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5대 교육기관의 치열한 위상경쟁

수능날개 달고 EBS 독주 ‘맏형’ 교육개발원은 뒷짐

  •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4-03-29 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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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대 교육기관의 치열한 위상경쟁

    EBS 수능방송에 대해 설명하는 고석만 사장(왼쪽)과 2004년 수능 복수정답 파동.

    1월27일 안병영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 장관은 교육 관련 연구와 사업을 집행하는 기관 대표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참석자는 한국교육개발원 이종재 원장, 한국교육학술정보원 김영찬 원장,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정강정 원장,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김장호 원장, 그리고 한국교육방송(EBS) 고석만 사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안 부총리는 “교육은 교육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교육 관련 기관들이 네트워크를 이루어서 함께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며 협조를 당부했다.

    그리고 2월17일 사교육비 경감대책이 발표됐다. 안 부총리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브리핑룸에서 “학교교육의 경쟁력을 높여 사교육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겠다”며 10대 핵심추진과제를 설명할 때, 뒷줄에는 직업능력개발원장을 뺀 4명의 기관장이 모두 배석했다. 비록 방송위원회(EBS), 국무조정실 산하 인문사회연구회(한국교육개발원·한국교육과정평가원·한국직업능력개발원), 교육부(한국교육학술정보원)로 소속은 달랐지만, 사교육과의 전쟁을 선포한 ‘교육 패밀리’의 결속을 보여준 자리였다.

    그러나 교육부가 발표한 ‘사교육비 경감대책’이 EBS 수능방송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EBS의 위상만 높여놓았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또 이를 계기로 교육 관련 연구기관들의 역할과 위상의 재조정 문제도 거론되고 있다.

    먼저 수능 인터넷 서비스(VOD)의 주도권을 놓고 한국교육학술정보원과 EBS가 벌인 신경전은 EBS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EBS가 위성과 인터넷 콘텐츠를 모두 주관하게 된 것이다.

    애초 교육부의 구상은 EBS가 지상파를 맡고, 에듀넷(www.edunet4u.net)을 통해 인터넷 교육을 해온 교육학술정보원이 인터넷 서비스를 맡는다는 이원화 전략이었으나, EBS가 자체 서버구축을 고집해 일단 4월1일까지 10만명이 동시 접속할 수 있도록 서버를 확충하고, 교육학술정보원은 1만8000명 규모의 서버를 지원하기로 했다.



    ‘2·17 사교육 경감대책’에 따라 EBS는 인터넷 강의를 위한 서버구축과 방송제작비를 포함해 2004년 230억원, 2005년과 2006년에 각각 170억원을 지원받는다.

    사실 2·17대책이 내세운 10대 추진과제 중 핵심이라 할 e-러닝(learning) 체제는, 기존 EBS플러스1 위성채널을 수능전문채널로 특화해 인터넷 서비스까지 확대하는 것 외에, 사이버 가정학습 지원체제 구축이라는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사이버 가정학습은 교육학술정보원이 지난해 여름 사이버학습특임실까지 구성해 주력해온 사업.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은 1989년 교육개발원 내에서 학습보조용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업무로 출발해 학교종합정보관리시스템 및 학생생활기록부 전산화를 주도했고, 전국 초·중등학교 정보 인프라 구축과 교육 업무를 맡아왔다. 에듀넷 서비스를 통해 지난 10여년 동안 학교의 정보활용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수능방송 총력지원체제

    교육학술정보원 경영기획실 정성무 실장은 “사이버 가정학습에는 세 종류가 있다. 1단계는 에듀넷처럼 교육 콘텐츠를 컴퓨터를 통해 학습하는 것, 2단계는 사이버 교사를 도입해 질의응답식 시스템을 갖추는 것, 3단계는 사이버 학급을 편성해 담임교사가 방과후 과제를 내주는 등 학습관리를 해주는 것이다. 교육 콘텐츠, 사이버 교사, 학습관리와 지도가 동시에 가능한 시스템으로 금년 초 가동을 목표로 테스팅까지 마친 상태”라고 했다.

    교육부도 2·17대책에 사이버 학급을 시범운영하고 연차적으로 확대 실시한다는 계획을 마련했으나 수능방송 총력체제가 되면서 이 안은 ‘잠수’해버렸다. 교육학술정보원은 EBS 수능방송이 시작되면 단지 서버만 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평가’ 등의 부가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차별화 전략을 마련하는 데 부심하고 있다.

    수능방송 인터넷 서비스와 관련해 EBS와 교육학술정보원 사이의 경쟁은 ‘교육정보화’라는 대세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불가피한 현상이다. 다매체, 다채널이라는 매체환경에서 EBS는 더 이상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됐고, 더욱이 TV라는 아날로그 매체와 컴퓨터 네트워크라는 디지털 매체의 융합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방송과 통신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도 EBS에는 위협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에듀넷 520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교육학술정보원 외에도 각 시도교육청이 자체 교육방송 체계를 갖춰 EBS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5대 교육기관의 치열한 위상경쟁

    2·17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발표하는 안병영 교육 부총리(오른쪽)와 EBS 수능위성방송.

    EBS는 1999년 교육부 산하기구에서 방송위원회 산하 한국교육방송공사로 위상이 바뀌면서 교육부의 직접적인 재정지원을 받기 어렵게 됐다. 당시 정부는 자체자금 조달을 통한 교육프로그램 제작 및 운영을 전제로 EBS의 공사화를 추진한 것. 이에 따라 교육부는 EBS 프로그램 제작에 관여하지 않는 대신, 직할 체제인 교육학술정보원 육성에 주력해온 것이 사실이다.

    교육부의 재정지원이 줄어들자 EBS는 인터넷 동영상, 오디오 서비스를 유료화하고 방송교재 판매에 나서는 등 수익사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공영방송이 학생을 상대로 장사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자구책 마련에 나선 EBS가 지난해부터 들고 나온 것이 수능전문채널. 위성을 이용한 수능전문채널을 만들어 인터넷 방송을 하면 사교육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데 당시 윤덕홍 부총리도 공감하고 이 사업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사이버 학습이라는 측면에서 교육학술정보원의 영역과 겹쳐 교육부 실무진이 난색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EBS는 먼저 한나라당 쪽을 설득, 인터넷 방송을 위해 200억원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12월 열린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일제히 EBS 지원에 나섰다. 박종근 의원은 “인터넷 쌍방향 방송 서비스를 통해 교육의 평준화를 이루고 사교육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했고, 이성헌 의원은 “교육방송에서 교육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질의·응답 쌍방향 통신을 위해서는 별도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원사격을 했다.

    여기에 참여정부 출범초기 교육행정정보시스템 파동으로 1년을 낭비한 교육부가 안병영 부총리 체제로 바뀌면서 서둘러 발표한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핵심이 e-러닝에서 EBS는 여야로부터 동시에 지원을 받는 ‘행복한’ 처지가 됐다.

    2·17대책이 발표된 이틀 후 열린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답변에 나선 안 부총리는 5년 동안 1조6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EBS의 경우 한나라당이 이번에 수고를 많이 하셔서 200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다”는 말로 한나라당에 공을 넘기며 2·17대책에 더는 ‘딴죽’을 걸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수능방송이 사교육비 경감의 궁극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것은 EBS도 잘 알고 있다. 2월1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고석만 EBS 사장은 “방송과 통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같이 가는 신모델을 마련하겠다”고 비전을 밝히면서 “EBS 수능강의는 새로운 대학입시제도가 도입되는 2008학년도까지 계속될 것”이라며 그 한계를 분명히 했다.

    TV과외와 e-러닝

    사실 TV과외는 전혀 새롭지 않다. 이미 1980년 과외금지조치와 함께 TV과외(가정고교방송)가 등장했다가 곧 시청자들에게 외면당한 경험이 있고, 1989년에 과외금지 해제조치의 보완책으로 TV과외가 다시 등장했다. 오랫동안 금지됐던 과외가 허용되면서 과열될 기미를 보이자 정부는 문제풀이 위주의 EBS ‘고교가정학습’ 프로그램으로 과외 수요를 억제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그때도 “사회문제가 될 만큼 과열된 과외공부를 완화해 학부모의 부담을 덜어주고, 도농간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는 해설이 따랐다. 덕분에 시골 흑백TV가 컬러로 교체되던 시절이었다.

    TV과외의 효과를 입증하는 데는 교육개발원이 앞장섰다. 1990학년도 대입 학력고사에서는 TV과외 내용의 시험반영률이 77.5%였고 다음해에는 80%까지 올라갔다는 자료를 내놓았다. 교육개발원은 TV과외가 다룬 문제 가운데 문항의 진술방식이 아주 비슷하거나 답지의 순서, 진술형태가 약간 다른 것을 ‘적중문항’, 주·객관식 형태를 바꾼 것을 ‘유사문항’으로 취급, 80%에 가까운 적중률을 보였다고 치켜세웠다. TV과외가 과열과외 해소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던 1990년 EBS는 KBS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나 TV과외는 본격 시행된 지 2년도 채 안 돼 “입시위주 교육이 낳은 비교육적 프로그램”이라는 질타 속에 그 효과를 의심받기 시작해 대입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새로운 입시제도가 도입된 1994학년도부터 중단됐다. 당시 교육방송 관계자는 “입시제도가 바뀐 것이 계기가 됐지만 근본적으로 문제풀이 중심의 TV과외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교육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방송내용을 바꾸겠다”고 했다. TV과외의 적중률을 자랑하던 초기와는 180도 달라진 태도다. 언론도 “TV라는 비정상적 학습행위는 이제 끝내야 마땅하다”며 근시안적인 교육정책을 꾸짖었다.

    고교교육의 목적이 수능인가

    1997년 여름 무궁화 위성방송채널을 이용한 위성과외 시대가 열렸다. 이번에도 교육부는 사교육비 부담을 덜어주고, 농어촌 지역 학생들에게 학습보충의 기회를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성과외는 바로 안병영 교육부 장관 시절(1995년 12월~1997년 8월)에 결정된 정책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반대 여론이 높았다. 고려대 전성련 교수(교육학)는 ‘위성TV과외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토론회에서 “교육부의 방침은 별도의 과외를 받지 않더라도 위성과외방송 시청만으로 수능대비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나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며 “고교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수능대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전 교수는 “이것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부가 민심흡수용으로 내놓은 정치적 고려라면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5대 교육기관의 치열한 위상경쟁

    EBS 수능전문강의를 앞두고 교재를 고르고 있는 학생들.

    당시 위성과외는 내수시장 침체에 허덕이던 가전업체에 1조원에 달하는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7년 뒤, 우리는 놀랍게도 똑같은 상황에 놓였다. TV과외라는 표현 대신 e-러닝(인터넷 학습)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날로그 방송에서 디지털로 무게중심이 옮아간 것을 빼면 교육부의 주장, 언론의 해설, 시민들의 반응까지 이렇게 똑같을 수가 없다.

    이 점을 의식한 듯 안병영 부총리는 기자간담회에서 “교육문제에 있어 경천동지할 대책은 혼란만 부른다”며 “수능출제기관인 교육과정평가원이 참여한 e-러닝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지금까지 2·17 사교육비 경감대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대단히 좋은 편이다. 교육개발원 온라인모니터링시스템을 통해 120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6%가 “단기적으로 사교육 흡수, 중·장기적으로 공교육 내실화”라는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기본방향에 대해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조사대상의 70%가 EBS 수능방송 및 인터넷 강의내용에서 수능문제가 출제된다면 사교육비 경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지난 20여년간 TV과외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한 교육계 원로는 “e-러닝도 국소마취제에 불과하다. 교육부가 총선을 앞두고 사교육비 경감대책에 모든 것을 건 것 같다”며 교육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우려했다.

    어쨌든 EBS는 2·17대책의 최대수혜자가 된 것은 분명하다. 수능방송을 계기로 지상파 방송을 단순 재방송하던 기존 인터넷 VOD 서비스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자신의 학습능력에 맞춰 강의를 받을 수 있는 맞춤형 교육체제를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장기적으로는 수능강의를 인터넷으로만 제공하고 지상파 방송에서 아예 빼는 방안도 모색중이다. 그러나 인터넷 서비스 부분은 교육학술정보원의 에듀넷 영역과 상당 부분 겹쳐, 일각에서는 두 기관의 통합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수능방송 시작과 함께 EBS만큼이나 분주한 곳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하 평가원)이다. 안 부총리는 3월4일 다시 고석만 EBS 사장, 정강정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을 만나 방송강의와 수능출제의 연계를 당부했다. 처음부터 수능방송의 성패는 2005학년도 수학능력시험에 얼마나 반영되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방송강의와 수능출제를 연계한다’는 원칙만 정했을 뿐 어떤 방식으로 반영하느냐는 결정되지 않아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3월12일 평가원에서 열린 ‘대학수학능력출제·관리개선방안’ 공청회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됐다. 토론자로 나선 상계고 김재준 교사는 “학교현장에서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EBS 강의에서 몇 문항이나 나올 것이냐 하는 점”이라고 했고, 평가원 수능팀에서도 같은 어려움을 호소했다. 평가원 대학수학능력시험연구관리처의 남명호 처장은 “EBS에 방영된 내용을 그대로 출제할 수는 없고, 교육부도 그런 방식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학교교육을 열심히 받고 학원 가는 대신 EBS 강의를 보면 충분하다는 의미 아니겠느냐”고 원칙론만 되풀이했다.

    성공의 열쇠 쥔 평가원

    그러나 박도순 고려대 교수(교육학·전 평가원장)는 처음부터 확실히 해놓지 않으면 이 문제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방송강의에서 출제한다는 의미가 그 내용과 수준에 맞춘다는 것인지, 아니면 방송에서 풀어준 문제유형 그대로 나온다는 것인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전자라면 지금까지의 출제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후자라면 평가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교재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내지 않는 것이 평가의 원칙이다. 문제유형을 그대로 내면 암기위주의 교육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민들은 똑같이 나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수능시험을 총괄하는 평가원만 어렵게 됐다.”

    몇 년째 평가원은 대입수능 때문에 바람잘 날이 없다. 연거푸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사회적 질타를 받은 데다 지난해에는 오답 시비와 복수정답 인정, 학원 강의 경력이 있는 출제위원을 포함해 특정대학 출신 출제위원이 58%나 되는 등 출제관리상의 허점을 드러내 결국에는 이종승 원장이 사퇴했다. 이 와중에 수능출제를 담보로 사교육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까지 떠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평가원 수능팀은 초비상이다.

    이와 함께 재차 거론되는 것이 평가원의 위상 문제다. 현재 평가원은 교육개발원, 직업능력평가원과 함께 국무조정실 산하 인문사회연구회 소속으로, 수능시험 기본계획 수립 등의 업무는 교육부로부터 위임받아 시행하면서 국무총리실의 감독을 받아 이원적 관리·감독체계의 비효율성이 누차 지적됐다.

    2002년 8월 고교 한국근·현대사 검정 교과서에 현 정권을 미화한 부분을 놓고 책임을 가리는 과정에서 이원적 관리·감독의 문제점이 노골화됐다. 당시 이상주 교육 부총리는 “교과서 검정 업무는 이를 위탁받은 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성동 평가원장은 “평가원은 교과용 도서의 검정과정만 관리하지 법령상 검정 내용에 관여할 수 없도록 돼 있다”고 발뺌을 한 것. 이에 이 부총리가 “위탁했던 것을 도로 가져와야겠다”고 할 만큼 교육부와 평가원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더욱이 김 원장이 교육부가 작성한 교과서 대책문건을 한나라당에 유출한 것이 알려지면서 이 문제는 정치쟁점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결국 김 원장은 수능난이도 조절 실패와 전국연합학력고사 채점 오류, 근·현대사 교과서의 교육부 대책문건 유출 등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나, 평가원을 다시 직속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교육부의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수능에서는 출제위원 자격시비가 일자 교육부 모 대학지원국장이 “평가원에 기관경고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가 법적으로 교육부가 평가원에 대해 직접 경고조치를 할 수 없음이 밝혀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평가원은 1985년 교육부 산하 중앙교육연수원 고시과가 확대 개편돼 중앙교육평가원이 됐다가 1991년 국립교육평가원으로 바뀌어 초중고생의 학력평가와 대입수능, 각종 국가고시 등을 주관해왔다. 그러다 1994년 정부조직개편 때 평가원을 폐지하고 수능출제 및 학력평가기능을 한국교육개발원으로 넘기는 안이 검토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1998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으로 바뀌면서 수능시험 등의 교육평가 업무 외에도 교육과정 연구 및 개발 업무를 수행하는 기구로 오히려 그 규모가 확대됐다.

    그리고 1999년 제정된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무조정실 소속이 돼 현재 지도·감독권한은 국무총리에게 있다. 평가원을 다시 교육부 소속으로 이관하는 문제는 교육부, 평가원, 국회도 대체로 찬성하는 쪽. 지난해 수능시험 직후 열린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설훈 의원은 “국무총리는 교육문제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수능시험에 관한) 정확한 지휘와 그에 따른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평가원이 교육 부총리 산하로 들어와야 한다”며 “평가원의 위치를 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연 평가원이 국무조정실에서 교육부로 다시 옮겨오면 매년 되풀이되는 수능파동이 사라질까. 박도순 교수는 “근본적으로 수능체제를 개선하지 않는 한 관리감독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한다.

    “국립교육평가원이 교육과정평가원으로 바뀔 때도 7차교육과정이 적용되는 2005학년도 수능부터 ‘문제은행’방식을 도입하겠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이번에 내놓은 수능개선방안에도 출제위원들이 합숙을 하면서 문제를 만드는 폐쇄형 출제방식을 개방형 출제, 즉 문제은행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검토중인 것으로 안다. 수능출제방식의 대안으로 항상 문제은행이 거론되지만 막상 실행되지 못하는 이유는 수능체제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교육과정이 계속 바뀌는 데다 내년에 수능이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데 문제은행을 만들어서 어쩌겠나. 평가원장으로 있으면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시험적으로 별도의 수능팀을 가동해 매년 언어와 수리, 영어 등 3개 영역에 걸쳐 문제은행을 만들어보았지만 한 번도 쓰지 못하고 캐비닛에서 잠자고 있다. 당장 올해 치를 수능의 출제방향도 결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제은행이 무슨 의미가 있나.”

    올 8월 대통령직속 교육혁신위원회가 대학입학제도 혁신방안을 발표하면 2·17대책의 유효기간은 기껏해야 3년이라는 지적도 있다. 단기적으로 사교육 경감효과가 있더라도 3년짜리 정책에 별도의 수능채널까지 만들어 돈을 퍼붓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일부 공개된 교육혁신위 안에 따르면 2008학년도 대학입시부터 교사의 학생평가가 강화돼 ‘교육이력철’(내신)을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기존 수능시험 대신 전국 혹은 시도단위의 학력고사를 보조선발도구로 활용한다. 이렇게 되면 수능제도는 사실상 폐지되는 것이나 다름없어 EBS 수능방송의 실효성도 사라지게 된다.

    교육혁신위도 2·17대책이 공교육의 내실화를 다지기도 전에 EBS를 앞세워 오히려 학교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을까 우려를 표시했다. 안병영 부총리도 이 점을 의식해 수능방송을 포함한 사교육비 경감대책은 ‘처방약’이 아니라 일종의 ‘해열제’라고 설명했으나, 단기적 효과를 노린 사교육 경감대책의 한계는 분명했다.

    애초 사교육 경감대책의 기초를 잡은 것은 한국교육개발원이었다. 2003년 5월 한국교육개발원에 ‘사교육비 경감대책연구팀’이 설치됐고 여기서 마련된 초안을 가지고 전문가 토론회, 지역순회 공청회, 수많은 간담회를 거쳐 연말까지 사교육비 경감종합대책을 발표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참다운 학업성취’를 앞세운 교육개발원의 ‘사교육비경감대책’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 “새로울 게 없다”는 비난여론이 빗발치자 교육부가 직접 나서서 챙긴 안이 2·17사교육 경감대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1972년 창립 이래 한국 교육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온 연구기관으로서 교육개발원의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평준화정책은 어디로

    뒤이어 교육개발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2월23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산하 교육개혁연구소가 발표한 ‘고교 평준화 정책이 학업 성취도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실증분석’ 연구가 그것. KDI 연구결과는 한마디로 ‘고교평준화를 해제하면 학생들의 학력이 신장된다’는 내용으로, 평준화 기조 유지를 주장해온 교육개발원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KDI의 주장대로 ‘평준화 해제’ 여론이 급물살을 타자 교육개발원은 KDI 연구방법론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그동안 교육개발원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자성도 이어졌다.

    한국교육개발연구원의 장수명 부연구위원은 “경제연구소에서는 평준화를 학교선택권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규제정책’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번 연구에 그런 시각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그렇다면 교육개발원은 자신 있게 평준화 유지를 주장할 만한 연구를 해왔는가. 지금까지 교육개발원이 해온 평준화 연구는 주로 여론조사, 만족도 조사에 머물러 평준화, 비평준화의 학업성취에 관련된 실증적이고 장기적인 연구가 부족했다”고 말한다.

    이 사건을 통해 교육개발원과 교육과정평가원의 연구공조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KDI 연구의 기초자료는 교육과정평가원이 수집한 것으로, 학업성취도 연구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평가원측은 개인신상정보의 유출을 엄격하게 규제해 연구자들 사이에서 학업성취도 연구는 거의 불가능의 영역으로 취급됐다. 실제 이종재 교육개발원장이 자료요청을 위해 수차례 평가원을 방문했으나 거절당했다.

    KDI의 연구가 가능했던 것은 평가원에서 근무했던 연구자가 허가 없이 자료를 유출했기 때문이다. KDI의 연구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평가원은 2시간 만에 반박자료를 냈고, 서둘러 동일자료를 분석해 평준화 정책의 효과를 입증하는 논문을 발표하겠다고 했다가 중단했다. 평가원은 평준화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이 아니며, 정책 연구는 교육개발원의 몫이라고 설명했으나 실제로 부처간(교육부와 재정경제부) 싸움으로 비치는 것을 우려한 교육부가 발표를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시사저널’ 3월11일자).

    맏형 교육개발원의 역할

    교육개발원은 후속조치로 ‘KDI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평준화 정책연구에 대한 교육개발원의 입장과 대안’이라는 자체 보고서를 내 연구와 정책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첫째, 교육연구에 관련된 심층적인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지 않았다. 2003년에야 비로소 교육개발원 자체 조사를 시작해 고등학교·중학교에 대한 횡단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둘째, 교육연구기관간 자료 및 정보교류, 체계적인 자발적 연구협력이 없었다. 셋째, 교육연구기관들은 중요한 교육문제에 대해 주도적으로 연구하여 교육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교육부와 연계된 상황과 사안에 대처하는 미시적인 연구접근에 빠져 전체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평준화 논란은 교육정책 연구의 메카로서 교육개발원의 떨어진 위상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교육개발원은 1972년 설립 이래 1979년 교육과정연구 전담 개발기관(1979년), 교육과정 개편 및 교과용 도서 연구·개발 기관(1981년), 부설 교육방송(1990년), 부설 멀티미디어교육지원센터(1996년) 설립 등 꾸준히 교육의 영역을 확대해왔다.

    그러나 1997년 이돈희 원장 재임시 한꺼번에 기능분리가 이뤄지면서 연구원들이 대거 이동해 교육개발원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게 됐다.

    이 무렵 교육과정연구업무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이관됐고, 교육방송 및 멀티미디어정보센터가 한국방송원으로 분리독립했다 다시 교육방송은 공사체제로 전환했으며, 멀티미디어정보센터는 첨단학술정보센터와 함께 한국교육학술정보원으로 통합되고, 직업기술 교육연구 업무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으로 이관됐다.

    연구·사업의 주도권 다툼

    하지만 기능분리 이후 각 연구기관들이 공동연구 등 상호협력보다는 불필요한 경쟁에 치우쳐 업무의 중복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많다. 예를 들어 평생교육을 놓고 교육개발원과 직업능력개발원이 주도권 싸움을 하다 결국 2000년 교육개발원에 평생교육센터가 설치됐고, 2003년 직업능력개발원 내에 인적자원개발지원센터가 만들어지면서 사실상 기능의 중복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직업능력개발원 2대 원장으로 재직했던 강무섭 강남대 평생교육원장은 “1999년 김덕중 장관 시절 평생교육센터를 어디에 설치할 것이냐를 놓고 교육개발원과 직업능력개발원(이하 직능원) 양쪽이 사업계획서를 냈고, 직능원 쪽으로 가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다 장관이 바뀌면서 2주일 만에 개발원으로 결정됐다”고 말한다.

    또 강 원장은 “평생교육이 과거에는 가정주부들이 교양을 쌓는 수준으로 인식됐으나 OECD국가에서는 이미 1980년대부터 평생교육의 핵심을 직업능력개발로 보았다”면서 “평생교육 업무는 직능원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노동부와 교육부가 공동출연해 설립한 직능원은 연구원들도 노동계와 교육계로 갈라져 알력이 있을 만큼 내부사정이 복잡하다보니 교육개발원과 주도권 경쟁을 할 처지가 아니다.

    올해 교육개발원에 설치된 교원·교육과정정책연구실도 교육과정평가원과의 중복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교육개발원 측은 “교육과정이라도 정책연구는 개발원이 맡고, 평가원은 내용과 실행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가업무도 학교평가는 교육개발원이, 학업성취도 평가는 평가원이 맡는 것으로 분리했으나 이 역시 교육현장을 외면한 단순 기능분리라는 지적이다.

    또 교육개발원은 최근 교육부로부터 교육통계 업무를 넘겨받았다. 교육통계를 수요자 중심으로 만들어보자는 취지는 좋으나 교육개발원이 본연의 연구와 정책개발 업무는 뒷전이고 지나치게 ‘사업’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2002년 부임한 이종재 원장은 국내 최대의 교육연구기관이라는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하도록 교육개발원을 바꿔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취임사에서 ‘연구보국(硏究報國)’이라는 말을 앞세웠다. 연구가 연구로 끝나지 않고 현장에 바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그러나 프로젝트 따기에 바쁜 현실에서 현안연구는 교육부 수탁과제에 머물고 있고, 그마저도 효과적인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硏究報國의 과제

    ‘교육개혁을 하려면 차라리 교육부를 해체하라’고 할 만큼 교육관료주의를 비판해온 교육시민단체들은 최근 교육부의 정책생산 기능을 분담하고 있는 교육 관련 연구기관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는 올해 비판의 칼을 교육개발원 쪽으로 겨누고 있다. 교육개발원이 독립적인 연구보다 교육부 입맛에 맞는 연구를 하고 잘못된 정책을 양산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안승문 서울시교육위원은 “그동안 교육개발원이 내놓은 처방이 과연 한국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따져 묻겠다. 교육계 갈등이 심화되니까 ‘교단안정화대책’을 연구한다고 하면서 1억5000만원짜리 프로젝트를 시행했으나 전국을 다니며 토론회를 개최한 게 전부다. 지방교육행정체제혁신연구는 자그마치 10억원짜리 프로젝트인데 이리저리 연구하청을 주어서 몇 개월 만에 보고서 만들고 공청회 하면 끝이다. 누구를 위한 연구인지 묻고 싶다.”

    이에 대해 교육개발원의 한만길 연구원은 “교육연구가 비판적이기보다 기능적인 데 치우치다 보니 우리 사회의 문제와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해결방법도 찾아내지 못한 측면이 있다”면서 “교육개발원은 교육부 정책을 뒷받침할 뿐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교육개발원의 보고서는 “(평준화) 논쟁을 계기로 교육연구의 질을 제고하고 교육정책 수립과 집행의 합리성을 높이며, 국가교육연구기관과 교육부의 역할을 확고히 재정립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연구기관들이 자료수집과 유통, 분석에 관한 상호 불신과 비협조를 없애야 한다”고 당부했다.

    교육부가 몸통이라면 연구기관들은 머리요 손발이다. 한마디로 손발이 잘 맞아야 교육이 잘 된다. 소모적인 논쟁과 위상경쟁은 국력 낭비일 뿐이다.

    각 부처 소속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이 국무조정실 산하 연구회 체제(경제사회 인문사회 기초기술 산업기술 공공기술 5개 연구회 내 42개 연구기관)로 바뀐 지 4년째를 맞아 정부는 연구회 체제 개편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이미 연구회 체제개편을 검토하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며 일부 기관은 원래 부처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기관들은 2~3개의 연구회로 재편성할 것으로 보인다.

    매년 수능 내홍을 겪는 교육과정평가원은 교육부 소속으로 개편되는 것이 유력하다. 그러나 연구의 독립과 자율성을 위해 연구회 체제로 개편한 지 4년 만에 다시 감독과 관리를 위해 각 부처 소속으로 옮기겠다는 논의는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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