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사형수의초상

  • 글: 박김혜원

    입력2003-11-28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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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수의초상
    1976년 3월 나는 한 사형수를 만났다. 그리고 그가 형집행을 당할 때까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가 떠난 후 매주 또는 격주로 만나 나와 신앙과 우정을 나눈 사형수는 줄잡아 20여 명에 이른다. 그들과 신앙상담을 하면서 삶의 마지막 길동무가 되는 것은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뜨거운 마음 하나면 되리라 믿고 겁없이 덤빈 이 길이 너무 힘들어 때로는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없지 않지만 사회가 내게 준 사랑의 빚을 가파른 절벽 위에 선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힘이 되어주었다. 어쩌면 담장 안 그들은 악인이고 담장 밖 우리들은 선인이라고 믿는 사회의 이분법적 편견에 도전하는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이 마치 괴물이라도 되는 듯 이 지구상에서 추방해버리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안전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8년의 교도소 교화위원 생활은 내게 삶을 거꾸로 보는 또 하나의 눈을 주었다. 나의 새로운 눈에 잡힌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를 뒤늦게 후회하고 올곧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피를 토할 듯 억울함을 호소하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사람답게 한번 더 살아보고 싶다고 외치는 사형수들의 절규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무력감에 소리 없이 통곡했던 체험들을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이 글은 한 교화위원의 뼈아픈 자기 고백록이자 직접 만났던 담장 안 흉악범들의 인간적 참회록이요, 항변의 외침이기도 하다.

    사형수의 신앙상담과 출소자 재활지원, 무기수 상담, 재소자 교화위원 등의 활동을 하면서 나는 인생의 장년기를 활활 불태웠다. 그런데 아직도 사형이나 교도소라는 소리만 들으면 계절병 환자인 양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통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조급해진다. 만나봐야 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자책감에서다.

    사형집행장이 있는 교도소는 전국에 5개가 있다. 교도소마다 사형수 교회(敎悔)를 실시하는데, 이는 신앙을 통하여 참회에 이르도록 사형수를 교화하는 일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 일을 맡는 여성 교화위원을 ‘사형수 자매’라 부른다. 사형수 자매들은 매달 영치금(1976년에는 2000원, 지금은 1만∼2만원)을 넣어주고 내의나 양말 등 생활필수품을 가족 대신 공급하는 일도 한다. 사형수들은 대개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사상범을 제외하면 사형수 열에 예닐곱이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계층에 속한다.

    사형수 교회는 한 편의 휴먼드라마



    사형수 교회는 비교적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사형수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 특히 힘들어진다. 이런 사형수는 대개 집행장에서 그때까지 쌓아온 신앙을 부정하고 불안한 최후를 맞게 된다. 이럴 때 담당 자매는 자신의 사랑이 부족했던 탓으로 여기며 자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담당해온 사형수가 사라져버렸을 때의 허무함을 이겨내는 일 또한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다. 형이 집행되면 사형수 자매는 비로소 인간으로 돌아온 그들을 무참히 죽여버리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버겁기만 한 일이라면 이리 오래 버틸 수 있었겠는가. 사형수 교회는 사형수와 그 자매가 함께 엮어가는 한 편의 휴먼드라마다. 신앙을 매개로 두 사람이 만나 짧게는 1∼2년, 길게는 7∼8년 동안 정과 신뢰를 나눈다.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흉악범인 그들이 신앙으로 거듭나 참회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성스럽기까지 하다. 또한 내가 누리는 안정과 평화의 밑바닥에는 이렇게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의 분노가 있었음도 알 수 있게 된다. 끊임없이 죽음의 두려움에 떠는 그들을 보면서 내 삶에 대한 불평이나 원망이 얼마나 사치스런 것인가를 깨닫기도 한다. 이 가파른 여로를 함께함은 봉사라기보다는 수련의 과정이다. 결국 그와 나는 잠시 동안이지만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커가는 것이다.

    인생을 바꾼 남편의 말 한마디

    나는 경찰서 앞을 지나기만 해도 괜히 발이 떨리는 겁쟁이였다. 그러던 내가 사형수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말하자면 1975년 10월9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날 아침 남편과 나는 식탁 앞에서 조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내 눈을 사로잡은 기사는 사상초유의 살인마 김상현(가명)의 체포 소식이었다.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신출귀몰 연쇄살인을 저지르면서 전국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던 흉악범이 청량리역 부근에서 붙잡혔다는 것이다. 기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55일 동안 경찰 비상망이 쳐진 전남, 경기, 서울을 멋대로 누비며 9차례에 걸쳐 17명의 무고한 생명을 잔인하게 죽인 범인은 잡고 보니 돈이 궁했던 폭력전과 2범의 20대 단순 강도였다. 그가 17명을 살해하고 얻은 금품은 현금 겨우 2만6000여원과 여자 팔목시계 하나, 고추 15근, 쌀 1말, 플래시 1개, 블루진 옷 1벌, 가짜 금반지 1짝뿐. 첫 범행지인 전남 무안에서는 250원 때문에 일가족 3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남편에게 퉁명스레 소리쳤다.

    “여보, 이 범인이 당신 고향 사람이네! 창피해서 어떻게 살아요?”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묵묵부답이던 남편이 부시시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서 한마디를 툭 던졌다.

    “당신이 전도하면 되잖아요. 요즈음 전도열이 펄펄 끓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교사직을 그만둔 후 집과 교회가 온 우주인 양 살아온 내게 17명을 살해한 흉악범을 찾아가 전도를 하라니! 유명 목사님과 스님이 수두룩하잖아. 지금 남편은 나를 놀리고 있는 거야. 지난 2개월 동안 온 나라 사람들의 밤 외출을 꽁꽁 묶어놓은 흉악범. 그 악명에 걸맞게 유명인들이 찾아가 교화를 해도 참회를 할까말까일걸. 얼굴만 사람일 뿐 마음은 야수 중의 야수잖아.’ 그때 내 맘속에선 이런 말들이 꿈틀댔다.

    희대의 살인마 김상현의 유년은 지극히 평범했다. 그는 논 4마지기와 밭 1000여 평을 부쳐 연명하는 가난한 농군의 6남매 중 맏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에 특별히 성격이 포악하다거나 정신이 박약하다는 기록은 전혀 없었다. 노모(현재 74세)의 말을 들어봐도 어린 시절 그는 수줍은 편이었고 정이 많았다.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그는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집에서 빈둥거리다 17세에 집을 떠나 공장일꾼, 머슴, 점원 등으로 전전해야 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마음 붙일 곳이 없기는 객지와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동네 구멍가게의 물건값이 도시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것에 화가 나 말다툼을 벌인 것이 폭행으로 이어져 6개월 징역을 살았다. 출소한 그의 얼굴과 눈빛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폭행과 감옥살이로 별을 단 전과자를 감싸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극적 운명이 덮친 날, 그는 철로 5km를 걸었다. 어둠이 내리고 배가 고팠다. 산자락 아래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농가가 그의 눈앞을 막았다. 두 눈에 도둑고양이 같은 섬광이 일었다. 그 집에 침입하여 부부와 아이를 살해하고 250원을 빼앗았다. 그의 첫 범행은 전남 무안에서 그렇게 시작됐다. 나쁜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 남들처럼 멋있게 살고 싶었다지만 체격이 작고 힘이 약해 큰집을 털 엄두를 못 냈다는 김상현.

    “당신이 전도하면 되잖아요” 하던 남편의 말 한 마디가 내 가슴속에 박힌 사랑의 가시가 되어 그를 위해 기도하도록 했다. ‘너무 외로워서 철로 5km를 내내 걸었다?’ ‘몸이 약해 노약자만을 범행대상으로 택했다?’ 이런 물음들이 땅속을 헤집는 지렁이처럼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저었다.

    나는 기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편지 쓰기 등 그와의 소통경로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겨울을 대비해 두툼한 내의를, 수갑으로부터 여린 살을 보호하도록 털실로 뜬 토시(팔목 보온대)를 보내기도 했다. 그에게 배달된 우리 애들의 예쁜 성탄 카드는 그의 감방 벽을 꾸민 장식품이 됐다. 동료 수인들은 그에게 신방을 차렸다고 놀리곤 했다고 한다.

    기도로 시작한 사형수와의 첫 만남

    생각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교도소. 그곳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편지로 그와 안면을 튼 지 3개월 만인 1976년 3월이었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서울구치소의 높고도 긴 담장은 번잡한 찻길과 맞닿아 있었다. 일상적 일들로 정신 없이 바쁜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그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거대한 동토지역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우뚝 선 감시 망대와 높고 긴 회색 담장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막혔고 온몸에 소름이 쪽 돋았다. 이를 악물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제2정문을 통과하고 경비실에서 치르는 절차는 까다롭고도 무시무시했다. 충성을 목이 터지게 외치면서 경례를 붙이는 교도경비병을 벗어나자 비로소 살았다 싶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살이 통통한 기독교 담당 직원이 정문에서 우리를 맞아 조그만 방으로 안내했다. 어찌나 방이 춥고 싸늘하던지 턱이 덜덜 떨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도소 안에 들어서면 나는 일년에 계절이 여름과 겨울 두 개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이는 단지 시설의 열악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곳에 난무하는 온갖 후회와 비탄, 미움과 원망에 눌려 자연이 들여보내주는 따스함이나 시원함을 품는 완충지대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속칭 ‘넥타이 공장’이라 불리는 사형집행장이 버티고 있는 탓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희대의 살인마 눈에서는 어떤 독기가 뿜어져 나올까?’ ‘살인자는 혈통부터 다르다니까 분명 드라큘라 비슷한 공포의 냄새를 풍기겠지’ 이런저런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기다리는데 가죽수정(쇠수갑 외에 양팔에 채운 가죽수갑으로 허리에 맨 가죽띠에 연결해놓는다. 자해나 폭력을 막기 위해서다)을 찬 그가 교도관과 얘기를 나누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신문에서 읽은 대로 그는 가냘프고 작은 체구였다. 수줍은 듯 미소를 짓자 그의 가느다란 눈은 눈꺼풀 속으로 숨어버렸다.

    우리의 첫 만남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기도로 시작됐다. 그 날 주고받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벌레만도 못한 나를 무엇 하러 찾아오느냐’던 김상현의 말만 기억난다. 나는 2주마다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섰다. 경사길을 내려오는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사형수 출신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금년에는 별 탈이 없을 거야. 그러니 금년 성탄절은 안심하고 즐겁게 보내라고. 새해 초에 만나기로 해.”

    12월30일, 광주에 있는 친지의 문병을 마치고 귀갓길을 서두르며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라디오에선 막 저녁 7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종합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법무부는 오늘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의 5개 교도소에서 23명의 사형수를 일제히 형집행했습니다.”

    그 23명에 끼여 그는 서른 살의 짧은 생을 마쳤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안심하고 지내도 된다고 큰소리친 나의 소견이 얼마나 짧은 것이었던가. 한치앞도 못 보는 주제에, 감당도 못할 부도수표 남발하듯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을까. 머릿속이 휑하게 빈 것 같았다. 허탈감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갑자기 메스꺼움이 일었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때였다. 두툼한 입술을 크게 열고 떠들던 그의 음성이 사위에 번지는 어둠처럼 내 가슴으로 밀려왔다.

    “그날 밤 별똥별이 떨어지데요. 교무과 뒤 십자가 동상 위쪽으로요. 그 별을 보면서 저는 소원을 빌었어요. 오늘도 살았으니 내일도 살고 싶다고.”

    그러나 그토록 소원하던 그의 내일은 별똥별 사라지듯 영원히 어둠 속으로 묻혀버렸다.

    남편의 원수를 용서한 ‘산소 같은 여자’

    나는 그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산소 같은 여자’라는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1992년 5월10일에 그녀가 한 일은 죽어가는 뭇 생명에게 산소를 공급한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 날 나는 유순임(가명, 당시 44세)씨와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나는 그녀 오빠가 꽃동네에 정착했는지를 묻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남편을 비명에 보내고 세 자녀와 시어머니를 부양하는 힘든 생활 전선에서 돌볼 직계 가족이 없는 중풍환자 오빠는 그녀의 근심거리 1호였다. 나는 범죄의 피해자인 그녀를 돕고 싶었다. 그래서 형제자매가 있는 경우에는 자격이 안 되는 그녀의 오빠를 꽃동네에 입소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오빠는 꽃동네에 들어갔다. 그녀는 수녀님들의 친절한 보살핌으로 오빠와 자신 모두 만족스럽다고 대답했다. 1989년 5월의 첫 만남 이후 그녀는 딴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생기가 넘치고 수다스러워졌다. 점심이 끝나갈 무렵 나는 마음을 벼르고 입을 뗐다.

    “유순임씨, 새벽기도회에서 은혜 받고 원수도 용서하겠다고 전화로 말하셨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했으니까요.” “당신의 원수가 누구인지는 알고 계세요?” “서정택(가명, 당시 46세의 사형수)이겠지요. 그 사람 아직도 안 죽었습니까?”

    서정택은 1987년 말 유순임씨의 남편 김씨와 같이 행상을 하다 노름방에서 김씨에게 250만원을 빌려줬다. 서정택은 김씨가 종적을 감추자 다음해 3월 천신만고 끝에 강원도 영월에서 그를 찾아내 돈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김씨가 갖고 있던 곡괭이를 빼앗아 내리쳤다.

    “그래요. 당신의 맘먹기에 따라 그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어쩌시겠어요?” “네?”

    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숨을 한번 크게 쉰 후 그녀의 남편을 죽인 사형수 서정택의 감형탄원서를 그녀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한번 죽 훑어본 그녀는 내 얼굴을 피한 채 길가로 향한 출입문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간 후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예수 믿나요?” “아니요. 하지만 유순임씨가 열심히 기도하면 믿게 될지도 모르지요.” “예수 믿고 전도사나 된다면 모를까….”

    나는 난감했다. 서정택이 교도소 안에서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불릴 만큼 독실한 불교신자가 됐음을 차마 알릴 수가 없었다. 오로지 예수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는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가 없었다.

    “용서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고 그를 전도사로 만드는 일은 하나님 몫이지요. 당신이 탄원서를 쓴다고 반드시 그를 살릴 수 있다고는 장담 못 해요. 용서를 하면 당신은 새벽기도가 더욱 은혜스러워질 겁니다.”

    그녀는 볼펜을 달라 하더니 탄원서 밑에 이렇게 적었다.

    “잔인했던 서정택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 밝은 세상에 나와 불쌍한 처자식과 행복하게 생활하고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을 전하는 기도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산소 같은 여자 유순임씨는 그 날 첫 아이를 낳는 산모의 모진 진통을 겪으며 탄원서에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꾹 눌렀다.

    사형 폐지운동에 나서다

    그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9년 5월의 일이다. 나는 이상혁 변호사(서울구치소교화협의회장, 당시 57세)가 건네준 한 장의 주소를 들고 찾아 헤맨 끝에 서울 봉천동 언덕배기 허름한 함바식당에서 유순임씨를 만났다.

    사형수 서정택이 이변호사에게 절절한 편지를 보내왔다. 자신의 아이들은 어떤 스님이 잘 거두어 공부를 계속하는데, 자기가 죽인 피해자의 아이들은 어찌 되었는지 걱정이 되니 그 애들에게 장학금을 줄 독지가를 구하여줄 수 없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이변호사와 나는 좋은 독지가를 구했고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후원을 거절했다. 모르는 사람의 호의를 받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유씨가 밝은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한 것은 1991년 10월 말경이었다. 자신이 기독교 신자가 됐다면서 “새벽기도회에 가서 성경말씀을 듣는데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이 자꾸 떠올랐다”고 했다. 나는 얼마 후 유씨의 전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이변호사에게 전했다. 피해자의 아픔을 껴안을 때 비로소 사형제도폐지운동의 공감대를 넓힐 수 있으리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사형수 서정택의 대리인이 된 이변호사는 1989년 2월28일에 사형의 위헌여부를 구하는 헌법소원을 냈다. 여기에 피해자의 가족이 가해자의 감형을 탄원하는 글을 덧붙인다면 금상첨화였다. 이후 이변호사를 비롯해 서울구치소 각 종파 책임 성직자들이 앞장서서 1989년 5월30일 한국사형제도폐지운동협의회(이하 사폐협)를 창설했는데 나는 이때 창립 임원으로 참여했다.

    국민의 정부 5년간 사형집행 유보

    헌법재판소에 처음 찾아간 것은 1993년 11월25일이었다. 사형수 강정규의 부모와 함께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 도착하니 사폐협의 공동 대표인 스님, 신부, 목사님들과 이변호사를 비롯한 법조인들이 이미 30여 명 와 있었다. 이들은 사형폐지의 뜻을 담은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있었다. 나는 어리벙벙해 서 있는 강정규의 부모를 안내하여 법정 안 앞자리에 앉았다. 높고 긴 재판관석에 치렁치렁한 법복을 걸친 법관 8명이 좌정한 후 재판이 시작됐다. 어려운 재판용어 때문에 아무리 귀기울여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더니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각하한다’는 말 한마디가 들렸다. ‘사형은 헌법 제10조와 제37조 등에 보장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부정하는 생명권 박탈의 형이므로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은 재판관 8인 전원일치로 기각됐다.

    한편 교도소 안에 숱한 미담을 뿌리던 사형수 서정택은 1994년 11월 큰스님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행당했다. 그러나 실망의 끝에는 희망의 작은 싹도 달려 있는 법이다. 최소한 금기로 여겨져온 사형문제를 법정으로 끌어들여 공론화시킨 것만 해도 작은 성과였다.

    희망의 씨앗은 이곳저곳에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갔다. 2001년 국회의원 정대철씨가 발의하고 의원 155명의 서명을 받아 사형제도폐지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청원하기도 했다. 사폐협과 사형폐지를 위한 범종교협의회의 끈질긴 활동으로 이룩한 성과였다. 하지만 아직 법사위원회에 상정조차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국민의정부 5년은 사형집행이 유보된 사상 초유의 기간이었다. 참여정부의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공약을 통해 가정파괴범 같은 파렴치범을 제외하고는 사형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끔찍한 범죄현장을 많이 목격한 사람은 사형찬성론자가 되고, 처절한 사형집행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반대론자가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각종 범죄 장면이 TV화면을 통해서 많이 노출되지만 사형집행은 교도소 한 구석에서 은밀히 이뤄진다. 그래선지 국민들의 법 감정은 사형존치론에 더 기울어 있는 것 같다.

    사형은 국가가 저지르는 또 하나의 살인

    오래 전에 읽었던 ‘88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라는 책이 떠오른다. 미국인 저자는 교도관의 아들로 태어나 교도소 구내 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을 보았다. 커서는 자신이 교도관을 거쳐 교도소장을 지내며 90명의 사형수들을 형집행했는데, 이 책은 그 경험을 적은 것이다. 저자는 사형수 대다수가 흑인이거나 소수민족이고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강력범죄에 빠져들 확률이 낮을 뿐 아니라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여 극형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형수들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김상현이나 박민서처럼 범죄 내용이 명백해 현행법상 사형이 분명한 경우, 둘째 강정규처럼 죄에 비해 사형이 과중하다는 심증이 가는 경우, 마지막으로 오철규처럼 오판에 의한 사형일 개연성이 높은 경우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 사형을 집행한다는 것 자체가 국가의 중대한 과실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의 경우라도 후회와 참회 속에서 속죄의 삶을 갈망하는 그들에게서 새 삶의 기회조차 박탈하는 것은 비인도적이지 않은가.

    인간은 과오를 저지르기 쉬운 불완전한 존재다. 사형을 선고한 판사의 행위에 과오가 끼여들 틈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진범이 따로 있는데 판사의 오판으로 억울한 사람을 사형대에 세웠다면 그렇게 죽어간 원혼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하겠는가.

    또 사형제도는 인간의 교정가능성을 일시에 빼앗아버린다. 국가가 범법자를 교화해야 할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포기하는 야만적인 제도다. 이런 의미에서 사형은 국가가 저지르는 또 하나의 살인이다.

    범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처한 가정, 시대,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부익부 빈익빈의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제도적 희생양이기도 하다.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그 낙오자들을 돕는 일은 자선이 아니라 의무다. 강력범죄에 대해 극형이라는 처방을 내리는 것은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복수행위의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의 마음을 녹인 것은 가혹한 형벌이 아니라 미리엘 신부의 이해와 사랑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는 우리 가족에게 모두 18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편지에 담은 내용은 다양했지만 일관되게 반복하는 말이 있다. 편지 끝에 ‘벌레만도 못한 수인 상현 올림’이라고 썼다. 내가 처음 보낸 편지에 대한 그의 답장을 보면 영혼이나마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자 하는 갈망이 느껴진다.

    ‘탐욕과 허영심에 사로잡혀 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범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기생충처럼 다른 사람을 갉아먹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향의 선배님인 박선생님(나의 남편)은 그렇게나 훌륭하신데. 파리보다 못한 제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100분의 1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보다 더한 고통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남겨진 삶이 짧아서였을까. 아니면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크다는 성경말씀을 이루려 함이었을까. 자살하겠다고 감방 벽에 머리통을 짓찧는 등 교도소의 골칫거리였던 그가 거짓말처럼 달라졌다.

    그의 국선변호인을 자임했던 이상혁 변호사(당시 서울구치소 교화협의회장)는 훗날 막 교도소에 들어왔을 때의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해줬다. 첫 법정에서는 이름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도 대답을 거부했다. 심지어 검사의 앞잡이인 국선변호인 따위는 필요 없다고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구치소의 변호사 면담실로 그를 다섯 번이나 찾아갔더니 차츰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고 한다.

    참회와 선행의 수형생활

    서울구치소 건너편 금계산 양지바른 언덕에는, 힘겨운 겨우살이를 털고 일어난 개나리들의 노란 함성이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그 뒤를 좇아 은행나무들이 귀엽고 작은 잎부리를 옹기종기 내밀고 있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하필 그가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었다.

    “저, 벌써 죽었어야 마땅한 놈 아닙니까. 저 때문에 끌려온 친구 목숨 살리려고 항소했거든요. 오늘 그가 무기로 감형됐으니 더 이상 살아 무엇하겠습니까.”

    법정에서 금방 돌아온 그는 상기한 얼굴에 미소까지 띤 채 나를 안심시켰다. 보통 공범이 있는 강력범죄 사건의 경우 사형수들은 절대 혼자 죽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범이나 종범을 기어코 물고 들어가려고 온갖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혼자 죽음의 길에 서는 것은 더 외롭고 무섭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친구인 공범을 항소심에서 살렸다. 모든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고 진술함으로써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무기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사형과 무기의 거리는 하늘과 땅의 사이만큼 벌어져 있다. 또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큼 희비가 엇갈린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감형을 받은 공범 김해창(가명·현재 59세)은 천하를 얻은 듯 두 손을 높이 들고 흔들어대면서 입 끝이 귀 밑에 닿을 만큼 기뻐했다. 나를 큰누님이라 부르는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20년 복역한 후 모범수로 출소해 가정도 일궜다.

    김상현은 한사코 더 살기를 마다했다. 변호사의 상고 권유도 뿌리쳤다. 피해자 가족들을 생각하면 무슨 낯으로 더 살겠다고 발버둥치겠느냐는 것이다. 상고 포기로 그의 마지막은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그와 나눈 대화는 이후로도 세상 인심이 야속해 힘들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곤 했다.

    “자매님, 이제 영치금은 넣지 말아주십시오.” “왜요? 액수가 너무 적어서요?” “제가 원래 치사한 놈이잖아요. 매달 넣어주시는 그 영치금 2000원 때문에 자매님을 기다리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영치금은 칫솔, 치약, 비누 등 최소한의 용품들을 사기에도 모자라는 액수였다. 하지만 그는 무의무탁 재소자들을 위해 그 돈을 몽땅 썼다. 또 200여 명을 기독교로 전도했다. 이렇듯 참회와 선행으로 이어진 그의 모범적 수형생활은 교도소 안을 훈훈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젊고 건강한 육신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 주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사형수들의 장기기증과 관련된 규정이 없었던 것 같다.

    끝내 맺지 못한 찬송가의 메아리

    1976년 12월28일 서울구치소로 나오라는 급한 전갈이 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나는 즉각 알아차렸다. 잠시 망설인 끝에 나는 안 가겠다고 결정했다. 그의 마지막을 거두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도 후회가 된다.

    김상현은 스물여덟 해의 욕스러운 삶을 마감했다. 그는 벽제의 기독교 공원묘지 한 귀퉁이에 묻혔다. 그 날 집례를 맡았던 김수진 목사가 전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다음과 같다.

    집행장으로 향할 때 김상현의 손은 얼음장처럼 찼다.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삼정목(감방에서 나와 한 길은 처형장으로, 다른 한 길은 의무실로 갈린다) 길에서 그는 뒤를 한번 길게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느냐”는 집행소장의 물음에 그는 침착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전과자들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그들이기에 그 꿈은 더욱 간절하고 큽니다. 그러나 그 꿈은 세상의 냉대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납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회가 출소자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고 갱생의 길을 열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도 초범자와 재범자를 분리 수용해 죄를 배워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저같이 불행한 젊은이가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저를 돌보아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사형수의초상
    예배 집전이 끝나자 교도소장의 손 지시가 떨어졌다. 김상현의 뒤에 서 있던 형집행자가 그에게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 용수를 씌웠다. 그리고 포승줄로 그의 발목과 무릎, 두 팔을 묶는다. 묶인 몸이 뒤로 끌려가는 동안 그의 입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흰 커튼이 드르륵 걷히자 그의 몸은 사방으로 금이 그어진 직사각형 판자 위에 앉혀진다. 천장의 도르래에서 2cm 굵기의 밧줄 올가미가 내려와 그의 목에 걸린다. “제껴!”라는 소리와 동시에 그의 몸은 아래로 툭 떨어지면서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예수 예수 내 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쉬 떠나지 마시고….” 끝을 맺지 못한 찬송가의 메아리만이 지하실 허공을 잠시 맴돌았다. 15분쯤 지난 후 교도관과 의사가 그의 질식사를 확인함으로써 모든 절차는 완벽하게 끝났다.

    천국을 본 황홀함

    1981년 성탄절을 앞둔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금당 사건의 주범 박민서(가명·당시 41세)와 우리가 마주한 예배실은 화기애애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큰누님(나는 그 무렵 사형수들 사이에 큰누님으로 통하고 있었다. 기독교 자매로서는 고참인 데다 적극적인 교화활동을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자 누님(박민서의 기독교자매 양순자씨, 당시 42세), 저는 주님께서 불러주실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 목에 밧줄이 놓이기 전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셔서 제게 천국을 보여주실 것이며 곧 저의 영혼을 거두실 겁니다. 천국을 본 황홀함 속에서 저는 하늘나라로 갈 것을 믿습니다. 두 누님께서 꼭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우리는 당황했다. 처음엔 그를 안쓰려워하는 우리를 위로하려는 마음이려니 여겼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몇 번인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자 그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죽음의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다른 사형수들과 달랐다.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죄를 잘 알고 있었기에 죽음을 미리 준비하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삶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상현이 상고를 포기했던 것과 달리 그는 상고를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본 나의 짐작이다.

    그는 교도관들에게 처형장의 모습과 처형절차 등에 대해서 여러 번 물어 사형장에 대한 예비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 날이 닥치면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라며 집행예정일을 미리 귀띔해달라는 은밀한 부탁까지 했다.

    1982년 7월22일. 그 날은 하필 복더위에 느닷없이 찾아왔다. 그를 연출(連出)하러 다가간 교도관이 “오늘은 하나님 앞으로 가는 날입니다”고 알려줬는데, 이런 말을 미리 해준 것은 전무후무한 특례였다. 박민서가 그 동안 교도관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와 정을 쌓아왔던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성경과 편지보퉁이 등 소지품을 정리한 뒤 감방 동료들과 작별의 기도를 나누고 교도관들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시종일관 침착하고 환한 얼굴 그대로 밧줄을 받았다. 긴 참회의 기도 겸 유언과 자신의 장기를 뒤에 남기고 그는 떠났다. 그가 예견했던 황홀한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다.

    박민서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 3월, 새봄이 추위에 지친 세상을 향해 햇솜처럼 부드러운 손길을 내밀 때였다. 박민서와의 첫 대면을 앞두고 기독교상담실에 앉아 기다리던 나는 그가 무척 궁금했다. 교도소에 파다하게 소문난 그의 인기의 허와 실을 알고 싶어서였다.

    사형수가 된 후 비로소 얻은 행복

    사업자금에 잔뜩 쪼들려 현금 3억원이 필요했던 박민서는 1979년 6월20일, 골동품상 금당의 정사장 부부를 차례로 자신의 집에 유인하여 돈을 요구했다. 정사장이 부인을 시켜 구해올 수 있던 돈은 겨우 500만원이었다. 이제 돈이 아니라 두 입을 막는 것이 목적이 된 그는 두 사람을 살해하고 운전사마저 처치했다. 그는 세 사람의 시체를 자기집 정원에 파묻고 감쪽같이 100여 일을 버텼다. 완전범죄라고 믿고 또 다른 사기행각을 벌이다 동거 여인의 고발로 붙잡혔던 것.

    그는 인물 좋고 말솜씨 또한 좋아 상대편의 혼을 빼버리듯 한다고 했다. 교도소에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열이면 열 그에게서 감동을 받는다고 하니 해괴한 일이었다. 그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헛갈렸다.

    “사람을 셋이나 죽여 자기 집 마당 안에 묻어놓고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하다니. 그러고도 뭐가 잘났다고 교도소 안에서조차 사람들을 홀려?”

    내 안의 혼란스러움을 알 리 없는 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허리를 절반으로 꺾어 인사했다.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 짙은 눈썹, 서글서글한 눈매에 뽀얀 얼굴. 훤칠한 키마저 갖춘 그는 정갈한 한복 속에서 더욱 돋보이는 미남이었다.

    그는 전과 13범인 명동깡패를 전도한 얘기라면서 신들린 사람처럼 감방 안의 소식들을 전해주었다. 홀린 듯 듣고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민서씨는 늘 그렇게 기쁩니까?”

    내가 그러나 사실 그때 정말로 묻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당신 뻔돌이 아니야? 그렇게 끔찍한 죄를 지었는데 마냥 기쁘다고? 참회하고 근신할 시간도 모자랄 텐데….”

    “절망 앞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다니 이해가 안 되시죠? 저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놀라워서 입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당장 죽어 마땅하지만, 이 더러운 저를 사형수로 만들어서라도 구원해주신 그 사랑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풀어준다 해도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가면 또 죄의 길에 빠질 통제불능의 욕망 덩어리가 저니까요. 사형수가 제 마땅한 신분입니다.”

    우리를 쳐다보는 그의 깊은 눈 속에 어느덧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내 속마음을 벌써 읽고 있었을까? 막힘 없는 그의 대답에 진정함이 넘쳐났다. 그의 기쁨은 깊은 영혼의 샘에서 솟구치는 맑은 물 같아서 죽음과 참회의 쓰라림으로 누르려 해도 누를 수 없어 보였다. 그의 말대로 그는 참 행복해 보였다.

    그 행복은 지난날 그가 돈과 육체의 향연 속에서 맛보았던 찰나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쭐대기 위해서 친구들과 여자들에게 퍼부어 줌으로써 얻었던 자기만족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겨서 사랑하는 누님(양순자씨)에게 생일 선물 하나 줄 것도 없는, 맨 밑바닥에서 얻은 자유로 인해 솟구치는 충만함이었다. 지난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의 탐욕에서 비롯됐다면, 그가 얻은 새로운 기쁨은 아픈 자, 괴로워하는 자와 함께함으로써 더욱 커지는 나눔의 행복이었다. 감방 안에서 신입 수감자의 발을 씻겨주고 변기를 씻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수감자 중 아픈 사람이 생기기라도 하면 잠을 자지 않고 기도를 하는 것도 그였다.

    ‘내 목에 밧줄이 놓이기 전에’

    박민서는 옥중 참회록을 썼다. 그가 담당 자매인 양순자씨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참회록은 그의 집행 8개월 후인 1983년 출판됐다. 제목은 ‘내 목에 밧줄이 놓이기 전에’.

    외롭고 시간이 많은데 편지 쓰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당시 구치소에서 자유로운 집필이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교무과의 검열을 거친 봉함엽서 편지와 상고이유서나 재심청구서 등 법률구조행위에 필요한 서류만 허용됐다. 미결수의 경우는 1일 1회, 기결수는 1주일에 1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그것도 감방 밖에 마련된 제한된 공간에서 1회 1시간 동안 교도소에서 제공하는 볼펜으로 쓰도록 제한했다.

    봉함엽서에 안팎으로 빼곡이 쓰면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글을 쓸 수 있다. 따라서 책 한 권을 만들어내려면 200여 통의 편지를 써야 한다. 박민서가 쓰려고 했던 것은 자신의 일대기. 시간적, 공간적 제한 때문에 조급해진 박민서는 범칙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취침시간이 되어 재소자들이 다 잠든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복도를 오가며 감시의 눈을 번득이는 보안과 직원들을 따돌려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는 척하면서 편지를 썼다. 종이는 화장실용으로 지급받는 누렇고 거친 관지로 충당했다. 문제는 볼펜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는 양순자씨에게 모나미 볼펜심 10개만 구해달라고 떼를 썼다. 양씨는 당국이 엄금하는 이 일에 공모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단호히 거절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박민서는 집필 목적이 자신의 추한 과거를 공개함으로써 다시는 자기처럼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열망임을 여러 번 말했다. 양씨는 그 뜻을 잘 이해했고 ‘공모자’가 됐다.

    이렇게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그는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편지 보따리는 우리에게 건네졌고 책으로 출판됐다. 책의 내용은 경악 자체였다. 섹스와 돈의 난장판, 탐욕과 허영, 사기와 배신, 복수에 불타는 잔혹성, 살인의 광기 등 온갖 독소가 넘쳐나는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양순자씨에게 이 기록을 세상에 내놓는 게 무슨 이득이 있냐고 물었다. 양씨는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박민서는 외계인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소산물일 뿐이죠. 그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나약함과 죄악, 그럼에도 열려 있는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신 건 아닐까요?”

    정말 그랬다. 박민서라는 확대경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 이기성, 허영과 탐욕, 그리고 악마적 모습을 극대화시켜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이런 욕망을 똑바로 보는 것은 곧 극복의 첫걸음이었다.

    “남을 죽인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죽였다”

    박민서는 자신이 수십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와 가장 가까웠던 동거 여성도 그의 진짜 얼굴을 몰랐다. 자신의 뜻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십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았다. 그 덕택에 그는 최고급 생활과 환락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탐욕을 먹고 자라는 벌레였고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는 범행 당시의 처절한 외로움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것은 무섭고 견디기 힘든 고독과 쓸쓸함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가시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세 사람을 유인하여 죽이고 묻는 동안 그에게는 초인적인 인내심, 치밀함,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독심술, 위기를 극복해내는 순발력 등이 번득였다. 그는 범죄의 천재였다. 그 순간 그에게 악령이 씌워지지 않았다면 그런 수법을 자행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일을 끝낸 그는 처절한 후회와 공포를 맛봤다.

    “50년이나 100년을 교도소에서 썩는다 해도 그때 정사장을 풀어서 집으로 돌려보냈어야 했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내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살인하고 난 후 나는 남을 죽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죽인 것임을 뼈아프게 느껴야 했다. 나에게 성난 파도처럼 일시에 덮쳐온 죄의식과 공포, 두려움은 죽음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박민서의 자서전을 열심히 팔았다. 책의 인세, 수입금은 심장병을 앓는 세 어린이의 심장판막 수술비로 쓰였다.

    “저는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형수 오철규(가명)의 사례는 앞의 김상현이나 박민서와는 판이하다. 1979년 9월13일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에서 처형된 치정살인 사건의 범인 오철규의 마지막 말은 너무도 끔찍했다.

    “저는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죽어 원혼이 되어서라도 제게 오판을 한 판검사와 거짓 증언을 한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겠습니다.”

    죽기 전까지도 결백을 주장했던 오철규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1974년 12월30일 인천시 중구 신흥동 쌀가게 시화상회에서 주인 정민구(가명·당시 38세)씨와 두 자녀의 사체가 발견됐다. 경찰은 다음날 피살자의 부인 두순애(가명·당시 27세)씨와 그녀의 정부 오철규(당시 29세, 일련정종불교회 인천 창영지구 부장)를 범인으로 체포했다. 범행을 극구 부인하던 오철규는 경찰조사에서 두순애와의 대질심문을 거치는 동안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1975년 1월10일 서울지방검찰청 인천지청 안길수 검사 앞에 불려나간 오철규는 지금까지의 자백을 전면 부인했다. 허위 자백을 한 이유는 경찰의 고문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1심 재판 중 구치소 안 화장실에서 두순애가 목매 자살을 했다.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쓴 오철규는 1, 2심을 거쳐 1976년 2월24일 3심에서 사형확정을 받았다. 상고 기각 후 마지막 기회는 재심청구다. 그러나 재심청구는 확정된 판결 내용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 증거나 증인이 있을 때만 허락된다. 오철규의 경우 그런 선결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재심청구, 기각, 재항고, 기각, 재상고, 기각. 이렇게 여섯 번을 반복했다.

    내가 오철규를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6월이었다. 그해 3월 양순자씨는 사형수 오철규의 신앙 자매가 됐다. 그는 일명 ‘남묘호랑게교’라고 불리는 일본의 일련정종불교 인천지구 포교사였다.

    당시 양씨와 나는 각자 돌보는 사형수가 달랐지만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도움을 구했다. 그녀가 어느 날 내게 의논을 해왔다.

    “요즘 만나는 사형수는 자꾸 억울하다고 하니 신앙지도하기가 몹시 힘드네요. 같이 만나면 좋겠어요.”

    그래서 가끔씩 나도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내가 그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다만 억울하다고 몸부림치는 그의 목소리를 조용히 들어주고 그를 위해 기도했을 뿐이다. 아마 그는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판인가 철면피인가

    작은 키에 통통한 체구, 고수머리…. 그의 첫인상은 다부지고 고집이 있어 보였지만 별로 호감을 주는 타입은 아니었다. 신앙 면에서 김상현이나 박민서와 비교가 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죄가 명백했으므로 사형을 받아들이고 오로지 신앙에만 열중했다. 하지만 오철규는 달랐다. 억울하다는 생각에 설교를 해도 톡톡 튕기기 일쑤였다. 빈정거리는 말투 때문에 맘놓고 무슨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위증한 사람들(오철규의 주장)이나 경찰, 검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분노의 눈빛을 번득였다. 그런 태도가 우리에게는 참 부담스러웠다. 억울하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줄 수도 없고, 기도만 열심히 하자고 설득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진을 빼는 만남이었다.

    그는 1976년 12월쯤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 하지만 일련정종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염주를 갖고 있었으며 가끔씩 불경을 외는 일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병으로 고생하다 일련정종교를 믿은 후 병이 나았고, 그래서 그 자신도 일련정종교를 믿게 됐다고 한다. 그런 그가 종교를 바꾼 것은 신앙적 동기라기보다는 억울한 누명을 벗고자 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자기에게 씌워진 누명과 그에 따른 형벌이 너무 억울했던 그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고 가르치는 기독교의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리고 싶었을 것이다. 재심청구 상고가 기각되자 그는 구치소 담당 목사나 교무계장에게 “나는 억울하니 제발 누명을 벗게 해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재심청구가 기각되자 그는 1979년 5월 사형수 교회 참석을 거절했다. 자신의 억울함을 절대자가 풀어줄 것이라는 기대가 채워지지 않자 냉소적으로 변한 것이다. 두 달 후 그를 다시 만나 함께 예배를 드렸다. 마지막 예배였다. 같은 해 9월13일에 그는 집행됐다. 형장에서 서슬 퍼런 저주를 남긴 것과는 달리 그는 평정을 되찾고 기독교 신자로 세상을 떠나겠다며 기독교 집례를 순순히 받았다. 그리고 그를 돌봐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역시 잊지 않았다.

    물론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는지, 아니면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철면피였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한 수사와 엄정한 재판을 한다 해도 인간의 인지능력과 판단능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오판의 위험은 항상 동전의 앞뒤처럼 따라다닌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이유 중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이 바로 오판의 가능성이다.

    다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23세의 젊은 사형수 강정규(가명)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은 1990년 7월23일이었다. 그는 세로 4.5cm, 가로 9cm 크기에 2212라는 숫자가 새겨진 빨간색 딱지를 왼쪽 가슴에 달고 있었다. 빨간색 딱지는 요시찰로 감시받는 최고수들의 수인번호 표찰이자 죽음의 표식이기도 하다. 일반 수인들은 하얀색 딱지를 단다.

    사실 그와 만나기 전날 나는 그를 만나야 할지 망설이느라 밤잠을 설쳤다. 사형수 돌보기 16년째에 들어서 있던 당시 나는 좀 지쳐 있었다. 봉사를 하더라도 가슴이 덜 아픈 일을 하고 싶었다. 정성껏 돌보고 정들인 그들이 어느 날 작별의 인사 한마디 없이 교수대 위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현실이 너무도 허망해 무력감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기억밖에 없는 사형수 교화에 나는 회의를 느꼈다. 희망을 심는 교화가 아니라 조용한 죽음을 위한 예비작업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교도소측의 끈질긴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하룻밤의 망설임 끝에 당시 23세였던 젊은 사형수 강정규를 서울구치소에서 첫 대면하게 됐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서울구치소는 1987년에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으로 이전했다. 새 구치소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웅장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청계산을 뒤로, 모락산과 관악산을 좌우로 거느리고 앉은 그곳은 풍수지리에 무지한 나의 눈에도 명당인 듯했다. 이곳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사람의 목을 매는 ‘넥타이 공장’이 사라지고, 덴마크의 어느 교도소처럼 재소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표시로 흰 깃발을 나부끼는 날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강정규는 나의 막내아들보다 한 살 위였다. 육척 장신에 덩치가 어찌나 큰지 마치 씨름판의 천하장사 같았다. 미결수(사형수는 형이 집행될 때까지 미결수 신분임)에게 허용되는 한복 바지저고리 특대호도 그에게는 형편없이 작았다. 짧은 저고리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의 파란 문신 점들이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못마땅해하는 내 눈길을 의식한 듯 그가 변명의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거요, 애인과 약속의 표시로 북두칠성을 그려넣은 거걸랑요.” “정규씨, 그 애인 때문에 신세 망쳤잖아요. 이젠 애인일랑 깡그리 지워버려요.” “노력해도 꿈마다 나타나걸랑요. 면회 한번만 오면 원이 없겠어요.”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진 게 시간밖에 없는 이곳이니 성경 열심히 읽고 기도해야죠.” “저요, 글을 잘 못 읽걸랑요. 성경은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아직 어리광을 떼지 못한 듯 말끝마다 ‘걸랑요’를 붙였다.

    “중학교 중퇴라면서 한글을 못 읽다니요?” “공부는 싫고 권투가 하고 싶었걸랑요. 그래서 엄마한테 만날 혼났죠, 뭐.” “그럼 정규씨한테 우선 국어를 가르쳐줘야겠군요.”

    이렇게 시작된 강정규의 국어 학습은 3개월쯤 지나자 성경을 더듬거리며 읽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성경을 읽게 되자 그는 매주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들을 형광펜으로 표시해 내게 질문을 퍼붓곤 했다. 질문의 답을 성경책 여백에 서툰 철자로 빼곡이 적었다. 동료 재소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다음 해 부활절에 세례를 받자 덜렁대던 그가 차차 신앙생활에 열성을 기울였다.

    일기, 편지 등 글쓰기 즐겨

    서툰 국어 실력이었지만 그는 글쓰기를 즐겼다. 대필에 의존하던 가족 편지를 자신의 글로 쓰니까 엄청나게 재미있더라고 자랑했다. 편지 1백여 통을 쓰는 동안 그의 글 실력은 물론 생각 역시 하루가 다르게 깊어졌다. 글을 쓰는 것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깊은 뿌리를 내리고 느낌이라는 잎과 꽃을 피우며 행동이라는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은 것임을 그를 통해서 절감했다. 그는 일기에 우리의 첫 만남과 독방생활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았던 참담한 심경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원문 그대로 싣는다.

    “90년 7월23일 종교자매를 매워(맺어) 주었다. 나는 글씨을(를) 모르기 때문에 책을 보는 것조차 실어서다(싫었었다). 그러치만(그렇지만) 자매님은 내가 글시을(를) 모른다고 흉을 보는 일은 없어고(없었고), 나에게 우리 엄마처럼 따스하게 글시을(를) 또박또박 가르쳐 주셨다. 처음에는 주기도문을 에우는(외우는) 것이 기찬아(귀찮아) 매주 하시는 집회조차도 나가기 싫어써다(싫었었다). 그러면서(그리고) 생활방에서 생활하는 것이 기찬아(귀찮아)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을 계로피고(괴롭히고) 네(내) 말을 안 들을 때는 주먹으로 때려서 징벌을 받고 독방에 드러간(들어간) 적도 있서다(있었다). 90년 5월17일에 첫 독방생활을 해서 66일 만에 나왔다. 독방은 1.5평 좁은 방이고 담요 2장만으로 지낸다. 햇빛은 없고 형광등만 빈(빛)난다.

    나는 독방에 이쓰면서(있으면서) 죄판(재판)에 붙어 21부에서 죄판(재판)을 받은데(받았는데) 친구인 최성규(가명)가 자기가 나보다 말도 잘한다고 해서 그럼 네가 다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법정에 들어가서는 네(내)가 다 한 것이라고 하면서 나를 나븐(나쁜) 놈으로 진술했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는 자기가 죽은 박진아양을 때려다고(때렸다고) 말하고 법정에서는 안 때려다고(때렸다고) 했다. 나는 멍청하다. 의리 생각해서 죄판(재판) 받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못하고 사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형을 받고 7일 동안 밥을 안 먹어써다(먹었었다). 굶어 죽고 싶어써다(싶었었다).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친구도 나를 배신했고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며(하면) 좋을까 하는데 선우라는 애가 이제는 하나님만 믿고 살라고 했다.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외는 데 6개월이 걸려써다(걸렸었다). 항소심 재판에 나는 또 성규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내가 현장에서 지문을 지우고 나왔다고 했다. 나는 기억도 못하는 일을 그는 나에게 뒤집어씌우고 자기 빠져나갈 곳만 찾는다. 항소심 재판에서 판사가 나에게는 무기징역을 조하게지만(줘야겠지만) 최성규의 2심 진술 때문에 죄판(재판)을 기각한다고 했다.

    나는 억울하다. 항소심 죄판(재판)이 기각되니까 답답한 나머지 출소하던 사람이 주고 간 담배를 피우다 걸려서 징벌을 받았다. 보안과에서 담배를 어디서 나냐고(났냐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매맞아 가면서 조사바다다(받았다). 2달간 징벌을 받아 독방에 또 가쳐다(갇혔다).”

    뒤늦게 깨달은 어머니 사랑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강정규의 경우가 꼭 그랬다. 뒤늦게 글공부를 하더니 편지, 일기 등 되는 대로 쓰기 시작했다. 글 쓰는 맛을 알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가끔씩 시를 짓거나 노랫말을 만들고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물론 맞춤법이나 낱말은 틀린 것이 있었지만 그의 표현은 매우 호소력이 있었다. 특별히 어머니란 제목의 시를 여러 편 썼다. 내게 남긴 그의 시집 맨 첫 장에 실려 있는 시 ‘어머니’는 나를 많이 울렸다. 뒤늦게 깨달은 어머니 사랑의 애틋함이 엿보여 여기 싣는다.

    어머니문득 새벽녘에 눈을 떠 사방을 둘러볼 때 슬픕니다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해도 슬픕니다머리 빗을 때나 속옷을 갈아입을 때도 슬픕니다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을 수 없어 슬픕니다.웃을 때와 찡그릴 때도 슬픕니다어머니께 이런 나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밀린 빨래를 볼 때 어머니 정성이 더욱 그립고배식을 받아 앞에 두고 어머니의 음식솜씨를 그리워합니다철창 안에서 겨우 철들어 가족의 소중함도 알았습니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가정

    강정규를 만나 6개월쯤 지났을 때 나는 그의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시청 옆 프레스센터 현관에서 만났다. 미안하고 또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그의 어머니가 쏟아낸 집안 사정은 이러했다.

    미장일과 식당일을 하는 그의 부모는 가난하고 무식하지만 2남2녀 기르며 힘든 세상에 잘 살아왔다. 첫딸은 시집을 갔고 큰아들은 군 생활을 마치고 전문대 2학년에 복학했다. 그들 부부는 둘째아들 정규가 공부와는 담을 쌓았지만 봉제기술이라도 배워 제 밥벌이만 하면 된다 싶었다. 막내딸은 상냥한 성격 덕에 고등학교 졸업만 하면 작은 사무실 말단 직원으로라도 취직이 되려니 기대하고 별 욕심 없이 지냈다. 집안은 별 풍파 없이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다. 적어도 그 날 아침까지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느닷없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서울 만리동 언덕배기 20여 평 정규네 보금자리에 용산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서슬 퍼런 형사 일행 4명은 지난 밤 늦게 들어와 뒷방에서 잠에 곯아떨어져 있던 정규를 조사할 일이 있다며 무조건 끌고 가버렸다. 술 냄새를 물씬 풍기며 끌려가던 정규의 두 손에서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수갑이 그 가정을 송두리째 뭉개버릴 재난의 징조임을 누군들 알았으랴.

    정규의 어머니가 가슴을 쥐어짜는 아픔을 안고 발을 동동거리는 동안 정규는 경찰서 유치장 구금 10일 만에 검찰에 송치됐고 곧 서울구치소로 이송됐다. 검찰조사를 거쳐 그는 방화살인범으로 기소됐다.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1심 재판의 공소 내용은 이랬다.

    “친구인 강정규와 최성규는 사건 당일인 1990년 5월6일에 용산구 서계동에 있는 청파공원에서 동네 친구들을 만나 소주와 콜라를 마셨다. 만취한 두 사람은 박진아(가명, 당시 19세)와 박미숙(가명, 당시 21세)이 일하는 서계동 소재 모 지하 봉제공장에 침입했다. 그들은 두 여공들을 협박하고 맥주병으로 때려 금품(20만원 상당)을 빼앗고 강간미수를 범했다. 그들은 범행을 은폐할 목적으로 실내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후 도주했다. 박진아는 현장에서 죽고 박미숙은 중화상을 입었으며 공장은 화재로 5000만원 상당의 재산피해를 입었다. 술에 만취한 강정규는 귀가하여 잠을 자다 다음날 아침 경찰에 체포됐다.”

    그러나 강정규의 입을 통해 나온 사건의 대강은 이렇게 달랐다.

    “5월7일 아침 집에서 자고 있는데 엄마가 나영이란 아가씨한테서 전화 왔다고 하데요. 오늘 오후 6시10분에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엄청 사랑했는데 갑자기 나를 멀리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걸랑요.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덩치 큰 낯선 사람 네 명이 내 이름을 부르며 들어오더니 이런저런 말도 없이 저를 끌고 가 동네에 있는 서계파출소 지하실 방에 감금했습니다. ‘네가 어젯밤 사람 죽였지?’ 하면서 저의 팔을 꺾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어젯밤 술에 취해 집에서 잤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몽둥이로 저의 온몸을 구타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 제 친구 성규가 끌려와서는 ‘네가 어젯밤 사람을 죽였어’ 하는 거였습니다.

    사형수의초상
    그 순간 저는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른 파출소 지하실을 거쳐 용산경찰서로 옮겨져 조사를 받던 중 한 형사가 ‘너 어제 어디서 술 마셨어?’ 하고 묻데요. 똑같은 대답을 했는데 그때 한쪽 의자에 앉아 있는 성규를 한 형사가 막 때렸습니다. 매를 맞던 성규가 ‘사실대로 다 말하겠습니다’ 하데요. 어제 청파공원에서 술을 마시고 또 자기 삼촌네 가게에서 산 술을 마셔서 진탕 취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중 내가 ‘이 공장에 들어가면 나영이 친구 박진아가 있으니까 나영이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 거야’ 하면서 그 공장으로 들어갔답니다. 들어가서 여자들을 때린 후 금품을 갈취하고 방화를 했다는데 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도망을 가지 어떻게 집에 와서 잠을 자고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저는 하도 많이 맞아서 살고 싶지도 않데요. 그래서 성규가 말한 대로 ‘네네’만 했습니다요. 지금 보니까 자기 혼자 빠져나가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글도 잘 못 읽어서 조서에 그냥 손도장을 찍었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은 물론 나도 2심의 감형에 기대를 모았다. 순박하기 이를 데 없고 자식 사랑이 지극했던 그의 부모는 유일한 재산 목록인 20평짜리 무허가 건물 집을 팔아 피해자 박미숙의 화상치료비와 성형수술비를 부담했고 죽은 박진아의 유가족을 찾아가 위로금과 사죄의 뜻을 전했다. 피해자 가족의 감형 탄원서를 얻어 고등법원 담당 재판부에 제출도 했으니 무기로 감형이 될 성도 싶었다. 행여나 싶어 나도 재판부에 그의 감형을 탄원하는 글을 냈다. 그는 재판장에게 그 날 이렇게 울면서 매달렸다고 한다.

    “판사님,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저 예수 잘 믿고 있걸랑요. 저의 신앙 자매님에게 물어 보십시오. 진짜 착하게 살겠습니다. 흑흑….”

    그러나 2심에서 그의 항소는 기각됐다. 그에 비해 공범 최성규는 1심부터 사선 변호사를 선임한 데다 강정규의 주장처럼 적극적인 자기 방어적 진술 덕인지 2심에서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됐다.

    증거물 확보 안돼 재심청구 기각

    대법원에서 형 확정을 받은 피고인에게 법 절차상 남은 마지막 출구는 재심청구이다. 그는 감방 안에서 난다 긴다 하는 여러 징역살이 박사(전과자)들의 법률자문을 받고, 거기에 그동안 익힌 자신의 문장실력을 가미해 긴 재심개시청구서를 작성해서 지방법원부터 대법원까지 제출했다. 그러나 확정된 형을 뒤집을 만한 증인이나 증거물이 확보되지 않아 재심청구는 기각됐다. 이제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형 집행의 날을 앞에 두고 피 마르게 몸부림치며 죽음의 줄에서 대기하는 것뿐이었다. 가슴에는 빨간 헝겊 딱지에 찍힌 2212번이라는 사형수 번호표를 달고서. 그는 항상 사형집행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가 남긴 회고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나는 평소처럼 기상 소리에 일어나 방 사람들과 아침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방 한쪽에 앉아 종이학을 접으려고 했어요. 그때 소지(단기 기결수인 청소부)가 와서 오늘 집행이 있다고 하데요. 나는 무슨 소린지 몰라 ‘무슨 집행인데요’ 하고 물었지요. 사형수를 집행시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하도 놀라 옷에다 오줌과 똥을 싸버렸어요.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사람들이 옷 갈아입으라고 하데요. 정신을 차려보니 바지가 홀딱 젖어 있었어요. 옷을 갈아입고 창문에 올라가 내가 좋아하는 경수형과 도영형, 태화(그날 사형이 집행된 사형수들)를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요. 나는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간절히 기도 드렸어요. 기도를 드리고 한참 울었어요. 무섭고 두려워서 눈물밖에 안 나왔어요. 그러고 있는 제게 사형 집행장에 있었던 분이 와 도영형, 경수형, 태화는 찬송가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를 힘차게 부르면서 하늘나라로 갔다고 했어요. 나는 그 날부터 5일 동안 밥을 먹지 못했어요.”

    세월이 흘러 새 정권이 들어섰다. 처음으로 민간인 출신의 대통령이 선출된 것이다. 대통령이 그를 무기로 감형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었다. 당시 대통령이 어느 교회 장로라는 사실이 나를 흥분케 했다. 강정규의 성실한 신앙생활과 모범적 수형생활은 교도관들도 인정하는 바이니 대통령에게 감형을 탄원해보리라 결심했다. 서명 용지를 만들어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집회마다 찾아다니며 나는 목메도록 서명을 호소했다. 1000명의 서명을 받자마자 청원서를 써서 당시 서울구치소 기독교 담당 문장식 목사를 통해 예수교장로교총회 인권위원회 명의로 청와대에 제출했다. 그러나 청와대를 거쳐 법무부로부터 온 답신은 감형의 사유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죄과를 회개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던 그에게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왔다. 그 불행한 사건을 내게 이렇게 전했다.

    “그 날은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어요. 눈물콧물 흘리는 어머니께 예수 믿으라는 신신당부를 하고 생활방(감방)으로 돌아왔죠. 사동 부장(보안과 소속 담당 교도관)이 와서 방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5방에 있는 김영종(가명)이 책 1권을 주면서 11방의 이영모(가명)에게 전하라 하기에 아무 의심 없이 받아 부탁대로 건네줬죠.”

    하지만 그것이 불행의 발단이었다. 김영종이 준 책 사이에는 10만원짜리 수표 8장이 들어 있었고, 이영모는 그 수표로 담배를 사 피우다 교도관들한테 발각됐던 것. 정규는 영문도 모른 채 조사과에 불려가 조사를 받을 때에야 비로소 덫에 걸린 것을 알게 됐다.

    조사과에 불려온 이영모는 “강정규가 책 사이에 든 80만원을 줬다”고 했다. 결국 정규에게 징벌방 2개월의 벌이 떨어져 그는 또 독방에 갇혔다. 감옥 안의 감옥이라 불리는 독방은 교도소 내규를 어긴 재소자들에게 내리는 벌이다. 독방에서는 아무리 추운 날이라 해도 찬 마루 바닥에서 얇은 담요 2∼3장으로 견뎌야 했고 운동은 물론 면회도 금지됐다. 그는 독방에서 많이 울었다. 너무 억울했고 너무 추워서였다.

    사형수들의 아슬아슬한 징역살이를 지켜보는 내게 가장 힘든 계절은 봄과 12월 근처의 겨울이다. 사형 집행 없이 보낸 국민의 정부 5년을 제외하면 집행이 대개 이 무렵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수시로 집행을 했다. 특히 정치적 탄압이 극심했던 1982∼83년에는 한여름 복더위에도 사형을 집행해 뒤처리를 맡은 교도관들은 물론 유가족들에게도 시신부패로 인한 곤욕스러움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 무렵이 되면 교도소 안 분위기가 착 가라앉고 사형수들 태도 역시 극도로 예민해진다. 살이 좍좍 내리며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한다. 정규 역시 여름이 좋다고 했다. 집행이 없어 찜통 더위일지라도 마음놓고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일기 한 대목이다.

    “어제 나는 꿈을 꾸었다. 무서운 꿈이었다. 집행장에 끌려가 집행당하기 전의 일을 꾼 것이다. 나와 5명이 당하는 꿈이었는데 나는 꿈속에서도 목사님한테 ‘억울합니다. 저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고 말했지만 목사님은 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셨을 뿐이었다. 나는 그냥 집행대에 올라섰다. 나는 꿈에서 깨어 이렇게 기도했다. ‘사랑의 주님, 저의 생명을 구원해주십시오. 한 달만이라도 가족 곁에서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의 억울함을 주께서 들어주십시오.’ 나는 요즈음 마음이 약해진 탓인지 자꾸 악몽을 꾸거나 자살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 나 때문에 밖에서 고생하는 부모 형제 자매를 위해서라도 생활을 잘해야 하는데, 왜 이곳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나를 이용하여 나쁜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햇볕에서 고생을 하시고 엄마는 잠을 잘 때 이부자리도 펴지 않고 손이 닿는 대로 아무거나 받치고 몸을 잔뜩 오그리고 자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한번쯤은 잘 모셔야 했는데 이렇게 사형수가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님께 매달려보지만 살려주실지는 모르겠다.

    어머님, 이제 그만 이 아들을 잊어주세요. 못난 자식 없어도 웃으며 살아주세요. 떠나는 마음 알릴 수조차 없어. 아, 어머님 말없이 떠납니다. 용서하세요.”

    벼랑 위에 선 듯 하루하루의 목숨을 가까스로 이어가는 사형수들. 그러한 긴장 가운데서도 정규는 즐겁게 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워낙 성격이 낙천적이고 맺힌 데가 없었다. 속이 좀 빈 듯하고 수다스럽지만 인정이 많고 흥이 많아 노래를 불러도 여러 곡을 연거푸 불러야 성에 찼다. 그리고 손재간이 특출했다. 빨래비누나 세수비누를 오리고 파내어 교회당이나 예수님상을 만들었고, 칫솔대를 갈아 크고 작은 십자가나 하트 모양의 목걸이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만들어서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여신도들에게 선물했다.

    영원히 사라진 그의 내일

    1995년 4월 나는 남편을 따라 전남 영암군으로 내려갔다. 남편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당선됐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을 비운 사이 나와 짝을 이루어 봉사하던 신복순(지금 68세)씨가 정규를 돌보았다. 정규는 나에게 차마 못 부른 어머니 칭호를 신복순씨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고 했다.

    마치 나를 따라오기라도 하듯 그는 1996년 말쯤 광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사형수를 이감시키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때 서울구치소에는 5·18 민중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 등 관련자들이 줄줄이 수감됐는데, 그에 따른 공간 부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적체된 사형수를 일제히 처형하기 위한 분산 배치였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광주교도소에서 그를 다시 만나 한 달에 한 번 신앙 상담을 나눌 수 있어 다행이었다.

    대선 열풍으로 달궈진 1997년은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여느 해처럼 사형수들이 극심한 긴장에 휩싸이는 12월초 그를 만났다. 그가 “올해에는 별 탈 없이 지나가겠느냐” 묻길래 나는 입회 교도관을 따돌리려 한껏 목소리를 내려 이렇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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