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KAL 858기 사건의 진실게임

의혹은 있다. 그러나 조작은…

  • 글: 이정훈 동아일보 주간동아 차장 hoon@donga.com

    입력2003-12-26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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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11월 KAL 858기 사건은 김현희(41)씨가 아니라 안기부가 일으켰다”는 소설 ‘배후’가 출간되면서 여러 방송사들이 KAL 858기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와 당시 수사관계자를 찾아 진실을 추적해본다.
    KAL 858기 사건의 진실게임
    ●서울올림픽 개최 둘러싼 비밀스런 남북 대결 최초 공개 ●KAL 사건, 올림픽 참가 신청 50여일 앞두고 터져 ●아부다비에서 암만으로 튀려고 했던 하치야 父女 ●실존 일본인 여권 사용한 김승일의 정체 ●아부다비와 바레인공항 요원의 친절에 발목잡힌 김승일 ●안기부 “북한 놈들이 바레인 와서 갈겨도 우리는 모른다” ●한밤중에 인도받은 관 뚜껑 열고 시신 수색 ●불 꺼놓고 진행된 안기부의 수사발표 ●“꽃다발 소녀는 김현희 아니다” 北女 정희선 주장 ●金正日을 金正一로 적어놓은 수사발표문 ●“규율과 규률의 차이점은 중앙일보가 답하라”

    【1987년과 김현희 사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시절의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국은 ○개 단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중 제1단이 대공사건 수사를 전문으로 하는 ‘대공수사단’이었다. 1987년 11월29일 일요일, 대공수사단의 핵심 요원 K씨는 모처럼 집에서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의 관심은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맞붙은 13대 대선에 쏠려 있을 때인지라, 그 또한 덩달아 바빴는데 그날은 용케도 집에서 쉴 수 있었다.

    K씨는 저녁 때쯤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TV를 보고 있는데 화면에 KAL 858기가 비행중 실종되었다는 내용의 자막이 뜬 것이었다. K씨는 퍼뜩 ‘회사로 나가봐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북한의 소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KAL 858기 실종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왜 북한을 떠올렸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려면 1987년이라는 시대상황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87년은 민주화의 봄이 펼쳐진 1980년 이후 가장 ‘뜨거운’ 시절이었다. 신년벽두인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발생, 한겨울임에도 시위가 불붙기 시작했다. 시위사태는 곧이어 대통령직선제 개헌투쟁으로 비화됐고, 4·13 호헌조치를 거쳐 마침내 6·29선언이 나오게 됐다. 이후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짐에 따라 1노3김이 출마한 13대 대선이 12월16일로 예정돼 있었다.



    또 한 가지 KAL 858기 사건의 조작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울올림픽을 앞둔 당시 상황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안기부 수사관 출신의 한 인사는 “김현희 사건은 서울올림픽 참가신청 마감 50여일을 앞두고 터져나왔다”며 “서울올림픽을 코앞에 둔 1987년 남북한이 치열한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지 않는 한, 사람들은 김현희 사건 조작설에 현혹될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올림픽 앞두고 치열한 신경전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항의해 미국·한국 등 많은 서방국가가 불참했다. 1984년 올림픽은 미국 LA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공산국가들이 불참했다. 따라서 서울에서 열리기로 한 88올림픽도 반쪽짜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최대한 많은 나라를 참여시켜 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르려고 했다. 이러한 한국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북한의 방해였다. 북한이 테러를 일으키면, 안전성을 이유로 불참하겠다는 나라가 늘 것이므로 한국은 안전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최대한 홍보해야 했다.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려니 시위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공안 관계자들은 무엇보다도 서울올림픽이 제2의 뮌헨올림픽이 되는 것을 염려했다. 1972년 우리처럼 분단국가인 서독은 뮌헨에서 20회 올림픽을 치렀는데, 이때 ‘검은 9월단’이라고 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소속 테러조직이 선수촌에 침입해,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살해한 후 11명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구금돼 있는 팔레스타인 게릴라 200여명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서독은 특공대를 투입해 테러범 진압작전을 폈다. 그러나 작전이 치밀하지 못해 검은 9월단은 11명의 이스라엘인 인질 전원을 사살한 후에야 제압되었다. ‘피의 올림픽.’ 이 충격으로 20회 올림픽은 하루 동안 중단됐다가 다시 진행되었다.

    공안 관계자들은 올림픽기간 중에 북한이 ‘한 방’만 날리면, 서울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방’의 위협을 예방하기 위해 한국은 황급히 프랑스로부터 휴대용 대공미사일인 미스트랄을 수입해 서울 주변에 배치하였다. 스위스에서 제작하는 오리콘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공포인데, 오리콘포도 수입해 수도권 인근의 산에 집중 배치하였다.

    ‘한 방’은 무기 발사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특수요원을 보내 한국군의 무기고나 레이더 기지, 공군 비행장 등 전략시설을 파괴하는 것도 회심의 일격이 될 수 있다. 한 방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한국은 비밀리에 전략시설 주변에 대인지뢰를 매설했다. 그후 세월이 흐르자 이 지뢰들이 폭우가 쏟아질 때 물살에 휩쓸려 강이나 하천으로 떠내려와 문제가 되기도 했다.

    KAL 858기 사건의 진실게임

    뮌헨올림픽 때 유혈사태를 일으킨 PLO 소속 검은 9월단.

    155mm포탄에 실려 발사되는 살포지뢰가 도입된 것도 이때였다. 당시 살포지뢰는 미국에서 개발한 최신무기였는데, 한국군은 이를 수입해 휴전선에서 서울을 잇는 최단 노선인 문산-파주 축선 부대에 집중 배치하였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에서는 일명 ‘삐삐’가 크게 유행했다. 그런데 사전 약속을 하면 삐삐로 들어오는 숫자를 암호로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삐삐에 19039라는 숫자가 찍히면 ‘A요인을 암살하라’는 암호가 되고, 33097이면 ‘B시설을 파괴하라’는 지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987년 한국 정보기관들은 북한 해주에서 한국이 삐삐 전파의 교신을 위해 허가해준 주파수대와 같은 전파가 발사되는 사실을 포착했다. 해주발 삐삐 전파는 서울을 지나 수원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북한의 공작조직이 삐삐를 이용해 지령을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은 파주에 해주발 삐삐 전파를 차단하는 방해전파 발신 시설을 설치했다.

    북한 고정간첩은 무전기로 교신하는데, 이들은 무선 교신을 통해 북한에 공격 포인트를 알려줄 수도 있다. 따라서 수상한 전파의 발신지를 추적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 일을 위해 한국은 체신부(지금의 정보통신부) 산하 중앙전파관리소로 하여금 무선 전파 발신지를 추적하는 ‘방향탐지기’를 도입해 서울 등 대도시 주변에 설치하도록 했다.

    이렇게 88올림픽을 앞둔 1987년 남북한은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안기부 관계자는 “그런 시점에 KAL 858기 사건이 터져 실종 소식을 듣는 순간 북한 소행으로 추정했다”고 말했다.

    집에서 쉬다가 TV 자막으로 KAL 858기 실종 사건을 알게 된 안기부 대공수사관 K씨도 “같은 이유로 북한의 소행일 것으로 짐작했다”고 말했다. K씨는 회사 당직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출근을 서둘렀다. K씨의 집은 서울 반포 부근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남산 1호 터널 부근에 있던 안기부 2청사까지는 자동차로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간부들에게만 비상이 걸린 듯 하급 직원들은 나오지 않았다.

    안기부 간부들, ‘북한 소행’ 직감

    삼삼오오 모여든 간부들은 그러나 TV를 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기자들 역시 실종된 KAL 858기는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 외에는 이렇다할 정보를 내놓지 못했다. 밤 11시쯤 별다른 소식이 없자 “일단 귀가했다가 내일 아침 일찍 나오라”는 지시가 떨어져 K씨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11월30일 언론은 1983년 9월1일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을 맞고 격추된 KAL 007편처럼 KAL 858편도 공중폭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안기부에서도 북한이 KAL 858기를 폭파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북한 관련 사건인 만큼 이에 대한 조사는 대공수사단 수사공작과에 배정됐다.

    이날 정부는 KAL 858기가 추락했거나 불시착했을 가능성이 있는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역 등을 조사하기 위해 홍순영(洪淳瑛) 외무부 2차관보를 단장으로 한 정부합동조사단 25명을 현지로 급파했다.

    KAL 858편은 11월28일 밤 11시30분(현지시각) 이라크의 바그다드공항을 이륙해 UAE(아랍에미레이트)의 아부다비공항에 기착했다가 다시 이륙해 다음 기착지인 태국의 방콕공항으로 가다가 미얀마 부근 안다만해 상공에서 사라졌다. 이 비행기가 폭발물에 의해 공중폭발되었다면, 폭약을 설치한 범인은 아부다비공항에서 내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부다비공항에서는 KAL 858기에서 15명의 외국인이 내린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그 명단은 즉각 입수되었다. 이 중에서 눈길을 끈 것은 아부다비공항 입국신고서에 ‘신이치’와 ‘마유미’라고만 쓴 일본인 남녀였다. 통상 일본인들은 출입국 신고서에 성(姓)을 적는데, 두 사람은 이름을 써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공항을 출입할 때는 성명이 기재된 여권을 제시하므로, 두 사람은 ‘하치야 신이치(蜂谷眞一)’와 ‘하치야 마유미(蜂谷眞由美)’로 확인되었다. 사용한 항공권을 조사하자 이들은 11월19일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오스트리아항공사에서 오스트리아의 빈→유고의 베오그라드→이라크의 바그다드→UAE의 아부다비→바레인까지 가는 항공권을 구입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 항공권을 구입할 때도 이들은 이름만 사용하였다.

    두 사람은 이 여정에서 바그다드→아부다비 구간을 KAL 858편을 이용했다. 두 일본인 남녀가 수상하다는 소식은 즉각 일본으로 통보돼, 일본 외무성은 두 사람의 여권 조사에 착수했다. 여기서 하치야 신이치는 실존하는 일본인 남자로 확인되었으나, 하치야 마유미는 없는 사람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하치야 마유미의 여권번호(MG5021208)는 남자용이라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마유미의 여권에는 일본 나리타(成田)공항을 출입한 스탬프가 찍혀 있었는데, 이 스탬프도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안기부와 일본 경찰의 공안 부서는 긴박하게 정보를 교류했다. 두 사람의 여권 정보가 접수된 순간, 안기부에서 관련 파일을 뒤지자 하치야 신이치는 1985년 이후 대공 용의자로 분류돼 있음이 드러났다(상자 기사 참조). 이러니 의혹의 눈길은 두 사람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이 확인될 무렵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는 이미 아부다비를 떠났다. 그런데 아부다비를 떠나기 전 두 사람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우연’이 일어났다.

    두 사람은 아부다비공항에서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트릭’을 쓸 예정이었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항공권을 산 바로 다음날(11월20일), 알리탈리아(이탈리아 항공사) 항공사에서 UAE의 아부다비→요르단의 암만→이탈리아의 로마까지 가는 또 다른 항공권을 구입했다. 아부다비공항에 내리면 두 사람은 애초 예정한 바레인행 비행기를 타지 않고 요르단의 암만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했던 것이다.

    알리탈리아 항공에서 항공권을 살 때 두 사람은 ‘하치야’라는 성(姓)을 사용했다. 오스트리아 항공에서는 이름으로 표를 사고, 알리탈리아 항공에서는 성으로 표를 구입해 추적자의 눈길을 속이려 했던 것이다.

    항공권의 눈속임

    KAL 858기 사건의 진실게임

    마유미(Mayumi)로 구입한 오스트리아 항공권(위). 하치야(Hachiya)란 성으로 구입한 알리탈리아 항공권(아래).

    두 사람이 탔던 KAL 858기가 UAE의 아부다비공항에 내린 것은 현지시각으로 11월29일 새벽이었다. 일본인이 아부다비에 입국하려면 비자가 있어야 하는데, 두 사람은 UAE 비자가 없었다. 비자가 없는 일본 여권으로는 입국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통과여객 대기실에 있다가 다음 비행기에 탑승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두 사람이 입국장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아부다비공항 관계자가 막았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이 “우리는 통과 승객이다. 곧 바레인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하자, 공항 관계자는 “바레인으로 가는 항공권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으로 이어지는 애초의 항공권을 제시했다.

    공항 관계자는 두 사람에게 여권까지 달라고 한 후 “여권과 비행기표는 두 사람이 바레인행 비행기를 탈 때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암만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눈속임용으로 준비한 바레인행 비행기에 탑승하게 됐다(이상 김현희 진술 근거).

    날이 밝은 후 두 사람은 아부다비공항에서 바레인 행 비행기를 타고 당일 바레인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공항에서 30달러를 주고 3일간 체류할 수 있는 임시 비자를 받았다. 그러나 원래 계획은 바레인에 가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바레인에 예약해둔 호텔이 없었다.

    이들은 공항에서 전화번호부 등을 뒤져 이곳저곳의 호텔로 전화를 걸어 예약을 시도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이때 바레인공항에 있던 한 공안요원이 다가와 대신 전화를 걸어 리젠시 호텔을 예약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아부다비공항에서는 항공권 제출을 요구하는 바람에 암만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바레인공항에서는 공안요원의 도움으로 호텔을 예약한 ‘우연’ 때문에 이들은 곧 꼬리를 밟히게 되었다.

    리젠시 호텔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11월30일) 알리탈리아 항공사 사무실로 찾아가 사용하지 못한 아부다비→암만→로마행 티켓을 내놓고 그 다음날(12월1일) 바레인을 출발해 암만을 거쳐 로마로 가는 항공권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11월30일을 보내는 사이 한국 안기부와 일본 경찰, 그리고 KAL 858기가 거쳐간 곳의 공안기관은 두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항공권을 바꾼 두 사람이 리젠시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곧 호텔 관계자가 전화를 걸어와 여권에 적힌 이름과 여권번호 생년월일 등을 물었다. 이어 바레인 주재 한국대사관의 김정기(金正奇) 대리대사가 전화를 걸어 영어로 유사한 것을 물어와, 신이치가 짧은 영어로 대답을 해주었다. 이어 바레인 주재 일본대사관의 관계자가 전화를 걸어 역시 유사한 내용을 일어로 물었다. 그리고 나자 다시 한국의 김정기 대리대사가 전화를 걸어와 방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김 대리대사가 두 사람이 투숙한 방에 들어갔을 때 마유미는 자는 척하고 신이치가 상대했다. 김 대리대사는 일본어를 못했고 신이치는 영어에 서툴렀다. 따라서 두 사람은 한자로 필담을 했는데, 이때 김 대리대사는 한자로 대한항공기가 떨어졌다는 내용을 설명했다. 김 대리대사가 돌아간 후 신이치는 마유미에게 “대한항공기가 분명히 떨어진 모양이다. 걱정 말고 푹 자고 내일 떠나자”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그렇게 불안한 밤을 보내는 사이 한국과 일본 그리고 바레인의 공안 당국은 두 사람에 대한 고삐를 조이기 시작했다.

    KAL 858기 사건의 진실게임

    김현희가 사건 경위를 쓴 자술서.

    다음날(12월1일) 아침 마유미는, 신이치가 독약 앰풀이 든 담배에 특별한 표시를 해놓은 말보로 담뱃갑을 건네주자 이를 받아 가방 안에 넣었다. 호텔 체크아웃을 한 이들은 택시를 타고 바레인공항에 도착해 출국신고서를 쓴 후 출국심사대 앞에 섰다. 이때 심사관이 두 사람의 여권과 출국신고서를 압수하고 한 사무실로 안내한 후, “좀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잠시 후 일본 대사관 직원이라며 일본인이 나타나, “당신네 여권은 위조 여권이라 이 여권으로는 계속 여행을 할 수가 없다. 일단 일본대사관으로 갔다가 일본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김현희씨에 따르면 이때 신이치(김승일)는 “모든 것이 끝났다. 일본에 가면 이래저래 고생하다 죽을 것이니 여기서 약을 먹어야 한다. 나는 오래 살았지만 너는 아깝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직후 바레인의 남녀 공안 관계자가 두 사람을 각기 다른 방으로 데려가 온몸과 짐을 수색하였다. 잠시후 다시 데리고 나와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을 의자에 앉아 기다리게 하였다.

    이때 신이치가 재빨리 앰풀이 든 담배를 빼물고 불을 붙이며 마유미에게도 앰풀이 든 담배를 물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마유미가 가방에서 담뱃갑을 꺼내 앰풀이 든 담배를 뽑아들자, 바레인 공안 관계자는 담뱃갑을 조사 하지 않은 게 생각났는지 담배를 달라고 했다.

    그 순간 이미 담배에 불을 붙인 신이치가 앰풀을 깨물었는지 “쿵” 하고 쓰러졌다. 마유미도 앰풀이 들어 있는 담배의 필터 부분을 깨물었는데, 그 순간 바레인 공안요원이 손으로 마유미가 문 담배를 쳐 바닥에 떨어뜨렸다. 신이치는 앰풀 안에 등 청산가리가 입안으로 퍼져 즉사했으나, 마유미는 청산가리가 입 근처로만 약간 튀어 상처를 입었으나 생명을 잃지 않았다.

    KAL 858기가 사라진 지 불과 이틀 만에 유력한 용의자인 노령의 일본인 남자가 자살하고, 젊은 여자는 자살 미수에 그쳤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안기부는 크게 술렁였다고 한다. K씨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체포되면 앰풀을 깨물고 자살하는 것은 북한 공작원의 전형적인 수법이 아닌가. 우리들은 KAL 858기 폭파는 북한 공작원의 소행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안무혁 당시 안기부장과 이상연 1차장 등은 즉각 생포한 마유미는 물론이고 사망한 신이치의 시신도 가져올 목적으로, 수사공작과를 중심으로 한 수사팀을 바레인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김현희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바레인으로 날아간 안기부 H과장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했다”고 지적하는데, H과장이 바로 수사공작과장으로 수사팀을 이끌었던 책임자다.

    문제는 수사공작과에 영어 능통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어를 잘하는 해외공작국 요원을 통역으로 붙여 12월3일 모두 세 명의 요원이 바레인으로 날아갔다. 이때 이들은 바레인 수사 당국을 설득하기 위해 과거 북한 공작원이 사용한 독약 앰풀도 갖고 갔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12월7일 정부는 박수길(朴銖吉) 외무부 1차관보를 특사로 임명해 바레인으로 파견했다.

    H과장의 바레인 설득작전

    외국인이 관련된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의 공안 기관이 수사권을 행사할 수도 있고(속지주의), 외국인의 국적 국가도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속인주의). 그러나 일반적으로 속지주의가 속인주의에 우선한다. 따라서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한 바레인이 이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고집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1983년 10월에 벌어진 아웅산 사건도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미얀마 공안기관이 범인인 강모 등을 처벌한 전례가 있었다.



    KAL 858기 사건의 진실게임

    김현희가 깨문 앰풀(왼쪽)과 김승일이 깨문 앰풀.

    그러나 안기부는 “KAL 858기 사고로 희생된 사람은 전원 한국인이다. 더구나 범인은 북한 공작원임에 틀림없으니 우리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것이 일본 경찰이었다. 일본에서는 ‘일본 여권을 사용한 자들이 비행기를 폭파시켰다’고 하여 한국 이상으로 관심이 높았다. 일본 경찰은 “일본 위조여권을 사용한 자들이 범행을 했으므로 우리가 데려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한일전(韓日戰)은, 여러 정황상 북한 공작조직이 일으킨 것이 틀림없는 것 같자 일본이 물러섬으로써 한국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일본 경찰은 북한 공작조직에 관한 수사에서는 안기부보다 한 수 아래다. 따라서 항상 안기부로부터 북한 정보를 제공받는 처지이기 때문에 꼬리를 내린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을 맡은 바레인의 수사국장은 핸더슨이라는 이름의 영국인이었다(바레인은 외국인을 공안 책임자로 채용했던 것이다). H과장은 한국에서 준비한 앰풀을 들고 핸더슨을 만나 “마유미라는 여자가 깨문 것이 이 앰풀과 똑같지 않더냐. 이 사건은 틀림없이 북한 공작원의 소행이다. 그러니 마유미를 우리에게 넘겨달라”고 설득했다.

    핸더슨을 설득하는 동안 H과장은 북한이 자신을 표적 삼아 2차 테러를 할 것을 매우 염려했다고 한다. 당시 바레인에는 현대건설이 진출해 있었는데, H과장은 호텔보다는 한국인이 많은 현대건설 현장의 숙소가 훨씬 더 안전하다고 보고, 그곳에서 잠을 잤다. 이때 바레인 주재 한국대사관과 바레인에 현장을 갖고 있어 영향력이 큰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 회장 등이 H과장을 측면에서 지원해주었다.

    여권도 없이 날아간 수사관들

    그래도 핸더슨이 결심을 하지 않자 H과장은 “당신네들이 수사하다가 북한 게릴라들이 들어와 총을 갈기면 어떻게 할 것이냐”며 협박조로 설득하기도 했다.

    한편 박수길 특사는 12월9일 바레인 외무장관을 만나 속인주의를 언급하고 있는 몬트리올협약과 도쿄협약을 제시하며 범인 인도를 강력히 요구했다.

    한국측의 요구가 집요해지자 바레인은 마유미를 한국에 넘기는 문제를 놓고 각료회의를 열었다. 바레인 각료회의는 만장일치로 결정을 하는데, 때마침 용의자 인도 문제를 관장하는 각료가 아프리카 방문중이었다. 그 바람에 일부 각료들은 담당 각료가 귀국한 후 마유미 인도 문제를 결정하자고 주장했으나, 핸더슨의 노력으로 담당 각료가 없는 가운데 만장일치로 마유미를 한국에 넘겨주기로 했다.

    12월12일 바레인 외무부는 박수길 특사에게 마유미 등을 한국에 넘기겠다고 통보했다.

    이러한 연락이 오자 안기부는 전세기를 띄우기로 하였다. 한국으로 끌려가는 것을 알면 마유미가 자살을 시도할 수 있으므로 의사, 간호사와 함께 심리전 요원도 보내기로 했다. 이들을 태운 전세기가 이륙한 것은 12월13일이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것은 1990년부터였으므로, 1987년에는 여권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해외 우회침투 간첩을 추적한다고 하지만, 수사공작과 역시 해외에 나갈 일이 거의 없어 여권을 가진 사람이 적었다. 한 관계자는 전세기를 탈 요원이 결정되자 “수사도 수사지만,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 때문에 좋아라고 따라나선 요원도 적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전세기가 바레인공항에 도착하자 여권이 있는 요원만 바레인으로 입국하고 여권이 없는 요원들은 입국이 거절돼 전세기에서 먹고 자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그때는 안기부의 위세가 통했으므로, 이들은 대한항공 바레인 지점에 압력(?)을 넣어 음식물 등을 제공받으며 기내에서 생활했다.

    12월14일 밤 8시쯤 바레인은 마유미와 신이치의 시신, 그리고 기타 증거물 49점을 H과장에게 넘겨주며 “30분 이내에 바레인공항을 떠나라”고 통보했다. 바레인 공안당국은 마유미를 넘겨줄 때가 북한의 공격을 받을 확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로 보고 이렇게 요구한 것이다.

    마유미 등의 신병을 인도받을 때 수사팀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신이치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이었다고 한다. 폭약을 이용해 KAL 858기를 폭파시킨 자들이면 신이치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이나 신이치의 몸 안에 시한폭탄을 설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관 뚜껑을 열고 관 속과 신이치의 몸을 샅샅이 뒤졌다.

    괴기스런 한밤중의 屍身 수색

    야심한 시각 넓고넓은 바레인공항 한쪽에서 펼쳐진 시신 수색은 한 편의 ‘괴기’ 드라마였다고 한다. 조사가 끝난 밤 9시40분쯤 전세기는 드디어 바레인공항을 이륙하였다.

    전세기가 서울을 향해 날고 있는 동안 의료진은 초비상 상태였다. 한국으로 끌려간다는 것을 안 마유미가 자해를 비롯한 온갖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리 소홀로 인도받은 용의자가 숨지게 된다면 그 동안 반협박조로 핸더슨을 설득해온 H과장은 망신살이 뻗치게 된다. 아울러 무슨 낯으로 본부로 돌아갈 것인가.

    의료진은 마유미가 혀를 끊어 자살하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는 등 조치를 취하고 간단한 의료 검사를 하였다. 심리전 요원은 마유미에게 붙어 그의 심리 변화를 예의 주시했다.

    그날 오후 2시5분쯤 전세기가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13대 대통령선거를 꼭 하루 앞둔 12월15일이었다.

    KAL 858기 사건의 진실게임

    1972년 11월2일 장기영 대표에게 꽃을 주는 소녀는 귓불이 도톰하지만, 김현희는 귓불이 없다.

    마유미를 데려온 후 대공수사단의 전 요원이 수사에 동원됐다. 그러나 도착 첫날 마유미는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둘쨋날인 16일(대통령선거일)에는 중국어와 일본어로 “나는 중국 흑룡강성 출생의 백취혜(白翠惠)로 중국 광주(廣州)에서 살았다. 출생 직후 어머니가 재가해 고아가 되었는데, 1987년 7월 광주에서 마카오로 불법 이주한 후 도박장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그때 하치야 신이치를 만나 그의 양녀가 돼 일본에서 살았다. 내 어머니는 조선 사람과 재혼해 평양에 갔는데, 나는 어머니를 만나러 평양에 갔다 온 적이 있다”는 등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그후로도 마유미는 중국어와 일본어 신문에만 반응을 보이다가 12월23일, 마음이 바뀌었는지 자신을 담당해온 여자 수사관의 가슴을 밀치며, 한국어로 “언니 미안해”라고 말했다. 이후로는 한국어로 진술했다고 한다.

    【수사발표문이 야기한 의혹들】

    노태우 후보가 13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다음인 1988년 1월15일 안기부는 매우 이례적인 기자회견을 가졌다. 서울 이문동에 있는 안기부 본청 강당으로 기자들을 초청해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이상연(李相淵) 1차장이 먼저 수사 전반에 대해 발표했다. 이어 수사 책임자인 대공수사단장이 H수사공작과장 등 실무자들과 함께 나와 상세한 이야기를 한 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불은 끄고 녹음은 하지 마시오”

    대공수사단장 등이 무대에 나타나기 전 안기부측은 강당 안의 불은 물론이고 방송사 ENG카메라의 조명도 끄게 했다. 무대를 촬영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당연히 스틸 사진을 찍는 신문사의 사진기자들에게도 “사진을 찍지 말라”고 요구했다. 오직 귀로 듣고 노트에 적기만 하라고 한 것이다.

    순식간에 강당 안은 어두컴컴해졌다. 그러나 창문과 문틈새로 빛이 들어와 무대에 있는 사람의 윤곽을 볼 수는 있었다. 취재기자들이 필기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는 유지되었던 것이다.

    대공수사단장 등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하치야 마유미로 위장한 김현희와 하치야 신이치로 위장한 김승일은 제3국을 우회해서 대남공작을 하는 북괴(당시는 북괴라고 했다) 노동당 조사부 소속 공작원이다. 이들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때는 김일성이 살아 있었다)로부터 ‘남조선의 두 개의 조선 책동과 올림픽 단독 개최 책동을 막기 위해 남조선 비행기 한 대를 폭파하라. 이 사업은 올림픽에 참가하려는 세계 여러 나라의 의사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다’는 지령을 받고 KAL 858기를 폭파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요지의 설명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평양 동북리에 있는 초대소에서 여행자들이 일상적으로 휴대하는 라디오와 술병을 이용해 대한항공기를 폭파하기로 하고 이 폭발물의 시한장치를 작동시키는 훈련을 받았다. 김현희는 김옥화라는 이름의 북한 여권을 이용해 김승일과 함께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온 후, 헝가리 주재 북한대사관이 제공한 승용차로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가는 도중 북한 여권을 반납하고 하치야 마유미 명의로 된 일본 위조 여권을 받았다. 그리고 빈에서 항공권을 구입해 폭파공작에 나섰다”는 요지의 설명을 덧붙였다.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기자들은 안기부측이 제공한 수사발표문을 보고 있었다. 대공수사단장이 이야기 하는 것 중 상당수는 수사발표문에 이미 포함돼 있었다. 이때 안기부측은 “김현희는 만 10세이던 1972년 11월2일 평양에서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회담이 열렸을 때 화동(花童)으로 나와 한국의 장기영 대표에게 꽃을 선사했다. 그때 우리측은 북한 소녀에게 꽃을 받는 장기영 대표를 찍었는데, 이 소녀가 바로 김현희다”라며 수사발표문을 통해 사진을 공개했다.

    사람 귀는 평생 그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진에서 김현희로 지칭된 소녀는 도톰한 귓불을 갖고 있으나, 김현희는 귓불이 없는 세칭 칼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안기부에서는 그 누구도 이러한 차이점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수사발표 두 달 후인 그해 3월 북한에서는 정희선이라는 여성이 외신기자회견을 갖고 ‘1972년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건넨 것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이 기자회견에는 조총련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일본 기자들이 참여했는데, 이 회견에서 북측은 1972년 11월2일 남북조절위 행사 때 찍어놓은 비디오를 공개하며 장기영씨에게 꽃다발을 준 소녀는 정희선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언론은 KAL 858기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므로 ‘당연히’ 이 비디오를 방영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KAL 858기 사건에 대한 의혹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안기부가 이 필름을 ‘적성(敵性) 자료’로 분류하는 바람에 방영되지 못했다. 이러한 금지 조치는 훨씬 더 강력한 의혹을 제기하는 간접 자료가 되었다.

    안기부는 김현희의 아버지는 김원석인데, 그는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에 근무했고 1986년 8월부터 KAL 858기 사고가 날 때까지는 앙골라 주재 북한무역대표부에 수산대표로 있었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에 근무하는 외교관 명부를 공개한다. 그런데 얼마 후 앙골라의 외교관 명부 북한편에는 김원석이라는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도 훗날 의혹을 부풀리는 요소가 되었다.

    김현희 父 김원석의 의문점

    수사발표 다음날 신문들은 일제히 김현희가 북한을 떠날 때 썼다는 충성맹세문을 기억을 되살려 쓴 것을 공개하였다. 그런데 중앙일보에 게재된 충성맹세문에서는 한 문구가 다른 신문에 게재된 것과 달랐다. 여타 신문에는 ‘규률’로 쓰여 있는 김현희의 글씨가 유독 중앙일보에는 ‘규율’로 적혀 있었다. 또 중앙일보에 실린 충성맹세문에는 선이 그어져 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훗날 “왜 김현희가 쓴 충성맹세문의 모양이 다르냐. 한국에서는 규율로 쓰나 북한에서는 규률로 적는다. 중앙일보에 실린 사진에서는 규율로 쓰여 있으니 김현희는 남한 사람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안기부는 김현희와 김승일은 폭약이 들어 있는 라디오와 술병을 KAL 858기의 선반에 두고 내렸고 그것이 9시간 후 폭발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안기부는 김현희의 진술을 토대로 “이들이 사용한 라디오는 일제 파나소닉의 RF-082형인데, 라디오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줄이면 그 안에 350g의 컴포지션4 폭약을 집어넣을 수 있다. 그리고 술병에는 양주 빛깔을 띠는 PLX(Picatinny Liquid Explosive) 액체폭약을 700cc 넣었을 것이다. 1988년 1월9일 경기도 광주의 종합 대테러훈련장에서 이 정도 양의 폭약을 갖고 폭발시험을 해보니 1cm 두께의 강판도 구멍이 뚫렸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렇게 강력한 폭발력을 갖고 있으니 시한장치에 의해 폭약이 터지는 순간 비행기는 공중 폭발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1983년 9월1일 KAL 007기가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을 맞고 격추되었을 때 조종사는 황급히 비상 신호를 보내다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미사일보다도 위력이 약할 것으로 추정되는 컴포지션4 폭약이 터진 KAL 858기는 비상 호출도 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이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 것은 당연했다.

    김현희씨는 문제의 라디오 속을 본 적이 없다고 했으므로 의혹을 제기하는 쪽에서는 과연 라디오에 폭약이 들어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되었다. 또 건전지를 갖고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인데 어떻게 김승일은 건전지가 든 라디오를 갖고 KAL 858기에 탑승했는가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안기부가 공개한 수사발표문에 김현희의 자술서가 있는데 이 자술서에서 김씨는 이런 요지의 주장을 폈다.

    “베오그라드에서는 이라크항공 비행기를 타고 바그다드로 갔는데, 이 비행기를 타기 전 승무원들은 모든 전자제품을 조사해 건전지를 수거해 갔다. 그때 김승일도 라디오의 건전지를 빼서 주고, 바그다드공항에 도착해 돌려받아 다시 라디오에 집어넣었다. 바그다드공항에서는 통과여객으로 KAL 858기 탑승을 기다렸는데 그때 공항 요원이 건전지를 갖고 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김승일이 ‘여기만 왜 특별히 개인 사물을 검열하는가’ 하며 라디오를 켜 보이며 항의해 건전지를 뺏기지 않았다.”

    350g의 컴포지션4 폭약은 RF-082 라디오와 크기가 비슷하다. 따라서 일부 인사들은 ‘안기부의 주장대로 350g의 컴포지션4 폭약을 넣은 RF-082 라디오가 과연 작동될 수 있는가’란 의문도 제기했다.

    수사발표 2년 후인 1990년 일본인 노다 미네오(野田峯雄)는 안기부 발표에서 발견되는 각종 의혹을 모아 ‘파괴공작(破壞工作)’이란 제목의 책을 일본에서 출판해, KAL 858기 사건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노다 미네오는 1999년 이 책을 문고판으로 재출판했는데, 한국의 D출판사는 최모씨로 하여금 이 책을 번역시켜 2003년 7월 ‘김현희는 가짜다’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가 문제가 될 것 같자 황급히 수거했다. 그리고 2003년 11월 서현우씨가 현재 소송으로 비화된 소설 ‘배후’를 출판했다.

    KAL 858기 사건의 진실게임

    김현희 자필의 충성맹세문

    이렇게 KAL 858기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국정원은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섰다. 이 해명은 ‘배후’의 작가인 서씨를 형사고소한 사건에 자료로 제출하기 위해 문서로 만들어졌는데 기자는 이를 열람하며 관계자로부터 보충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의문인 김현희씨의 귀모양에 대해 국정원측은 “안기부 요원들은 두 번째로 꽃을 주었다는 김씨의 당시 진술을 사실로 믿고 더 이상 확인해보지 않고 그 사진을 골랐는데, 김씨의 기억이 잘못된 것 같다. 김씨는 10세 때(1972년) 한 일을 26세 때(1988년) 진술한 것이므로 자세한 묘사에선 틀릴 수도 있는데 이를 간과했던 것이다. 김씨의 진술로 보아 김씨는 두 번째로 꽃을 주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측 대표단이 도착할 무렵 변동이 있어 세 번째로 꽃을 준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현장에 있던 화동을 찍은 사진을 갖고 있는데 그중 세 번째 소녀의 골격이 지금의 김현희씨와 매우 흡사하다. 김현희씨가 꽃을 주는 현장에 있었던 것은 사실임에 틀림없다”고 해명했다.

    72년 꽃준 소녀, 김현희 아니다

    결국 국정원은 장기영 대표에게 꽃을 준 어린이는 김현희가 아니라고 시인한 것이다. 장기영 대표에게 꽃을 준 소녀는 북한 주장대로 정희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편 이 회담에 참석했던 이동복씨는 세 번째로 북한 소녀로부터 꽃을 받았는데 그는 “나에게 꽃을 준 소녀가 김현희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두 번째 의문인 김현희씨 아버지에 대해 국정원측은 “무역대표부는 외교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앙골라의 외교관 명부에 그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정식 외교관인 3등 서기관으로 대사관 근무를 했기에, 쿠바의 외교관 명부에는 김원석이라는 이름이 등재돼 있다”고 말했다.

    KAL 858기 사건의 진실게임

    RF-082 라디오와 350g의 컴포지션4 폭약

    한편 콩고주재 북한대사관에 근무하다 귀순한 고영환씨는 ‘평양 25시’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KAL 858기 사건 후 앙골라에 수산대표로 나가 있던 김씨의 부친 김원석을 북한으로 소환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김현희의 충성맹세문 관련 의혹, 즉 중앙일보에 게재된 사진 속 맹세문이 다른 신문에 게재된 것과는 달리 선이 없는 점과 남한 언어인 ‘규율’로 쓰여져 있는 데 대해 국정원측은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 우리는 분명 선이 그어진 자술서에 김씨의 글을 받았고 김씨는 이때 규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왜 중앙일보 것만 다르게 돼 있는지에 대해서는 중앙일보가 답해야 할 것이다. 수사발표문에 딸린 자술서는 복사본이다. 유독 중앙일보에 간 것만 흐리게 인쇄돼 선이 보이지 않게 되고, 규률이라는 글자도 잘 보이지 않아 누군가가 ‘규율’로 써넣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폭약이 든 라디오가 바그다드공항을 통과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그 문제는 바그다드공항측이 답변해야 할 사항이다.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바그다드공항이 두 사람의 소지품을 조사한 것은 사실이었다. 소지품을 조사한 바그다드 보안요원은 자파르 모하마드(Zafar Mohamad·남)와 사미라(Sam ira·여)였는데, 훗날 조사에서 두 사람은 ‘X레이 투시기에 이상 없는 것으로 나타난 데다 라디오가 정상 작동해 통과시켰다’고 해명했다. 사실 컴포지션4는 인천공항의 X레이 장비로도 발견하기 어렵다. 최근 도입된 ETD 장비만이 이를 적발해 낸다. 바그다드공항 검색에서 걸리지 않은 것으로 봐 이 라디오는 북한에서 특수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컴포지션4 등이 터졌다고 거대한 항공기가 비상호출신호도 못내고 사라질 수 있는가란 의문에 대해서는 “컴포지션4는 같은 양의 TNT보다 1.3배 위력이 강해 1cm 두께의 철판을 뚫는다. 1988년 미국 연방항공관리국(FAA)은 KAL 858편과 동형인 보잉 707기를 놓고 같은 폭약으로 시험을 했는데 폭발 순간 기체의 80%가 파괴되면서 기내의 전선과 안테나선이 타버렸다. 전선이 타버렸다면 잠깐 생존해 있었던 KAL 858기의 조종사는 비상 호출신호를 보낼 수 없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 외 김현희가 베오그라드에서 잤다고 한 호텔의 방 번호가 다르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 지적도 사실로 밝혀졌는데 이에 대해 국정원측은 “김현희가 어느 호텔에서 잤다고 하면 해외 IO를 그 호텔에 보내 과연 하치야 마유미라는 이름의 손님이 투숙했는지 확인해 보게 했는데,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IO들은 몇호실에서 잤는지까지는 물어보지 않았고 호텔 역시 살인자가 잔 방이라는 소문이 날까봐서인지 그것까지는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때문에 안기부는 김현희가 말한 호실 그대로 발표했는데, 결국 김현희의 진술이 틀렸다”고 해명했다.

    KAL 858기 사건의 진실게임

    대공수사국장이 타자 연습을 위해 치다가 金正日을 金正一로 잘못 쳐놓은 수사발표문

    국정원의 해명 중에서 가장 군색한 것은 김현희씨의 귀에 대한 것이다. 김현희 소녀가 꽃다발을 준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데, 안기부는 공개했다가 오히려 의혹만 증폭시키고 말았다. 이는 안기부의 수사와 발표가 노련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안기부 발표문에는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김정일의 한자 이름은 金正日인데 수사발표문에는 金正一로 적혀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이 수사에 관여했던 K씨는 “수사발표 직후 한 언론사의 기자가 이 글자를 가리키며 ‘김정일의 일자가 ‘한 일’로 바뀌었는가’라고 물어, 우리가 오자(誤字)라고 답변했다. 통상적으로 수사 발표문은 전문 타자수가 치므로 실수가 적다. 그러나 이 발표문은 전문 타자수가 아니라 대공수사국장이었던 J씨가 친 것이다. 당시 안기부에는 286급 컴퓨터가 보급돼 있었는데 J국장은 타자 연습을 위해 자신이 치겠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金正一 등의 오자가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김현희가 직접 썼다는 자술서에도 오자가 있다는 점이다. 바레인에서 그는 리젠시 호텔에 묵었는데 자술서에서는 리젠트 호텔에서 잤다고 써놓았다.

    국정원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언론인들은 안기부를 ‘블랙홀’에 비유한다. 안기부가 용의자를 데려간 다음에는 더 이상의 취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블랙홀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안기부는 수사과정에서 언론의 견제를 받지 않아 편리했을지 모르지만, 이는 결국 실수를 사전에 발견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낳았다. 아무런 견제없이 진행되는 안기부 수사는 완벽해야 하는데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김현희 살려둔 이유

    소설 ‘배후’는 한국의 N(안기부의 영어 약칭이 NSP였다)이 대한항공기를 폭파시켰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묘사는 KAL 858기 사건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의문 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김현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김현희씨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와 ‘사랑을 느낄 때 눈물을 흘립니다’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KAL 858기를 폭파한데 대한 사죄를 하고 있다. 이 사건이 만일 안기부의 자작극이라면 수년 전까지 공개석상에서 “내가 폭파범이오”라고 외친 김현희씨는 대단한 연극을 한 셈이다. 안기부가 폭파범이라면 김씨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공작원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현희씨는 빈→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행 항공권을 갖고 있었으며 각 나라의 공항당국은 그가 아부다비까지 이동해온 것을 사실로 확인해주었다. 따라서 안기부가 KAL 858기를 폭파한 주범이 되려면, 안기부는 이 여러 나라의 수사기관까지 완벽히 속여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국정원에서 국장을 지내고 퇴직한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김현희씨가 범인이라면 왜 살려두었느냐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 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이러한 의혹이 제기될 때를 대비해서였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이 자기네 소행이 아니라고 할 것에 대비해 김씨를 살려둔 것인데, 지금 와서는 북한이 아닌 엉뚱한 사람들의 의혹제기에 대처하는 처지가 되었다. 수사에 허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조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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