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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기획|달아오른 고구려 논쟁

‘중국판 문화 패권주의’와 정면대결

한국의 시각으로 ‘동북아史’다시 쓴다

  •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khmzip@donga.com

‘중국판 문화 패권주의’와 정면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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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지경이 되도록 한국은 중국의 한국 고구려사 빼앗기 전략을 몰랐던 것일까.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1980년대에 시작돼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됐다. 단국대 서영수 교수는 중국 고구려사 연구의 변화를 3단계로 설명했다.

1950년대부터 1980년까지(1단계)는 중국 각종 교과서에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로 기술되는 등 전통적인 견해가 유지됐다. 하지만 1980년대(2단계) 들어 ‘일사양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고구려사의 한국사 귀속 문제를 비판하는 한편, 427년 고구려의 평양 천도 이전 시기를 중국사로, 천도 후를 고구려사로 구분하는 일종의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다 1990년대(3단계)에 접어들어 ‘모든 역사는 중원(中原)으로부터’라는 중원 중심의 민족사 연구인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이념화하고 고구려사를 전면적으로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노골화됐다.

1993년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책은 고구려를 한국사라고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쑨진지(孫進己) 등 고구려사를 중국사 입장에서 연구하는 학자도 있었지만 중국 당국이 우방국가인 북한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해 이들의 발표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중 국교 수립 후 1993년 8월 지안시에서 열린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예상치 않게 이 문제가 불거졌다. 중국 한국 북한 일본 대만 홍콩 등 각국 학자들이 참석한 토론회에서 고구려 귀속문제를 놓고 당시 지안박물관 겅톄화(耿鐵華) 부관장과 북한의 원로 역사학자 박시형이 설전을 벌였다. 이어 쑨진지가 “역사상 고구려는 오랫동안 중국의 중앙 황조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후예는 조선족이라 할 수 없고 대부분 오늘날 중국의 각 민족이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중국측 입장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쑨진지는 더 나아가 ‘동북민족사연구’(1994년)에서 한국사의 범위를 신라사로 한정하고, 만주 외에 한반도 북부까지도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했다.

이후 중국 동북부 지역 대학마다 고구려 혹은 한국 관련 연구소들이 설치됐다. 1996년에는 아예 중국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이 앞장서 고구려 문제를 중점연구 과제로 선포했다.

‘아, 고구려’의 만시지탄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고구려 붐’이 일었다. ‘고구려사’를 집필한 이화여대 신형식 교수는 1980년대 말부터 북한의 연구성과가 국내에 소개되고 한·중 수교 이후 중국(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접하게 됨으로써 고구려 연구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됐다고 설명한다. 이 전까지 국내 역사학계의 고대사 연구는 신라사 중심이어서 상대적으로 고구려는 외면당하고 있었다. 문헌사료 부족과 만주와 북한 고구려 유적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993~94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고구려 문화유적 전시회 ‘아! 고구려’는 만주지역 한민족 역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학문적 연구 열기도 높아져서 1990년대 중반 이후 고구려 관련 박사학위 논문이 이어졌다(금경숙 ‘고구려 전기의 정치제도 연구’, 임기환 ‘고구려 집권체제 성립과정 연구’, 박경철 ‘고구려의 국가형성 문제 연구’, 여호규 ‘1~4세기 고구려 정치체제 연구’,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연구’, 최종택 ‘고구려 토기연구’, 강현숙 ‘고구려 고분연구’ 등).

하지만 한국에서의 ‘고구려 붐’은 대중의 일시적 관심과 개별적인 연구성과에 머물렀을 뿐 중국에서처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프로젝트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고구려사가 우리 역사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이하게 대처한 측면이 있고, 외교적으로 예민한 만주지역 문제를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의식도 작용했다.

서울대 송기호 교수는 ‘역사비평’(2003년 가을호)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으나 굳이 상대방을 자극하여 연구마저 장애를 받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참아왔다”고 고백했다.

고려대 최광식 교수는 1999년 베이징대 초빙교수로 머물 당시 이 문제를 감지하고 한국고대사학회에서 학술발표회를 준비했으나, 2002년 12월에야 이루어졌다. 결국 고대사를 둘러싼 한·중 역사분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그 사이 많은 고대사 연구자들은 현장답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발해 ‘친자확인소송’

1994년 헤이룽장성 발해박물관에 들렀던 경성대 한규철 교수는 발해사 연구자라는 이유만으로 입장이 거부됐다. 그후 중국 답사 때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연락을 하고, 가급적 행선지를 정확히 알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었다. 그렇게 조심을 해도 허락없이 답사를 했다고 벌금을 물거나 필름이나 카메라를 빼앗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중국 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돼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중 역사전쟁을 처음 실감한 것은 고구려가 아닌 발해사 연구자들이었다. 중국이 발해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20여년 전부터 진행됐다.

송기호 교수에 따르면 20년 전 중국은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상고사 체계 대신 숙신-읍루-물길-말갈로 이어지는 계보도를 공식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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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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