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이보게!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3-12-29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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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파른 능선 따라 굽이굽이 올라 산봉우리 두드리니 아침이다.
    •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산자락 감싼 치마폭 안개가 걷히는가 싶더니 이내 백두대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리산 마지막 ‘대간 봉우리’ 큰고리봉을 넘어 백두대간은 잠시 쉬었다 간다. 여원재, 사치재, 새맥이재, 복성이재까지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반긴다.
    “이보게!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고리봉에서 바라본 일출

    백두대간(白頭大幹)에는 모두 487개의 산(山), 령(嶺), 봉(峰), 재(峙)가 있다. 특기할 것은 500번 가까이 오르내리는 동안 단 한 번도 물을 건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백두대간을 설명할 때 흔히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단골처럼 등장한다. 조선 영조시대 백두대간을 그린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에서 인용된 문구다.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산이 솟은 이유와 물이 흐르는 사연을 되새겨보게 된다. 그곳에는 서로를 범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는 군자의 풍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은 백두대간을 능선의 연속으로만 파악한다. 그래서 백두대간의 주능선 코스만을 보존하는 것으로 우리 국토의 건강성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지리체계를 자세히 뜯어보면 백두대간이 일련의 산줄기를 넘어 한반도 전체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백두대간은 지역을 구분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창출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수없이 바꿔왔다. 그런 측면에서 백두대간을 보호한다는 것은 곧 한국인이 자연의 면전에서 겸손함을 되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성삼재에 서다

    11월이다. 전라선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은 필자는 취기를 빌려 잠을 청하려 식당칸으로 갔다. 지리산 늦가을로 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1주일간 지리산에 묻히기 위해 휴가를 냈다는 한 중년 여성이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배낭에 기댄 채 열심히 지도에 줄을 긋고 있었다. 아마도 1주일 동안 돌아다닐 코스를 정하는 모양이다. 그에게 “왜 지리산인가?” 물었더니, 미술사학자 유홍준 선생이 지리산 답사를 마치고 내린 결론이 날아왔다. “산은 지리산이다.” 모르긴 해도 이 정도의 내공이라면 죽을 때까지 ‘지리산 중독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팔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은 설악산이었다. 지리산이 설악산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선 것은 1994년이고, 이후로는 한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설악산이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객을 많이 유치한 반면, 지리산은 거대한 마니아 집단을 갖고 있다. 백두산과 금강산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서지 않는 한, 지리산은 앞으로도 국내 제1의 국립공원 자리를 지켜나갈 듯하다.



    구례터미널에서 성삼재로 올라가는 길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굴곡이 심하다. 혹자는 이 길을 구 영동고속도로 대관령의 아흔아홉 굽이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맛은 성삼재 코스가 한 수 위다.

    특히 여름철 장마 끝에 이 길에서 맛볼 수 있는 구름바다는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꼽힌다. 지리산 종주를 제대로 하고 싶다면 화엄사에서부터 등반을 시작해야 마땅하지만, 한번쯤은 차량으로 성삼재까지 드라이브도 해볼 만하다. 감히 말하지만 이 길은 한반도 남쪽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아침 6시20분. 다시 성삼재에 섰다. 오른쪽 길을 따라 노고단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을 뒤로하고, 필자는 인적은 물론 불빛조차 없는 왼쪽 철창문으로 들어섰다. 만복대로 가는 입구다. 멀리 반야봉 쪽에서 해가 떠오르면서 산 아래쪽에 치마폭처럼 둘러쳐 있던 안개가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성삼재에서 40여분쯤 오솔길을 걸어가자 헬기장 가장자리에서 야영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중년의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텐트 위의 물기를 제거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묘봉치다. 지리산 서부능선을 타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장소다. 묘봉치에서 곧장 내려가면 위안리가 나오고 그 길을 계속 걸으면 지리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지리산 온천랜드가 있다. 지리산온천은 한겨울이 제맛인데, 그 중에서도 눈이 내리는 날 노천탕에서 즐기는 좌욕이 으뜸이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지만 마지막이 늘 힘들다. 필자는 수없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아무리 낮은 봉우리도 쉽게 머리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을 무수히 되새겼다. 만복대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내달릴 거리였지만, 세 번이나 숨을 고르고 밧줄에 몸을 기댄 채 힘겹게 만복대에 섰다.

    여전히 후덕한 산골인심

    말 그대로 만복대다. 필자에게도 복이 찾아들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중년의 아저씨들이 더덕술을 따라주며 배를 안주로 내놓았다. 필자가 백두대간을 종주할 생각이라고 말하자, 백전노장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겁부터 먹였다. 설악산에서 얼어죽은 모 산악회 총무의 얘기에서부터 혼자서 대간을 종주하다 다리를 못 쓰게 됐다는 친구의 사연까지 흘러나왔다. 서둘러 짐을 챙기는 필자에게 그분이 던진 충고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보게 젊은이.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글 잘 쓰는 놈은 필화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아무쪼록 조심해서 가게나.”

    9시30분. 만복대에서 곧장 30분 동안을 내려와 정령치(鄭嶺峙·1172m)에 이르렀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岩記)’에 따르면 정령치는 기원전 84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지키게 한 데서 유래했다. 이렇듯 삼한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에서 후일 신라의 화랑들이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근방에 있는 개령암지마애여래불상군(보물 1123호)이 더 유명하다.

    정령치에서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면 큰고리봉(1305m)이다. 이곳에서 계속 달리면 바래봉과 팔랑치가 나오는데, 백두대간은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하산을 시작한다.

    주촌마을로 내려가는 경사가 급한 오솔길은 혼자 걷기에 호젓한 코스다. 가을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여름의 신록을 그대로 간직한 소나무와 황갈색 측백나무가 마주보고 서 있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종류의 나무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이들에겐 똑같이 겨울이 찾아들 것이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살아가는 이치는 다 같은 모양이다.

    11시30분. 주촌리에 도착했다. 멀리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면서 한적한 아스팔트길을 걸었다. 백두대간이 다시 산과 만나는 노치마을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집집마다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마당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곶감을 꿰느라 바쁜 손을 놀렸다. 필자가 허기를 달래려고 우물가에서 라면을 끓이자, 녹두를 털던 할머니는 슬며시 콩밥을 한 공기 내밀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지만, 산골 인심은 여전히 후덕한 것 같다.

    힘이 남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코스를 단축하기 위해 쉬지 않고 걸었다. 도중에 갈림길도 많았지만, 먼저 지나간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표지 덕분에 길을 잃지는 않았다. 특히 ‘남원 뚜벅이’라고 적힌 리본의 도움이 컸다.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이 지면을 빌려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냥 지나칠 여원재가 아니로다

    수정봉에서 여원재로 가는 길은 잡목이 많고 탁 트인 전망도 없다. 마치 산 속에 갇혀 긴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다. 능선을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바로 운봉면인데, 이곳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동편제 창시자인 송흥록이 운봉 태생이고,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제자들이 모두 운봉 땅에서 득음했다.

    운봉은 또한 수 년 전까지 양을 기르는 목장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여름철이면 유럽대륙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가 없다. 양떼가 사라진 운봉목장에서는 요즘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수정봉에서 여원재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시간 이내. 쉬운 길이지만 필자는 이상할 정도로 피로를 느꼈다. 급하게 먹은 점심이 얹히기라도 했는지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러다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여원재에 도착해서 배낭을 점검해 보니 방풍 파카가 없어진 것이다. 덥다고 벗어서 배낭 위에 얹은 것까지만 기억나고,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필자는 파카를 찾으려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갔다. 1시간쯤 걸어가자 등산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분들에게 파카에 대해 물었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여원재로 돌아왔다. 파카 속에 들어 있을 비상금을 빼고 나니 서울까지 갈 교통비도 빠듯하다. 할 수 없이 근방에 사는 친구에게 SOS를 쳤다. ‘이쯤 되면 산행은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남아 있는 비상식량으로 요기를 하고, ‘여원재’라는 지명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동학군의 접주 김개남이 영남지방으로 진격하기 위해 동학군 1만명을 이끌고 나섰다가 수많은 희생자만 남기고 남원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땅. 여원재 전투의 충격 탓에 동학군은 결국 영남지방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했다. 또한 여원재에는 임진왜란 때 왜구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던 조선여인이 이곳에서 스스로 젖가슴을 도려내고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말 그대로 여원재의 여원(女院)이 ‘여원(女怨)’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필자는 그 여원재에서 아내의 선물을 잃고 일찌감치 귀경길에 올랐다.

    “이보게!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만복대에서 바라본 지리산 서부능선. 초겨울 메마른 잡목과 풀만 무성해 쓸쓸함을 더한다.

    11월29일 필자는 백두대간 산행 계획을 세웠다가 취소한 일이 있다. ‘신동아’ 신년호 산행르포라면 당연히 눈 덮힌 겨울산의 풍경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주일을 기다려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기온이 갑작스레 떨어져 전국에 한파주의보가 내려졌을 뿐, 겉으로 본 산의 모양새는 여전히 가을이었다.

    12월7일 새벽 4시30분. 남원역 근처의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을 주문했다. 졸린 듯 눈을 비비고 일어난 중년의 주인 부부는 주방과 식당을 분주히 오가며 첫 손님을 맞았다. 잠시 후 10여명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들이닥쳤다. 겨울 등산객치고는 너무 짐이 가벼워 보여 걱정스럽게 물으니, 도리어 추운 날씨에 산에 오르는 나를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우리는 지리산 온천에 때 밀러 가요. 때 벗기고 시간 나면 노고단에 들러볼까 합니다.”

    다시 여원재에 섰다. 해가 뜨려면 아직 1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서둘러 고남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또 탈이 나고 말았다. 노루가 편안하게 놀았다는 데서 연유한 장동(獐洞)마을까지는 잘 찾아갔는데, 산길로 접어들면서 그만 ‘백두대간’ 표지를 놓치고 만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40여분을 헤매다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따라 급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함양-남원간 24번 국도가 나타났다. 지루한 아스팔트길을 걸어서 다시 여원재에 이르니 아침 7시. 한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필자는 여원재 표지판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대간으로 올라섰다. 이번에는 장동마을의 개들이 일제히 필자의 뒤로 따라붙었다. 깜짝 놀라 골목 어귀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 있자, 농기구를 챙기던 농부가 단 두 마디의 호통으로 개들을 멀리 쫓아버렸다. 고마워하는 필자에게 그가 던진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것 봐. 개를 무서워하면서 어떻게 산을 타는가. 허벅다리쯤 개한테 먹이로 준다고 생각하면 걱정할 게 없어. 귀신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네.”

    “이보게!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백두대간 종주자들 사이에 유명한 매요휴게소 할머니

    고남산으로 가는 길은 알고 보니 쉽고 편안한 코스였다. 처음에는 잡목을 뚫고 나가는 것이 지루하더니, 능선으로 올라서자 시원한 소나무 숲길이 펼쳐졌다. 멀리 장동마을에서는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 올랐다. 비록 겨울산에 눈이 없는 것이 ‘옥의 티’였지만, 고남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북의 산줄기는 아침산행의 맛을 배가시키기에 충분했다.

    고남산에서 매요리까지는 줄곧 내리막길이다. 매요리 입구의 밭고랑에는 김장배추와 무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길 가는 아주머니의 넋두리에서 농촌의 달라진 세태를 읽을 수 있다. “예전에는 다 주워다 먹었어요. 지금은 밭떼기로 팔아 넘기니까 약도 많이 치고, 서울 사람들이 차로 실어가고 돈 받으면 끝이죠. 아깝지만 인건비도 안 나오니까 그냥 내버리는 겁니다.”

    매요리에는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등산객이라면 누구나 들러가는 쉼터가 있다. 바로 폐교된 운성초등학교 앞쪽에 위치한 매요휴게소다. 이곳에 사는 신순남 할머니(68)는 백두대간 종주자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하다. 길 가는 사람 붙들고 라면을 끓여주는가 하면, 밤길에 지친 나그네에게 거실을 내어주고, 10마지기 농사로 7남매를 가르치며 살아온 인생역정도 들려준다.

    매요휴게소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앞마당 오른편에 걸린 광목에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써놓은 문구가 그것이다. 이번 산행에서 필자의 눈과 귀를 붙잡은 것은 다소 철학적인 문구였다. “산은 내려가야 올라갈 수 있다” 아마도 지금 필자는 좀 심각한 마음으로 백두대간을 밟고 있는 모양이다.

    “이보게!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노치마을에서 감 따는 아주머니

    매요리에서 사치재로 가는 길은 낮은 야산이다. 필자는 산악구보를 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뛰면서 사치재를 넘었다. 사치재에서 복성이재로 가려면 88고속도로를 건너야 한다. 건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쉽게 가려면 주민들이 다니는 지하의 우회로를 이용하면 되고, 점잖게 걸으려면 2km를 돌아서 고가도로를 지나면 된다. 문제는 세 번째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주로 단체 등산객들이 이 방법을 쓰는데, 다짜고짜 고속도로를 막고 무단횡단하는 것이다. 88고속도로가 상대적으로 교통량이 적은 길이라지만, 더없이 무모한 행동이다.

    필자의 속을 상하게 만든 풍경은 또 있었다. 사치재에서 가파르게 올라서면 697m봉이 있는데, 이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한숨만 나왔다. 1994년과 1995년 연이어 산불이 난 탓에 나무들이 모두 타죽은 것이다. 숯덩이로 변한 나무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죽은 나무 밑에서는 잡목들이 힘겹게 새 생명을 키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애써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멀리 아래쪽으로 지리산휴게소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에 우뚝 선 88고속도로 준공탑은 지리산의 산세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추물 중의 추물이다.

    이 코스의 위안거리는 오로지 억새뿐이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억새들은 쉼없이 몸부림치고, 그들의 몸부림이 빚어낸 묘한 효과음이 지친 다리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흥부의 마을에서 걸음을 멈추다

    예전에 우마차가 다녔다는 새맥이재에서 복성이재로 가는 길은 온통 철쭉밭이다. 오르내리면서 철쭉 가지에 옷가지와 배낭끈이 수 차례 걸려 그때마다 풀어내는 수고를 다하고 나면 눈앞에 아막성터가 보인다. 이곳은 삼국시대 당시 백제와 신라가 맞붙었던 격전지다. 역사서를 보면 백제에서는 아막성으로,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은 무너져내린 돌덩이들이 등산로의 계단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을 뿐이다.

    아막산성 너머로 보이는 긴 길이 바로 복성이재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왼쪽이 전북 장수 땅이고, 오른쪽이 남원 땅이다. 필자는 복성이재로 내려서면서 줄곧 오른쪽을 응시했는데, 이곳이 바로 고대소설 ‘흥부전’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제비가 물어준 박씨로 부자가 됐다는 곳이 바로 전북 남원시 아영면 성리의 상성마을이다. 때문에 최근 이 지역에서는 흥부전을 모태로 한 테마파크 개발이 한창인데, 과연 마을의 길목마다 흥부를 연상케 하는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갔다는 화초장바위거리나 흥부가 배를 곯다가 쓰러졌다는 허기재 등은 한번쯤 들러볼 만한 곳이다.



    오후 4시. 더 가자니 부담스럽고 끝내자니 아쉬운 시간이다. 복성이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끊기로 했다. 겨울산에서 무리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기 때문이다. 혹시 눈이라도 내렸다면 마음이 동할 수도 있겠지만, ‘겨울 속의 가을산행’이라면 이쯤에서 접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병에 담아간 위스키를 들이켜며 흥부의 마을로 걸어내려오는 데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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