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한라산 名人 대각심(大覺心) 스님

“내 삶의 화두는 ‘이 뭐꼬’”

  • 글: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입력2003-12-29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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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方外之士는 일상의 삶에서 벗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어느 조직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사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 우리나라에는 방외지사들이 적지 않다. 민속학에 정통한 조용헌 교수가 그들의 독특한 삶을 들여다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 그 첫 번째는 올해 82세의 대각심 스님으로, 그는 35세가 되던 해 깨달음을 얻어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한라산에 은거해 득도의 길을 걸었다. 타인의 전생을 꿰뚫어보는 신통력을 가졌다는 대각심 스님의 기괴한 수행과 예사롭지 않은 삶을 알아보았다(편집자).
    한라산 名人 대각심(大覺心) 스님

    수행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대각심 스님.

    명산(名山)에는 명인(名人)이 있다. 10여년 동안 전국의 이산 저산에 숨어 있는 기인(奇人), 달사(達士)들을 쫓아다니면서 내린 결론이다. 유명한 산에는 그 산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명산에는 산 정기가 어려 있고 그 정기를 섭취한(?) 명인이 한두 사람쯤은 있다. 산마다 산주(山主)가 있는 것. 우리나라 삼신산 중 하나에 속하는 명산이자, 수천 년 전부터 중국, 일본에까지 알려진 기산(奇山)인 한라산의 명인은 누구일까. 올해 82세의 대각심(大覺心) 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필자는 제주도 토박이 이영흠씨를 통해 대각심 스님을 알게 되었다. 이씨는 ‘걸어다니는 탐라학(耽羅學) 사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주도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안내로 한라산 이곳저곳을 답사하던 중 “한라산에 기인이 어디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씨는 “절물에 가면 대각심이라는 여자 스님이 한 분 계시는데 아주 특이하다. 앉아서 천리를 보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고 대답했다. 앉아서 천리를 본다면 숙명통(宿命通·전생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요즘 숙명통 한 도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절물’은 한라산 동쪽, 해발 600m 지점에 있다. 제주시에서 택시를 타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현재는 ‘절물 자연휴양림’으로 조성되었다. 쭉쭉 뻗은 삼나무 숲속 사이로 잘 다듬어진 휴양림 길을 걸어 400m쯤 올라가면 ‘약수암(藥水庵)’이라고 새겨진 자그마한 집이 나온다. 돌로 만든 금강역사 두 명이 청룡도를 들고 서 있는 대문을 들어섰다. 암자라고 하지만 격식을 갖춘 기와지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허름한 살림집처럼 생겼다. 마당으로 들어가니 올해 82세의 할머니가 나와 방으로 안내해준다. 160cm가 채 안 되는 작은 키에, 얼굴에 주름이 많아 눈이 매우 작아 보였다. 전형적인 제주 할망의 모습이다.



    성욕은 근원적 집착이자 장애물

    기인을 만날 때는 서론을 생략하고 단도직입, 핵심을 치고 들어가야 한다. 어물어물 인사말로 대화를 시작하면 KO패나 판정패로 끝난다. 선문답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기(氣)로 하는 것이다. 기는 없고 머리만 있는 사람은 처참하게 박살난다. 문제는 기선제압이다. 그러려면 어떤 이야기로 물꼬를 틀 것인가도 중요하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첫 질문을 던졌다.

    “스님이라고 들었는데, 머리를 기르고 계시네요. 스님이 어떻게 머리를 기를 수 있습니까?”

    “머리털에 ‘도’ 있어!”

    이 말은 필자의 관자놀이를 한 대 후려치는 주먹이나 다름없었다. 관자놀이를 맞고 보니 말문이 막혔다. 말이야 바른 말이다. 도는 머리털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리 깎았다고 도가 있고, 머리 길렀다고 도가 없겠는가! 위기를 모면하려 처음보다 겸손한 질문을 던졌다.

    “저도 도를 닦아보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기도를 해도 잘 안 됩니다. 왜 그런 겁니까?”

    “구멍 때문이지!”

    “구멍이 뭡니까?”

    “여자지, 여자에 대한 생각을 끊어야 해!”

    “그렇다면 마누라도 끊어야 하는 건가요?”

    “마누라야 깊은 인연인데 끊을 수 있나, 음심(淫心)을 끊어야지. 앞으로 여자를 조심해야 할거야!”

    이런 자리에 아내와 같이 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사실 나는 예쁜 여자만 보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쁜 여자가 저더러 오라고 손짓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무자(無字)를 들어야지. ‘없다’ 하고 마음을 챙겨야지.”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 공부가 되어간다 싶으면 남자나 여자나 이성의 유혹이 있게 마련인데, 이때 특히 무자 화두를 들면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인간이 가장 끊기 힘든 욕망이 성욕이라고 했다.

    진화론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미생물인 아메바 상태로부터 고등동물로 진화했고, 그 과정에서 암수의 결합에 의해 종족을 번식했으며, 번식을 통해 다시 진화가 이뤄졌다고 한다. 따라서 성욕은 인간이 아메바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근원적인 욕망이라는 것. 즉 성욕이 없었으면 진화도, 존재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욕은 당연한 생식본능이지만,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근원적인 집착이자 장애물로 여겨진다.

    고도의 수행을 마친 고승에게선 6가지 신통력이 나온다고 한다. 첫째는 숙명통(宿命通), 둘째는 천안통(天眼通·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 셋째는 타심통(他心通·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넷째는 신족통(神足通·축지법), 다섯째는 천이통(天耳通·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 여섯째가 누진통(漏盡通·번뇌가 사라진 경지)이다.

    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능력이 누진통이다. 여기서 말하는 번뇌는 성욕을 가리킨다. 성욕으로 인해 생기는 번뇌를 끊기는 무척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누진통에 도달한 사람은 성욕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다.

    누진통을 얻은 사람의 구체적인 징표는 무엇인가. 남자는 정액이 새지 않고 여자는 생리가 중단된다. 도교의 내단학(內丹學)에서는 이를 항백호(降白虎), 참적룡(斬赤龍)이라는 구체적인 용어로 설명한다. 백호를 항복 받고 붉은 용을 절단한다는 뜻이다. 백호는 남자의 정액을 지칭하고 붉은 용은 여자의 생리를 상징하는 표현. 항복과 절단의 의미는 이것을 중지시킨다는 것이다. 누진통의 경지를 체험한 고수들로부터 정액은 물론 땀도 별로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진을 시키는 과정은 인체의 연금술 원리에 따라야 한다. 심장의 불기운을 신장의 물기운 속에 접어 넣는 것. 이렇게 되면 아랫배에 단(丹)이 형성된다. 그러면 남자의 경우 성기가 어린아이의 고추처럼 줄어든다. 이런 상태를 마음장상(馬陰藏相)이라 부른다. 말의 성기가 번데기처럼 줄어들어 있는 형태와 유사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붓다의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는 32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음장상’이다. 남자의 경우 누진통을 얻었는가 여부를 같이 목욕탕에 가보면 확인할 수 있다.

    종합해보면 누진통의 형이상학적 정의는 성욕으로 인한 번뇌가 사라진 경지를 가리키고, 형이하학적인 정의는 정액(생리혈)이 새지 않는 경지로 압축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성욕이 사라졌는가, 아닌가의 현실적인 증거는 정액 또는 생리가 계속되는가 안 되는가로 환원할 수 있다.

    “대각심 스님은 언제 생리가 끊겼습니까?”

    “아마 서른여섯 살 때일 거야. 생리가 묻은 속옷을 갖다 놓고 돌로 자근자근 쪼았어. 중단되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중단되면서 음심이 사라지더구만. 마치 아이 낳는 것처럼 배에 통증이 오면서 음심이 빠져나갔지.”

    대각심이 한라산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57년부터다. 1922년생이니 35세의 나이였다. 그는 세속에서 결혼을 했었고 아들도 하나 두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불도를 닦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밭에서 김을 매다가 홀연히 손에 들고 있던 낫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그 머리카락을 세 차례 허공에 던지면서 “이 머리카락 수만큼 많은 도를 기필코 이루리라”고 소리쳤다. 그 후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무작정 한라산에 들어왔다.

    당시 한라산의 절물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곳이었고 길도 없었다. 잡목만 무성한 야생의 밀림지대였다. 여자의 몸으로 혼자 나무를 꺾고 돌로 담을 쌓아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미국 매사추세츠의 월든 호숫가에서 혼자 살았던 소로우처럼, 대각심도 한라산의 숲 속에서 외부세계와 단절된 야생의 상태로 혼자 살았다.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는 원시적인 생활이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에 남자 한 명이 들이닥쳤다. 여자 혼자 산다는 말을 듣고 겁탈하려고 온 것이다. 대각심은 예지력으로 남자가 겁탈하려 오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낫을 숫돌에 갈아서 예리하게 다듬어놓았던 것이다.

    “그 남자가 나를 덮치려고 다가오더구만. 그래서 내가 ‘강아리(여자의 생식기를 지칭하는 제주도 방언)가 두 개라면 이 낫으로 그걸 하나 오려내서 너를 주겠지만, 하나뿐이라서 줄 수 없다. 만약 네가 나를 덮치려고 가까이 오면 이 낫으로 내 목을 칠 것이다’ 하고 큰소리로 외쳤지. 그리고 낫을 내 목에 턱하니 걸쳐놓았어. 가까이 오면 내 목을 잘라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지. 그까짓 죽는 일에 미련이 없었어. 그러니까 남자가 돌아가더라고. 속으로 미친년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이 말을 하고 대각심은 큰 소리로 웃어제쳤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80대의 고령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고승들이 설법할 때 그 소리가 크고 우렁차기 때문에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다고 해 ‘사자후를 토한다’고 표현하는데, 대각심의 음성이 그랬다. 마치 암사자가 포효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임신 후 부부관계는 금물

    한번은 육지에서 큰스님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스님이 약수암을 방문했다. 따르는 사람도 많고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한 그야말로 큰스님이었다. 대각심은 그와의 첫 대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당신이 큰스님이라고? 뭐가 커서 큰스님이야? 좆이 커서 큰스님인가? 불알이 커서 큰스님이야? 어디 한번 내놔보아라.”

    한라산 名人 대각심(大覺心) 스님

    대각심이 머물고 있는 약수암. 암자라고는 하지만 허름한 살림집처럼 보인다.

    대각심이 보기에 그 큰스님은 외부에 이름만 알려졌다뿐이지 내공은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첫눈에 가짜라는 것을 간파한 대각심은 ‘좆이 커서 큰스님이냐’고 한방에 갈겼다. 이 말을 들은 그 스님은 아무 말 못하고 약수암을 나가버렸다. 이처럼 대각심은 상대방 면전에 대놓고 강속구를 던진다.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이 본인의 특기라고 말한다. 봐주는 것이 없다.

    필자가 약수암을 방문한 날에도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신도가 찾아왔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벌이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고 속을 썩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상의를 하러 온 것. 대각심은 바로 강속구를 던졌다. “아기 배고 나서 씹했지?” 필자가 동석하고 있는 데도 거침없이 원색적인 말을 내뱉었다. 얼굴빛이 확 변한 아주머니는 “안했어요” 하고 강하게 부정했다. 그러자 “내가 저울에 달아서 보고 있는데 무슨 거짓말을 해” 하고 면박을 줬다. 중년 남자인 내가 옆에 있건없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30대 중반의 젊은 부부가 신년초에 약수암을 방문했다. 새해 덕담을 기대하고 대각심을 찾아왔던 것. 부부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대각심은 젊은 부인을 쳐다보면서 청룡도를 휘둘렀다. “네년 뱃속에는 연하의 젊은 남자가 들어앉아 있구나.” 부인은 남편 몰래 연하의 남자를 사귀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부부는 이혼하고 말았다.

    “스님은 요즘 사람들에게 음심(淫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많은 것 같아. 우선 음식을 기름지게 먹으니까 그렇지 않나 싶어. 잘먹으니까 자꾸 그쪽으로만 생각이 가는 것이지. 조심해야 할 게 있어. 임신 후 부부관계를 가지면 안 돼요. 자주 부부관계를 가지면 멍청한 아이가 나와. 박복하고 총기 없는 아이가 나오지. 아이를 보면 그 부모가 어떻게 했나를 알 수 있어. 내가 조 선생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요. 어디 가서 대중에게 강연을 할 때 이 사실을 좀 강조해줘요. 임신한 뒤 부부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고 말이에요.

    또 요즘 낙태를 예닐곱 번씩 한 여자들도 있잖아. 척 보면 알지. 그런 여자에게선 악취가 풍깁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죠. 그게 다 낙태한 아이들이 몸 안에서 서서히 썩어가면서 생기는 냄새입니다. 썩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보통 사람은 맡을 수 없지만 나는 맡을 수 있죠. 그런 냄새를 맡으면 성불을 못합니다. 나는 그런 여자들이 들어오면 ‘썩 나가라’고 소리칩니다. 또 그런 여자들이 시주한 돈은 절대 받지 않아요. 그런 돈 받으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스님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여자들에게 ‘보살님, 보살님’ 하면서 아양을 떨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스님이 아닙니다. 무당이죠. 적어도 스님이라면 그런 여자들의 속내를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스님이라는 호칭을 싫어합니다. 조 선생도 나를 스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우바이 대각심’이라고 불러주세요.”

    우바이(優婆夷)는 불교를 믿는 여자 신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바이도 도통할 수 있으니 자기를 우바이로 불러 달라는 요청이다.

    대각심은 선승의 삼엄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살불살조(殺佛殺祖)에서 드러난다. 부처가 나타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나타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것. 어떤 도그마나 우상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각심을 수십 년간 지켜봤던 주변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불상도 2구나 땅에 묻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불상 앞에서 ‘사업 잘되게 해달라’ ‘돈 벌게 해달라’ ‘승진하게 해달라’ ‘병 낫게 해달라’고 비는 모습을 보고 불상을 땅에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나무토막으로 만든 불상이 돈 주고 밥 주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다. 그건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그 방편을 진짜로 착각하면 불교의 진리와는 영영 멀어지게 된다. 불상 앞에서 복이나 빌 목적이라면 백년 동안 절에 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주장이다. 요는 자기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데 있다.

    “부처가 축원하다가 부처 되었냐? ‘이 뭐꼬’ 하다가 부처 되었지. 절은 마음을 닦는 곳입니다. 복이나 받게 해달라고 비는 장소가 아닙니다.”

    “대각심의 수행 방법은 ‘이 뭐꼬’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앉으나 서나 항상 ‘이 뭐꼬’라는 화두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팔만사천 가지 번뇌가 전부 사라집니다. 마음이 시원하고 청정해집니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조 선생도 ‘이 뭐꼬’를 한번 해보십시오.”

    “저는 화두를 잡아보려고 해도 잡념이 많아서인지 집중이 잘 안 됩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이 뭐꼬’가 잡히는 데 10년 걸렸습니다. 우리 업장이라는 것이 마치 길바닥에 붙은 시커먼 껌과 같습니다. 손톱으로 긁어내지만 처음엔 잘 긁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또 너무 급하게 화두를 몰아붙이면 머리로 기가 올라와 상기가 됩니다. 상기가 되면 단전호흡을 해서 아래로 내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해도 안 됩니다. 기타줄 조이는 이치와 같이 적당하게 잡아당겨야 합니다.”

    “저는 요즘 매사가 심드렁해져서 인생살이가 자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놓은 일도 없이 나이만 먹는 것 같고 이빨은 흔들리고 눈은 침침해지기 시작합니다. 봄날은 어느 사이에 가버렸고 결국 이러다가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 이렇게 허무한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허무하다는 생각 역시 망상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망상이고, 어떤 생각이 망상이 아닙니까?”

    “이 뭐꼬 외에는 전부 망상입니다.”

    대각심과의 대화에서 필자의 정수리에 쇠못처럼 박힌 대목은 바로 이 말이었다. 앞으로 허무감과 상실감이 들 때마다 ‘이 뭐꼬’로 물리쳐야겠다고 다짐했다. 법회 가운데 ‘담선법회(談禪法會)’라는 게 있다. 법에 관해서 여러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 그 자체가 법회라는 것이다. 선승인 대각심과의 대화는 그 자체로 법회의 효과를 내고 있었다. 나는 지금 담선법회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졸음 오면 왕소금 눈에 넣어

    “이 뭐꼬 화두는 누구에게서 받았습니까?”

    선가(禪家)의 관례에 따르면 통상 화두는 스승으로부터 받게 마련이다.

    “머리카락을 낫으로 끊어서 하늘에다 세 번 던졌습니다. 도통시켜달라고 하늘에 외치면서 다짐을 했죠. 그러니까 산이 세 번 울렸어요. 얼마 있다가 하늘로 올라가게 됐습니다.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이 뭐꼬’를 하라고 하더군요. 나는 ‘이 뭐꼬’를 하늘로부터 받았습니다.”

    여기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임사(臨死) 체험을 말한다. 대각심은 1958년 11월 어느 날 움막에서 화재가 발생해 불에 타는 체험을 한다. 억새풀로 만든 움막에서 기도를 하다가 어느 순간 유체이탈이 됐고 그 상황에서 촛불이 녹아들어가면서 억새에 불이 옮겨 붙었다. 이때 온몸의 털이 전부 탔다고 한다. 가사 상태로 3일간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소생했다. 3일 동안 저승세계에 갔다 오는 임사 체험을 한 것. 그는 이때의 상태를 ‘육체는 떨어지고 영은 올라갔다’고 표현했다.

    현상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확신은 임사 체험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한번은 죽어야 에고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일번대사(一番大死)가 바로 그것이다. 대각심도 마찬가지였다. ‘이 뭐꼬’ 화두는 하늘로부터 받았으므로 그의 스승은 하늘이다.

    또 하나의 스승은 칼과 소금이었다. 15cm 크기의 과도를 날이 서게 갈아놓고 항상 머리맡에 놓고 잤다. 공부할 때 졸음이 오면 칼로 눈을 찌른다고 생각했다. ‘칼이 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그 칼을 한번 보여달라고 하니까 베게 밑에서 꺼내 필자에게 보여준다. 그래도 졸음이 오면 왕소금을 눈에 넣었다. 꺼끌꺼끌한 왕소금을 눈에 집어넣으면 졸음이 달아났다고 한다. 수마(睡魔)만 잡아도 수행의 반은 성공이라는 설명이다. 말이 그렇지 자기 눈에다 소금을 집어넣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결단인가! 한때는 21일 동안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물만 먹으면서 기도를 한 적도 있었다. 철저히 혼자 수행을 했으므로 대각심은 조계종 소속도, 태고종 소속도 아니다. 오로지 ‘이 뭐꼬’ 하나 가지고 홀로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1970년대 중반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100일간 철야로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고 송담선사가 주석하던 인천 용화사를 찾아갔던 적도 있다. 용화사에서 보내준 전강선사 법문 테이프를 들으면서 단전호흡을 알았다. 화두를 과도하게 잡다가 발생한 상기증을 고치기 위해선 호흡을 아랫배로 길게 끌어내리는 단전호흡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수행 위해 한라산 독버섯 달여 마셔

    몇 년 전 대각심은 독버섯을 달여 마신 적이 있다. 사명대사가 일본 왜장으로부터 건네진 독이 든 음식을 먹고도 아무 탈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과연 그런 경지에 도달했는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도를 통했다면 독버섯을 먹고도 아무 탈이 없어야 하고, 도를 통하지 못했다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가 독버섯을 몽땅 뜯었다. 솥단지에 독버섯을 가득 넣고 끓여서 먹어보았다. 죽는가 안 죽는가. 그 결과는 12일 동안 계속되는 설사였다. 죽지는 않았지만 12일 동안이나 설사를 해 이부자리와 속옷이 지저분해졌다. 대각심의 기행은 그뿐만이 아니다.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이 떨어졌나를 알아보기 위해 길바닥에 떨어진 음식이나 관광객들이 먹다 버린 음식쓰레기를 주워서 먹기도 했다. 더러운 음식쓰레기를 먹다 보니까 식중독으로 여러 날 고생했다.

    그런가하면 어느 때는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제주시에 탁발을 나가기도 했다. 걸인으로 행세한 것.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아동복과 신발을 구입해 중산간의 산골동네에 가서 어려운 아이들에게 몰래 주었다.

    대각심은 “막노동이나 험한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시를 해야만 제대로 한 것이다”고 말한다. 편하게 번 돈으로 보시를 하면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겨울에 탁발을 나가기도 했다. 일부러 모멸감을 느끼기 위해서다. 만약 상대방으로부터 모멸을 느끼면 아직 공부가 부족하구나 생각하고, 상대가 어떤 험한 말을 해도 마음이 청정하면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간다고 생각한단다.

    그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신도들이 돈을 주면 잘 받지 않는다. 신도들이 대각심 모르게 불상 앞에 돈을 놓고 가면 그 지폐들을 검정 고무줄로 둘둘 묶어서 제주시의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갖다준다. 법당을 짓는 불사(佛事)도 한사코 반대한다. 그 돈 있으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생활이 어려운 신도들의 시주 돈을 받아서 절을 크게 지으면 다음 생에 이무기가 되는 과보를 받는다고 여긴다. 언젠가는 신도들이 십시일반으로 1800만원을 모았다고 한다. 현재 그가 거처하는 건물을 좀 크게 짓기 위한 용도였다. 이 사실을 안 대각심은 크게 화를 냈다. 곧바로 그 돈을 신도들에게 나눠주었다. 본인이 거처하는 방 한 칸도 호사스럽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상생활을 보면 낡은 옷 한 벌에 한끼 식사가 전부다. 50년 동안 하루 한끼만 먹어왔다. 82세의 고령이지만 아주 건강하다.

    건강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하나는 ‘이 뭐꼬’를 해서 생긴 심청정(心淸靜)이요, 또 하나는 산삼이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나 산삼 두 뿌리를 대각심에게 건네더라는 것. 그걸 먹고 나니 예전보다 몸이 훨씬 좋아졌다고 술회한다. 6∼7년 전까지만 해도 대각심이 머무르던 방에 키가 자그마하고 흰옷을 입은 노인이 거의 매일 찾아왔다고 한다. 이 노인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아니었지만, 정신세계의 이치에 대하여 항상 대각심과 이야기를 나누던 영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절물에 휴양림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그 가운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들락거리면서 담배 냄새가 약수암에까지 풍겨오자 이 노인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대각심 주변에는 신비한 일화들이 많다. 한라산에 눈이나 비가 오려고 하면 그는 미리 그 조짐을 몸으로 느낀다. 머리에 금테 두른 것처럼 조이는 느낌과 함께 목이 졸리면 여지없이 눈이나 비가 왔다고 한다. 한라산과 그가 일심동체인 것일까.

    짐승과도 대화

    대각심이 어떤 일이 발생한 조짐을 예단하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촛불이 타면서 떨어지는 촛농이 고이는 형상을 보고 판단한다. 오늘 오는 사람이 좋은 일로 오는가, 궂은 일로 오는가를 짐작한다. 보통사람이 볼 때는 단순한 촛농이지만 영안이 열린 사람이 볼 때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둘째는 까마귀가 음식을 물어가는 모습이다. 마당에 음식을 던져놓으면 한라산 일대에 서식하는 까마귀떼가 모여든다. 까마귀는 고구려 때부터 ‘삼족오(三足烏)’라고 불리던 영조(靈鳥)다. 음식을 물고 높이 시원하게 비상하면 좋은 조짐이고 잘 먹지 않으면서 낮게 떠다니면 좋지 않은 조짐이라고 여긴다. 대각심은 주변의 목장에서 방목하는 소들을 향해서도 가끔 ‘발보리심진언’이라는 주문을 외워주는데, 그러면 소들이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빨리 깨우쳐 소의 탈을 벗으라는 내용의 주문이다. 소와도 대화가 통하는 것. 까마귀도 마찬가지다. 대각심이 던져주는 음식을 물고 가는 과정에서 어떤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것 같다.

    셋째는 향을 피우는 방법이다. 향을 피울 때 연기가 어떤 형태로 흘러나가는지 살펴본다. 귀한 손님이 방문할 조짐이 보이면 그 향의 연기가 약수암으로부터 300∼400m 앞까지 흘러 나간다. 손님이 걸어오면서 그 향기를 코로 맡게끔 하기 위해서다.

    넷째는 새벽에 별의 정기를 관찰하는 방법이다. 천문(天文)을 보는 것이다. 별자리가 인간세계에 주는 메시지를 해독하는 것이 바로 천문이다. 천문은 별자리를 안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영안(靈眼)이 열려야만 한다. 필자 같은 보통사람은 아무리 밤하늘의 별을 보아도 그 의미를 읽어내지 못한다. 대각심은 새벽 3∼4시 무렵 마당에 나가 별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국가적인 중대사는 대개 별빛의 밝기나 새로운 별의 출현여부를 보고 미리 짐작하는 것 같다.

    10년 전쯤만 해도 이북 지역에 2개의 별이 빛나고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2개의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빛나는 별은 인물을 이야기하는데, 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인물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남쪽에는 없느냐고 물어보니 최근 남쪽 하늘에 2개의 별이 보인다고 대답했다. 2개의 별이 앞서거나 뒷서거나 하지 않고 한 뼘 사이로 나란히 빛나고 있는 중이란다. 별은 국가적인 지도자의 출현이나 활동을 의미하는 수가 많은데, 수평으로 2개의 별이 빛나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라산 名人 대각심(大覺心) 스님

    대각심의 스승인 단도. 대각심은 항상 칼을 머리맡에 놓고 자며 졸음이 올 때면 칼로 눈을 찌른다고 생각한다.

    약수암 마당 위편에 있는 석탑도 그냥 세워진 것이 아니다. 대각심이 밤에 별 정기를 보면서 별자리에 맞춰서 탑을 세웠다고 한다. 어떤 별의 정기에 맞추었냐고 물으니까, 삼태육성(三台六星)에 맞췄다고 대답했다. 삼태성은 사다리처럼 수평으로 2개의 별이 3단으로 형성된 별자리이다. 동이족들은 5000년 전부터 이 삼태성을 상서로운 별자리로 인식했다.

    삼국지에 보면 공명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별자리를 보고 아는 대목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공명은 자기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천지신명에게 기도한다. 그 천지신명이란 다름아닌 별자리였다. 서울의 낙성대(落星臺)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인데, 낙성대라 이름 지은 이유도 별자리 때문이었다. 문곡성(文曲星)이 떨어지고 나서 강감찬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천문이라 하면 고대 신화적인 세계에 속하는 이야기인데, 21세기에 아직 천문을 보면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인간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천문을 해독하려면 어떤 수련을 해야 하는가. “애욕을 끊어야 한다”가 그 해답이었다. “애욕만 끊으면 별이 다 보인다.” 대각심이 필자에게 준 충고였다.

    설문대 할망의 현신

    필자가 생각하는 도인의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신통력이다. 입으로만 말해서는 일상인들에게 감화를 줄 수 없다. 신통력을 보여줄 때 사람들은 신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도인은 신통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또 하나는 지혜다. 지혜의 본질은 무소유다. 그 어느 것에도 집착이 없어야 한다. 집착하면 약점이 생기기 때문. 재색명리(財色名利) 중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으면 자유를 누린다. 그런데 요즘 이 두 가지를 겸비한 도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하지만 대각심은 이 두 가지를 겸비하지 않았나 싶다. 그가 지닌 신통은 무엇인가.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하면 숙명통(宿命通)과 타심통(他心通)이다. 사람의 전생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현생의 방향을 알 수 있다. 숙명통을 해야만 사람을 지도해줄 수 있다. 대각심은 그 사람의 얼굴만 보아도 전생을 꿰뚫어본다. 타심통은 어떤가. 몇 번의 만남을 통해서 대각심은 필자의 심리상태를 꿰뚫고 있었다. 필자가 피곤한 생각이 들면 그가 먼저 ‘이제 그만 쉬자’고 이야기했고, 필자가 배고프다 느끼면 먹을 것을 내다주는 식이다. “타심통을 한 것 아닙니까” 하고 물으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 상태가 짐작된다고 했다.

    지혜를 보자. 그의 50년 삶은 무소유 그 자체다. 더 이상 군더더기가 필요 없다. 필자가 대각심을 인터뷰하면서 걱정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그의 조용한 수도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였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 나이 이제 여든두 살입니다. 갈 날이 멀지 않았어요. 한 명이라도 더 건지고 저승으로 가야지요. 금생에 1000명은 건지고 가는 것이 소명인데, 아직 다 못했으니 남은 시간에 부지런히 서비스해야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벼락 같은 목소리로 “굿 바이” 하고 외쳤다. 제주도 탄생 신화에는 제주도의 삼신할머니인 설문대 할망이 등장한다. 대각심에게서 제주도를 지키는 설문대 할망의 현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가 외치던 목소리가 제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때까지도 쟁쟁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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