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300야드 장타처럼 시원한 노래

  • 글: 김동규·성악가

    입력2003-12-29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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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야드 장타처럼 시원한 노래
    나는 골프를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친 듯이 좋아한다. 일정이 잡혀야 비로소 ‘업무’가 시작되는 직업을 가진 덕분에 골프 역시 한꺼번에 몰아 치는 필자는, 아침 5시부터 밤 9시까지 하루 16시간씩 두 주일 내내 골프만 친 적도 있었다. 어둑어둑해져서 라운딩을 할 수 없게 됐을 때 스코어카드에 남은 기록은 66홀. 하루에 66홀을 쳤다고 하면 누가 믿어주기나 할까. 3년 전 미국 애틀랜타에서의 경험이었다.

    필자가 골프를 본격적으로 치게 된 것은 지난 1999년부터.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많아 하루종일 해도 못 다할 고민을 끌어안고 지낼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오랜 친구가 권했다. 골프를 쳐보라고. 솔직히 믿지 않았다. ‘뭐? 지금 이 판에 골프 배우게 생겼어?’ 그래도 강권에 못 이겨 속는 셈치고 그립을 잡았다. 웬걸, 간단하게 생각했던 골프가 영 쉽지 않았다. 자꾸만 빗나가는 공에 약이 올라 첫날부터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공을 쳤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돌이켜보니 그날 하루는 그 동안 지고 다니던 고민을 잊고 지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런대로 하루를 잘 보낸 셈이었다. 술을 마셔도 그때뿐이요, 여행을 다녀도 치유되지 않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듯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다음날부터 골프공을 바구니째 갖다 놓고 날마다 1000여개씩 때렸다. 그렇게 약도 없다는 화병을 다스려나갈 수 있었다. 이후로 골프 마니아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아쉬운 것은 필자의 직업이다. 한번 연주 일정이 잡히면 수 주일 동안 편곡과 작곡, 연습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어야 하니 다른 이들처럼 꾸준히 골프를 즐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몇 달간 골프채를 잡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 그러다 보니 실력이 들쭉날쭉 멋대로다. 꾸준히 연습하지 않으면 노래실력에 금세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골프 또한 마찬가지다.

    골프든 노래든 근육을 움직이는 작업이다. 머리로만 하는 일이라면 몇 달쯤 게을리했다고 큰 차이가 있을까마는, 요령을 ‘아는’ 것과 근육이 그에 잘 따라주는 것은 별개다. 노래의 경우는 횡경막을 움직이는 근육이 중요하다. 노래의 호흡과 강약, 템포를 정확하고도 맛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요령을 머리뿐 아니라 횡경막이 기억해야 한다. 골프에서 중요한 것은 등과 어깨 근육이다. 스윙의 미세한 방향과 타이밍을 근육이 기억해야만 정확하고도 시원한 샷이 나온다.



    그뿐이랴. 생각하면 할수록 노래와 골프는 잘 어우러지는 한 쌍이다. 수많은 테크닉과 규칙, 리듬, 속도에다 한없는 핑곗거리까지 비슷한 점이 너무도 많다. 우선 리듬부터 살펴보자. 박자를 전혀 못 지키는 사람을 ‘박치’라고 하듯 스윙을 일정한 템포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몸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나 골프나 힘의 배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한마디로 노래가 생각하는 예술이라면 골프는 생각하는 운동이다.

    흔히 골프는 힘을 빼야 한다고 한다. 노래는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소리가 만들어지는 성대, 발음이 만들어지는 혀, 입술, 턱 등 모든 것의 힘이 빠진 상태라야만 좋은 노래가 나온다. 속이 꽉 찬 유리토막은 소리를 낼 수 없지만 속이 빈 와인잔을 두드리면 우아한 공명음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힘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골프도 모든 힘이 임팩트 때 모아져야 비거리를 낼 수 있듯 노래도 복근의 임팩트가 있어야 비거리를 낼 수가 있다.

    함께 골프를 즐기는 분 중에 건설업을 하는 분이 있다. 이분의 스윙이 참 재미있다. 남들의 딱 절반만큼만 스윙을 하는 것이다. 그립을 아무리 뒤로 빼도 허리쯤에나 올까. 그런데도 비거리는 혀를 내두를 만큼 잘 나온다. 모양이 흉한 것도 아니다. 순간의 탄력이 감탄할 만 했다. 가만히 보니 임팩트가 비밀이었다. 온몸의 체중을 그 순간에 집중하는 식으로 자기만의 스윙폼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만약 노래였다면 그 폭발력 넘치는 소리에 모두 경탄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 다른 한 분은 자잘하게 스코어에 신경 쓰기보다는 호쾌한 맛을 즐긴다. 잠시 오비가 난다 해도, 간혹 실수가 있다 해도 크게 마음 쓰지 않는 대신 하늘로 쭉쭉 뻗어나가는 포물선을 보며 세상만사 시름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노래로 따지자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시원한 소리다.

    문득 생각해보면 이제 내 인생은 18홀 라운딩 중 11홀쯤 와 있지 않을까 싶다. 열심히 전반을 보내고 이제 후반의 문턱을 막 넘어서려는 찰나다. 버디도 있었고 보기도 있었지만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다. 보기 또한 다음 홀의 버디를 위한 충전의 기회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바람이라면 완벽한 스코어로 경기를 끝내기보다는 300야드를 날아가는 드라이브처럼 시원한 노래를 불렀으면 하는 것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가슴이 후련해지는 그런 노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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