수준을 증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앞날은 ‘중국과 일본의 극복’에 달려 있다. 중국과 일본에 대한 자주적인 인식과 행동의 패러다임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가 중국과 일본(서구까지 포함해서)에 유학을 가서 배운 것을 ‘우리 것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지 아니면 문화와 학문의 의존구도를 심화시키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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