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천하무적’ 이창호 시대는 가는가

방패 대신 창검 들다 불의의 일격

  • 글: 정용진 바둑평론가·타이젬 바둑웹진 이사 sodol@tygam.co.kr

    입력2004-03-30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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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무적’ 이창호 시대는 가는가

    제47기 국수전 최종 5국에서 맞붙은 이창호 9단과 최철한 7단(왼쪽)이 수읽기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창호 9단을 ‘석불(石佛)’이라고 부른다. 그런 그가 흔들리고 있다. 세월의 풍화작용 외에는 천년만년 미동조차 없을 것 같던 이 반상(盤上)의 돌부처에게 요즘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철(鐵)의 수문장으로 신기에 가까운 방어율을 자랑하던 무적 이창호가 연일 실점을 허용하고 있다. 이창호가 지는 것이 뉴스가 된 지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요즘같이 화제에 올랐던 적은 없었다.

    【최철한】

    올해 만 19세. 보송보송한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이 소년기사의 별명은 ‘독사’다. 요즘 ‘천하의 이창호’를 가장 괴롭히는 ‘바둑짱’으로 2004년 3월2일 열린 제47기 국수전 도전5번기에서 이창호 9단을 3대2로 물리치고 아홉 번째 국수(國手)에 올랐다.

    바둑기사에게 국수 타이틀은 영원한 꿈이다. 굳이 반세기에 가까운 전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국수라는 호칭은 그 자체로 ‘한 나라의 최고수’를 지칭하는 명예 작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틀 이상의 무게를 지닌 타이틀 ‘국수’. 때문일까. 그 왕관은 아무나 쉽게 차지할 수 없었다. 지난 50여년 동안 200명이 넘는 기사 가운데 단 한 번이라도 국수에 오른 기사는 조남철-김인-윤기현-하찬석-조훈현-서봉수-이창호-루이나이웨이(芮乃偉) 등 단 8명에 불과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일인자가 아니고서는 정녕 차지하기 힘들었던 타이틀이었기에 국수의 족보는 곧 한국바둑의 계보로 대표된다.



    이러한 국수전에 19세의 최철한 7단이 이름을 올렸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들 천하의 이창호에 도전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여기는 분위기였다. 물론 한편에서는 이 소년기사에 대해 내심 희망을 걸고 있었다.

    지난해 최 7단은 1997년 입단한 이래 최고의 해를 보냈다.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소띠 동갑내기인 원성진 5단을 꺾고 생애 첫 타이틀을 땄으며 연간성적 77전 65승12패로 승률상(84.42%), 다승상(65승)에 이어 신예기사상까지 주요 상을 휩쓸었다.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으면 그의 이름 앞에 ‘두기만 하면 이기는 기사’라는 수식어까지 달아주었겠는가.

    그렇지만 상대는 일인자 이창호 9단, 세계가 공인한 현존 최강의 기사다. 도전1국이 벌어지기 전까지 두 기사간 전적을 보면 최 7단이 3전 전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도전1국도 ‘역시’ 이 9단의 승리였다. 그런데 도전2국에서 이변이 생겼다. 최 7단이 승리한 것이다. 최철한으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이창호를 이기는 순간이었다. 바둑계에서 ‘제법’이라고 여기면서도 ‘혹시나’ 하는 분위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번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도전자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더니 마침내 승부를 2대2까지 끌고 갔다. 이 9단을 상대로 막판까지 끌고 온 것만으로도 소년기사의 무한한 가능성은 충분히 입증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흑번(黑番) 필승, 다시 말해 흑을 잡은 쪽이 승점을 올리는 시소게임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자연히 마지막 5국에서 과연 누가 흑번으로 둘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승부의 여신은 새 역사를 창조할 작심이었는지 최 7단에게 흑돌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또 이겼다. 흑번 필승 신화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아홉 번째 국수의 탄생.

    【이세돌】

    최철한 7단의 승전보를 분석하려면 먼저 이세돌 9단이 뿌린 씨앗을 살펴봐야 한다. 이세돌 9단은 한 걸음 앞서 이창호 9단을 ‘금가게’ 한 폭풍의 사나이기 때문이다. 천년요새 같기만 하던 이창호 아성의 일각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이세돌 9단으로부터였다. 다음 음악 얘기 한 토막으로 이세돌의 바둑을 설명하는 편이 빠를지 모르겠다.

    ‘악성(樂聖)’ 베토벤의 음악이 빈 음악계에 처음 선보였을 때 대단한 센세이션이 일었던 모양이다. 그 시대 음악정서에 비추어 상당히 모던한 요소를 담은 베토벤의 음악에 젊은이들은 열광했지만 기성세대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듯하다.

    베를리오즈의 스승이면서 프랑스의 저명한 음악교수인 르쥐외르(Lesueur)는 학생들 사이에 굉장한 인기를 누리고 있던 베토벤을 애써 외면했다. 베토벤의 음악세계에 매료된 제자 베를리오즈의 성화에 못 이겨 르쥐외르는 베토벤의 C단조 교향곡이 연주되는 음악회에 가게 되었는데, 연주가 끝난 뒤 제자가 감상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선 바람을 좀 쐬야겠어. 굉장하군. 모자를 쓰려고 했을 때 내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어. 지금은 아무 말도 할 게 없네. 다음에 얘기하세.”

    베를리오즈의 회상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세돌 9단의 바둑을 이 정도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을 위해 ‘엽기 바둑해설자’로 유명한 김성룡 8단의 말을 여과 없이 적는다.

    “한마디로 말해 이세돌의 바둑은 현대바둑 기술의 집산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반 포석, 중반 전투, 종반 끝내기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출중한 실력을 가진 존재지요. 조훈현, 유창혁, 그리고 이창호의 장점을 모두 아우른, 구체적으로 말해 승부욕에서는 전신(戰神) 조훈현을, 파괴력에서는 유창혁을, 끝내기에서는 신산(神算) 이창호에 버금간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기력만 가지고 얘기하자면 바둑사에 참으로 대단했던 기사가 많다. 여기에 성취한 업적까지 보태자면 이세돌 9단은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이창호 9단이나 조훈현 9단보다 훨씬 아랫길이다. 그럼에도 이세돌 9단을 ‘대단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렇다. 이창호 9단보다 선배대열인 조훈현 9단이나 유창혁 9단 단 두 명을 제외하고는(이 두 사람도 궁극적으로는 이창호와의 백년전쟁에서 참패했다고 봐야 한다) 동년배나 후배기사 대열에서 그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이창호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거침없이 열어젖힌 첫 번째 주자였던 것이다. 이세돌은 이창호를 향해 떠난 숱한 도전자들이 하나같이 함흥차사일 때 ‘이창호라는 실타래’를 쾌도난마(快刀亂麻)처럼 풀어 젖히고 살아 돌아온 유일한 생존자였다.

    ‘昌世棋’에서 드러난 이창호의 약점

    바둑사에서 이창호와 이세돌을 거론할 때 2001년과 2003년, 두 번에 걸쳐 펼쳐진 LG배 세계기왕전 타이틀 매치 얘기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창호의 첫 이름자 창(昌)과 이세돌의 세(世)를 따 ‘창세기(昌世棋)’란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던 2001년과 2003년의 LG배 결승5번기.

    2001년 바둑계는 이창호라는 서슬 퍼런 칼날에 지금보다 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이세돌은 다크호스였을 뿐 선입마 대열에 끼일 만큼 인정받지는 못했다. 미완의 대기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LG배 결승1·2국에서 이창호 9단을 연파해 파란을 일으켰다. 한 판 이기기도 어려운 이창호에게 두 판을 내리 이겼으니 바둑계가 발칵 뒤집혔을 것은 뻔한 일. 그러나 한 달 뒤 재개된 결승3·4·5국에서 이세돌은 내리 세 판을 지며 뼈아픈 대역전패를 당했다.

    그렇지만 이때 이세돌은 그 나름대로 이창호에 대한 해법을 찾은 듯하다. 그것은 먼저 실리를 확보해놓은 뒤 이창호의 두터움을 치열한 전투로 격파하는 전략이었다.

    ‘이창호 바둑’은 강태공을 떠올리게 하는 기다림, 느긋함의 바둑이다. 정밀한 형세판단과 계산력으로 초중반보다는 후반 끝내기로 승부하는 바둑이라고 할까. 그렇기에 초중반에 눈에 띄는 우세를 잡지 못하면 대국자는 그에게 따라잡히기 일쑤다.

    이창호는 세계 일인자인 만큼 모든 부분에서 골고루 강하지만 상대적으로 포석과 전투에 약한 면을 보인다. 이세돌은 바로 이 점을 집중 공략했다. 싸움이라면 ‘천부적인 파이터’ 소리를 듣는 이세돌이었고 번개처럼 빠른 수읽기는 이미 소문이 자자하던 터수였다. 이 점에서 요즘 뜨고 있는 최철한 7단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공통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복싱으로 치면 이창호 9단은 아웃복서이다. 그런데 그를 상대로 싸우면서 탐색도 거치지 않고 초반부터 세차게 몰아붙이며 난타전을 벌이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전투)을 끄는 게 급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특기인 계산바둑이 힘을 발휘할 여지가 줄어들게 된다.

    이 점을 가장 먼저 간파한 것은 사실 조훈현 9단이었다. 숱한 사제대결에서 제자에게 일패도지(一敗塗地)하면서 터득한 대응법이었으나 이세돌이나 최철한과는 두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싸움에 관한 한 ‘전신(戰神)’으로까지 불리는 조훈현 9단이다. 특히 그의 ‘흔들기’ 수법은 태산도 요동치게 할 만큼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조훈현도 이미 50줄에 접어들어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 체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집중력에서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훈현 9단은 계산력, 즉 끝내기 공력이 후배기사들만 못하다. 그래서 좋은 형세를 만들어놓고도 뒤에 가서 뒤집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세돌이나 최철한은 달랐다. 바둑을 시작할 때부터 ‘타도 이창호’의 기치를 걸고 매진한 ‘이창호 세대’답게 이들은 계산이나 끝내기에 관한 한 이창호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뒷심 걱정은 없었다. 바로 이 점이 이창호 9단으로서는 괴로운 일이다. 게다가 무시 못 할 요인이 한 가지 더 있다.

    【부담감】

    이상하게도 이창호 9단은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곧잘 지고 만다. 그 상대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무명 기사일 때 더 그렇다. 이는 그만큼 심적인 부담을 갖는다는 얘기다.

    국제대회에 참가해 선배인 고바야시(小林光一) 9단이나 가토(加藤正夫), 녜웨이핑(攝衛平) 9단에게 졌을 때는 그가 아직 커가는 시기라 그럴 수 있다고 본다지만 세계 정상에 우뚝 선 뒤 2001년 후지쯔배 1회전에서 무명인 일본의 60세 노장기사 이시이(石井邦生) 9단에게 덜미를 잡힌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쟁터의 장수에게 승패는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 세계 일인자라는 명성에 크게 금가는 패점이 아닐 수 없다.

    ‘천하무적’ 이창호 시대는 가는가

    최철한, 이세돌, 목진석

    처음 만나는 후배기사들에게는 더 많이 졌다. 특히 저우허양(周鶴洋) 9단, 쿵졔(孔杰) 7단, 후야오위(胡耀宇) 7단, 셰허(謝赫) 5단 등 중국 기사들에게는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그렇지만 이창호는 ‘바둑사를 통틀어 최고의 전략가’답게 선배든 후배든 자신에게 첫 패배를 안긴 기사의 기풍을 철저히 분석해 다음에는 반드시 설욕했으며 단판승부가 아닌 번기(番棋)에서는 여전히 무적을 자랑한다.

    첫 상대에게, 그것도 자기보다 어린 기사들에게 곧잘 무너진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 이것은 ‘부동심의 달인’ ‘포커페이스’로 치장된 이창호의 이면을 말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평정심이 돋보이는 희대의 승부사라 할지라도 그는 바둑 두는 기계가 아닌, 감정에 휩쓸리는 인간이라는 것.

    이러한 점은 일찍이 10년 전 요다(依田紀基) 9단과의 한·일 신예대결 5번기에서 3대1로 질 때 일단을 보였으며, 지난해 LG배 결승 5번기에서 다시 이세돌 9단과 두 번째 ‘맞장’에서 3대1로 허망하게 무너졌을 때, 그리고 이번 국수전에서 최철한 7단에게 패해 좌초됐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단판이 아닌 번기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패국이다.

    【이창호】

    상대가 아무리 터프가이 인파이터라 해도 내 스타일이 아웃복서라면 아웃복싱으로 유도함이 옳다. 일류 투우사라면 어떤 상황이라도 기막히게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창호 9단 실력쯤이면 굳이 상대와 ‘맞장’ 뜨지 않고도 피해갈 방법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얘기다. 실제 최철한 7단에게 승점을 거둔 대국 내용을 보면 예의 ‘이창호류’로 이기고 있기에 하는 소리다.

    반대로 패국을 가만히 분석해보면 하나같이 초반부터 난타전을 마다하지 않다 휘말린 것을 알 수 있다. 포석의 ABC는 네 귀와 변을 선점한 다음 중반전에 돌입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창호는 공이 울리자마자 바로 몸싸움에 접어들어 마치 마른논에 쥐불 번지듯 세 귀와 변을 빙 둘러가며 뒹굴다 무려 100여 수 언저리에 와서야 마지막 빈 귀에 돌이 놓일 정도로 정신없는 싸움바둑으로 일관했다. 예전 이세돌 9단에게 질 때도 그랬다. 소리 없이 흐르는 강일수록 수중의 소용돌이는 세차다고 했던가. 무엇이 이창호의 평상심을 자극하고, 무엇이 이창호로 하여금 방패 대신 창검을 들게 하는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해볼 수 있다.

    첫째는 다분히 의도된 기풍의 변화라는 것이다. 10년 세도 없다는 말도 있듯 승부세계에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다. 무릇 피라미드의 꼭지점에 선 일인자는 만인에게 도전받는 위치에 있는 만큼 전력 또한 백일하에 노출돼 있다. 따라서 새로운 수법을 갈고 닦지 않으면 정상을 고수할 수 없다.

    이창호 특유의 ‘날 무딘 명검’으로 바둑계를 석권한 지도 어언 10여년이 넘었다. 이 기간이면 전력이 노출될 대로 다 노출됐고 상대도 면역성이 길러질 만큼 길러질 세월이다. 대중화의 물결을 탈 수밖에 없는 바둑은 날로 대중의 기호에 맞춰 스피디하고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다. ‘만만디 전법’ 하나만 가지고서는 이제 먹혀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뒷심이 쇠심줄보다 더 질긴 후배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러한 바둑계 상황이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다’는 이창호를 변화시키고 있는 듯하다. 변신에는 다소의 초조함과 조급증이 동반되는 법. 이창호가 그 와중에 있는 건 아닐까.

    두 번째는 승부사로서의 자존심,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 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 많은 선배기사들과 대국할 때는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던 그가 펀치력 좋은 이세돌이나 최철한 같은 후배기사들과 싸울 때는 냉철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건 어쩌면 “그래, 네가 그토록 싸움에 자신이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 초식이 아닌 네 초식으로 당당히 싸워 본때를 보여주마” 하는 승부욕이 나타난 때문은 아니었을까.

    세 번째는 말 못할 신상의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문이다. 가령 여자를 사귄다거나 하는 일로 예전만큼 바둑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가능성이 약한 얘기지만, 이창호의 나이(29세)라면 세상물정 알 만큼 알고 세파에 마음 쓰고도 남을 나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천하의’ 조훈현 9단 허리춤에서 대왕 타이틀을 당돌하게 뺏어내던 청년 유창혁의 모습이. 1988년 11월, 아직 이창호가 전방위로 나서기 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봉수 9단이 간혹 조훈현 9단의 발목을 걸 뿐, 그 누구도 ‘천하의’ 조훈현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그러던 때에 방위병 말년인 유창혁 사병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세돌 9단과 최철한 7단을 얘기하면서 16년 전 유창혁 9단의 첫 타이틀 획득 당시를 연상하는 이유는 이렇다. 그때 유창혁은 4단이었다. 대왕전 도전기가 끝난 직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 국수의 바둑은 강수가 많은 만큼 의외로 허점도 많습니다. 포석 중반과 종반 다 강하시지만 이 가운데 종반 계산이 약한 편입니다.”

    아, 놀라워라. 지금까지 누가 감히 천하의 조훈현 바둑을 이처럼 평가한 적이 있었던가.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워 감히 입에 올릴 엄두조차 낼 수 없던 시절에 말이다. 그런데 청년 유창혁은 당당히 재단했다.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조 국수를 이길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있었다.

    이창호 9단이 천하를 호령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세돌 9단은 ‘나는 그 누구에게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 옛날 청년 유창혁이 당대 일인자 조훈현을 겁내지 않은 것처럼 청년 이세돌도 ‘천하의’ 이창호 앞에 서기만 하면 자신감이 철철 넘친다. 눈곱만큼도 지는 걸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패기와 자신감을 무기로 2003년 벌어진 LG배에서는 마침내 이창호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그 옛날 청년 유창혁이 조훈현 9단의 성역을 훼손한 것은 지방 신문사가 주최하는 국내 타이틀이었지만, 청년 이세돌이 이창호 9단의 신화에 금가게 한 건 세계 타이틀 무대였다.

    최철한 7단도 자신감에 있어 이세돌 9단에 버금간다. 도통 겁이 없다. 매도 맞아본 사람이 그 위력을 알고 겁을 낸다고 하던가. 그 옛날 조훈현 아성을 기웃거리던 ‘도전5강’ 기사들이 가랑비에 옷 젖는 식으로 조훈현의 잔매를 맞다 보니 정작 뭔가 한 방 날려야 할 타이틀전에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선 예가 적지 않았다. 이창호 9단에게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승부세계에서 최강자에 주눅든다면 그 자체로 반은 지고 들어가는 셈이다. 십분 실력을 발휘해도 쉽지 않은 상대이거늘 어찌 이기길 바라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세돌, 최철한 같은 신세대 기사들의 담력은 남다르다.

    ‘사면초가’ 절체절명의 위기

    이번 국수전 도전기에서 최철한 7단이 한 말에도 자신감이 철철 넘쳐흐른다. 최 7단은 도전2국에서 이겨 1대1을 만든 뒤 “남은 두 판(3국과 4국) 가운데 한 판은 이길 수 있을 것이며 한 판을 이길 수 있다면 그 다음 판(5국)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국수에 오른 뒤 가진 인터뷰에서는 “가장 큰 수확물은 자신감이다. 이창호 사범께 승리하고 나니까 이제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러한 자신감이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본다. 최철한 7단은 국수전 도전기를 벌이는 와중에 기성전 도전권까지 거머쥐어 이창호 9단과 더블 매치를 펼쳤다. 국수전 도전5국 사흘 뒤인 3월5일 벌어진 기성전 도전2국에서 최 7단은 또다시 싸움바둑으로 이창호에 승리를 거두고 1대1 타이를 만들었다. 역시 흑을 들고 승리, 국수전과 마찬가지로 흑번 필승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국수전 최종국에 이은 2연승. 이에 흔들린 이창호 9단은 다시 나흘 뒤 광주에서 시작한 LG배 결승5번기 1국에서 이번엔 목진석 7단에게 졌다. 목진석 7단도 싸움바둑으로 이창호 9단에 완승을 거뒀다.

    이창호의 잦은 패배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데가 있다. 당장 욱일승천(旭日昇天)하고 있는 최철한의 기세를 꺾어야 하는데 국수전 상실의 상처를 수습할 새도 없이 기성전 도전기가 연이어 열린다는 점이 일단 곤혹스럽다. LG배에서 협공을 가하고 있는 목진석 7단의 공세도 걸림돌이다.

    천하의 이창호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이창호 9단의 1인 장기집권 체제로 꽁꽁 얼어붙었던 한국바둑에 정녕 봄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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