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美 시사주간지가 밝혀낸 딕 체니-핼리버튼 정경유착 내막

“부통령은 스톡옵션 받아내고, 기업은 110억 달러 챙겼다”

  • 정리: 박성희 재미언론인 nyaporia@yahoo.com

    입력2004-03-02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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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가 벌인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 침공으로 최대 호황을 맞은 기업은? 바로 딕 체니가 5년간 CEO로 몸담았던 ‘핼리버튼’이다. 핼리버튼은 쿠바 관타나모에 포로수용소를 짓고, 이라크 석유시설 복구사업을 독점, 11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핼리버튼 배후에는 딕 체니가 있다. 美 시사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 최근호는 ‘계약 스포츠 : 부통령은 핼리버튼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제하에 딕 체니-핼리버튼 정경유착의 검은 내막을 파헤쳤다. 주요 내용을 발췌 게재한다(편집자).』

    美 시사주간지가 밝혀낸 딕 체니-핼리버튼  정경유착 내막
    미부통령 딕 체니는 언행에 매우 조심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백악관이 공식 발표한 그의 이력(http://www.whitehouse.or g/administration/dick.asp)이나 체니 개인의 웹사이트에 실린 이력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이력들은 1941년 미 네브래스카주(州)에서 태어나 워싱턴의 권부(權府)에 자리잡기까지 63년 동안 체니가 걸어온 화려한 길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 부분이 실종됐다. 그가 부통령이 되기 직전 큰돈을 벌었던 5년 동안(1995~2000년)의 행적이다. 그의 개인 이력서에는 단지 ‘경영자(businessman)’로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이 시기 그는 미 텍사스주(州) 휴스턴에 본부를 둔 세계적인 석유가스 회사 핼리버튼(Halliburton)의 경영책임자였다. 체니는 정경유착을 통해 기업 매출액을 늘렸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부(富)를 쌓았다.

    1800만달러 스톡옵션

    체니는 핼리버튼에서 5년 동안 일하면서 무려 4400만달러를 벌었다. 체니는 “현재는 핼리버튼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은 상태”고 주장하지만, 그는 부통령을 그만둔 뒤에 핼리버튼으로부터 해마다 15만달러씩 받기로 돼있다. 그뿐 아니다. 체니는 무려 1800만달러 어치 핼리버튼 스톡옵션을 갖고 있다. 체니는 이 스톡옵션에 대해 “언젠가 자선기관에 기부할 작정”이라고 밝혔다. 그렇다고 딕 체니와 핼리버튼을 둘러싼 의혹이 잠재워지는 것은 아니다.



    핼리버튼은 미 민주당을 비롯한 부시 행정부 비판자들로부터 걸핏하면 공격의 과녁이 됐다. 핼리버튼은 현재 이라크 전후 재건사업에서 미국 기업으로는 가장 큰 규모인 110억달러 어치의 계약을 맺고 이라크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그 다음은 28억달러 어치를 계약한 벡텔).

    때문에 반전론자들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침공한 숨어있는 동기를 핼리버튼이 받고있는 특혜와 관련짓는다. 마치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당시 ‘베트남 특수’로 떼돈을 벌었던 다우 케미컬(Dow Chemical)처럼, 핼리버튼은 반(反)부시전선에 선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이를테면 민주당 대선후보 선두주자 존 케리는 아이오와주(州)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던 날 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재건사업에서 핼리버튼에 준 특혜를 세차게 비난했다.

    지금까지 체니는 “나는 이라크 전후 재건사업 계약을 둘러싼 미 행정부의 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지난해 9월 미 NBC의 간판프로인 ‘언론과의 만남(Meet the Press)’에서도 체니는 “(핼리버튼의 이라크 특혜와 관련해) 나는 절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고 개입하지 않았을 뿐더러, 계약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체니는 “핼리버튼은 매우 독특한 회사다. 핼리버튼만큼 대규모 엔지니어링 건설능력과 유전지대 작업능력을 갖춘 회사는 드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니는 핼리버튼과의 ‘특수관계’에 대한 기자의 질문 공세에는 구체적으로 답변하길 거부해왔다. 그는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을 뿌리치면서 대변인 케빈 켈름스로 하여금 읽어보나마나 한 형식적인 답변을 이메일로 보내게 했다.

    캘리포니아주 출신으로 하원 정부 개혁위 소속 의원인 헨리 왁스먼(민주당)도 의혹을 제기한다. 그는 “부시 행정부가 핼리버튼에 대한 여러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있다”며 목청을 높인다.

    이라크 침공 직후 부시 행정부는 파괴된 석유산업 관련시설을 다시 짓기 위해 핼리버튼과 70억달러 규모의 공사 계약을 독점적으로 맺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 계약은 ‘부시 행정부의 윗선(high level)에서 최종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왁스먼 의원은 다시 묻는다. “그것은 누구의 결정인가? 무슨 이유로 핼리버튼에 특혜가 주어졌나?” 그러나 아직까지 납득할 만한 답변이 들려오지 않고 있다.

    잇단 바가지 시비로 말썽

    핼리버튼은 이라크 재건사업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쿠웨이트에서 사들인 석유를 이라크로 넘기면서 미 정부에 6100만달러를 바가지 씌운 일도 벌어졌다. 핼리버튼은 석유 1갤런당 2.38달러로 가격을 매겼지만, 펜타곤(미 국방부) 회계감사원은 핼리버튼이 1갤런당 1달러씩 바가지를 씌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펜타곤 감사관은 조사위 구성을 고려중이다.

    핼리버튼은 “하청업체인 쿠웨이트 석유수출 회사 알탄미아가 값을 높게 매겼다”면서 “쿠웨이트 정부가 알탄미아에 하도급 계약을 맺도록 우리에게 압력을 가해 일이 그렇게 꼬였다”고 변명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미국 쪽 계약 실무자가 쿠웨이트 석유부로 보낸 2003년 5월4일자 편지는 “알탄미아를 하도급 업체로 선정한 것은 오로지 핼리버튼의 권고에 따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편지는 미군 공사관련 용역계약 부서인 미 육군공병단(Army Corps of Engineers)도 핼리버튼이 하도급 계약자를 알탄미아로 정한 것을 지지했다고 밝히고 있다.

    미 육군공병단 대변인은 그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시인하면서 “핼리버튼은 미 육군 조달청에 ‘오직 알탄미아만이 핼리버튼의 요구에 맞출 수 있는 회사’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두바이에 본부를 둔 전략에너지투자그룹의 고위간부 유세프 이브라힘은 “핼리버튼과 알탄미아는 마치 산적과 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핼리버튼이 쿠웨이트 정부로부터 직접 석유를 구매하지 않고 중간상인을 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는 지적이다(쿠웨이트 석유장관의 동생 탈랄 알-사바흐가 알탄미아의 대주주라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핼리버튼은 미 연방정부 예산을 축내면서 쿠웨이트 고위관료에게 뇌물을 바친 셈이다).

    최근 ‘월 스트리트 저널’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핼리버튼은 쿠웨이트 미군기지 장병들에게 급식을 제공하면서 무려 6100만달러나 바가지를 씌웠다. 지난 1월에는 핼리버튼의 두 임원이 쿠웨이트의 하도급 업체를 잘못 골라 630만달러를 바가지 씌운 일이 말썽을 빚자 그들을 해고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며칠 뒤 미 국방부는 핼리버튼과 12억달러 규모의 이라크 남부 석유생산시설 보수공사 계약을 맺었다.

    체니의 작은 정부 예찬론

    미 존스 홉킨스대의 댄 구트먼 교수는 핼리버튼의 독점과 특혜가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 몇 년간 미 행정부는 기구 축소와 더불어 민간사업체의 역할을 늘려왔다.

    이와 관련 구트먼 교수는 “민간 계약자들의 영향력이 워낙 커져 정부가 이들을 감독한다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즉 핼리버튼이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바가지를 씌우는 등 말썽을 부려도 핼리버튼의 독점적 지위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은워싱턴 정가에서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체니는 오래 전부터 민간기업이 정부관료조직보다 더 나은 서비스를 싼값에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는 민간부문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논리의 옹호자다. 그러한 체니의 논리는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크게 힘을 얻었다. 2002년 펜타곤이 민간계약자들에게 지불한 액수는 1500억달러가 넘는다.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 피터 싱어는 저서 ‘기업 전사들(Cor porate Warriors, 2003년)’에서 “지금 미국은 국방의 근간을 시장(marketplace)에 넘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공기업 민영화 옹호론자들은 ‘시장경쟁이 가격조절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버드대 스티븐 켈만(공공정책학)은 “이라크의 경우 이례적으로 정부 발주 계약을 따내기 위한 미국 기업 사이의 경쟁이 아주 낮다”고 지적한다. 왁스먼 의원은 “우리는 핼리버튼이 얼마나 많은 돈을 바가지 씌우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핼리버튼에 관한 정보는 미국 국민은 물론 의회도 전혀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민간계약자들은 정부조직과는 달리 기업비밀 보호를 구실로 정보자유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규정된 사항들을 비켜갈 수 있다. 또 미 의회의 감시 테두리에서도 벗어나 있다. 일리노이주 출신 하원의원 잰 샤코우스키가 “펜타곤의 민간 계약자들은 비밀전쟁(secret war)을 치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탄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해치 법(The Hatch Act)은 공무원들로 하여금 정치 캠페인에 헌금을 하지 못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미 민간기업들은 국가정책이 정치권의 장난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부윤리규정이나 임금최고 한도 규정(salary caps)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 물론 핼리버튼도 마찬가지다.

    핼리버튼은 1999~2002년에 정치헌금으로 70만달러 이상을 내놓았다. 기부 대상은 대부분 미 공화당 소속 정치인들이다. 이를테면 지난 2000년 대선 기간 중 핼리버튼은 부시-체니 공화당 후보에게 1만7677달러를 기부했다(이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정치헌금일 뿐이다. 음성적으로 건네진 정치헌금이 있다면 그 액수는 이보다 엄청 클 것이다).

    美 시사주간지가 밝혀낸 딕 체니-핼리버튼  정경유착 내막

    최근 미 정계는 딕 체니 부통령과 핼리버튼사(社)의 정경유착 의혹에 관심이 쏠려 있다. 핼리버튼은 펜타곤과 70억 규모의 전후 이라크 복구사업 계약을 맺었다. 휴스턴시(市) 중심가에 있는 핼리버튼 본부 전경.

    현재 이라크 전후 재건사업에 뛰어든 약 70개의 미국 민간기업들은 어떤 후보들보다 부시 행정부 쪽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정치헌금을 바쳤다. 국립전쟁대학 교수인 샘 가디너(예비역 공군대령)는 “이라크 특수에 뛰어든 기업 대부분은 부시 행정부 고위 인사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관급공사 업체 선정방식이 기본적으로 추천 시스템(patronage system)이 돼버렸다. 정치헌금으로 진 신세를 갚기 위한 수단이 된 것이다”고 비판한다.

    펜타곤 대변인 조지프 요스와 소령은 이 같은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고 손을 내젓는다. 공정한 사업계약을 맺기 위한 여러 안전 장치들을 두었기 때문에 편파적 정실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디너 교수는 “안전장치는 고장났다. 딕 체니를 보라. 그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할 공공의 이익과 사적인 이익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고 되받아 친다.

    핼리버튼 임원 중 한 명인 조지 시걸로스는 얼마 전 워싱턴에서 민간기업인들을 상대로 연설했다. 이 자리에 모인 기업인들은 이라크 재건사업에서 계약을 따내고 싶은 마음에 1인당 400달러의 참가비를 냈다. 모임 주최측은 미 연방기관의 하나인 해외민간투자법인(U.S. Overseas Private Investment Corporation, 약칭 OPIC). 다수의 참가자들은 이라크를 ‘제2의 클론다이크(Klondike, 캐나다 유콘강 일대의 금광지대. 1897~98년 사이에 이른바 골드러시 특수로 일시적인 호황을 누렸다)로 묘사한 안내문에 자극받아 이 자리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날 시걸로스는 참석자들의 마음을 읽은 듯 이렇게 입을 열었다. “미 독립전쟁 때 조지 워싱턴이 이끌던 군대에 실탄을 공급한 것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간기업이었다.” 이는 이라크전쟁에서 미군이 버틸 수 있는 것은 바로 핼리버튼을 비롯한 미 기업들의 지원 덕분이라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핼리버튼의 성장사는 곧 정부를 끼고 전쟁에서 떼돈을 버는, 정경유착의 기록이다. 핼리버튼의 건설엔지니어링 분야 자회사인 ‘브라운 앤드 루트(Brown & Root)’는 1962년 핼리버튼에 인수 합병됐다. ‘브라운 앤드 루트’는 1960년대 린든 존슨 대통령과 공생관계(symbiotic relationship)를 맺은 기업이다. 존슨의 자서전을 대필한 로버트 케이로에 따르면, ‘브라운 앤드 루트’가 존슨의 정치 캠페인을 전적으로 밀어주는 대가로 독점적인 관급공사 계약을 맺어왔다. ‘브라운 앤드 루트’는 1960년대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미 육군이 발주한 인프라 건설공사 계약의 85%를 차지했던 컨소시엄의 주역이었다(이 컨소시엄은 4개의 미국 기업으로 구성됐다).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 ‘브라운 앤드 루트’는 시위자들의 비판과녁이었다. 베트남 참전군인들도 ‘브라운 앤드 루트’란 회사 이름을 ‘불태우고 약탈한다’는 뜻의 ‘번 앤드 루트(Burn & Loot)’로 바꿔 부르곤 했다.

    1980년대 대부분을 하원의원으로 지낸 딕 체니는 1988년 조지 H. W. 부시가 대통령이 되자, 국방장관(1989~92년)에 임명됐다. 냉전시대의 막바지였던 때라 체니에게 주어진 임무는 미군 병력규모를 줄이고 군사기지를 폐쇄하는 것이었다. 체니-핼리버튼의 유착관계는 이때부터 본격화한다. 체니는 장관 재임 후반기에 미군 해외기지의 지원사업, 이를테면 급식, 세탁, 청소 등의 사업을 민간기업에 용역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 첫 단계로 용역사업의 타당성 검토를 맡은 기업이 다름아닌 핼리버튼이었다. 390만달러를 받고 핼리버튼이 작성한 1차보고서는 핼리버튼의 새로운 시장 창출 보고서나 다름없었다. 펜타곤은 다시 핼리버튼과 500만달러 짜리 2차 보고서 작성 용역 계약을 맺었다.

    마침내 1992년 미 육군공병단은 핼리버튼의 보고서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핼리버튼으로 하여금 향후 5년간 미국 해외기지 지원사업을 독점하도록 했다.

    핼리버튼의 이윤을 전체 계약금액의 1% 이상으로 확실하게 보장한, 말 그대로 ‘땅 짚고 헤엄치기’식 사업이었다. 핼리버튼은 1992년 말 미군이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하자 지원업체로 뛰어들어 900만달러를 벌었고, 이어 발칸 반도에서도 5년 동안 독점적 사업을 벌여 22억달러를 벌어들였다.

    클린턴 행정부가 출범한 후 펜타곤을 떠난 체니는 차기 공화당 대통령 지명전에 후보로 나설 것인가를 두고 이것저것 저울질하며 2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정치헌금을 거둬들였다. 그는 신보수주의자(neocon) 두뇌들이 모인 미국기업협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에도 관여했다. 연방선거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그 무렵 체니의 정치자금줄은 핼리버튼은 물론, 세계적 건설엔지니어링 회사인 벡텔 등 현재 이라크에서 대규모 관급공사 계약을 맺은 회사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통령후보 출마의 꿈을 접은 체니는 1995년 핼리버튼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했다. 핼리버튼의 대주주들은 체니가 비록 기업 경험은 없지만 영향력이 큰 인물들을 두루 알고 지낸다는 점을 높이 샀다. 시니어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로렌스 이글버거 또한 핼리버튼의 임원 출신이다. 그는 체니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뒷이야기를 밝혔다.

    “핼리버튼에게 체니는 세계적으로 사세(社勢)를 키울 능력을 갖추기 위한, 말하자면 섭외용 인사였다. 체니가 석유 서비스산업 업체로서 핼리버튼의 활동 중심지역인 페르시아만의 정치 지도자들과 가깝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체니 부부는 워싱턴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였던 반다르 왕자와 아주 친했다. 반다르 왕자는 딸 결혼식에 체니 부부를 사우디로 초청했을 정도다.”

    대주주들의 기대대로 체니가 CEO를 맡은 후 핼리버튼은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1998년 주요경쟁회사였던 드레서산업(Dresser Industries)을 77억달러에 인수·합병함으로써 핼리버튼은 동종업계에서 세계 제1위의 매머드급 회사가 됐다.

    그러나 합병 과정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문제가 발생해 핼리버튼은 큰 손실을 입었다. 드레서산업의 석면(石綿) 피해배상 소송에서 패해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핼리버튼의 주식도 1년 새 20%나 떨어졌다. 이를 두고 체니의 비판자들은 “옳다고 한번 믿으면 독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체니의 독단성이 악재를 낳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이라크 침공을 강력히 밀어붙였던 체니가 요즈음 이라크의 혼란상으로 인해 비판을 받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드레서산업을 합병·인수한 뒤 체니는 또 다른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이번에는 기업윤리 문제였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 리비아, 이란을 ‘테러지원국가’로 낙인 찍고 이들 3국에 대한 수출입을 엄격히 규제했다. 그러나 핼리버튼은 법망을 교묘히 피하면서 이들 3개국과 모두 거래해왔다. 이라크와는 드레서산업이 거느렸던 외국 자회사들을 통해서, 이란과 리비아와는 핼리버튼의 외국 자회사들을 통해서 거래했다. 그럼으로써 핼리버튼은 미국 법의 규제를 피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세금도 한푼 물지 않았다.

    특히 사담 후세인이 지배하던 이라크의 경우 체니는 두 개의 외국 자회사를 이용해 수백만 달러 어치의 석유채굴 관련부품과 기술서비스를 이라크에 팔아넘겼다. 이 같은 사실이 정치적 문제로 번질 조짐을 보이자, 체니는 2000년 2월 핼리버튼으로 하여금 이라크 커넥션을 끊고 이라크에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부시에게 해가 되지 않을 인물

    2000년 봄, 체니는 부시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팀의 ‘부통령 물색위원회 (Vice-Presidential search committee)’ 우두머리가 됐다. 부시의 부통령 후보 선정기준은 ‘나에게 해가 되지 않을 인물’이었다. 체니는 여러 후보들로부터 꽤나 두툼한 서류를 요구했지만, 결국은 자신을 부통령 후보로 뽑았다. 체니의 오랜 친구인 스튜어트 스펜서는 “내가 목격한 가장 ‘X 같은’ 마키아벨리적인 처신(Machiavellian fucking thing)이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흐메드 찰라비는 딕 체니가 공화당 부통령후보가 된 것을 가장 기뻐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사담 후세인 정권에 맞서는 해외 반체제단체 이라크민족회의(INC)를 이끌고 있던 찰라비는 그 전부터 체니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 둘은 워싱턴의 보수적인 모임을 통해 서로 알게 됐는데 2000년 6월 찰라비는 UPI통신 기자에게 “체니가 부통령후보가 된 것은 우리와 같은 이라크 반체제 인사들에게 좋은 일이다”고 말했다.

    찰라비의 말은 3년이 채 되지 않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현실화됐다. 부시 행정부 내에서는 사담 후세인 처리 문제가 주요 논란거리였다. 론 서스킨드가 올해 펴낸 ‘충성의 대가(The Price of Royalty)’에는 “딕 체니는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기 전부터 이라크 침공을 선동했다”는 전 재무장관 폴 오닐의 폭로가 담겨 있다.

    체니는 부시 행정부의 에너지 정책 가닥을 잡는 에너지특위(Energy Task Force)를 이끌면서 이라크 침공을 선창했다. 미 국가안보위(NSC)가 2001년 2월3일자로 작성한 극비문서는 체니의 에너지특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체니의 특위는 두 가지 상반된 정책을 합성해놓고 있다. 그 두 가지란 이라크를 비롯한 ‘불량국가들(rogue states)’의 대외정책을 점검하고, 새로운 유전지대를 마련하는 정책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안보위의 한 관계자는 “그 무렵 체니의 에너지특위가 사담 후세인 체제 전복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체니의 목표가 ‘후세인 체제를 무너뜨려 미국을 위한 새로운 석유자원을 확보한다’는 것이었음이 뚜렷이 드러났다. 그것은 핼리버튼의 이윤창출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9·11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가 벌인 ‘테러와의 전쟁’은 핼리버튼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해외 자회사를 통한 ‘불량국가’와의 거래 사실도 핼리버튼의 앞날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미 해군은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포로수용소를 지으면서 핼리버튼과 3700만 달러짜리 계약을 맺었다. 미 국무부는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아프간 카불에 미 대사관을 짓도록 핼리버튼에 1억달러를 건넸다.

    핼리버튼은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쿠웨이트, 요르단, 우즈베키스탄, 조지아공화국, 그리고 이라크에서 왕성한 기업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2년 핼리버튼의 연차보고서는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이 핼리버튼에 새로운 성장기회를 가져다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펜타곤이 이라크 석유산업 복구를 위해 핼리버튼과 70억달러짜리 계약을 맺은 것은 전쟁이라는 비상국면하에서 이뤄진 일이다.

    지난 2002년 가을 핼리버튼은 펜타곤으로부터 이라크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이라크 유전지대가 파괴되고 불탈 경우에 대비한 계획을 세우라는 용역을 비밀리에 받았다. 이 무렵 미 의회에서는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 침공에 전권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 논의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이라크 침공 직전인 2003년 3월초 미 육군은 핼리버튼에 이라크 유전지대를 맡겼다. 그러고는 3월20일 전쟁이 터졌다. 그러나 이라크의 주요 유전지대 1500개 유정(油井) 가운데 단 9개만 손상을 입었다. 많은 유정이 불에 타고 파괴될 것이라는 펜타곤의 예측은 빗나갔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 펜타곤은 이라크 전역의 석유산업 재건 용역사업을 핼리버튼에 넘겼다.

    재건 특수 독점

    핼리버튼의 뒤에는 딕 체니란 든든한 후원자가 버티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재건 프로젝트는 총 200억달러가 넘는 규모다. 부시 행정부에 선을 대고 있는 한 기업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라크 정책에 관한 모든 것은 체니의 손을 거친다. 그가 모든 것을 주무르고 있다.” 이는 이미 이라크에서 110억달러의 실적을 올린 핼리버튼을 놓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이 기업인의 이어지는 말. “러시아처럼 요즈음의 미국 또한 부패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뇌물이 오가는 것은 아니다. 체니는 펜타곤에 전화를 걸어 ‘이번 계약을 핼리버튼과 맺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요직에 있는 인사를 찾아가 저녁식사를 함께함으로써 일은 끝난다.”

    전쟁 후 이라크는 ‘재건 특수’가 기다리고 있는 기회의 땅이 됐다. 이 기회를 통해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 이를테면 기업인, 그들과 공생하는 변호사들이 이라크로 몰려가고 있다. 더글러스 페이스 국방차관(정책 담당)의 법률 파트너였던 마르크 젤은 ‘이라크 국제법 그룹’이란 법률회사를 차려놓고 이라크 진출을 노리는 기업인들을 돕고 있다. 아흐메드 찰라비의 조카 사렘 찰라비도 기회를 잡으려고 뛰고 있다. 살렘은 법률가들과 기업인들을 하나로 묶어 이라크 투자자문회사를 차렸다. 그는 삼촌인 아흐메드 찰라비가 위원으로 참여하는 이라크 과도통치위의 법률자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사업을 하려는 기업인들은 혼란을 느끼고 있다. 워싱턴 정가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공화당계 로비스트 찰리 블랙은 이라크인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를 홍보하는 조직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계획을 추진중이다. 일이 제대로만 진행된다면 이라크 최초의 로비스트 조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블랙은 불만이다.

    “바그다드에서는 모든 결정권은 펜타곤이 쥐고 있으니 펜타곤으로 가보라고 한다. 그래서 펜타곤에 가면 바그다드(폴 브레머의 이라크 임시행정청)에서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런 와중에 핼리버튼만 돈을 벌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가까운 사람만 챙겨주기(cronyism)가 정도가 심해졌다는 것을 뜻하는 건가. 나도 그렇게 챙겨주는 사람을 찾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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