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 대담: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논설주간

    입력2003-12-29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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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는 러일전쟁(1904) 100주년이며 내년이면 을사조약(1905) 100주년, 한일국교정상화(1965) 40주년을 맞는다. 이런 시점에서 ‘신동아’와 일본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월간지 ‘논좌(論座)’는 한일관계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고 미래를 조망하기 위해 한일 양국의 대표적 언론인의 대담을 공동기획했다. 20세기를 악연으로 시작한 한국과 일본은 과연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되었는가.
    • 갈등의 본질, 진전을 위한 해법 등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한 두 언론인의 대담을 2회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와카미야 언론계 대선배이자 오랫동안 한일관계를 지켜본 권오기 선생으로부터 이제까지 많은 가르침을 받아왔는데 이렇게 대담 기회를 갖게 돼 기쁩니다.

    저 역시 반갑습니다.

    와카미야 2002년 9월, 평양 북일 정상회담에서 본격적인 국교정상화 교섭을 시작하기로 합의했습니다만 납치문제, 핵문제로 중단된 상태입니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 등 과거 한일교섭때 문제가 됐던 것이 북일교섭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초기 한일교섭은 전후 처리의 일환이기도 했고 냉전체제의 전개 시기와도 맞물렸습니다. 국교정상화 등을 의제로 한일회담이 시작된 때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것은 1953년 7월이고요. 그런 시기에 교섭을 진행한 것이지요. 따라서 초기 한일교섭은 식민지지배를 정리하기보다는 미국의 강력한 요망에 따라 ‘냉전체제를 만들어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당초엔 한국이 대표가 되어 북한 몫까지 보상을 받자는 측면이 있었지요. 하지만 햇수로 15년 걸려 마침내 다다를 곳에 다다른 해가 1965년입니다.

    와카미야 북한은 김일성이 빨치산으로 항일투쟁을 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한일조약처럼 경제협력 방식의 타협은 못한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다가 2002년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 되서야 평양선언을 발표했지요. 배상이 아니라 경제협력 방식이라도 상관없다고.



    그렇습니다.

    와카미야 일본으로서는 북한과의 경제협력에 관해 한국과 타협한 정도 이상은 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에 미안해서라기보다도 그럴 경우 한국으로부터 또 뭔가 요구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지요. 북한도 그런 부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일조약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의 문구는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북일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사죄를 표명하고 평양선언에 써넣은 것은 한일조약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다만 이 부분은 한일조약 뒤 한일간에 갖가지 대화가 오갔고, 1998년 한일공동선언에서 사죄했으므로 거기에 맞추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한편 김정일 위원장 쪽에서는 일본인 납치문제를 인정하고 사죄해 마무리지으려 했지요. 그러나 ‘8명 사망’에 대한 회답을 비롯해 귀국한 5명의 가족이 북한에서 받은 대우 등이 일본 국민감정에 큰 상처를 주어, 지금 북일관계는 최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유일 합법정부 인정 요구한 한국

    와카미야 한일교섭 때도 이른바 ‘이승만 라인’을 침범했다 해서 한국에 나포된 일본 어민의 석방이 의제가 됐었으니, 닮은 꼴이지요. 일본 국민은 ‘부당한 나포는 용서할 수 없다’며 오랫동안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전원석방될 거라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교섭을 촉진시키는 재료가 됐습니다. 이 점이 납치문제와 결정적으로 다르지요. 한일회담에서 당시 한국 정부는 북일국교정상화는커녕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부당하다며 ‘우리를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라’고 일본을 압박했지요.

    그점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와카미야 하지만 일본은 ‘그럴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요. 북한 정부를 당장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미래에 여지를 남겨두려 했지요.

    일본의 사회당도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로 ‘한일회담 분쇄’를 주장했습니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저는 당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씨와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인터뷰 했습니다. 단독회견이었지요.

    와카미야 오히라씨가 외상 때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오히라 외상은 내가 기자를 하며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도 매우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라 외상은 일본 사회당이 머리띠를 두르고 ‘한일회담 분쇄’를 외칠 때 ‘저 사람들이 진정으로 저런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묻더군요. ‘그럼 거짓말이라고 봅니까’ 하자 ‘나한테 한일회담을 빨리 하라고 다그치는 사회당 인사들이 많다. 한일국교가 성립되지 않으면 북일수교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회당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북일 국교정상화를 원하는 나머지 한일수교를 빨리 하라고 재촉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한반도는 4000년 역사상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다. 일본 조정은 조선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늘 일차적 관심사였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다’고. 이것이 오히라 외상의 전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쪽은 미국권, 북은 공산권이다. 미국은 북한에 0%, 소련은 남한에 0%의 관계다. 따라서 일본은 남에 70%, 북에 30% 정도의 관계를 갖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그때 만약 동아일보가 ‘오히라 외상은 한일수교 다음에는 북일수교 차례라고 말했다. 30% 정도는 북일수교 쪽에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썼다면 한일교섭은 깨졌을 겁니다. 그런 시기에 그는 담담하게 ‘뭐라고 해도 한일간이 먼저다. 사회당 사람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하려면 빨리 하라고 독촉까지 할 정도다. 실제 정치란 바로 그런 것’ 이라고 말했던 거죠. 한국 정치가들로부터는 들어보지 못한 설명이었기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와카미야 그런 우여곡절 끝에 한일조약이 맺어집니다. 경제협력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의가 분분했지만 결국 무상공여 3억달러, 유상차관 2억달러, 민간 3억달러로 정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1965년 2월 시나 에츠 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이 한일조약 가조인을 하러 서울에 갑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읽을 성명 문구를 놓고 외무성도 여러 가지로 고심했지요.

    결국 ‘양국간 오랜 역사중에 불행한 시기가 있었던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로,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라는 글을 넣었습니다. 공식문서는 아니지만 이 발언이 그후 다양한 ‘사죄’의 기초가 됩니다. 키워드는 ‘불행한 시기’의 ‘불행’과 ‘실로 유감스러운’의 ‘유감’ 그리고 ‘깊이 반성’의 ‘반성’입니다. 그 뒤 한국이나 중국을 상대로 한 천황의 말도 모두 이를 기초로 만들어졌습니다.

    백년을 내다보는 시야

    2005년은 한일 역사의 큰 마디가 되는 해입니다.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이 되고,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에 체결한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 100주년이 됩니다. 한일관계는 ‘100년을 내다보는 시야’를 갖지 않으면 그 ‘본질’을 놓치기 쉽습니다. 을사조약으로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둡니다. 그 조약 내용을 폭로한 것으로 유명한 신문이 ‘황성신문’이지요. 그때의 사설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고요.

    와카미야 비탄의 사설이었겠군요.

    그 글을 쓴 장지연(張志淵)은 조약에 서명한 자들은 을사오적, 즉 을사년(乙巳年)의 다섯 역적이 나라를 팔아 먹었으니 죽여 마땅하다고 규탄했습니다.

    와카미야 매국노라는 것이군요.

    하지만 한문 논설이라서 그것을 읽은 사람 혹은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이 드물었을 겁니다. 또 그 무렵 한국의 식자들은 대개 탄식하고 규탄만 할 뿐 국가전략론을 내놓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데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치면 아무것도 없는 한국이었으니 전략론이 있었다 해도 쓸 데가 없었겠지만….

    그런 물리력뿐만 아닙니다. 연표를 보면 1905년에는 일본에서도 이런저런 일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해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우에다 빈(上田敏)의 번역시집 ‘해조음(海潮音)’이 나옵니다. 나쓰메 소세키나 우에다 빈도 대단하지만 그보다도 그런 책을 읽는 독자가 많았다는 것이 한국과 뚜렷하게 다릅니다.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학문의 권유’는 1870년대에 나온 책인데 100만부나 팔렸다지요. 일본 독자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소프트 파워’ 면에서도 당시 한국은 보잘것 없었습니다. 큰 격차였습니다.

    1905년은 일본에 유학해 있던 중국의 혁명가 천톈화(陳天華, 1875~1905)가 ‘절명서(絶命書)’를 남기고 자결한 해이기도 하지요(천톈화의 절명서 : 1905년 청나라가 일본 정부에 자국의 혁명운동에 참여하는 유학생을 단속해달라고 의뢰했다. 이에 따라 ‘청국 유학생 단속 규칙’이 만들어졌다. 이에 반발하는 유학생들이 뭉쳐 항의운동으로 발전했다. 아사히신문이 사설에서 그들을 ‘방종하고 비열하다(放縱卑劣)’고 매도하자 유학생 천톈화는 밤새 절명서를 쓰고 다음날 도쿄 오오모리 해안에서 투신 자살했다. 1905년 12월7일, 그의 나이 31세였다. 절명서는 을사보호조약을 염두에 두고 ‘조선은 일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망한 것이다. 청나라는 나라가 크기 때문에 망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이대로 가면 조선처럼 스스로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편집자). 또 루쉰(魯迅)이 의학을 그만두고 사회 병리에 도전하는 전투적 문예로 뜻을 돌린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제껏 나쓰메 소세키도, 루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말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한국은 더 자학해야 합니다(웃음).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b>權 五 琦</b><br>1932년 생. 동아일보 도쿄특파원으로 63년 부임, 한일교섭 등을 취재했다. 그후 워싱턴 특파원, 편집국장, 논설주간, 사장을 역임. 김영삼 정권에서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으로 남북문제를 담당했다. 현재 동아일보 21세기평화재단 이사장, 울산대 석좌교수.

    와카미야 확실히 일본은 당시 근대화의 속도나 깊이에서 아시아에서 빼어난 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랑이고 한일합방의 역학이기도 했겠지만, 그것과 ‘한일합방은 정당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전후 한일교섭에서 되풀이된 한국측 주장은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원천 무효였다는 것으로, 일본측과 대립합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무효’라는 표현으로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애매모호하게 마무리지어졌지요. 하지만 일본에는 한일합방조약은 합의에 따라 원만하게 이뤄진 것이며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법적으로 무효인가 여부는 별문제라 치더라도 원만했다거나, 합의였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무력으로 협박해 반강제적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의 경위를 안다면 그런 발언이 나올 리 없겠지요.

    저는 이번에 후쇼샤(扶桑社)가 발행한 시판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읽었습니다. 거기에도 ‘일부에 합병을 받아들이자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동학혁명(1894년에 일어난 농민혁명·이때 출병한 청일 양군이 충돌해 청일전쟁으로 번졌다)이 있었습니다. 동학은 일종의 종교운동입니다. 뒤에 천도교(天道敎)와 시천교(侍天敎), 둘로 나뉘었습니다. 그 중 시천교의 이용구(李容九)라는 인물이 일본과의 합방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합방 후의 나라 이름은 ‘대동국(大東國)’, 즉 대등 합방을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합방에 공을 세운 인물에게 작위를 수여했는데 이용구는 작위를 거절했습니다. 일본에 흡수되는 합방을 당했기 때문에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또 일본에서는 합방을 요구하는 상소(上疎)의 수나 합방에 찬성하는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에 100만명이 참가했다는 이야기를 인용해 한국인 다수가 합방에 찬성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시 상소문은 일본인 손으로 쓴 것이 많았지요. 일진회 등을 조종한 일본의 국수주의자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한문 실력이 당시 조선 유생(유학을 배우는 사람)보다 못해 조선인 이름으로 상소문을 쓴 일인을 질책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때 일본은 친일파까지 속였던 것이지요.

    와카미야 가끔 일본 정치가의 입에서 이른바 ‘망언’이 나옵니다. 망언은 한국에서 쓰는 말이고, 일본에서는 ‘문제 발언’ 혹은 ‘폭언’ ‘방언(放言)’이라고 씁니다. 최초의 망언은 1953년 10월 제3차 한일회담에서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 수석대표가 한 발언이었습니다. 한국측 대표단이 ‘말도 안 된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그뒤 1957년까지 교섭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구보다의 발언 기록을 읽어보겠습니다. ‘일본도 (한국에) 철도나 항만을 만들거나 농지를 조성하면서 대장성이 여러 해에 걸쳐 2000만엔이나 지출했다. (한국측이 배상을 요구한다면) 이것을 돌려달라고 주장해 한국측의 청구권과 상쇄하자는 얘기다.’ 그러니 배상 요구는 그만두라는 취지였죠.

    망언의 다섯 유형

    또 하나는 ‘당시 일본이 하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한국에) 들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언의 원형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1986년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 당시 문부상의 발언(한일합방은 형식으로나 역사적 사실로나 합의로 성립된 것이다. 한국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한일합방이 없었다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한반도에 손을 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월간 ‘문예춘추’ 1986년 10월호-편집자), 1995년의 에도 다카미(江藤隆美) 당시 총무청장관의 발언(한일항밥은 강제적이었다고 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총리의 발언은 틀렸다. 한일합방이 무효라면 국제협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당시는 나라가 약하면 당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1995년 10월, 기자간담회에서 비보도 전제로 발언-편집자), 2003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의 발언(우리는 결코 무력으로 침범하지 않았다. 한일합방을 100% 정당화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들(조선인)의 선조에게 책임이 있다. 식민지주의라고 해도 매우 앞선 것이었고 인간적이었다:2003년 10월 도쿄 도내 한 집회에서 강연하며-편집자) 등 여럿 발언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일부러 거짓말을 지어냈다기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것이겠지요.

    와카미야 망언을 유형화해보면 5가지쯤 됩니다.

    첫째는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철도나 항만 등을 건설했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요약해 ‘근대화를 위해 꽤 공헌한 것 아니냐’는 유형입니다.

    둘째가 ‘일본이 합병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러시아나 중국, 특히 러시아가 합병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일본만 나무라는 것은 심하다’는 생각입니다.

    셋째는 ‘본래 합방 자체가 합의였다. 확실한 조약에 근거했다’는 유형입니다. 1995년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의 발언(일본은 36년간 한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고, 한일합방조약을 서로 확실하게 인정한 결과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대신 협력금을 내마고 해왔다. 한일합방조약은 원만하게 맺어졌다:1995년 6월 강연과 기자회견에서-편집자)처럼 ‘한일합방조약은 원만하게 맺어졌다’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시하라 씨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조선의 총의(總意)였다’고 표현됩니다.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b>若宮啓文</b><br>1948년 생. 70년 아사히신문 입사. 정치부장 등을 거쳐 2002년부터 논설주간. 연세대 어학당에 1년간 유학. 일찍이 월드컵축구 한일공동개최를 주장.

    넷째는 2003년 5월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정조회장(현 총무상)의 발언(창씨개명에 대해.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의 여권을 받으면 성명란에 ‘김’이나 ‘안’이라고 적혀 있어서 ‘조선인이네’ 라는 말을 듣고, 취직이 어려웠다. 그래서 일본식 이름을 달라는 말이 나온 것이 그 본래 시작이다:2003년 5월 도쿄대 축제 강연에서-편집자)으로 대표되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한 것’이라는 부류의 발언입니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기 위해,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해, 오히려 조선인들을 위해 했다’는 부류의 발언도 있습니다.

    다섯째가 식민지 지배든 침략이든 ‘백인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기 위해서 한 것이다. 오히려 아시아의 해방을 도모한 것’이라는 부류의 발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문부상과 법무상을 지낸 오쿠노 세이스케(奧野誠亮)의 1995년 발언(아시아 각국은 백인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고, 생활 안정을 위해 그들을 해방시켜줘야 했다. 이것도 하나의 목표였다. 결과적으로는 졌지만, 아시아는 모두 독립했다:세카이, 1995년 5월호-편집자)입니다. 이들 5가지 유형이 섞이면서 이따금씩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좋은 일도 했다’는 것은 ‘나쁜 일을 많이 했다’는 걸 전제로 하는 말이지요. 나쁜 일만 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철저하게 나쁜 일만 한다는 것은 좋은 일만 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어렵지요.

    와카미야 그러나 구보다 발언의 뉘앙스는 오히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좋은 일도 했다’고 강조하는 사람의 심리 밑바탕에는 나쁜 일을 많이 했다는 의식은 별로 없고 실은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에 상당히 공헌했는 데도 조선인들이 은혜를 모른다는 감정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좋은 일도’가 아니라 ‘좋은 일을’ 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참고 ‘좋은 일도’라고 말꼬리를 붙인 것이지요.

    근대의 제도 운영을 남기지 않은 일본

    바로 그런 심리에 한국인들은 분노하는 것입니다. 역사란 아이러니하지요. 예를 들어 중국 수나라 양제는 권력을 위해 아버지를 죽였고,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해 30만명의 군대 중 3000명만 살아 돌아오게 하거나, 배 타고 놀려고 운하를 파는 등 실정을 펴다가 왕조를 멸망시켰습니다. 하지만 훗날 그 운하가 연장되어 내륙의 교통 물류에 불가결한 존재가 됐으니 양제는 좋은 일도 했다는 식의 이야기도 그렇지요….

    창씨개명도 일시동인(一視同仁), 즉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려는 좋은 뜻에서 생긴 제도라는 식으로 말합니다만 실은 징병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가 얽혀 덩어리를 이룬 것 가운데 한 가지였습니다. 조선인은 황군 병사가 될 수 없었다, 조선인에게는 천황폐하를 위해 죽을 자격도 없었다, 그런데 죽을 자격을 준다, 그래서 ‘일본인과 똑같다’고 할 때 창씨개명, 조선지원병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교류가 많을 때는 좋은 일만 할 수 있는 존재도, 나쁜 짓만 할 수 있는 존재도 없습니다. 이런 당연한 이치에 한국인들은 어째서 그렇게 크게 반발하는 것일까, 반발의 원인을 꿰뚫어보려는 노력을 일본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와카미야 제가 보기에는 망언이라고 해도 전혀 사실무근인 것은 적습니다. 형식만 골라 말한다면 ‘조약에 의한 병합’이라고 할 수도 있고, ‘좋은 일도 했다’로 대표되는 표현도 냉정하게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측에도 문제는 있었겠지요.

    좀더 배경을 살펴보면, 이른바 망언에 공통되는 것입니다만, 일본은 ‘식민지 지배는 분명 조선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을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물며 일본만 식민지 지배를 한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반성하지 않고 무신경하게 말하는 바람에 한국인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것이지만 전적으로 ‘왜곡이다’ ‘부끄러운 줄 알라’고 심한 말로 전부 부정당하면 일본인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습니다. 서로 좀더 객관적인 표현을 쓴다면 좋겠습니다만….

    일제시대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전체로는 매우 나쁜 식민지 통치였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 증거는 오히려 식민지통치가 끝난 후에 나타났습니다. 당시 조선은행의 총재가 될 만한 사람이 조선인 중에는 없었습니다. 이건 단지 국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조선인의 책임하에 움직이는 제도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에서 손을 떼었던 것입니다.

    서유럽은 자국의 식민지에 식민지 이후를 위한 통치제도를 육성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 종주국은 사죄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인도에서는 간디도 네루도 영국과 싸웠지만 독립 전에 국민회의파라는 정당이 있었고 자치주 선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일본인이 철수하자 대학 총장을 할 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울대학의 첫 총장이 미군 대위입니다.

    와카미야 그래요. 그건 우리가 놓치기 쉬운 관점이네요. 조선은행의 총재도….

    미군 소령이었어요. ‘점령군’ 아래서 일본 총리대신이나 일본은행 총재나 모두 천황이 임명한 일본인이었던 데 비해 ‘해방군’이 들어선 한국에서는 미군이 직접 통치했습니다. 이는 한국인 중에 자기책임과 경험, 노하우로 제도를 운영할 줄 아는 이가 없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36년간 일본 식민지 지배의 결과지요. 그래서 한국에서 해방은 흔히 ‘광복’이라고 불리지만, 옛날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입니다. 정말로 한국에서는 ‘실존으로서의 일제시대’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내가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중국 기자가 내게 ‘조선인은 일본이 중국을 공격했을 때 가해자의 일원이었는데도 전쟁이 끝나자 이내 피해자가 되어 중국인 이상으로 피해자라고 외친다. 이건 어찌된 일인가’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당시 조선인의 위치가 아니었던가,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조선인들은 미국 영국측에서 보자면 적입니다. 조선인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었으니까요.

    와카미야 조선은 1945년 8월15일 일본에서 해방됐지만 전승국은 될 수 없었습니다. 중국은 전승국이 됐지만. 일본인에게는 미국과 싸워서 졌다는 의식은 있지만 중국에 졌다는 의식은 없습니다. ‘일본이 미국에 지는 바람에 중국도 전승국이 됐다’고 인식합니다. 하물며 한국의 경우에는 일본군으로서 함께 싸웠으니, 일본이 한국에 졌다는 의식은 더더욱 없지요. 일본인들은 ‘미국에 지는 바람에 한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식을 갖고 전후를 맞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은 당시 일본인에게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反日 감정이 고조된 이유

    일본의 군국주의가 실력 이상으로 확장했고 그것이 국가를 망하게 한 겁니다. 일본제국이 망한 덕택에 한국은 해방이 된 것이지요. 일제시대를 주로 미국에서 보낸 이승만이나 만주(중국 동북부), 소련에서 보낸 김일성은 일본에 주관적으로는 한번도 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일제시대가 없는 셈이지요.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미 국무성은 1943년 카이로선언(전후의 조선독립 등을 밝힌 미영중의 공동선언) 이후 한국을 어떻게 할지 연구했습니다. 주로 조선이 경제적으로 먹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 여부를 과제로 삼은 연구였지요.

    그렇게 해서 나온 방안의 하나가 즉시 독립이었지요. 그러나 조선은 근대적 제도를 운영한 경험이 없으니 진정한 독립국은 될 수 없다는 것으로 결론 났죠. 두 번째 방안은 패전국 일본의 일부로 남기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면 ‘본국’인 일본도 먹고 살기 어려운 마당에 ‘식민지’ 조선은 경제적으로 한층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세 번째 방안은 신탁통치였지요. 이 방안은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으로 귀착됐지요. 그뒤 유엔의 감시하에 총선거가 이루어져 대한민국이 성립합니다.

    와카미야 한국과 대조적인 것은 대만으로 옮겨간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정권이었습니다. 전승국이면서도 장제스는 전후 일찌감치 ‘일본에는 전혀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런 자세가 일본 보수정치가들의 심금을 울렸지요. 전시에 장제스는 일본군의 침략과 맞서 싸우면서 온갖 비인도적 행위를 규탄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장제스가 ‘이덕보원(以德報怨·덕으로써 원수를 갚음)’으로써 일본에 매우 관대한 자세를 취하자 일본의 보수정계는 ‘장제스는 위대하다’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장제스에게는 중국공산당과 대결해나가기 위한 깊은 뜻(深謀遠慮)이 있었습니다만.

    조선인 특공대원의 눈물겨운 이야기

    그에 비해 한국은 전후 반일로 일관했습니다. 더욱이 한일회담 직전에 한국전쟁을 맞아 같은 민족끼리 피로 피를 씻는 싸움을 합니다. ‘애당초 일본의 지배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과 결부되어 반일 감정이 한층 고조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시기에 한일교섭이 시작됐지요.

    그렇습니다.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2001년 4월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왜곡 교과서의 검정통과를 규탄하고 있다.

    와카미야 김일성과 이승만은 예외로 치고, 식민지 통치하 조선 사람들은 그야말로 일본과 하나가 되어 중국 미국과도 싸운 셈입니다. 그런 점이 그 뒤 한국 사람들의 굴절된 멘털리티로 연결된 것 아닙니까. 즉 일본에는 힘으로 식민지화를 당했다는 의식이 있는 한편 일본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기쁨과 함께 굴욕감도 갖게 됐다, 그것이 그 뒤의 격한 반일감정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는 없을까요.

    굴절이라는 표현이 가능하겠지요. 한국인 중에는 일본인 이상의 친일파가 있어서 ‘천황폐하 만세’를 일본인이 두 번 외치면 자신은 세 번, 네 번 외치는 자도 있었습니다. 가미가제 특공대원 중에도 한국인이 있었어요. 이들은 전쟁 때 스스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인으로서 월급을 받고, 일본인으로서 모든 일에 임했던 겁니다. 이런 것이 한국의 특수한 역사를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정리하기 어려운 부분이지요.

    이오(飯尾憲士)씨의 논픽션 ‘가이몬다케(開聞岳)’에 조선인 특공대원 얘기가 적혀 있습니다. 이오씨 자신도 어머니가 일본인, 아버지가 조선인입니다. 그래서 조선인 특공대원은 어떤 생각으로 죽었을까 하는 점을 열심히 취재해 쓴 책이지요. 정말 가슴을 치는 이야기입니다. 가이몬다케는 가고시마현 사쓰마(薩摩)반도 남단에 있는 산입니다. 지란(知覽)기지에서 발진하는 특공기는 이 산을 보면서 남쪽 바다로 출격해 갔지요.

    ‘가이몬다케’이 그리는 조선인 특공대원은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황국신민이 된 남자입니다. 형이 ‘도망쳐라. 일본을 위해 죽을 필요가 없다’고 설득합니다. ‘특공으로 죽는 건 그만두라’고. 그때 특공대원의 대답이 눈물겹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조선을 대표한다. 도망치면 조국이 조롱당한다. 많은 동포가 더욱 굴욕을 견뎌야 할 것이다.’ 즉 그는 ‘역시 조센징이란…’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다며 조선인의 자부심을 내걸고 ‘일본군인’으로서 특공에 임한 것입니다.

    와카미야 대단한 이야기군요.

    창씨개명도 그렇습니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인으로 최고계급이었던 육군중장 홍사익(洪思翊)은 단 한마디 자기변호도 없이 전범으로 처형당했습니다만, 최후까지 조선 이름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이 수없이 겹치는 것이 한일관계입니다.

    와카미야 그런데도 이런 얘기를 편한대로 해석해서 일부 일본인들은 ‘야, 조선 사람들은 특공대에도 자진해서 참가해 완벽한 일본 군인이 되려 했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요.

    일본은 複數다

    와카미야 아까 구보다 발언이 왜 문제인지 일본측은 깊이 따져보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만, 그 후로도 종종 그런 류의 발언이 나와 일본측도 학습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학습을 거듭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제다’라고 인식하게 됐지요. 이웃 나라를 무력을 배경으로 지배하고, 모든 것을 일본식으로 물들이는, 그런 일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국이 분노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는 의식은 적어도 전후 교육을 받은 세대에게는 꽤 퍼져 있습니다. 그런 것이 일본 총리의 일련의 사죄로도 이어졌지요.

    대표적인 경우로 1993년 호소카와 총리가 경주에 갔을 때 창씨개명을 언급해 ‘여러 형태로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경험하신 것에 대해 가해자로서 마음으로부터 반성하고 깊이 사과하고 싶다’고 사죄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 1995년에는 무라야마 총리가 호소카와 총리의 사죄에서 범위를 한층 넓혀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다대한 고통을 주었다.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고 전후 50년 담화에서 사죄했습니다. 이밖에 최근 총리들은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 행동을 지지하는 분위기는 일본 안에도 상당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없어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공식 방문했을 때 천황과 회담했습니다. 그때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 사이에 불행한 과거가 존재했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천황의 발언으로는 상당히 적극적인 사죄 의사를 표명했지요. 그것으로 과거가 청산됐어야 할 터인데 한국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전직 대통령이 부정되고 결산을 다시 합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됐던 것이지요.

    그랬지요.

    와카미야 전후 50주년이 되는 1995년, 일본 국회에서 전전 식민지 지배나 침략에 대해 사죄 결의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와 큰 문제가 됐습니다. 이어 오쿠노(奧野) 발언, 와타나베(渡邊) 발언, 에토(江藤) 발언이 그해에 집중됐지요. 이들 문제 발언은 ‘사죄라니 무슨 얘기냐’는 것으로 사죄하자는 제안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죄결의보다 문제발언 쪽이 더 주목을 끌어 한국에서 크게 보도되었고, 그것이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하는 아이러니한 악순환이 한때 있었지요.

    그래서 나는 자주 한국기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옛날엔 망언이 많았지만 사실은 신문기자나 국민이나 감각이 비슷했기 때문에 뉴스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발언이 문제가 되니까 기사가 되는 것이고, 그만큼 진보한 것이다. 그러니 일일이 법석 떨지 않는 게 좋다’고. (웃음)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오부치 총리가 공동성명에 사죄를 담아 ‘이것으로 과거 청산은 끝내자’고 했지만, 이러한 사죄의 되풀이는 보수층에 상당히 굴욕적으로 비쳤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젊은 세대 중에도 ‘왜, 언제까지 그런 얘기를 들어야 하냐’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망언과 사죄의 악순환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일본은 복수(複數)다’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하나인 것처럼 말합니다. ‘일본은 이렇다’ 또는 ‘일본은 저렇다’라고. 그러나 저렇기도 하고 이렇기도 한 것이 일본입니다. 예컨대 1925년 구미 이외의 지역에서는 최초의 보통선거법이 공포된 그해에 치안유지법이 생겨, 사상통제와 군국주의화가 진행됩니다.

    1960년대에는 한국에서도 한일조약 비준반대 데모가 대학을 중심으로 대단한 규모로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고려대에 불려가서 학생들을 상대로 말했습니다. ‘일본에는 제국주의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다’고. 그때 생각난 것이 ‘일본은 복수다’라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창씨개명이 어떻다고 얘기할 때 그것을 비판하는 언론도 일본에는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일본의 강점입니다.

    ‘우리 아시아’와 ‘그들 아시아’

    와카미야 북일관계 얘기입니다만, 과거에 대한 일본의 의식이 성숙한 가운데 국교정상화를 맞는다면 좋았을텐데 북한이 미사일을 쏜다느니 핵을 개발한다느니 해서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했고 급기야 납치문제로 불이 붙었습니다. 북일교섭의 주안점은 본래 식민지지배의 청산과 국교회복에 있었는데, 과거 청산 부분이 많은 일본인들의 의식에서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납치문제 해결이 교섭의 주안점이 돼버렸지요. 물론 납치문제는 해결해야 하지만 이 문제에선 일본이 마치 ‘단수’가 된 것 아닌가 해서 개운치 않습니다.

    납치된 일본인 동포 문제를 생각할 때는 일본이 과거에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합니다. 일본이 유엔총회에서 납치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지만 ‘무슨 소리 하는 거냐, 과거 당신들이 저지른 강제연행 문제는 그대로 제쳐두고’ 하는 말에 당당히 반론할 수 없습니다.

    국제사회가 ‘북한은 고약하다’고만 생각하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점에서 일본도 확실하게 결말짓지 못하고 있으니 유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가 납치문제 집회에서 일부러 한일병합 정당화론을 주장한 것은 국제적으로는 역효과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평화주의란 무엇인가’ ‘일본의 인권주의란 무엇인가’ 하고 반문하게 되는 것이지요. 1인칭, 2인칭으로 표현하면 한국인에게 북한은 일단 1인칭, ‘우리’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일본인은 ‘그들’이지요. 이것이야말로 북한 문제에서 마음의 좌표축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시아’를 말할 때, 일본은 지리적으로 아시아지만 일본인에게 아시아는 1인칭이 아닙니다. 일본인에게 아시아는 3인칭, 즉 ‘우리 아시아’가 아니라 ‘그들 아시아’입니다. 1인칭이 좋다 나쁘다 하는 얘기가 아니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일본이 과연 아시아냐는 생각이 듭니다. 한일 양국은 앞으로 ‘우리는 아시아인이다’라고 ‘Be’를 목청껏 외치기보다도 아시아인에게 걸맞은 ‘Do’를 공동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글쎄요, 언제나 의좋은 형제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크게 부딪치지 않고 서로 뭔가 얻는 관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자주 비유해 말합니다. ‘비디오로 봐달라. 스냅 사진으로 보지 말라.’ 한일관계를 비디오 영상으로 보면, 그런대로 가야 할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스냅 사진으로는 변화를 알 수 없지요.

    와카미야 그런 의미에서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한일 양국이 공동 주최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95년 6월 아사히신문 사설이 작심하고 ‘공동개최론’을 제기했을 때 제가 권오기 선생과 상의한 기억이 납니다. 북일관계가 이처럼 나쁠 때 한일 상호 국민감정이 전에 없을 만큼 양호한 것은 큰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한일관계도 나쁘다면 본격적인 민족간 증오로 발전했을테니까요.

    월드컵대회를 앞둔 2001년에 또다시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웠죠. 하지만 이는 1982년에 들끓었던 교과서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지요. 1982년엔 국가의 검정을 받은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침략’을 ‘진출’로, ‘3·1독립운동’을 ‘폭동’으로 기술한 사실이 드러나 한국이나 중국에서 ‘역사왜곡’이라며 큰 파문이 일었지요. 저는 마침 서울에 유학중이어서 격렬한 시위를 목격했습니다. 식당들이 ‘일본인 거부’라는 안내문을 내걸 정도였습니다. TV나 신문도 연일 크게 보도했지요. 술집에서 낯 모르는 사람이 저한테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문제가 된 것은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이었지요. 그때까지 반공 노선을 걸으며 ‘친한파’였던 자민당 우파가 검정 옹호파가 되는 모순을 드러낸 것도 이때 일입니다. 대응이 어려웠던 스즈키 내각이 시정을 약속하고 수습했지만 일본 정부로서는 공부를 많이 한 사건이었지요. 2001년에 문제가 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는 그런 일련의 움직임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내셔널리스틱한 존재였습니다. 이번엔 국가 검정에서 그것을 완화시켰고, 실제로 이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극소수였습니다. 이것도 일본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예일까요.

    제 딸한테서 이름을 들었는데, 베트남의 여성 영화감독이면서 포스트 콜로니얼 이론가인 트린 민하씨의 ‘no history without histories’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을까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역사는 일본의 역사 없이 쓸 수 없습니다. 일본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를 모르고는 쓸 수 없습니다. 일본 역사나 한국 역사나 동아시아 역사 없이는 쓸 수 없고요. 또 동아시아 역사도 세계 역사 없이는 쓸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와카미야 베트남 사람의 말이니까, 베트남 역사를 생각할 때는 구종주국인 프랑스 역사도 생각해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죠.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나라의 역사는 그 나라 역사만으로는 쓸 수 없다는 것이지요. ‘누구도 내 나라 역사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은 역사를 적는 자세가 아닙니다.

    와카미야 이쪽 역사도 상대의 역사관을 딛고 쓰지 않으면 틀린다는 얘기군요.

    서로 그런 점들을 감안하면 미래의 역사가 살아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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