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재계 대변인’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

“A기업 얼마 냈으니 B기업도 참고하세요”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3-11-26 17: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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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계 대변인’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
    SK로부터 불거진 대선자금 파문이 5대 그룹으로 번지면서 재계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5대 그룹 핵심 경영자들에 대한 출국금지와 검찰 소환으로 인해 대기업들은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상황이다. 전경련 현명관 부회장이 11월10일 불쑥 검찰총장을 찾아간 것은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참여연대에서는 현명관 부회장의 검찰 방문을 두고 ‘기업과 검찰의 검은 거래’라고 몰아붙였지만.

    재계와 검찰이 정면대립하고 있는, 아니 재계가 검찰의 칼날 앞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상황이 결코 편할 리 없는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을 11월12일 인터뷰했다. 인터뷰에 배석한 홍보팀 관계자는 “부회장님께서 언론과의 개별 인터뷰에 응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인터뷰 초기 현 부회장은 ‘삼성그룹 비서실장’ 출신다운 ‘의례적’ 답변으로 일관했으나 질문과 답변이 오갈수록 속마음을 드러냈다. 어떤 대목에서는 상기된 얼굴로 기자의 질문을 끊어가며 반박하기도 했다. 검찰 수사와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대해서는 ‘이전투구(泥田鬪狗)’ 등의 용어를 써가며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검찰을 극비 방문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왜 갔고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아시다시피 경제가 대단히 어렵거든요. 우리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업의 설비투자와 내수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투자의 60%를 담당하고 있는 5대 그룹으로 수사가 확대되다 보니 경제가 더욱 걱정이에요. 그래서 이런 상황을 검찰에 계신 분들한테 이야기하고, 기업들이 100%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하니 가능한 한 빨리 대선자금 수사를 종결하는 것이 우리 경제 회복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협조를 당부하기 위해서 찾아갔습니다. 검찰도 SK 이외에 5대 그룹으로 수사를 확대하면서 가장 고민한 것이 그 문제이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삼성의 대선자금과 관련해서 조사를 받았다는 보도도 있었는데요.



    “완전 오보입니다. 낭설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그만둔 것이 1996년입니다. 만 3년 동안 비서실장을 지냈으니까요. 그런데 삼성 비자금이 그 사이에 갖다 준 것도 아니고…. 난 지금 삼성그룹이 뭘 하는지도 몰라요.”

    비자금으로 수사 확대는 곤란

    -전경련이 대선자금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했지만 검찰 수사의 방향은 일반적 비자금이나 부당 내부거래 쪽으로까지 향하고 있는데요.

    “그게 곤혹스러운 부분이에요. 그런 혐의가 있어서 조사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다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기업들의 이야기에 신뢰성이 없다고 생각해 비자금으로까지 수사 영역을 확대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거죠.”

    -검찰에 찾아가서 그런 이야기도 했습니까.

    “딱 꼬집어서 비자금 수사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고 가능하면 최단기간 내에 수사가 끝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비자금이라는 게 뭡니까. 대선자금을 어떻게 조성했느냐를 캐는 게 비자금 수사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사가 장기화하는 겁니다. 비자금 조성 경위를 캐다 보면 분식회계니 뭐니 또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SK 사건처럼 대선자금 문제만이 아니고 일반적 기업 경영과 관련한 부분으로 확대되는 거죠. 기업이 수사에 협조하면 대선자금 제공에만 국한시켜서 빨리 끝내자는 것이 검찰의 생각이죠. 그래야 조기에 종결되니까.”

    -그런데 일반 국민 중에서 과연 기업들이 100% 검찰 수사에 협조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불법 대선자금을 모두 밝히면 자금 조성에 따른 책임문제, 즉 민사상 손해배상, 주주들의 비난이 이어질 텐데요.

    “맞아요.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제공한 대선자금은 다 떳떳하게 불겠죠. 그러나 불법적 자금의 경우 민형사상 책임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흔쾌히 말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SK 손길승 회장이 ‘한나라당에서 집권 후 표적사정을 들먹여서 어쩔 수 없이 100억원을 가져다줬다’고 했는데요, 손회장 발언에 공감하십니까.

    “그렇죠, 난감하죠. 돈을 요구하는데 딱 거절해서 못 주겠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예를 들어 삼성 비서실장 재직 당시 지인들을 통해 그런 요구가 왔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푼도 안 주고 딱부러지게 거절하기는 힘들었을 거예요. 단, 금액을 우리 실정에 맞게 조정해달라거나 시기를 좀 늦춰달라거나 하는 식으로는 이야기할 수 있겠죠.”

    대선자금 떳떳하다

    -대선자금 문제에 관해 전경련은 ‘억울한 피해자’입니까, 아니면 ‘불법행위의 한 주체’입니까.

    “원칙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돈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죠. 도의적 책임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로 볼 때 많은 재계인사들은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억울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 수사에 100% 협조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대부분 기업들은 대선자금 문제에 관한 한 떳떳하고 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언론에 보도된 대선자금 제공 기업 리스트에 오른 기업도 대개 법정 한도 내에서 준 것 아니에요? 5억원을 줘야 하는데 관계사에서 1억씩 내게 해서 5억원 모아준 것이 뭐가 잘못입니까. 그런 것은 다 밝히겠다는 겁니다.”

    -과거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하실 때도 정치 후원금은 계열사별로 조정하지 않았습니까.

    “비서실장은 그런 데 관여 안 해요. 어느 회사 이름으로 어떻게 내느냐는 실무자들이 알아서 합니다.”

    -정치 후원금 제공 메커니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까.

    “몰라, 몰라.”

    -정치자금을 둘러싼 당시 분위기나 관행과 비교해보면 요즘 사정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정치도 확실히 발전하고 있어요. 그건 확실합니다. 전두환 노태우 시대하고 비교해봐도 그렇고, 김영삼 김대중 시대하고 비교해봐도 정치자금의 규모도 줄어들었고 방법도 투명해졌습니다.”

    -당시에도 ‘대선 축하금’이라는 용어가 있었습니까.

    “글쎄….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은데요. 재임중 대통령에게 직접 갖다준 것 아닌가요? 추석 이나 설 같은 명절 때마다 가져다주고, 큰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도 갖다주고….”

    -SK가 제공한 대선자금만 보더라도 처음에는 한나라당에 ‘풀 베팅’했다가 후보단일화 시기를 전후해서 민주당 쪽으로 한꺼번에 몰렸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싸들고 갔다는 이야기지요. 사정이 이런 데도 기업을 대선자금의 피해자라고만 볼 수 있는 겁니까.

    “(…) 그런데요…. 사실은 그게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당선 가능성 높은 곳에 더 많이 주는 것은 당연하죠. 그런데 사실은 말이죠, 정치권이 요구 안 하면 아까운 돈 왜 가져다주겠어요, 직접적으로 달라니까 주지. 돈을 요구하는 강도가 세냐 약하냐가 다를 뿐이지, 정치권이 아무 이야기 안 하는데 돈 갖다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SK에 그 정도를 요구했다면 그룹 규모로 보나 수익성으로 보나 삼성 같은 경우에는 더욱 많은 돈을 요구했을 것 같은데요.

    “기업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게 바로 그런 거라고요. ‘왜 SK는 100억원인데 규모도 훨씬 큰 회사가 이것밖에 안 되느냐’라든가 하는. 아예 불법자금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추궁한다든가 하는 것이 정말 곤혹스럽다는 겁니다.”

    정치자금 사전조율은 어불성설

    -사실은 그런 식으로 빌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5대 그룹 정도면 정치자금 규모를 어느 정도 조율하는 것이 상식 아닙니까.

    “조율을 어떻게 해요? 정치자금은 극비사항입니다. 그거 조율하는 미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정말 기업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예요. 그룹 내에서도 그런 것 아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어요. 알면 알수록 폭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정치인들이 ‘SK가 100억 냈으니 얼마 좀 내주시오’ 이런 식으로 유도하는 경우가 있어요. 당 후원회 할 때도 ‘LG는 얼마, SK는 얼마 냈으니 참고하십시오’ 하는 경우가 있었죠. 하지만 그런 데에 넘어가서는 안 되지.”

    -누가 그렇게 전화합니까.

    “후원회장이 전화하고 그러죠.”

    ‘재계 대변인’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
    -그러면 (실제보다 많은 액수를 제시하면서) 금액이 부풀려지는 경우도 있겠군요.

    “그런 경우도 있죠.”

    -그런 데 안 넘어가려면 (기업들끼리도) 정보를 교환해야 할 것 아닙니까.

    “기업들끼리 정보교환을 왜 해요? 우리도 다 루트가 있어요. 아, 한푼이 아쉬운데 한 사람 말만 믿고 몇 십억원을 덜렁 내놓을 수 있어요?”

    -SK 손길승 회장이 ‘표적사정’ 운운해서 100억원을 갖다줬다는 걸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요.

    “그건 손회장 나름대로 그럴 만한 전후 사정이 있을 겁니다.”

    -일단 재계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자금 수사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점이겠죠? 검찰에서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분명한 것은 검찰도 가급적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게 본심이라는 겁니다.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증폭시키지 않고 재계의 경영 의욕을 위축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검찰 역시 수사 장기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말이에요…. 예를 들어 열흘 동안 수사해서 100억원을 밝혀냈다고 치고 (같은 사건을) 한 달 동안 수사해서 500억원을 밝혀냈다고 칩시다. 이게 뭐가 다른 겁니까. 100억원이나 500억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묻는 데도 마찬가지이고 책임을 추궁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열흘 안에 끝내는 것과 한 달 동안 끄는 것을 비교해보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비교가 안 돼요.

    대선자금 수사하는 목적이 뭐예요? 과거의 부패 고리를 끊고 정치인과 재계의 의식을 전환시키고, 깨끗한 정치발전을 위한 토대를 만들어서 결국 선진정치 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런 마당에 100억원 나온 것하고 1000억원 나온 것하고 무슨 차이가 납니까.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에 대한 중지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있는 걸 보면 납득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오래가면 국민들은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만 더욱 증폭될 겁니다. 그것이 민주적 발전의 암(癌)입니다. 이렇게 이전투구만 하면 재계는 재계대로 경제 망가져 손해고,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불신만 쌓여 손해예요. 이제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수사를) 끝내고 (대선자금과 관련한) 제도개혁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전경련이 정치자금 제도 개혁방안을 내놓자마자 검찰이 비자금 수사 방침을 들고 나와 전경련이 머쓱해졌더군요.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제도개선 방안을) 요구해나갈 겁니다. 멀리 내다보고 큰 전쟁에서 이기는 안목과 사고가 필요할 것 같아요.”

    기업과 정치권 직거래는 그만

    -경제에 미치는 충격과 관련해서도 그렇습니다. 국민이 느끼기에는 검찰이 5대 그룹 전면 수사에 나서도 주식시장은 여전히 상승하고 경기 회복 기대감도 퍼져가고 있습니다. 경제에 미치는 충격 때문에 수사를 마무리해야 하느냐, 아니면 그럼에도 대선자금 문제는 여기서 털고 가야 하느냐 중에서 선택한다면 지금 여론은 ‘충격이 있더라도 털고 가야된다’는 쪽 같은데요.

    “털어서 뭐 하게요? 뭘 하기 위해 털겠다는 겁니까? 터는 것 그 자체가 목적입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내가 답답한 게 그거예요. 지금 무얼 위한 수사를 하고 있는 겁니까? 정치발전 위해서 털자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수사의 전제는 정치권이나 재계에 정치발전을 위한 공감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겁니다. 이미 SK사건으로 인해 재계도 정치자금 제도 개혁안을 내놓았고 정치권에서도 정치제도 개혁안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정치권과 재계 모두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치제도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모으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수사를 빨리 끝내서 제도 발전에 중지를 모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수사만 할 겁니까?”

    -검찰에 가서도 그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했습니까.

    “지금 수사 목적이 뭐냐는 이야기는 했어요. 가능하면 빨리 하자는 이야기도 했고요.”

    -전경련이 내놓은 정치자금 제도 개혁안의 핵심은 뭡니까.

    “기본적 골자는 개별적으로는 정치자금을 기탁하지 말자는 겁니다. 선관위나 경제단체를 통해서만 정치자금을 내고 직거래는 하지 말자는 거죠.”

    -하지만 한국적 현실에서 그게 제대로 될까요? 선관위나 경제단체를 통한 합법적 후원금은 후원금대로 내고 기업들 사이에서 직거래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결국 기업만 이중부담을 안게 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불법 정치자금을 요구하거나 주는 경우 처벌을 아주 강화하자는 겁니다. 현재 불법 정치자금을 요구하면 피선거권 박탈기간이 5년일 겁니다. 이걸 아예 20년으로 해버리자는 거죠. 불법 자금을 주는 기업도 적발되면 거의 망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처벌을 강화하고. 그리고 주주총회에 정치자금 기부 한도를 승인받고 보고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아까는 기업의 정치자금이 1급비밀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주총 승인을 받는다는 건 결국 다 공개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전경련이 내놓은 지정기탁금 제도라는 것은 공개를 전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치자금을 내면 지정이든 비지정이든 나중에 다 공개되죠.”

    -그렇게 되면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

    “정치자금을 내겠다는 기업들이 많이 줄어들겠죠. 다 공개되면 강제로 얼마 내라는 전화도 오지 않을 것이고 문자 그대로 정치자금 기탁 여부를 자유의사에 맡긴다면 (자발적으로 낼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궁극적으로는 정치자금을 덜 내기 위한 복선이 깔렸다고 봐야겠네요.

    “현행 정치자금 중 중앙선관위에 의해 공개되는 것은 10분의 1도 안 될 것 아닙니까. 공개되지 않는, 은밀한 부분이 많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 은밀한 부분이 없어지니까 정치자금 규모는 많이 줄어들겠죠.”

    재계는 親기업 정당에 돈 대줄 것

    -지금 전경련이 내세우고 있는 지정기탁금 제도는 지난 1997년, 부작용 때문에 폐지된 것입니다. 또 과거 선거 때마다 전경련이 재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그때마다 여론은 아주 비판적이었습니다.

    “그건 정치자금의 본질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정치자금은 주는 사람이 임의로 내는 것입니다. 강제로 내면 그건 세금이지 정치자금이 아니죠. 정치자금이란 정치발전을 위해서 내는 것인데, 우리나라 헌법하에서 정치발전이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를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잘 발전시켜달라고 (정치자금을) 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도 노동단체는 노동자의 복리 증진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당에 정치자금을 주는 것이고 재계는 친(親)기업적인 정치를 하는 곳에 주는 겁니다. 재계가 반(反)기업적인 정치를 하는 곳에 정치자금을 주는 것은 모순입니다. 친(親)기업적인 정치를 하는 곳에 돈을 많이 주겠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자금의 본질입니다. 이런 본질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는 무식의 소치예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한나라당쪽으로만 정치자금이 쏠릴 가능성도 있겠군요?

    “지정기탁금 제도는 YS 때 폐지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우리 현실에서는 정권의 눈치를 보다 보니까 정치자금을 전부 다 여당에만 갖다주었거든요. 지금 한나라당이 지정기탁금 제도에 반대하고 있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또 열린우리당은 지정기탁금 제도에 유보적 입장이거든요. 굉장히 상징적인 일 아닙니까?”

    -한나라당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건 모르죠. 기탁 대상은 돈 내는 기업이 지정하는 거니까. 나도 뭐라고 얘기할 수 없죠.(웃음)”

    -전경련이 내놓은 방안을 보면 20만원 이상 기부자 명단을 공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치인 후원회에 가면 하다못해 고교 동창들도 50만∼100만원 내놓지 않습니까? 과연 ‘20만원 이상 명단 공개’라는 것이 현실성 있는 방안일까요.

    “20만원이라는 액수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선관위안(案)이 100만원 이상 공개하자는 것인데 그것보다는 좀 더 낮춰야 한다는 취지로 보면 되겠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강연료나 고문료 등도 정치자금에 넣자는 대목도 있던데요, 정당한 용역의 대가를 정치자금에 넣는다는 발상이 가능한 것입니까. 이런 것을 보면 대선자금 수사를 ‘물타기’하고 초점을 ‘제도개선’ 쪽으로 돌리기 위해 비현실적인 방안까지 마구 끼워넣은 것은 아닌가요.

    “그건 지엽적인 이야기고요…. 기본적 전제는 ‘임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법인세 1%’ 방안에 반대하는 것도 강제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는 사람이 ‘자기가 바라는’ 정치발전을 목표로 돈을 주는 것이 지정기탁금 제도의 취지입니다. 이것만은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이 정치 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질 것 같은데요.

    “정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원들이 당비를 내서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절반 정도는 당비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다른 데서 조달하도록 해야죠. 또 일반 국민들도 정치자금을 낼 수가 있습니다. 정치자금은 기업들만 내는 것처럼 이야기하면 안 되죠.”

    빅3 중 한 명이 차기 회장 돼야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이 결국 진통 끝에 전경련 회장대행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도망가는 사람 붙잡아다가 다시 앉혀야 할 정도의 현실이 곧 오늘날 전경련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이 답답하지 않습니까.

    “답답하지만 이해되는 측면도 있어요. 손길승 회장도 정치자금 때문에 그만두었는데 그 자리를 같은 문제로 조사받는 사람들이 차지할 수 있겠어요? 맡더라도 이런 상황이 정리된 다음에 맡겠다는 것이겠죠.”

    -현 부회장께서는 전경련 회장 선출과 관련해 삼성 LG 현대차 등 ‘빅3’에서 맡아야 한다는 ‘실세회장론’을 펴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정치자금 파문을 계기로 용도폐기될 가능성도 있습니까.

    “아뇨. 정치자금 조사 결과에 따를 것입니다. 정치자금 정국이 일단락되면 실세 회장이 등장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5대 그룹 총수는 사법처리되지 않더라도 일단 흙탕물이 튀었기 때문에….

    “아니죠. 흙탕물이 튄 것은 하나도 없죠. 합법적인 정치자금을 낸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현대차 같은 경우도 한도 내에서 냈는데 개인 이름으로 낸 것일 뿐입니다. 한도를 초과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이건 아무 문제도 아니에요.”

    -‘실세회장론’은 아직까지 유효한 카드라고 보십니까.

    “그건 내 개인적인 의견이고 구체적인 것은 강신호 회장의 직무대행체제 출범 이후 회장단과 논의를 해봐야겠죠.”

    -부회장께서 나름대로 갖고 계시는 복안은 무엇입니까.

    “세 사람 중에 하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건의할 생각은 없습니까?

    “글쎄요. 그게 건의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이건희 회장께 건의하기 더 어려운 것 아니에요? 분명한 것은 (현재로서는) 이건희 회장도, 구본무 회장도 안 맡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내년 2월 정기총회 때 회장단 의견이 어떻게 돌아갈지 봐야지.”

    -이번 기회에 전경련의 위상 변화를 추진할 생각은 없습니까.

    “전경련이 싱크탱크로 변모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개념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예요. 이익단체로서 전경련의 존재가치는 있는 겁니다. 단, 전경련이 국가정책의 일관성 유지를 위해서 헤리티지 재단이나 브루킹스 연구소 같은 싱크탱크를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죠. 전경련을 해체해서 만든다는 발상은 말도 안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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