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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③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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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그때 박정희씨는 여러 분야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어요. 저를 만난 것은 아마 박창암씨(식민지 시기 만주에서 하사관 생활을 하다 해방 후 국군에 투신했으며, 5·16 쿠데타 후 혁명검찰부장으로 활동하다 반혁명 사건으로 군사정부에서 퇴출됐다)의 조언 때문이었을 겁니다. 박씨가 그때 박정희 바로 밑에서 특보실장을 했거든.

박정희씨는 대화를 끝낸 뒤 “혁명 이후 지도층 인사 몇 사람을 만났는데, 내게 기탄없이 얘기를 해주는 사람은 강목사가 처음”이라면서 자기는 정치를 할 테니 저더러는 국민운동을 해달라고 했습니다(군사정부는 후에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고, 그 책임자로는 유진오 고려대 교수가 임명됐다). 저는 “국민운동은 국민이 하는 거지, 군사혁명을 한 사람이 어떻게 국민운동을 하겠다는 거냐”고 반문했죠. “국민운동은 간판만 갖다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니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국민운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초기에 제가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본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매우 청렴하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때 박정희 반대자들이 ‘박정희 집에는 피아노가 스무 대나 있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는데, 그건 다 중상모략입니다. 제가 잘 알아요. 박정희는 우리 교회에 나오던 박덕혜 집사의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아주 작은 기와집이었습니다. 5·16 후에도 거기서 살았죠.

박 : 신당동 집 말입니까?

강 : 그래요. 5·16이 일어난 뒤에 저도 가봤는데, 낮에는 집이 눈에 잘 띄지도 않았어요. 늦은 밤에 군인 몇 명이 그 앞에서 보초를 서는 걸 보고서야 박정희 집인 줄 알았죠. 제가 박정희에게 기대를 건 또 하나의 이유는 박정희라는 이름이 쿠데타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당시에 육군 소장쯤 되면 모를 사람이 없었어요. 대부분 정치군인들인 데다가 부정부패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거든요. 우리 교회 옆에도 양모라는 육군 소장이 살았는데, 아침마다 그 집 앞 쓰레기통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정도예요.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다 남긴 갈비 같은 걸 가져갔어요. 장군들이 거의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라는 이름을 제가 전혀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돈 먹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미국, 한국민 반응에 당혹

박 :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하셨다는데, 윤보선씨는 그 말 때문에 쿠데타 1년 후인 1962년부터 지금껏 논쟁에 휘말려 왔습니다. 과연 그 말이 무슨 의미였을까요(윤보선 대통령은 1961년 5월16일 아침 혁명군 박정희 소장과 유원식 대령(훗날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올 것이 왔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1년이 지난 1962년 5월 유원식의 진술로 밝혀졌다. 유원식은 이에 대해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한 반면,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는 쿠데타에 대한 윤 대통령의 애매한 태도와 연결되어 현재까지도 논란을 빚고 있는 부분이다)?

강 : 그 말이 일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윤보선씨가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거예요.

박 : 사전에 쿠데타 모의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논쟁을 낳은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강 : 윤보선씨가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요. 다만 당시 윤씨는 장면 정권의 실정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죠. 어떤 의미에선 쿠데타를 성공시킨 게 윤보선씨일 수도 있어요.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윤 대통령에게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윤보선씨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는 식으로 얘기를 한 거예요. 박정희를 물리치려면 또 피를 흘려야 할 텐데 그건 못하겠다고 거절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래서 쿠데타가 성공한 것 아닙니까(당시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그린 주한 미국 대리대사와 함께 1961년 5월16일 오전 11시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윤대통령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 거국내각 수립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는 장면 정부에 대한 윤보선 대통령의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주는데, 매그루더 사령관은 이러한 윤보선의 입장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이것을 곧 워싱턴에 보고했다-박태균·‘5·16 쿠데타와 미국’ ‘역사비평’ 2001년 여름호 참조).

무성한 쿠데타說

박 : 5·16 쿠데타와 관련해 여쭤보고 싶은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워싱턴에 보낸 문서들을 보면 한국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는 데도 한국인들이 조용하다는 거예요. 쿠데타가 일어나면 국민들이 합법 정부를 지지하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소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당시 쿠데타 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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