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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편입 전문 전국김영학원 김영택 회장

“편입 줄이면 지방대 부실 심화될 것”

  • 글: 이지은 동아일보사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편입 전문 전국김영학원 김영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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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김회장은 초등학교 시절 미와 양이 수두룩한 성적표를 받았다고 한다. 일곱 살에 입학한 데다가 워낙 장난꾸러기라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 그러던 중 6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2년여를 보낸 후 어느 정도 집안 사정이 나아지자 뒤늦게 중학생이 됐다. 중학교 성적표는 모두 수였다. 학교를 다닌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깨닫고 학업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만 하겠다는 작은 소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중학교 3학년을 마칠 무렵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이후 숙부네 가서 살았는데, 어느 날인가 숙부가 저를 고무신 도매상의 점원으로 보내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집을 나와 무작정 상경했어요.”

그 후 김회장은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다고 한다. 중졸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명 노가다(현장 막노동), 식당 직원, 가게 점원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가 좋고 행동도 민첩했던 그는 어떤 일이든 척척 해냈고 돈도 꽤 모았다. 22세가 되던 해 그는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갔더니 행정병을 시키더군요. 아마 제가 중졸 출신 행정병 1호일 겁니다(웃음).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행정병들이 저를 무시했죠. 하지만 제가 글씨도 더 잘 쓰고 기획안도 잘 만들었거든요. 다른 행정병들이 제게 아이디어를 부탁했을 정도였죠.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 대접받고 살려면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대 후 그는 대입 검정고시와 대입시험에 차례로 합격해 고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가르치던 학생은 대입 시험을 망쳐 원하는 대학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지는 대학에 진학했다. 괴로워하는 학생에게 그는 “편입 시험을 준비해보자”고 제안했고 당시 편입시험 과목이었던 국어와 영어를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그 학생은 편입시험에 합격,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 후로 입소문이 난 거죠. 특히 편입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저를 많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10명 정도 모아놓고 그룹과외를 했죠. 그러다가 1977년 처음으로 ‘김영선생 대학편입’이라는 간판을 걸고 학생 40명을 가르쳤어요. 그 중 34명이 고려대에, 나머지 6명도 다른 대학에 합격했죠.”

이후 그를 찾는 학생 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40명에서 100명, 1000명까지 늘었고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1981년 졸업정원제가 실시되면서 서울대에 처음으로 결원이 생겼어요. 그러자 당시 문교부 장관이 서울대 결원을 편입으로 채우겠다고 발표했죠. 사상 처음으로 서울대 편입시험이 치러지게 된 거였어요. 저는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투자해서 학원을 새로 지은 후 서울대 편입 준비반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죠. 그런데 그 해 9월 갑자기 서울대 편입 계획이 무산됐고 일반편입제도마저 없어졌어요. 투자한 것 다 날리고 알거지가 되고 말았죠.”

부자와 거지 오갔던 7년 외도 생활

그 후 한동안 편입학원 시장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김회장 역시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회사를 전전하던 그는 명성콘도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게 됐다. 영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금방 회사의 주역으로 떠올랐고 짧은 기간에 많은 돈을 모았다. 하지만 보증을 선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또다시 재산을 모두 날렸다.

“아내가 임신중이었는데 돈이 없어서 보건소에서 지원하는 산부인과에 가서 아이를 낳아야 했어요. 경기도의 한 단칸방으로 이사했는데, 매일 무슨 돈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나를 고민할 정도로 가난했죠. 당장 돈이 필요했던 저는 봉급이 아닌 일당을 주는 곳으로 위장취업을 했어요. 이력서에 초등학교 졸업이라고만 적고 일당 1만원을 받고 한 우산업체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김회장과 경리를 맡고 있는 여직원만 사무실에 남게 됐을 때 갑자기 독일에서 온 바이어가 들이닥쳤다. 그 바이어는 일본과 한국의 업체들 중 한 곳에서 우산을 수입하려고 했다. 영어를 못하는 여직원이 우왕좌왕하자 그는 능숙한 영어로 바이어를 상대했고 가계약까지 체결했다. 여직원의 어안이 벙벙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사장에게 ‘이력서를 거짓으로 작성한 데다 월권행위까지 했다’고 사과한 후 사직서를 냈어요. 하지만 사장이 극구 말리면서 오히려 국제수출 및 영업 업무를 맡기더군요. 순식간에 신분이 상승한 거죠. 하지만 3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제가 그 업무를 맡으면서 기존 사람들이 그만두게 됐거든요. 당시 저는 ‘이런 작은 우물에 갇혀 있는 게 아닌데, 괜히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펌프 부속회사, 학습지 회사 등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학습지 회사에서는 경영국장까지 맡았다.

영업사원으로 능력을 인정받으며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의 편입교육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언젠가는 일반편입이 가능해져 편입시장이 살아날 거라고 생각한 그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편입관련 자료들을 쭉 모아왔다. 그러던 중 1987년 입학정원제가 부활하면서 일반편입이 가능해지자 그는 다시 편입 교육을 시작했다.

“‘김영편입학원’이라는 간판을 단 학원에서 강의를 다시 시작한 순간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정말 ‘이것이 내 길이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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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은 동아일보사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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