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귀환 국군포로 정착지원금 노리는 브로커들

70대 老兵 두 번 울리는 ‘한탕 비즈니스’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3-12-26 1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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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을 데려다 놓았으니 돈을 가져와라’
    •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탈출 사실을 폭로하겠다’
    • 귀환한 국군포로들이 받게 될 4억원 가까운 ‘목돈’을 노리는 브로커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 死線을 넘은 포로 가족을 두 번 울리는 ‘포로 사기’ 百態.
    귀환 국군포로 정착지원금 노리는 브로커들

    중국 주재 해외공관에 망명을 요청하는 탈북자들에 대한 중국 공안의 단속이 강화될수록 ‘은밀한’ 탈출을 보장한다는 브로커들이 기승을 부린다.

    2002년 10월.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에서 일흔이 넘은 노인이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이 노인은 식사조차 제대로 못한 탓인지 비쩍 마를 대로 마른 상태에서 허리띠를 묶어 목에 걸고 그 한쪽 끝을 장롱 모서리에 걸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름 최완종(육군 상사), 군번 1201522, 1950년 11월26일 한국전쟁에서 전사.’ 지난 1999년까지만 해도 이 노인은 이처럼 한국전쟁 전사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2000년 1월 목숨을 걸고 북한 탈출에 성공해 한국으로 귀환하면서 최완종씨는 ‘귀환 국군포로’로 신분이 바뀌었다. 50년 만의 금의환향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형제들을 만났고 까마득한 후배들의 축하를 받으며 전역식을 마쳤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3억원대의 국군포로 정착지원금까지 받았다. 한마디로 경제적·사회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편안한 노후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최씨가 목숨을 걸고 선택한 땅에서 2년도 안 돼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최씨 가족들은 그 동안 최씨가 북한을 탈출하면서 두고온 가족들 걱정으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전했다. 최씨는 북에서 결혼해 부인과 5남매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씨의 사정을 잘 아는 귀환 국군포로들은 최씨가 3억원이 넘는 정착지원금의 사용처를 둘러싸고 가족들과 심한 갈등을 겪어왔다고 전했다.

    최씨는 귀환 직후 조선족 브로커 한 명이 북에 두고 온 가족의 편지와 사진을 들고 와 ‘돈만 주면 가족을 모두 데려다주겠다’고 하자 그때부터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씨와 함께 생활하던 친형 최모씨도 “중국에서 온 브로커가 가족들을 데리고 오는 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자 정착지원금을 모두 북한에 보내겠다고 고집했다. 그때부터 가족들간에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씨 가족에 따르면 이 브로커는 귀환 국군포로인 최씨와 가족들에게 “나는 북한에 들어가면 김정일 장군을 직접 만날 수 있다”고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며 접근해왔다는 것. 결국 수천만원의 돈을 북한의 가족들에게 전해달라고 브로커에게 보냈지만 최씨의 집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의 브로커 역시 ‘가족을 빼내오는 데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며 최씨에 대한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돈을 보내야 한다’고 고집하는 최씨와 ‘전달 여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브로커에게 무작정 목돈을 넘길 수는 없다’고 반대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던 것이다.



    한 귀환 국군포로는 “최씨가 자신의 정착지원금 통장을 가족 중 일부에게 맡겨놓았다가 나중에 목돈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크게 좌절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최씨 가족들은 이런 사실을 ‘주변의 모략’이라며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최씨가 자살을 선택한 것은 평소 건강 악화와 우울증 때문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 브로커의 출현이 최씨의 자살을 재촉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귀환 국군포로들은 대부분 귀환 직후 일반 탈북자들이 받는 정착지원금의 10배 가까운 3억~4억원의 정착금과 보로금을 받게 되는데, 이들의 ‘목돈’을 노리는 브로커들의 폐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군포로들의 북한내 가족을 중국 등 제3국에 데려다놓았으니 돈을 내놓으라’는 요구에서부터 ‘돈을 주지 않으면 북한으로 다시 되돌려보내 처형당하게 만들겠다’는 협박에 이르기까지 고령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행각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돈만 챙기고 연락 끊어버려

    광주에 사는 정모씨에게 53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지난 2000년 봄이었다. 국방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통해 아버지의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정씨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국방부 관계자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는 이미 한국전 참전 후 사망한 것으로 알고 50년 넘도록 제사까지 지내온, 그의 집안에서는 ‘사라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산에는 아버지의 묘소까지 꾸며놓고 명절 때마다 차례도 지내왔다.

    일단 아버지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정씨는 국방부에 문의해 북한에서 아버지와 한 동네에 살았다는 귀환 국군포로를 소개받았고 그를 통해 한 명의 브로커를 소개받았다. 브로커 김모씨는 정씨를 만나자마자 아버지를 데려오는 대가로 5000만원을 요구했다. 당시 정씨 형편에 5000만원이라는 돈을 마련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 그러나 국군포로가 귀환하기만 하면 4억원 가까운 정착금을 받을 수 있다는 브로커 김씨의 설명에 정씨는 선뜻 5000만원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 후 정씨는 브로커 김씨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알아다주는 대가로 500만원씩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000만원을 전달했다. 변변한 생계수단을 갖지 못한 정씨는 주변 친척들로부터 몇백만원씩 빌려 이 돈을 충당했다. 뿐만 아니라 광주에 들를 때마다 연락해오는 김씨에게 수십만원의 여비까지 챙겨 건네주었다. 하지만 정씨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물론 브로커 김씨와의 연락은 끊겼다.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걸 눈치챈 정씨는 김씨를 찾아나섰다.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브로커들은 이름이나 연락처를 남기지 않는 것이 철칙. 결국 정씨는 돈을 보냈던 계좌를 확인하고 수소문 끝에 서울에 살고 있는 김씨의 자녀들을 만났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김씨의 자녀들은 사실상 극빈 상태로 아버지가 정씨로부터 받아챙긴 돈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정씨는 브로커 김씨를 사기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그 후로도 정씨는 아버지를 모셔오겠다는 일념을 포기하지 않고 지난 10월경 또 다른 브로커를 소개받아 착수금조로 3000달러를 지불했다. 이 브로커는 “12월 말까지 반드시 아버지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막상 정씨는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태.

    ‘탈출’이냐 ‘체포’냐

    국군포로나 가족들이 받게 될 목돈을 노리는 브로커들은 국군포로의 북한-제3국 탈출 과정에 집중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일단 중국 등 제3국으로 탈출한 국군포로들의 경우에는 이미 국정원이나 군(軍)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경우가 많아 이권을 챙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브로커들이 국군포로 또는 포로 가족들의 북한 탈출을 유도하거나 강요하는 셈이어서 자칫하면 한국-북한-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몇몇 브로커들은 “국군포로나 포로 가족들을 북한에서 탈출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북한 보위부 요원을 매수해 이들 당사자들을 ‘합법적으로’ 체포해 오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하고 있다.

    목돈을 노리고 ‘위험한 도박’을 벌이는 이들 브로커들은 중국 공안이나 북한 체포조의 ‘단골 표적’이 되기도 한다. 지난 1998년 가수 현미(본명 김명선)씨와 북한의 동생 김길자씨의 상봉을 성사시켰던 한겨레상봉회 김학준 소장도 그런 경우. 김 소장은 지난 2000년까지만 해도 이산가족 상봉 주선단체들 중 가장 많은 실적을 올릴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해온 인물. 국군포로 장무환씨의 귀환을 성사시킨 것도 김 소장의 활동 덕분이었다. 그러나 김 소장은 지난 2000년 중국 단둥(丹東)에서 실종된 뒤 3년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 중국의 한 정보소식통은 “이산가족 상봉 단체 관계자들 중 현재 연락이 끊긴 사람들은 십중팔구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거나 처형되었다고 봐도 좋다”고 말했다.

    이처럼 국군포로들의 ‘목돈’을 노리는 브로커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된 채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귀환 국군포로나 포로 가족들을 상대로 거액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위험수당’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다.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이산가족 상봉 주선단체 대표 S씨는 몇 년 전 북한 체포조에 붙잡혀 구금되었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북한 보위부의 끄나풀로 보이는 북한 사람에게 납치돼 어딘가에 구금된 적이 있습니다. 여권을 빼앗더니 활동 내용을 자백하라고 강요하더군요. ‘이제는 죽었구나’ 싶어 한참 고민하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병원에 데려다달라고 했습니다. 마지 못해 병원으로 옮겨주더군요. 그 사이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S씨를 납치했던 북한 사람이 다름아닌 지난 2000년 당시 한국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김모씨를 탈출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브로커였다는 것이다. S씨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국군포로 탈출에 관여하는 브로커 중에는 북한 당국과도 깊숙한 관계를 갖고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브로커들의 이러한 ‘이중 플레이’ 때문에 국군포로나 가족들이 선의의 피해를 넘어 치명적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큰 형편이다.

    ‘국군포로들을 탈출시켜주겠다’고 접근해 오는 브로커들은 대부분 이미 한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국군포로들의 입을 통해 북한에 살고 있는 국군포로 명단과 주소를 확보한 뒤 북한으로 사람을 들여보내 이들의 사진과 편지를 확보하면서 ‘공작’을 시작한다. 국군포로들의 사진과 편지를 입수하면 이 편지에 적힌 한국전쟁 당시의 주소지를 뒤져 한국의 가족을 찾아내고 이들을 상대로 착수금조의 경비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한국내 가족들은 50년 넘도록 죽은 줄만 알고 지냈던 남편이나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브로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경제적 형편이 넉넉지 않은 국군포로 가족들도 귀환에 성공하기만 하면 3억~4억원이라는 목돈이 주어진다는 브로커의 설명을 듣고 나면 대부분 귀환 작업에 대한 대가로 목돈을 지불하는 데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 일종의 ‘후불제’ 계약이 이뤄지는 것이다.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국군포로가 요청하거나 원하지 않았는 데도 브로커가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만나 편지를 받아온 후 수고비조로 거액의 경비를 요구하는 일도 많다. 몇 년 전 귀환해 한국에서 결혼까지 한 국군포로 Y씨도 그런 경우.

    “북에서 함께 생활하던 동료 국군포로 자녀를 만나 그 아버지를 데려다달라고 사람을 소개시켜주었더니 막상 그 동료는 데려오지 않고 내 동생 편지를 갖고 왔더군요. 그러고는 경비를 요구하길래 동생 편지와 사진을 되돌려보냈습니다.”

    지난 2001년 귀환한 국군포로 K씨는 “지금도 ‘브로커’ 이야기만 나오면 이가 갈린다”고 말한다. K씨는 애초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올 때 아들과 손녀도 함께 넘어오려고 했으나 혼자만 탈출에 성공하고 아들과 손녀는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으로 다시 송환되고 말았다. 한국 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자신의 탈출을 도왔던 조선족 여성 브로커 H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들을 중국에 데려다놓았으니 당장 5000달러를 송금하라는 것이었다.

    H씨가 요구하는 아들의 ‘몸값’은 북한에서 중국으로, 북중(北中) 국경 도시에서 제3의 도시로 거처를 옮길 때마다 계속 올라갔다. 목돈을 한꺼번에 부칠 수 없다고 하자 H씨는 그때부터 ‘아들을 잃어버렸다’면서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중국에서 아들을 미아(迷兒)로 만들 수 없어 친척으로부터 소개받은 목사에게 중국에서 아들의 신병을 인수해줄 것을 부탁했다.

    천신만고 끝에 K씨의 아들은 톈진(天津)에 도착해 한국행을 시도했으나 배를 타기 직전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고 한다. K씨는 그 후 아들이 다시 북한으로 송환됐다는 이야기만을 들었을 뿐이다.

    K씨의 경우에서처럼 조선족 여성들이 브로커로 뛰어드는 것은 국경을 통과하거나 북한에서 활동할 때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당국의 시선을 피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 중국 현지 관계자들은 “북중(北中) 국경지대의 탈북 여성들이 인신매매당한 뒤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이유로 브로커로 변신하거나 이용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한다.

    물론 여성들만 브로커로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 사정을 잘 아는 탈북자들이 중국을 드나드는 브로커로 변신해 활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게다가 국내의 이산가족 상봉 주선단체들도 중국 현지 브로커들을 끼고 있고, 중국내 브로커 역시 지역별 중개인을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의 ‘먹이사슬’은 이중삼중으로 이어져 있는 셈이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한국인 브로커는 그 먹이사슬의 맨 끝에 놓여있는 셈.

    “가족 데려다줄테니 현찰 보내라”

    2002년 6월 귀환한 국군포로 P씨 가족은 귀환 직후부터 지금까지 ‘가족을 데려다줄테니 경비를 지원해달라’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 P씨의 귀환을 성사시킨 조카 P씨에게 국정원 직원을 사칭한 브로커들의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한 것은 P씨가 한국 땅에 발을 디딘지 딱 보름이 지난 뒤였다.

    “어디서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심한 경우에는 하루에 20통이 넘게 전화가 울려대는 바람에 일을 못할 지경이었어요. 전화를 거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국정원 직원을 사칭했고 ‘아저씨가 중국에 체류할 때 가족을 빼내다주면 (나중에)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 접근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조카 P씨는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국군포로 P씨에게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했지만 번번이 ‘그런 일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결국 P씨의 귀환 과정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브로커들이 P씨가 받게 될 정착지원금을 노리고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것이다. 조카 P씨는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의 소식을 전해줄테니 만나자는 브로커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이번에는 ‘P씨의 한국 귀환 소식을 북한측에 폭로하면 가족들이 모두 죽을 수도 있다’면서 협박조로 바뀌더라”고 말했다.

    2001년초 북한을 탈출해 현재 부산에 살고 있는 국군포로 C씨 가족들도 귀환 초기 딸을 중국 옌지(延吉)에 데려다놓고 돈을 요구하는 브로커들 때문에 몇 차례에 걸쳐 목돈을 송금하면서 피해를 입은 경우. C씨의 딸이 털어놓은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브로커들은 애초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해준다고 가족들에게 둘러대고 중국으로 데려갔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한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을 알게 되자 브로커들은 나를 옌지에 데려다놓고 부산의 삼촌들(아버지 C씨의 형제들)에게 전화해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돈이 몇 차례 건너오자 처음에는 거처도 마련해주고 먹을 것도 구해주더니 (한국으로 탈출하라는 것이 아니고) 북한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니까 브로커들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실상 인질 신세가 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브로커들로부터 탈출한 C씨는 옌지에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식모살이로 연명하다가 지금은 소식조차 끊긴 상태다.

    이렇게 브로커들의 ‘몸값’ 요구가 늘어나다 보니 귀환 포로들이 한국에 정착한 후에도 정착지원금을 둘러싼 말썽이 종종 생겨나고 있다. 지난 2000년 귀환한 국군포로 H씨는 3억7000만원이 넘는 정착 지원금을 동생에게 맡겼다가 1년 뒤쯤 1억원이 넘는 돈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 동생과 불화 끝에 의절(義絶)한 경우.

    H씨의 북한 탈출은 사실상 이 동생이 주도한 ‘작품’이었다. 자신의 귀환작업을 동생이 주도했던 만큼 H씨는 정착금 통장을 동생에게 맡겨놓고 생활비를 받아 생활해왔다. 그러나 1년 후쯤 동생이 내민 통장에서 1억원이 넘는 돈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후 동생과의 불화가 시작됐다. H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북한에서도 험악한 생활을 하면서 경험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돈 문제로 동생에게 멱살을 잡혀보기는 처음”이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H씨는 “귀환 직후 국방부가 실시하는 적응교육을 받으며 ‘통장은 반드시 본인이 직접 관리하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쉽냐”며 혀를 찼다. H씨는 지금 가족과도 헤어져 연고도 없는 지리산 자락에 다른 탈북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다.

    국군포로들은 대부분 70대 초중반의 고령인 데다 남한에 가족이 아예 없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 3억원이 훨씬 넘는 돈을 관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군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도 “귀환 후 적응교육 기간 동안, 갑자기 거액의 돈을 쥐게 되는 국군포로 귀환자들에게 통장 관리만큼은 절대로 남에게 맡기지 말라고 교육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간섭은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밝혔다.

    국군포로 귀환은 ‘한탕 사업’

    두만강과 압록강이 얼어붙는 겨울은 북한내 국군포로들이 탈출을 감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이산가족 상봉 주선단체의 한 관계자는 “겨울이 깊어지면서 ‘두만강이 꽁꽁 얼면 국군포로를 데리고 나올테니 우선 현찰을 달라’는 브로커들의 요구가 기승을 부린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겨울 한철이 국군포로들의 목돈을 노리는 브로커들에게는 대목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관계자가 내놓은, 국군포로 10여명의 명단과 인적사항, 한국내 가족관계 등을 기록한 두툼한 서류였다. 이들 명단은 대부분 이 관계자가 중국에서 활동하는 브로커들을 통해 확보한 뒤 남측의 가족들과 연락이 닿은 경우만 모아놓은 것. 그는 “이들 대부분은 북한 탈출 의사를 갖고 있으며 송환에 따르는 경비만 가족들이 지원한다면 언제라도 데려올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미 국군포로들은 목돈을 노리는 브로커들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관계자는 “국군포로를 귀환시켜주는 대가로 1억원을 받은 브로커도 있다”고 전했다.

    정부가 국군포로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사이 북한과 중국, 중국과 한국을 자유롭게 오가는 브로커들 사이에서 국군포로 귀환 작업은 거대한 ‘한탕 비즈니스’가 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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