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그리스·이집트·이탈리아風 공존하는 제국 賢帝의 小우주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4-01-29 1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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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빌라 하드리아누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카노푸스. 미소년 안티노스의 죽음을 기려 세운 이 못의 한쪽 변에는 이오니아식 원주와 그리스 신상, 그리고 악어 조각이 세워져 있다.

    서기 125년 어느 날 밤, 소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76∼138, 재위 117∼138)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몇 번을 뒤척이다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달빛이 교교한 정원을 거닐다 재스민색 살결을 지닌 한 소년을 보았다. 얼굴은 물론 어깨선과 손발까지 소녀 같았는데, 달빛을 받아 더욱 매혹적으로 비쳤다. 황제는 그만 소년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안티노스(Antinous)란 이름을 가진 이 소년의 나이는 열다섯 전후. 그리스 전래의 미소년다운 매력을 한껏 흘리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는 도시국가(폴리스)들의 집합체였다. 각 폴리스는 늘 외부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일종의 전시체제 아래 놓여 있었다. 따라서 남성들은 병영생활을 주로 했고, 그러다 보니 성인남성들은 15세 전후의 미소년을 애인으로 삼아 동성애를 즐기는 일이 빈번했다. 그들에게 동성애는 ‘특수하고’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이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미모의 젊은이를 사랑했다고 하니까.

    이에 비해 로마는 제국답게 동성애를 떳떳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황제였기에 미소년을 가까이 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날 이후 황제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개를 끌고 다니듯이 안티노스를 자신의 순방 길에 데리고 다녔다. 안티노스와의 만남이 앞으로 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모른 채.

    1100년에 이르는 로마제국 역사에서 최고의 태평성대였던 오현제(五賢帝) 시대(96∼180). 그 중에서도 제국의 판도가 최대에 이르고, 또한 이렇다 할 전쟁도 없었던 시대를 이끈 하드리아누스는 역대 황제들과는 여러 모로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 중 하나는 여행을 즐겼다는 점이다. 그는 재위 21년 동안 무려 12년간, 그러니까 절반이 넘는 시간을 마차와 배 위에서 보냈다.

    시간적으로만 최다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니라 제국의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기에 지역 범위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3차례에 걸쳐 이뤄진 그의 대순행 중 첫 번째(121∼125)는 갈리아(프랑스와 그 북부), 게르마니아(독일), 브리타니아(영국), 히스파니아(스페인), 판노니아(헝가리), 다키아(루마니아), 트라키아(불가리아 및 흑해 서부) 등 유럽대륙을 훑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하, 잠깐 그리스에 들러 그리스 문화에 젖어본 것이다. 두 번째(126)와 세 번째(128∼134) 여행에선 소아시아, 터키의 흑해연안,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제국의 남서쪽을 둘러봤다.



    그는 자기 현시욕도 대단했는지 방문지마다 자신의 왕림을 알리는 기념물을 세우곤 했다.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에 세운 하드리아누스 신전, 아테네에 옛 도시와 신도시를 가르는 경계임을 나타내기 위해 로마 스타일로 축조한 하드리아누스 기념물, 요르단의 캐러밴 도시 제라시에 세운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축조한 하드리안 장벽, 이집트에 그리스식으로 건설한 신도시 안티노폴리스 등 그 수는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다.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삼는 예루살렘에선 옛 이름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엘리아 카피토리노’라 부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의 행차는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로마 문화를 속주에 전파하고 속주의 이방 문화를 로마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후일 서아시아에서 태어난 기독교를 로마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하드리아누스의 이런 문호개방 정지작업에 힘입었다 할 수 있다.

    원래 로마의 황제들은 영내 시찰여행을 자주 떠났다. 대개는 제국의 안보를 도모하기 위한 민심 파악 차원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경우는 이와 조금 달랐지만 스스로 이국문화에 젖어들고 싶어 잠시도 쉬지 않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렇다고 황제의 직분에 소홀했던 것도 아니다. 늘 민심의 동향을 살핀 것은 물론, 문제가 있으면 현지에서 즉각 처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원로원에 이를 알려 황제의 부재로 인해 로마가 동요하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아무래도 행운아였던 것 같다. 그처럼 좋아하는 여행을 맘껏 즐겼는 데도 나라가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굳건해졌고, 따라서 ‘어서 로마로 돌아가야지’ 하는 불안한 마음은 갖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황제가 오랫동안 로마를 비워도 제국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권력이 적절히 분산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원로원과 각지의 행정·군사 책임자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면 황제가 장기간 로마를 비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로마는 거대하지만 잘 짜여진 하나의 완벽한 시스템이었다. 마치 그들이 만든 가로(街路)나 법망처럼. 인터넷 시대를 맞아 네트워크란 말을 즐겨 쓰고 있어 ‘네트워크 시대’가 지금에야 열린 듯하지만, 2000여년 전 로마제국은 이미 통치 차원에서 훌륭한 네트워크를 가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현제 시대에는 황제의 자리가 세습되지 않고, 전임 황제가 적임자를 골라 양자로 맞아들였다가 자리를 물려주는 식으로 이어졌다. 무능한 자가 황제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황제가 되는 잘못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황제 잇기 방식은 96년에 등극한 네르바에서부터 시작되어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하드리아누스(117∼138),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를 거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까지 이어졌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오현제 시대를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상찬한 바 있다. 바로 이런 제도 덕분에 히스파니아 태생의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가 로마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번이 오현제 시대를 과대평가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행을 그토록 좋아한 하드리아누스였지만 자신이 태어난 히스파니아 땅(지금의 세비야 인근에 퇴역장병을 위해 건설된 신도시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은 동북부 지방만 한 차례 다녀온 게 고작이었다. 그가 빈번하게 찾았고 또 오래 머물렀던 곳은 그리스 문화가 곳곳에 배어 있는 에게해 연안의 소아시아 지역과 서아시아(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그리고 그리스와 이집트 땅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그리스 문화에 매력을 느꼈으나 내놓고 좋아하지는 못했다. 친구들이 ‘그리스 아이’라고 놀려대서만은 아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감수성이나 논리성보다는 용맹함과 강건함을 사내다움의 최고 덕목으로 삼았기에 그리스 취향은 권장사항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열 살 이후 그의 후견인이 된 동향 출신의 트라야누스(그로부터 12년 뒤 로마 황제가 됐으나 당시엔 누구도 그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또한 그의 그리스 취향을 경계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이를 자신의 내면 깊숙이 묻어두지 않으면 안 됐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하드리아누스는 마흔한 살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때에도 그리스 취향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로마 황제는 권력을 사유화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절대군주가 결코 아니었다. 원로원과 백성들의 눈을 늘 의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황제는 ‘시민 중의 제일인자’였던 것이다. 그가 10대 이후 안으로 삭이고만 있던 그리스 취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황제가 되고 나서 6년이 지난 뒤인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그때 그는 꿈에도 그리던 아테네 땅을 처음 밟았던 것이다. 얼마 전 소아시아에서 만난 안티노스와 함께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마치 그리스 사람이 된 것처럼 구레나룻까지 길렀다.

    미소년 안티노스의 죽음

    하드리아누스 대제가 여느 황제와 공유하지 않은 또 하나의 특징은 자신이 정무도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궁전 겸 별장, 즉 별궁을 로마 시내가 아니라 교외의 한적하기 짝이 없는 언덕 위에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로마의 역사는 기원전 753년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로스 형제가 팔라티노(Palatino) 언덕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우며 시작됐다고 한다. 역대 황제들 또한 거기에다 궁전을 세우고 살았다. 왕궁을 뜻하는 영어의 ‘palace’란 말도 팔라티노에서 유래했다. 지금도 이곳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운 왕궁 유적인 도무스 아우구스투스가 남아 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이들과 달리 로마 시내에서 30km 정도 떨어진 티부르티니 언덕 120ha의 대지에 ‘빌라 하드리아누스(Villa Hadrianus 또는 Villa Adriana, 영어로는 Hadrian’s Villa)’, 즉 하드리아누스 별궁을 세운 것이다. 건설공사는 그의 대순행이 그랬듯이 3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1단계는 등극한 이듬해인 118년에 시작되어 125년까지, 2단계는 125년부터 134년까지, 마지막 3단계는 134년부터 그가 숨을 거둔 138년까지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온 134년에 공사가 거의 끝나 이용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고 한다.

    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아누스가 통치하던 시절 로마제국은 최고의 판도를 자랑했다. 여행을 좋아했던 황제는 제국 곳곳을 누볐다.

    따져보면 빌라 하드리아누스도 그의 여행벽과 그리스 취향, 이 둘의 합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가장 가고 싶어했던 서아시아를 향해 가장 긴 세 번째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 준비를 한 곳도 이곳이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이집트에서 죽은 안티노스를 떠올리며 몸을 뒤척였던 곳도 이곳이다. 건물의 구조와 형태, 장식, 명칭 등이 로마 고유의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와 이집트의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속으로 삭인 것을 황제로서의 지위를 굳힌 다음 이렇게 폭발시켰으니 그는 평생동안 일관되게 그리스·이집트 문화에 경도(傾倒)되어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빌라와 그리스 취향을 한데 묶어놓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안티노스란 미소년이었다.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이 미소년을 데리고 다녔고, 또 그를 어떻게 대했으며,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선왕인 트라야누스의 영향을 받아 사적인 감정을 매우 절제했던 그였기에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후세의 우리는 단지 상상력을 발휘해 그때의 상황을 그려볼 수밖에 없다.

    황제 일행은 서아시아 순방을 마치고 드디어 이집트로 들어갔다. 이집트는 비가 내리지 않지만 상류에서 내려오는 나일강 물로 농사를 지어 3000년에 이르는 왕국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니 나일강은 생명줄이었다. 일찍이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이집트는 나일의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집트 여행도 거의 끝나갈 무렵 황제 일행이 나일강 유람에 나섰다. 황제의 어용선은 동방 원정에 나섰던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한가한 어촌을 일약 대항구로 탈바꿈시킨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했다. 그런데 나일강을 거슬러 300km쯤 내려갔을 때 안티노스가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악어에 물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이었다.

    황제는 다행히 그 장면을 목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보를 접하자 곧장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안티노스가 벗어놓은 옷가지와 샌들을 보고는 아녀자처럼 펑펑 울고 말았다. 누구보다 절제력이 강했던 그가 이렇듯 황제의 체통도 잊어버릴 만큼 평정심을 잃은 것이다.

    ‘안티노폴리스’에 신전까지 건립

    안티노스를 처음 만난 지 5년. 열다섯 살의 미소년이 스무 살을 바라보는 청년으로 모습이 바뀌어가던 때였으니 이 일은 서기 130년 전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른 황제는 안티노스를 신격화하고, 사고가 났던 건너편 강변에 그리스 스타일의 신도시 안티노폴리스를 건설해 그곳에 안티노스의 신전까지 세웠다. 그런 다음에 이집트인들을 그곳으로 대거 이주시켰다.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관심을 보여온 것은 그 미소년의 죽음이 자살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타살에 의한 것인지 여부였다. 프랑스 여류문학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황제가 직접 구술하는 형식으로 쓴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1952년 작. 황제에 관한 평전 가운데 최고의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에 따르면 안티노스는 조만간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나일강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안티노스는 생의 절정기에 자신이 사라져주는 게 감수성이 예민한 황제를 실망시키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황제가 그를 신격화하고 그의 이름을 딴 도시까지 건설한 것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읽어내고는 ‘바로 이때다’ 하면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자에 대한 보답의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황제가 안티노스를 죽였다고 볼 수도 있다. 황제가 사랑하는 자의 늙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인식시킨 탓에 당사자가 정신적 긴장을 견디다 못해 그런 결과가 빚어졌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사랑한 소아시아 태생의 미소년 안티노스. 그에게서 관능미는 몰라도 지성미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아무튼 동성간의 사랑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기 십상이다. 사랑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가 가져야만 오래 지속될 수 있는데, 동성끼리는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안티노스의 경우 황제가 가지지 못한 아름다운 육체를 가졌기에 둘의 관계가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같은 미모가 안티노스에게서 사라져버린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세계 유명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안티노스의 두상 조각을 보면 헝클어진 머리에다 리본까지 달고 있다. 눈은 아래로 내리깔고 있으며, 입도 소녀의 그것처럼 작다. 대신 입술은 두툼하다. 사랑을 갈구하는 여린 그의 모습에서 지성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의 모습이 그러했는지, 아니면 황제의 눈에 그렇게 비쳤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어떤 경우가 됐든 황제가 자신의 말벗으로 안티노스를 대동하고 다닌 것은 아닌 듯하다. 원래 학구열이 대단하고 학식도 풍부한 황제인지라 젊은, 아니 어린 소년이 그의 대화 파트너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관상용 혹은 애무용이라면 몰라도.

    황제는 이집트 순행길에 나서면서 그 동안 대동하지 않았던 왕비 사비나와 함께 행차했는데, 사고는 바로 이때 터졌다. 그렇다고 안티노스가 사비나를 의식해서 자살을 기도한 것이란 뜻은 아니다.

    왕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로마의 황제들은 축첩으로도 모자라 수많은 상궁 나인들을 거느리고 때로는 ‘사고’도 쳤던 동양의 군주(단 일본은 제외)들과는 달리 대체로 왕비 한 사람으로 만족했다. 이런 일부일처의 전통은 후일 로마가 공인한 기독교와 어울려 유럽문화의 일부로 굳어졌다. 영국의 헨리 8세가 앤을 새로이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 전 왕비와의 이혼을 원했으나 로마교황청이 이를 받아주지 않자 교황청과 관계를 끊고 영국국교회(성공회)를 만들고서야 자기가 원하는 이혼과 재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문화에 기인한다.

    소유욕, 질투심, 신비주의

    안티노스의 자살설에 맞서 타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황제가 안티노스를 죽이도록 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든다. 첫째는 아름다운 자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안티노스의 용모가 더 망가지기 전에 죽여야 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황제에게는 아름다운 자에 대한 강한 질투심이 있었다는 점을 든다. 셋째로는 신비주의자였던 황제가 안티노스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였다는 것이다.

    유르스나르는 아무래도 황제의 편이라 자살설을 지지하는 듯하고, 살해설은 황제의 성격이나 취향으로 볼 때 믿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안티노스를 살해했건 그렇지 않건 안티노스를 끔찍이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빌라 하드리아누스엔 안티노스의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황제의 빌라를 찾아가려면 먼저 로마로 가야 한다. 로마는 세계 최고의 관광지답게 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린 2003년 여름에도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여행객·순례객들로 연일 넘쳐났다. 가까운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물론이고 샤리 차림의 인도 여성, 차도르를 두른 아랍 여성, 신부인 아들의 안내를 받아 아프리카의 토고에서 왔다는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지역과 종교, 인종과 피부색의 차이를 초월해 가히 세계의 축소판이라 할 만했다.

    그들은 커다란 페트병을 치켜들고 연신 물을 마셔대면서도 팔라티노 언덕과 원로원, 신전·재판소 등의 흔적이 모여 있는 포로 로마노(로마광장),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로마인들이 여러 신을 모셔두었던 판테온(萬神殿), 수도를 뜻하는 영어 ‘capital’의 어원이 된 카피톨리노 언덕, 16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카라칼라 대(大)욕탕 등 고대 로마제국이 남긴 유적과,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한 스페인 계단과 진실의 입, 트레비 분수와 같은 명소, 그리고 세계 종교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 등을 찾아다녔다.

    돌을 다듬어 기둥을 세우고 콘크리트를 이용해 벽과 지붕을 올려 제국의 위엄과 그 그릇의 크기를 유감없이 드러내고자 했던 고대 로마인들의 손길 덕분에 20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껏 형체를 간직한 고대 로마 유적은 방문객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만약 이들이 형체가 없고 허물어진 채 나뒹구는 돌덩이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과연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찾아올까. 로마의 유적들은 ‘문명은 인간 유위(有爲)의 소산’임을 이렇듯 은근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들 유적은 지금의 로마시 한가운데에 집중돼 있다. 이 지역이 고대 로마의 영역인 것이다. 시내의 명소들을 둘러보고는 아침 일찍 황제의 빌라를 찾아 길을 나섰다. A와 B, 이렇게 두 개의 노선이 운행되는 로마의 지하철에서 B라인을 타고 동북쪽 종점인 레비비아역에서 내려 거기서 티볼리행 버스로 갈아탔다. 서울에서도 어느 노선이건 지하철의 종점에 내리면 한적한 게 마치 시골길을 달리는 기분이 드는데, 로마도 이와 다를 게 없었다. 직행이 없어 완행버스를 타다 보니 정차하는 곳도 많아 17∼18km의 거리인 데도 50분이나 걸렸다.

    내가 내린 곳은 티볼리 4km 전방의 라르고 가리발디. 동네 사람들에게 물으니 빌라 하드리아누스는 거기서 다시 20분 정도 걸어야 한다고 했다.

    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분수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빌라 에스테의 정원. 티볼리에 있다.

    티볼리(Tivoli)라고 하면 혹자는 덴마크 코펜하겐 중앙역 앞의 유명한 놀이공원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는 복제품에 불과하고 원조는 로마 티볼리다. 경관이 수려한 이곳은 기원 전후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로마 부자(富者)들의 휴양지로 각광받았으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6세기 초 빌라 에스테(Villa d’Este)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빌라의 이름이 된 에스테는 피렌체와 함께 르네상스를 이끈 페라라(Ferrara·이 도시 또한 세계문화유산이다)의 영주 에스테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출세가도를 달려 29세 때 벌써 추기경이 됐고, 40세에는 교황에 출마했다가 낙마한 뒤로 티볼리 종신 지사가 된 이폴리토 에스테 추기경(1509∼72)을 말한다. 그는 이곳 지사가 되자 원래의 수도원 건물을 헐고 3층 구조의 궁전을 세우고는 그 내부를 대가들의 그림으로 장식하고, 드넓은 정원 곳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분수를 세워 한껏 멋을 부렸다. 따라서 빌라 에스테 최고의 자랑거리는 단연 500여개에 이르는 분수다. 유네스코 또한 이 점을 높이 평가하여 2001년 인근 빌라 하드리아누스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술잔 분수, 용의 분수, 티볼리 분수, 100개의 분수, 물오르간 분수, 넵튠(바다의 신) 분수, 판도라 분수 등 기상천외한 이름을 가진 분수들이 물을 내뿜는 광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보는 이들을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물줄기의 방향을 교묘히 조절해 한 곳으로 쏠리지 않게끔 했다는 점이다. 강약과 대소, 장단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결과가 분수 미학의 극치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 빌라 에스테가 모델로 삼은 것이 다름아닌 빌라 하드리아누스였다고 한다면 황제의 빌라가 어떤 존재였던가를 웬만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라르고 가리발디는 특급은 아니라 하더라도 1급 정도는 될 것 같은 주택들이 들어선 작은 마을이다. 집집마다 뜰에 키 큰 수목을 심어 그 잎새와 가지들이 드리우는 그늘 덕분에 한가로이 졸고 있었다.

    마을이 끝나자 왕복 2차선으로 길이 좁아지며 시골길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황제의 별궁으로 이르는 길인데 어찌 이럴 수 있을까. 황제 얘기야 옛일이라 치고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이라 찾는 이도 많아 우리 같으면 있던 길은 더 넓히고, 없던 길을 새로 내는 등 요란을 떨었을 텐데 이렇게 한가한 모습인 채로 그냥 두고 있다.

    알고 보니 거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원래 그리스의 것이면 모두 좋아했던 하드리아누스가 빌라를 건설하면서 그리스 북부지방 어느 계곡의 풍경을 본떠서 진입로를 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로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으니 누가 말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탈리아인들은 유적을 복원한답시고 섣불리 손을 대지 않는다. 돌덩이가 나뒹굴면 나뒹구는 대로 내버려둔다. 그 대신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한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걸 보여준답시고 유적의 진정성(authenticity)까지 훼손할 수는 없다는 게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그들의 철학이다.

    입구의 매표소에는 사람이 많았으나 안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둘 어디론가 흩어져 나중에는 나 혼자 남게 됐다. 그러다 어느새 낯선 이들과 마주치곤 했다. 햇살은 따갑다 못해 뜨겁고 길은 언덕을 향해 나 있다 보니 바람기마저 꼭 막혀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황제는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어 이곳에 터를 잡았을 테지만, 그곳으로 찾아가는 나는 왜 이다지도 힘든 것일까. 이국의 이름없는 여행자라 그런 걸까.

    물을 사랑한 황제의 ‘소우주’

    언덕을 넘어서자 커다란 벽이 시야를 가로막으며 나타났다. 그 뒤로는 장방형의 못인 페칠레(Pecile)가 자리잡고 있다. 동양의 못이라면 연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을 텐데 이곳에선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수생식물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푸른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물만 가득히 담겨 있었다. 그것은 못이 아니라 풀장이었다. 그나마 단조로움을 달래주기 위해서인지 네 모서리에 접어놓은 우산처럼 생긴 키 큰 사이프러스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아누스 대제가 원형의 수로 안에 작은 인공 섬을 만들어놓고 혼자서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는 해상극장. 연구자들은 이를 ‘빌라 속의 도무스’라 부른다.

    마침 인근 올리브나무 아래에 벤치가 있어 거기에 등을 기댄 채 안내책자를 넘기다 이곳에 물과 관련된 시설물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페칠레의 풀장만 해도 가로가 26m, 세로가 106m이니 절대 작은 크기가 아닌데, 가로 18m, 세로 119m에 이르는 카노푸스(Canopus)와 원형으로 축조된 해상극장(Maritime Theatre)이라는 독특한 건축물도 있었던 것이다.

    이는 황제가 물,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강과 바다를 좋아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지중해와 에게해, 흑해 그리고 나일강과 다뉴브강을 여행했던 그가 아닌가. 왕비 사비나보다 더 가까이했던 미소년 안티노스가 익사한 곳 또한 나일강이 아니던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황제가 자신만을 위해 지은 이 빌라에 물을 담고자 했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가 왜 이 티부르(티볼리의 당시 이름)에 빌라를 지으려 했는지도 알 수 있다. 이곳엔 아니에네강이 흘러 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해상극장은 페칠레 북쪽에 있었다.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원형의 벽체는 아스라이 높은데 두 개의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막혀 있다. 이 폐쇄된 공간 안쪽으로는 원형의 수로가 달린다. 지금은 그 위로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어 외부와 연결되지만, 당시에는 이동식 나무다리를 이용했다고 한다. 얼마나 혼자 있고 싶었으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드리아누스란 인물은 이해하기 힘들다.

    섬 안에는 허물어진 벽체와 원기둥만 서 있어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지만, 1950년대에 이곳을 발굴 조사한 연구자들은 이 섬이야말로 ‘빌라 속의 도무스(왕궁)’였다고 한다. 황제의 침실과 도서실 등이 있어 황제는 지름 25m의 이 작고 외로운 섬에서 혼자 명상에 잠긴 채 제국 경영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우주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곳의 이름은 해상극장이라 되어 있다. 생긴 모양이 바다를 연상케 하는 데다 대리석 벽면에 바다와 관련된 것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카노푸스=이집트+그리스

    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카노푸스 못가에 세워진 그리스 양식의 여상주. 황제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빌라의 정중앙에 자리한 대욕탕은 말 그대로 대단한 크기인데 냉탕과 온탕, 수영장, 사우나실을 완비했다고 한다. 이곳에선 태양열 화로(Heliocaminus)가 발견되기도 해서 태양열을 이용해 물을 데웠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대규모 욕탕이 제국 곳곳에 생겨나자 삼림이 급속히 황폐화됐고 급기야 땔나무 공급 부족이라는 난관에 봉착하자 태양열을 대체 에너지로 이용하는 아이디어까지 내놓게 된 것이다. 콘크리트를 고안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했던 로마인들이라면 태양열 화로를 만드는 것쯤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안내책자에 따르면 ‘터키탕’은 이곳에서 비롯됐다고 되어 있다.

    빌라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카노푸스는 삼면이 언덕으로 둘러싸여 은밀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사랑하던 사람에게 바치려고 만든 것이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찾는 사람도 가장 많아 사진을 찍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카노푸스는 풀장이 아니라 못이다. 못은 나일강을 상징한다. 안티노스가 익사한 바로 그 나일강 말이다. 그리고 못의 명칭이 된 카노푸스는 사고지점을 일컫는다. 황제의 어용선이 출발한 알렉산드리아와 사고가 난 카노푸스까지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해 가로로 매우 긴 장방형의 이 못 한쪽 변은 타원형을 그린다. 그 선을 따라 이오니아식 원주(圓柱)가 서 있다. 원주들 사이로는 그리스의 신들이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어 그리스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신상 조각이 끝나는 곳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 같은 악어가 버티고 있다. 악어는 이중적인 존재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신성시했던 동물이라는 게 그 하나이고, 안티노스의 숨을 멎게 한 장본인이라는 게 다른 하나다. 카노푸스는 이 이중성을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다. 안티노스가 실제로 악어에게 물려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렇게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를 신격화하기 위해 꾸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빌라 하드리아누스 중심부에 위치한 대(大)욕탕 유적. 물은 태양열을 이용해 데웠다고 한다.

    못의 긴 변 한쪽에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나 볼 수 있는 백색의 여상주(女像柱·젊은 여인의 모습을 한 기둥) 6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이 모두를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는 게 있다. 세라피움이 그것이다. 세라피움이란 이집트인들이 신으로 모셨던 황소 세라피스를 모신 신전을 말한다. 이 또한 이집트의 카노푸스에 있었다. 그렇다면 황제는 안티노스가 태어난 그리스와 그가 세상을 떠난 이집트를 적절히 결합해 카노푸스를 만든 것이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스는 나이와 신분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이토록 심대한 영향을 끼쳤던 모양이다. 불교에서도 인연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지만 빌라 하드리아누스도 그 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정원의 표본

    무척이나 광대한 황제의 별궁에는 오랜 세월 탓에 허물어진 게 많지만, 이밖에도 바닥의 타일이 참으로 아름다운 영빈관과 재판소, 황금광장, 도서관, 회의실, 그리스식 반원형극장 등 다양한 공간들이 남아 있다. 알맞은 지형에 알맞은 크기로.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빌라를 일러 교외에 있는 단독주택, 도무스를 시내의 개인주택이라고 정의를 내렸지만, 내가 보기에는 지리적 위치보다는 정원의 크기와 그 용도에 따른 구분이 더 적절하리라고 생각된다. 정원이 있음으로 해서 마음의 여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별장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니던가.



    황제가 떠난 지 1200년이 흐른 16세기 초,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기운 속으로 빠져들었다.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이 새로이 각광을 받던 그 시절, 빌라 하드리아누스도 세인의 관심의 표적이 됐다. 르네상스인들은 이곳의 정원이 이탈리아 정원의 표본이라고 평가했다. 에스테 추기경이 자기의 임지에다 빌라 에스테를 조영하면서 인근에 있는 이 황제의 빌라를 모델로 삼은 것은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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