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거짓말, 편가르기, 여론조작에 얼룩진 근시안 원전정책 30년

‘방폐장 갈등’ 속 부안과 原電지역을 가다

  • 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3-12-26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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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폐장 유치 갈등으로 ‘계엄도시’를 방불케 했던 전북 부안 주민들이 2003년 12월10일 마침내 정부의 항복선언을 받아냈다. 이로써 정부는 지난 17년간 거듭해온 시행착오를 부안에서 또 재연한 셈이 됐다. 방폐장 후보지로 거론됐거나 원전이 들어선 지역 주민들은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주)의 30년 원전정책이 아물지 않는 상처만 남겼다고 비난한다. 한바탕 원전 바람이 할퀴고 간 바다마을들을 찾았다.
    거짓말, 편가르기, 여론조작에 얼룩진 근시안 원전정책 30년
    지난 11월22일 전북 부안 성모병원 5층. 입원실은 ‘영광의 상처’를 입은 환자들로 넘쳐났다. 입원환자 중 20여명은 17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일어난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이하 방폐장) 유치반대 시위에서 전투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다 다친 주민들이다. 온몸에 피멍이 들거나, 머리가 함몰되거나, 팔이 부러지거나, 발목을 삔 이들 대다수는 부안에서 태어나 부안에서 평생을 살아온 농부 혹은 어부들이다.

    22일 오후 이들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한마디’ 하기 위해 휠체어를 탄 채 부안성당을 찾았다. 환자들은 격해진 감정에 눈물까지 흘리며 생업을 내팽개치고 거리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는 처지, 아들이나 손자뻘 같은 전투경찰들에게 욕지거리를 들으며 얻어맞는 비참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중 한 명인 김대수(49)씨는 17일 시위 도중 골목으로 도망치다 40∼50명의 전경들에게 포위되어 곤봉과 방패로 몰매를 맞았다. 머리를 내리치는 곤봉을 피하기 위해 손으로 머리를 감싸다 오른손 두 번째와 세 번째 손가락이 부러졌다. 엉덩이께를 10cm 가량 베이는 부상도 입었다. 그는 “뭔가 차가운 감촉의 흉기가 허벅지를 쑥 밀고 들어왔다”고 기억한다.

    김씨는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반핵(反核)을 상징하는 노란색 점퍼를 걸친 채 매일 저녁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11월25일에는 상경시위에도 참여했다. 서울 미근동 경찰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김씨는 “노무현과 김종규(부안 군수)를 찍어준 이 손가락이 그놈들의 방패에 찍혀버렸다”며 철심을 박아넣은 손가락을 내보였다. 정부와의 극한 대립이 일상생활로 굳어지자 김씨는 이제 농담할 여유까지 생겼다.

    “아, 글씨 고기가 먹고 싶거든 우리 집에 오지. 우리 마누라가 격포항에서 횟집을 하잖어. 추운 날씨에 고생들 하는데 회 한 접시 공짜로 못 줄까봐? 왜 먹지도 못할 사람 고기를 썩둑 자르는겨. 저네들은 사람고기까지 씹어먹는겨?”



    방폐장 유치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촛불시위는 부안군이 후보지로 확정된 직후인 2003년 7월26일부터 매일 밤 열렸다. 촛불시위의 성지(聖地)가 됐던 부안 읍내 수협 앞 큰길은 ‘반핵민주화광장’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여름이던 지난해 8월 내내 산업자원부, 행정자치부, 청와대의 입장이 서로 엇박자를 그리는 가운데 부안 주민들은 전주 도심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9월에는 김종규 부안군수를 집단 폭행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22만 주민, 66만 병력의 대치

    민주적 문제 해결의 마지막 보루로 기대를 모았던 주민투표 방안에 대해 정부가 “연내 투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자 주민들은 11월17일과 19일 과격시위로 공권력에 맞섰다. 주민과 전경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이틀간의 시위 이후 부안에 투입되는 병력은 크게 늘었다. 11월20일부터 30일까지 매일 77개 중대 8000여명이 부안 읍내를 빽빽하게 둘러싸면서 부안은 19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하는 ‘계엄도시’로 일컬어졌다.

    당시 각종 여론조사 결과 부안 주민의 80% 이상이 방폐장 유치에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1월22일 ‘동아일보’의 현지 여론조사 결과 88.3%의 주민이 반대의사를 밝혔으며, 72.1%는 경찰의 야간집회 원천봉쇄에도 집회에 계속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처음에야 핵이 어떤 건지 주민들이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고준위 핵폐기물에서 방사성이 사라지려면 무려 2만4000년이 지나야 된다는 거예요. 미쳤습니까, 그런 걸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주민들이 그렇게 반대하는데 군수 간이 얼마나 크다고 설마 유치신청을 하겠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가 이 지경까지 온 겁니다. 더욱 강력하게 시위를 해야 하는데, 저렇게 전경들이 막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11월21일 밤 부안성당 앞에서 주민 김모(45)씨는 골목골목을 장악한 전경들에게 분노했다. 읍내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그는 벌써 두세 달째 장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했다. 김씨는 “이미 30여명이 구속됐다. 100번째 안으로 구속된다면 영광스런 일이다”며 방폐장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12월10일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이 “부안군민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고 사과하기까지 부안에서는 137일간의 촛불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이 기간 부안에 동원된 병력을 5540중대 66만여명으로 집계한다. 같은 기간 집회에 참가한 주민 22만여명(경찰 추산)의 세 배에 달하는 규모다. 반대시위 동안 주민 25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고 이중 31명이 구속됐다. 16명은 수배중이다. 350여명의 주민이 시위중에 부상당했다.

    12월10일 저녁 부안성당에서는 “다른 지역에서도 방폐장 유치신청을 받겠다”는 산자부 발표가 있은 후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여기에 참가한 송광국(41)씨는 “정부를 굴복시킨 것을 기뻐하며 평소보다 더 많은 주민들이 모였다”고 전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여전히 정부 정책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송씨는 “이번 발표는 정부가 시간을 벌어 주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작전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주민들이 많다”고 했다.

    갑작스런 방폐장 유치 결정, 경제적 혜택에 관한 뜬소문,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시위, 공권력 투입, 정부의 백기(白旗) 투항….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난 5개월간 부안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결코 낯설지가 않다. 1986년부터 17년간 방폐장 유치사업을 추진한 정부는 1990년과 1994년에도 안면도와 굴업도를 방폐장 후보지로 일방적으로 선정한 뒤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시위에 부닥쳤고 결국 방폐장 유치에 실패한 바 있다.

    안면도와 굴업도의 처절한 싸움

    충남 태안군 안면도가 방폐장 유치 후보지로 내정된 사실은 1990년 11월 언론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미 그해 9월에 안면도를 후보지로 결정한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비밀에 부친 채 ‘서해과학연구단지 건설’이란 명목으로 후보지역의 땅을 몰래 사들였다. 땅을 판 주민들도, 심지어는 태안군수조차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후 전쟁과도 같은 7일간의 투쟁 끝에 주관부서였던 과학기술처 정근모 장관이 경질되면서 안면도 주민들은 방폐장 유치사업을 무력화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7일 항쟁’이라 불린 반대 시위는 부안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폭력적인 양상을 띠었다. 매일 1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안면도 읍내에 모였고, 초·중·고교생들은 등교를 거부했다. 흥분한 주민들이 태안군 공무원들의 옷을 벗겨 전봇대에 매달고 집단 폭행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에 정부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켜 경비를 강화했다. 안면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인 연륙교가 차단되고 상점들이 문을 닫으면서 안면도는 생필품조차 구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단 9명의 주민이 살고 있던 인천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에 방폐장 유치가 추진된다는 사실 또한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세상에 알려졌다. 1994년 12월 언론에 이 같은 사실이 보도되자 정부는 굴업도의 모섬인 덕적도에 부랴부랴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내려보냈다. 1750억원에 이르는 지역 지원금과 주민 폭동에 대비한 1500여명 규모의 ‘인천경비단’이 그것이다.

    당시 덕적도 주민들과 함께 유치 반대운동을 벌였던 환경운동연합 공익환경법률센터 김혜정 사무처장은 1년간 계속된 당시 유치반대 시위를 “환경운동 중 가장 처절하고 외로웠던 싸움”이라고 회고한다.

    700여명의 주민들 중 시위에 참가한 주민이라야 고작 300명 정도였고, 그나마 대다수가 50세 이상의 장·노년층이었다. 하루 단 두 편의 배가 육지와 섬을 왕복하는 형편이라 언론이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전경들조차 주민들이 마음껏 시위를 하도록 내버려둘 정도였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서울 명동성당과 인천 답동성당에서 200여일 동안 농성을 벌이는 등 원정시위에 나섰다. 한 60대 노인은 서울 사직공원 집회에서 한겨울 추위에 시달리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95년 10월 굴업도에 활성단층이 존재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방폐장 유치는 백지화됐다. 그러나 이에 앞서 1991년 한국자원연구소가 “굴업도는 지질 조건상 방폐장 부지로 부적격하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를 무시한 채 무조건 주민 반대가 가장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을 노린 정부의 얕은 술수는 결국 주민들에게 상처만 남긴 채 또 하나의 실패작으로 기록됐다.

    거짓말, 편가르기, 여론조작에 얼룩진 근시안 원전정책 30년

    아이 어른 구별할 것없이 방폐장 유치반대에 나선 부안 주민들. 정부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주민간 ‘핵 분열’은 지속될 전망이다.

    방폐장 유치 백지화 이후에도 주민들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고통받아야 했다는 점 또한 과거 방폐장 후보 지역들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찬성측과 반대측 주민들의 갈등은 백지화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생계를 팽개치고 시위를 벌인 탓에 경제적 타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덕적도 주민들의 경우 그 무렵 인천까지의 왕복 뱃삯만 해도 3만원이어서 서울에 한번 나갔다 오려면 10만원이 들었다.

    당시 반대시위에 적극 참여했던 덕적도 주민 사명복씨는 “찬성과 반대로 나뉜 주민들 사이는 지금도 여전히 서먹하다”며 “술이라도 한잔 하다 보면 그때 얘기가 나오면서 말싸움이 벌어지고, 경조사가 있어도 끼리끼리만 챙겨준다”고 전했다. 경제적 손실도 컸다. 사씨는 낚싯배를 운영하며 고기를 잡아 횟집 등에 팔곤 했는데, 본업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단골손님이 모두 끊긴 후였다. 그는 지난 가을 경북 포항에 내려가 건설현장에서 날품을 팔고 있다. 그는 “남은 빚 갚을 돈을 마련할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고 털어놨다.

    안면도는 정부가 방폐장 유치를 철회한 이후에도 2년 동안 방폐장 유치 문제와 씨름을 벌여야 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등이 백지화 이후 금품을 살포하고 유치서명 작전을 벌이는 등 본격적으로 주민 회유에 나섰기 때문이다. “유치 찬성 도장을 받아오면 돈은 물론 술도 사주고 여관에 여자까지 넣어주더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같은 은밀한 ‘공작’은 1993년 1월, 유치활동을 벌인 주민 김남영씨의 양심선언을 통해 폭로됐다.

    김씨는 이 자리에서 “유치 추진위원들이 원자력연구소로부터 월 90만원 이상의 직장 보장과 자금 지원 등을 약속받았고, 위원장 격인 강모씨는 주택과 평생직장, 자녀교육비 등을 보장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주민들의 도장을 이용해 임의로 신청서를 작성하는 등의 방법으로 300여세대가 방폐장 유치에 찬성하는 것처럼 내세웠으나 이는 주민들의 의사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정부가 안면도에서 사기를 친 것도 모자라 부안에서 또 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며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드러냈다.

    “처음에는 정부가 방폐물을 안전하게 관리할 뿐 아니라 안면도에 지역발전금도 주겠다고, 또 예정부지에 있는 나무 한 그루까지 보상해주겠다고 해서 망설이지 않고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부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어요. 경제적 지원이나 보상도 약속과 달랐습니다. 또한 선진국에서조차 방폐장의 안전 문제 때문에 반대 여론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게다가 제게도 주민들로부터 어떻게든 찬성 도장을 받아오라는 주문까지 했습니다. 결국 정부가 시골 주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죠.”

    그는 “안면도 주민들이 입은 유·무형의 피해에 대해 손해보상청구를 한다면 액수가 엄청날 것”이라고 했다. 주민들이 찬반으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하던 당시 그는 집으로 몰려온 1000여명의 반대측 주민들로부터 협박당했고 가족들은 인분을 뒤집어쓰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김씨는 “당시 주민들의 행동을 이해한다”며 “모든 것은 정부의 잘못”이라고 잘라 말했다.

    1986년 시작한 방폐장 사업이 안면도와 굴업도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퇴짜를 맞게 되자 정부는 경제적 지원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사업이 실패를 거듭해가자 경제적 지원 규모는 더 커졌다. 부안의 경우 지역개발자금 3000억원 지급, 20년간 2조원을 지역개발에 투입, 양성자가속기사업 유치 추진, 한수원 본사 이전, 2개의 골프장 건설, 부안군 일대 해상에 바다목장 조성 등의 조건들이 제시됐다.

    그러나 대다수 부안 주민들은 이러한 정부의 지원책을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유치신청 초기에 소문으로 나돌던 위도 가구당 3억∼5억원 현금 보상설이 단지 뜬소문이었음이 밝혀졌고, 유치를 추진하는 위도발전협의회(회장 정영복)는 당초 2003년 10월 말까지 정부로부터 현금을 받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방폐장 유치에 반대하는 위도지킴이의 서대석 공동대표는 “주민이 1만8000여명밖에 되지 않는 위도에 종합병원이 세워진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냐”고 반문했다.

    현재 우리나라 전기 사용자들은 전기 요금의 4.5%를 전력산업기반조성기금으로 부담하고 있다. 이 기금의 일부는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는 고리·영광·월성·울진 등 4개 원전(原電)지역에 지원금으로 지급된다. 이밖에도 신규원전이 건설될 경우 건설비의 일정 비율을 특별지원금으로 지급한다. 그렇다면 원전 지역 주민들은 원전에 따른 경제적 부(富)의 효과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정부와 한수원은 방폐장 유치 후보지에 제시할 수 있는 원전정책 성공모델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

    “올해 초에 영광 성산리가 후보지로 결정되자 주민들은 기뻐서 돼지도 잡고 춤도 췄습니다. 그러다 부안으로 결정되자 괜히 부아가 나서 ‘핵=죽음’이라고 써 붙이고 찾아오는 부안 주민들을 헷갈리게 하는 겁니다. 요즘도 이곳 주민들은 다시 빼앗아오고 싶어해요. 여러분의 군수님이 참으로 영리하고 용감하셔서 원전수거물관리센터를 유치한 겁니다. 양성자가속기사업, 이거는 부안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올 정말 좋은 최첨단 사업입니다.

    지금 김종규 군수님은 발전이라는 옥동자를 얻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이 순산할 수 있도록 산파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부안으로 돌아가서 친구들, 친척들 한 사람씩 붙잡고 현지 주민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왔다고 하면서 유치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12월1일 전남 영광원자력발전소를 찾았다. 때마침 한수원 직원의 인솔 하에 부안 주민 20여명이 영광원전 홍보관을 방문해 영광원자력문화진흥회 설동선 회장의 유창한 연설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런 홍보연설은 영광원전 홍보관의 프로그램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영광원전 홍보부 관계자는 “부안에 있는 한수원 사무소에서 시간당 10만원의 비용을 지급하며 연설을 의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남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에 자리한 영광원자력발전소는 영광굴비 산지로 유명한 법성포에서 10여분을 더 달리면 그 위용을 드러낸다. 1981년 1·2호기 공사가 시작되어 2002년 6월까지 총 6개 호기가 건설되어 가동중이다. 시골 아낙네들이 쪼그려 앉아 손질하는 정문 앞 화단 뒤로는 200여가구가 밀집한 성산리 마을이 보였다. 20년간 세 차례에 걸친 원전건설 특수를 누린 이후의 마을은 고즈넉하기 짝이 없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인기척을 살피기 힘들었다. 큰 창문과 작은 창문이 번갈아 달린 집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는데, 원전건설 당시 인부들의 하숙집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모두 텅텅 빈 집이라고 한다. 성산리 이장 정병우씨는 “현재 주민 중 60∼70% 정도는 원전 건설 붐을 기대하고 외지에서 들어왔다”면서 “돈을 벌어서 떠날 사람은 다 떠났고, 지금 남은 사람은 노인이 된 원주민이거나 빚이 쌓여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1979년 집과 논밭을 모두 원전에 내어주고 성산리로 이주했을 때만 해도 기대가 컸습니다. 그후 전두환 대통령은 기공식 때 내려와 ‘앞으로 훨씬 잘 살게 될 것’이라며 큰소리를 쳤죠. 그런데 공사가 끝나자 인부들도 다 떠났고, 이젠 날품 팔 일거리도 없습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땐 원전이 유치지역에 그다지 도움되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원전에서 혜택받는 것이라곤 한 달에 9000원씩 보조해주는 전기요금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보상금 받았을 때 도시로 떠났어야 했는데….”

    1970년대 말 원전이 건설된다고 했을 때 성산리 주민들은 청정에너지를 생산하는 큰 공장이 들어서는 것으로 여겼다. 6개 원자로 공사비로만 20조원 가까이 투자되기 때문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영광군은 자연히 시(市)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원전에 대한 인식은 달라졌다. 원전에서 배출되는 온배수의 영향으로 어획량이 크게 줄어들었고,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사고가 일어나면서 주민들은 경제적·심리적 어려움을 함께 겪어야 했다. 정병우씨는 “쌀을 싣고 서울로 올라갔다가 ‘방사성 물질 묻은 쌀’이라고 박대받고 도로 싣고 내려온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계마리에서 조상 대대로 어업을 해온 김영오(49)씨는 “요즘 어획량은 1980년대 말의 10%에도 못 미친다”고 말했다. 온배수 때문에 중하, 꽃게, 오징어 등의 어종이 거의 멸종되고 김·어류·패류 양식도 불가능하게 된 탓이다. 지역 특산물인 굴비도 흑산도 앞바다까지 나가 잡아온 지 이미 오래다. 온배수 피해보상 문제를 놓고 영광원전과 주민들은 몇 년째 씨름을 계속하고 있다. 김씨는 “보상금으로 빚만 갚게 된다면 전업할 생각”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영광에서 반핵운동을 주도해온 김용국씨는 “원자력발전소는 산업 특성상 지역사회와 융화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단순 노동력에 의존하지 않는 첨단기술 산업이기 때문에 건설만 끝나면 더 이상 지역주민에게 고용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작은 부품 하나를 생산하는 데도 전문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이 하청업체를 운영하기도 어렵다.

    “주민들은 원자력 돔들을 ‘악마의 알’이라고 부릅니다. 20년간 원전, 군청, 한수원 본사, 산자부, 서울역 등지에서 1000여차례 넘게 민원 해결을 위한 시위를 벌였지요. 원전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소모시키면서 지역주민을 ‘데모꾼’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각종 민원에 대한 한수원의 무성의한 대응도 원전정책에 대한 불신을 키운 요인 가운데 하나다. 국내 최초로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 부산 기장군 장안읍 길천리 5·6반 주민 100여세대는 1988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주 문제를 요구하고 있지만 15년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고리원자력발전소와 세 차례 작성한 합의서도 매번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다.

    길천리의 대다수 농토는 발전소 부지로 편입됐고 앞바다 또한 발전소에 묶여 농·어업이 불가능한 형편이다. 원전 건설이 끝난 후에는 더더욱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 발전소와 700m 떨어진 길천 5·6반 주민들의 경우 발전소 옹벽 때문에 햇볕이 잘 들지 않고, 발전소 하수구가 막힐 경우 마을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어왔다.

    고리원전측은 1998년 작성된 합의서가 백지화된 이유에 대해 “이주에 드는 비용을 마련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초 신고리원전 건설에 따라 지급되는 특별지원금으로 이주를 추진하자고 주민들에게 제시했으나, 이 기금의 운영주체인 기장군이 ‘군 전체를 위한 사업에 사용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재원 마련이 불가능하다는 것.

    당초 합의서 작성 배경에 대해 고리원전은 “길천리가 신고리 부지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나오자 발전소 부지로 편입되어 이주하길 원했던 길천 주민들이 서울 본사에까지 올라가 항의시위를 벌이는 등 분위기가 매우 나빴다. 그래서 부랴부랴 고리원전본부장이 주민들과 합의를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합의서 작성이 ‘일단 주민들을 진정시키고 보자’는 차원이었음을 시인한 셈이다.

    현재 고리원전은 길천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해수탕, 찜질방, 수영장 등 60억원 정도가 소요되는 소득증대사업을 추진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 또한 확실한 재원을 마련해놓지 않아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한 형편이다. 고리원전은 “자세한 재원 조달 방식을 공개할 순 없다”고 밝혔다. 15년 동안이나 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이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한수원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소득증대사업에 나설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고향 팔아 예술회관 짓겠다고?”

    ‘죽어서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는 유언에 따라 신라 문무왕의 유골이 묻힌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대왕암. 이곳에서 10여분을 달리면 총 4개 호기가 가동중인 월성원자력발전소에 이른다.

    요즘 월성 인근 지역에서는 특별지원금 697억원의 사용처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경주시가 ‘경주문화예술회관’을 짓는 데 사용하겠다며 이 돈을 한수원에 지급 요청한 것. 그러나 발전소 인근 주민들은 “특별지원금은 신월성이 건설되는 데 따르는 보상”이라며 “발전소와 멀리 떨어진 경주는 이 돈에 대한 권리가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시장의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내 고향을 판 대가를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특별지원금 집행 주체는 2001년 한수원에서 자치단체의 장(長)으로 바뀌었다(발전소 주변지역에 관한 법률). 때문에 경주시는 “경주시 전체를 위한 일에 돈을 쓰겠다”는 입장이어서 발전소 주변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는 것이다. 이러한 마찰은 크건 작건 간에 4개 원전도시에서 모두 빚어지고 있다.

    “경주시가 특별지원금을 문화예술회관을 짓는 데 사용한다면 발전소 정문 앞에 드러누워버릴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주민들은 특별지원금은 물론 일반지원금 사용처에 대해서도 불만의 목소리를 높인다. 일반지원금은 발전소 인근 5km 이내 지역 주민들에게 해마다 지급되는데, 1995년 양북면·양남면·감포읍 등 발전소 인근 지역이 경주시에 편입되면서 경주시 일반예산과 다름없이 쓰인다는 것이다.

    양남면 나아리 이종대 이장은 “12년 동안 총 500억원 정도 투입됐지만 정작 경제적 발전을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대부분의 지원금이 길을 넓히거나 포장하는 등 기간시설사업에 쓰여 보상금의 성격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반지원금이 이미 배정되어 있는 상태라 지역 예산을 할당받을 때 차별을 겪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민들은 불만을 터뜨린다. “발전소가 들어와서 얻은 것은 다른 마을보다 조금 일찍 농로가 포장된 것일 뿐”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일반지원금은 해당 연도에 모두 집행해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업에 쓰이지 못하고 있다. 이 이장은 “때문에 닦은 길을 또 닦는 낭비만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대여론 잠재우기식 정책 남발

    관광지인 경북 영덕군과 강원 삼척시 사이에 자리잡은 경북 울진군. 현재 6개 호기를 가동중이고 앞으로 4개 호기를 더 건설할 예정인 데다 198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방폐장 유치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는 울진은 우리나라 원전정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장이다. 그러나 그만큼 원전정책에 대한 불신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12월3일 만난 울진사회정책연구소 황천호 소장은 울진읍내에 있는 5층짜리 새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2003년 2월 문을 연 울진의료원이다. 이 종합병원은 신울진 4개 호기 건설의 전제조건으로 울진군이 산업자원부에 요구한 14개 사업 중 하나다. 그러나 총 250억원의 건설비 중 산자부가 지급한 돈은 단 한 푼도 없이 울진군이 자체 마련한 돈으로 병원을 지었다. 황 소장은 “산자부가 약속한 14개 사업 가운데 단 하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신울진 발전소만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거짓말, 편가르기, 여론조작에 얼룩진 근시안 원전정책 30년

    온배수 피해보상, 보상금 사용처 논란, 합의서 백지화…. 4개 원전지역 주민과 한수원의 갈등은 잦아들 줄 모른다. 1995년 당시 영광원전 4호기 건설 모습.

    14개 사업 안에는 종합병원 건설 외에도 발전소가 들어선 북면에 4년제 특수대학 설립, 8000ha 규모의 연안어장 목장화 사업 추진, 원자력안전기술원 울진지소 설치, 한국해양연구소 울진지소 설치, 골프장 설치운영, 울진원전 명칭을 ‘부구원자력발전소’로 변경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울진원전 신규입지추진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산자부가 처음부터 합의하지 않았어야 했던 사업들이 대다수”라며 “당시 산자부가 너무 안이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신울진 건설에 따라 울진군에 투입되는 지원금은 2500억원 수준인데, 이는 14개 사업을 모두 추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라는 것이다. 또 인구 7만이 채 되지 않는 고장에 4년제 대학이나 종합병원, 골프장 등을 설치할 경우 과연 이 시설들이 제 기능을 하겠느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이 관계자는 “비록 돈은 들지 않지만, 발전소 이름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라고 했다. 발전소 이름을 바꿔달라는 주민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원자력 발전소가 위험시설이라는 점을 한수원이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울진군은 울진종합병원이 연간 20억∼40억원의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한다.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성형외과, 피부과 등 없는 과가 없지만, 상주하는 전문의는 단 두 명뿐이다. 이에 울진군은 울진 3·4·5·6호기에 해당하는 특별지원금 647억원 중 100억원을 떼어내 종합병원 적자 보전에 사용하기로 했다.

    방폐장 유치 사업에 있어서도 정부는 울진군에서 민심을 잃은 지 오래다. 산자부는 과거 울진 주민들의 방폐장 반대 여론에 밀려 세 차례나 ‘울진군에 더 이상 방폐장 부지확보를 추진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는 공문을 보내왔으나, 울진군은 2003년 2월 원자력위원회가 선정한 4개 후보지 중 하나에 또다시 포함됐다. 지난 12월 산자부가 다른 지역에서도 유치신청을 받겠다고 했을 때도 울진은 정부가 기대하는 방폐장 후보지 중 하나에 포함됐다. 방폐장 유치 반대 투쟁을 이끌었던 황융길씨는 “당장의 여론 무마에만 눈이 어두워 거짓말을 반복하는 정부에 신물이 난다”며 고개를 저었다.

    정부는 방폐장을 유치하는 지역으로 한수원 본사를 옮기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러나 한수원 직원들과 10∼30여년 더불어 살아온 발전소 지역 주민들은 “한수원 직원이 1등 주민이라면 우리는 2등 주민”이라며 이러한 정책에 냉소했다. 어느 정도 경제적 혜택은 있을지 몰라도, 철저히 분리된 생활방식 탓에 주민들이 겪는 위화감만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영광 성산리 주민 황운조씨는 “발전소와 한수원 사택은 30km 떨어진 운곡저수지에서 1급수를 가져다 먹지만, 성산리 주민들은 지하수를 끌어다 먹는다”며 “우리만 방사성에 오염됐을지도 모르는 물을 마시라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골프장, 수영장, 헬스장 등 근린시설을 갖춘 한수원 사택은 지역주민들의 접근을 막는다. 영광원전 홍보부는 “지역주민에게도 개방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사택관리사무소의 김모씨는 “뜨내기는 출입불가”라고 못을 박았다. “대운동장이든 수영장이든 미리 인가받지 않으면 출입할 수 없으며, 지역 아이들도 놀이터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

    한수원과 지역주민의 위화감

    위화감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울진 북면 주민 장광섭씨는 “중학교 운영위원장을 맡은 뒤 한수원 직원 부인들이 툭하면 학교에 찾아와 교사들을 대접하는 등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보아왔다”고 말했다. 전인수씨는 “마을에 다방, 노래방, 술집 등 유흥시설이 크게 늘어 농촌마을이 기형적으로 변했다”고 꼬집었다.

    게다가 원전에 우호적이냐 아니냐에 따라 주민들이 양분된다는 전언이다. 전씨는 “1994년 당시 우유보급소를 운영하던 한 주민이 방폐장 유치 반대운동에 나서자 한수원에서 불매운동을 벌여 사택이며 학교며 모두 우유를 끊었다”고 회상했다. 그런가 하면 방폐장 유치활동을 벌였던 주민이 운영하는 식당은 한수원 직원들의 회식장소로 애용되는 등 알게 모르게 패가 갈린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지난 12월12일 부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이 사퇴했지만, 부안 핵폐기장 유치 찬반 싸움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부안 원전 재검토’가 발표된 12월10일 오후에는 김종규 부안군수와 한수원 직원들이 서울에서 열린 부안 향우회 모임에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자리에는 위도 주민들도 참석해 향우회 회원들과 욕설을 하며 몸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주민들의 바람대로 ‘방폐장 공포’를 잊고 생업으로 돌아가기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생업으로 복귀한다 해도 더 깊은 상처가 부안 주민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12월8일 부안군민총궐기대회 준비가 한창인 부안읍내 반핵민주화광장 옆 수협을 찾았다. 수협 관계자는 “이런 사태가 내년까지 이어지면 어민들 태반이 연쇄부도로 무너질 것”이라고 염려했다. 현재 부안수협 조합원은 4300여명. 대다수 어민들은 1년 단위로 영어자금을 빌려쓰는데, 방폐장 싸움이 시작되면서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어민들이 허다하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이자까지 밀리면 만기를 연장할 수 없어 부도를 맞게 되는데, 문제는 7∼10명씩 연대보증을 선 상태라 연쇄 부도가 우려된다는 것”이라며 초비상에 걸린 부안수협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 관계자가 전하는 부안의 경제사정은 여간 심각하지 않다. 대출금과 상계처리되어 지급이 정지된 적금도 부지기수다. 가을철이 진짜 어업 시즌이라 11월 중순에는 ‘이동수협’이 항구를 돌아다니며 어민들로부터 대출금을 거둬들이는데 2003년에는 그야말로 “완전히 공쳤다”는 것이다. 또 대개 12월이면 위도 주변에서 양식된 햇김이 수협 공판장에 나와야 하는데, 2003년 물량은 전년보다 60억원 정도 부족하다고 한다.

    “위도 주민은 현금 보상에 들떠 일손을 놓았고, 부안 주민은 반대 시위에 나가느라 고기잡이 배를 띄우지 않았습니다. 양식업에 필요한 기자재가 격포항과 위도를 왕복해야 하는데, 주민 갈등 때문에 이마저 불편한 분위기입니다. 일부 어민에 대해서는 벌써 부도처리가 시작됐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시위를 벌이는데 어떻게 농사를 잘 짓고 장사가 잘 됐겠습니까?”

    12월4일 강원도 삼척시 버스터미널건물 2층의 한 사무실. 책상과 컴퓨터, 전화, 팩스, 복사기 등을 갖춘 10여평 공간은 보름 전 16명의 삼척시민들이 결성한 ‘삼척 원전수거물 및 양성자가속기 사업 유치추진위원회’의 사무실이다. 사무실을 홀로 지키던 김재무씨는 “우리는 한수원에게서 단 한 푼도 지원 받은 바 없다”고 강조하면서 “나름대로 판단하기에 곧 부안에서는 유치 백지화가 될 것 같아 삼척에 원전수거물 사업을 유치하자며 자발적으로 나선 단체”라고 설명했다. 그는 “후보지인 원덕면 주민들과 연대해 지역주민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원덕면에서는 ‘원덕경제살리기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유치활동을 벌이고 있다. 추진위의 지모씨와 정모씨는 “이미 3000여명의 주민들에게 유치 찬성 도장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양성자가속기 사업까지 들어오면 협력업체 300여개가 따라 들어오는 등 인구가 20만명 더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그러나 이에 대해 과학기술부 양성자가속기총괄사업팀은 “확정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삼척에서도 ‘방폐장 갈등’ 조짐

    결국 12월10일 산자부가 “다른 지역에서도 유치 신청을 받겠다”고 밝히면서 삼척 또한 후보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삼척에서는 주민들이 유치 찬반으로 나뉘어 극한 갈등을 보일 조짐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원덕읍 김종익 농협조합장은 “3000명 유치 찬성 서명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덕읍과 울진원전은 7km 가량 떨어져 있는데, 이에 추진위측은 ‘원전 보상을 받으려 하니 도장을 찍어달라’ 혹은 ‘큰 항구가 들어올 수 있게 도장 좀 찍어달라’고 하면서 서명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김 조합장은 “도장을 찍어준 주민 대다수가 방폐장이 뭔지도 모르는 60대 이상의 노인들”이라며 “유치 활동을 벌이는 이들은 원덕면에 연고가 없거나 울진원전에 건축자재를 대는 업자들로 방폐장 공사로 돈 벌 궁리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과거 여러 방폐장 후보 예정지에서 벌어진 뜬소문과 여론 조작 등이 이미 삼척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안면도와 굴업도, 고리, 영광, 월성, 울진, 그리고 삼척 등 정부의 원전정책이 훑고 지나간 곳 어디서나 정부의 거짓말에 지친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방폐장 유치문제와 관련해서는 뜬소문이 나돌고, 여론이 조작되고, 결국 주민들 사이에서 격렬한 대립이 나타나는 것이 공통된 현상이었다.

    이러한 문제가 빚어지는 것은 주민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투명한 정보공개와 토론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1993년 정부의 여론조작과 금품살포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던 안면도 주민 김남영씨는 부안 사태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방폐장 안전문제나 경제적 지원 수준에 대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떠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부 공개한 다음 찬반 의견을 물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밀고 나간다면 아무리 절차상의 민주화를 갖췄다 해도 과거의 안면도, 지금의 부안에서와 같은 사태가 장소만 바꾼 채 반복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원자력에 대해 전문지식을 갖지 않은 촌부(村夫)이지만, 정부가 어떻게 방폐장 난제를 풀어가야 할지에 대해 명백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이 그 속성상 안전성을 100% 확신할 수 없다면, 이 사업을 추진하는 정부와 한수원이라도 국민에게 확실한 믿음을 줘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거듭된 실패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숙고하는 대신, 거짓말, 편가르기, 여론조작으로 점철된 원전 정책을 밀고 나갔다. 부안 곳곳에 휘갈겨 써진 ‘김종규 개새끼, 노무현 개새끼’란 낙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지수가 몇 점인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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