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의 독설 한마당

  • 입력2004-04-27 1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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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들은 그를 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라 한다. 그의 비판에는 아군과 적군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글에 대해 “가슴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이들에게 묻는다.
    • “당신은 사유를 심장으로 하나?” 최근 대통령 탄핵, 영부인 모독방송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는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탄핵무효’를 외치는 진보그룹의 촛불시위(위)와 ‘탄핵지지’를 선언한 보수단체의 집회.

    갑자기 주위의 사람이 낯설게 느껴질 때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믿었던 이들에게서 문득 이질감을 느낄 때, 그 당혹감 속에서 주위의 세계 전체가 매우 낯설게 나타나게 된다. 요즘 그런 체험을 한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튄다’고 말한다. 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하는 얘기는 지극히 온건하고 상식적인 주장들이다. 외려 내가 비판하는 것들이야말로 도를 넘는 주장이나 극단적 행태들이다. 그런데 왜 나보고 튄다고 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대한민국의 소통은 극단적이다. 대통령을 탄핵하는 정치권만 극단적인 게 아니다. 탄핵사태가 나자 명문사학의 교수라는 분이 군인들 앞에서 “이 나라를 구할 길은 쿠데타밖에 없다”는 극언을 하고, 그 반대편에서는 한 철학자가 느닷없이 ‘자연법’ 운운하며 시민의 함성으로 헌법을 바꾸자고 선동한다.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면 다음 선거에서 자기들 마음에 드는 대통령을 뽑자고 하면 그만이다. 탄핵이 마음에 안 들면, 앞으로 탄핵요건을 법적으로 강화하자고 하면 그만이다. 그 얘기를 하는 데에 ‘쿠데타’라는 극단적 단어는 왜 필요하고, 개헌을 위해 거리로 나가라는 선동이 왜 필요한가.

    군사 쿠데타 혹은 의회 쿠데타를 주장하는 하나의 극단이 있으면, 그 반대편에는 현행헌법을 ‘근원적 위헌’이라 부르는 또 다른 오버액션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극단적인 견해는 (각자 자기 진영에서) 지식인의 용기 있는 소신의 표명이라는 찬양을 받고, 이 엄청난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뜯어말리는 나는 졸지에 쓸데없이 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얼마 전 MBC ‘신강균의 사실은’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탄핵에 찬성하는 시민들의 집회를 보여주었다. 거기에 모인 이들은 정상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한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굳이 극단적인 욕설이 필요한가.



    그 방송이 나가자 이번엔 그 반대편에서 난리가 났다. 집회의 사회자는 묘하게 편집된 화면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온갖 비방과 욕설과 협박을 들어야 했다. 듣자하니 그는 ‘영부인 모독죄’의 대가로 이틀 만에 3000통의 전화와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게 정상인가. 그런데도 그 편집의 극단성은 문제가 안 되고, 그 방송의 편파성을 지적하는 나는 졸지에 ‘튀고 싶어 환장한’ 놈이 된다.

    군중 속의 럭비공

    튀는 것은 공이다. 축구공, 농구공, 테니스공. 그 중에서 내 존재에 해당하는 것은 ‘럭비공’이다. 다른 공과 구별되는 럭비공의 고유한 성질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다.

    나는 이것도 이해가 안 된다. 내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다. 그것을 가지고 보면 내가 특정한 사안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얼마든지 합리적 예측이 가능하다. 내가 보기에는 외려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럭비공이다. 상식적인 머리로는 그들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도대체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럭비공일까?

    럭비공은 가끔 혼자서 거대한 네티즌 군단을 상대하곤 한다. 몇 년 전 부산대 여학생 몇이 인터넷 사이트에 대학 내 예비역들의 군사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전국의 예비역들이 궐기해 이들에게 끔찍한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그들의 개인정보를 빼내 포르노 사이트에 올리기까지 했다.

    마침 ‘안티조선’ 운동을 하던 나는 조선일보의 극우성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이라면 이런 군사문화와도 열렬히 맞서 싸워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네티즌들은 이 사태 앞에서 침묵하거나 심지어 그 몰상식한 폭력의 편에 섰다. 이 예상치 못한 사태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실존적’ 고독을 느꼈다.

    또 하나의 예. 한동안 미군 장갑차의 사고로 죽은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을 촛불로 애도하던 이들이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여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감성적 휴머니스트라면 서해교전 당시 북한의 발포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의 죽음에도 애도를 보내야 한다. 아울러 사람을 치어놓고 ‘나 몰라라’ 하는 미군의 무책임을 비난하는 사람이라면, 뚜렷한 이유 없이 총질을 하는 북한의 모험주의 노선도 소리 높여 비난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응당 그러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깨졌다. 미군을 비난하는 것은 휴머니즘이나, 북한을 비난하는 것은 냉전수구세력의 음모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저런 모순을 머리에 담아놓고 살아갈 수 있을까?

    최근에 벌어진 또 다른 사건의 예를 들어보자. 말 많은 조선일보의 편집예술을 열렬히 성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이번에 방송위로부터 ‘주의’를 받은 MBC의 프로그램(‘사실은’)을 보았을 것이다.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 방송의 고약한 편집기술 또한 열렬히 비판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조선일보의 편집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편파보도이지만, MBC의 편집은 사태의 본질을 꼭 집어 드러내는 공정보도라는 것이다. 정합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분열된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당파성

    저들에겐 내가 아직도 럭비공처럼 보일 것이나 그 동안 나는 나름대로 저들의 행동을 예측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먼저 나는 ‘저들도 호모 사피엔스인 이상 자기 행동을 규제하는 모종의 원리를 갖고 있을 것’이라 가정했다. 그리고 내 눈에 모순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행동 속에도 어떤 일관성이 감춰져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관찰해 보았더니, 과연 그들에게도 일관성은 있었다. 논리적 성격의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격의 일관성. 말하자면 저들은 특정 사안을 놓고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로만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바라보면 그들의 언행 역시 대단히 일관적임이 드러난다.

    우리 사회의 일관성은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정치적 고해(political commitment)의 일관성이다.

    내가 시대를 너무나 앞선 나머지 당대에는 이해받지 못하는 무슨 비범한 생각이라도 가지고 ‘왕따’를 당한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하는 얘기가 그렇게 비범한 얘기던가? 내 것은 하나도 특이하지 않은 얘기, 너무나 당연해 진부하기까지 한 얘기, 초등학교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얘기다.

    유·불리를 떠나 사유와 언행의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게 뭐 대단한 주장인가? 이렇게 평범한 상식을 말하는 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사회. 내게는 이 사회야말로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왜들 그럴까? 과잉 정치의식 때문이다. 가령 신문을 보자. 일부 보수언론은 버젓이 “대통령 잘못 뽑았다”는 내용의 칼럼을 게재하고 대통령이 내뱉은 말 한마디를 1면 톱에 올린다. 신문이라면 독자가 판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객관적 자료들을 제시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신문들은 필요한 정보는 누락시키고, 불필요한 정보는 과장함으로써 독자가 내려야 할 판단을 대신 내려주려 한다. 이로써 독자는 정보의 수용자가 아니라 정치적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 반대편은 어떤가. 거기에도 문제가 있다. 당파적 저널리즘에 대해 또 다른 당파적 저널리즘으로 맞서려 한다. 몇몇 인터넷 신문은 거의 여당을 위한 선전매체라는 느낌을 준다. 야당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행적이 의심스러운 김대업씨를 졸지에 사회적 의인(義人)으로 만들고, 야당 후보 아들과 같은 몸매를 가진 사람을 찾는다는 이벤트를 벌이며, 개혁당의 유시민씨가 출마한 동네에 그의 사진을 실은 무가지를 살포하여 그의 당선을 돕기도 했다.

    정치의 과잉, 조직의 쓴맛

    정치적으로 오염된 매체를 통해 견해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온전할 리 없다. 언론이 당의 기관지가 되어버리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자연히 당 기관원으로 전락한다.

    거기서 그치는가. 이렇게 과잉 정치의식을 갖게 된 독자들은 다시 자신의 흥미를 채워줄 당파적 기사를 요구하게 마련이다. 그럼 언론은 이런 소비자의 요구에 응하여 더욱 더 센세이셔널하게 당파적 저널리즘을 실천하고픈 유혹을 받게 된다. 한마디로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정치의 과잉이 정작 정치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정치의식이 차고 넘치는 사회에, 정작 제대로 된 ‘진성당원’은 거의 없지 않은가. 한마디로 모든 사안을 당파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과잉 정치의식이 시민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한갓 동원의 ‘대상’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치의 과잉이 사회적 소통에는 도움이 되는가. 그럴 리 없다. 당파와 파벌로 찢어진 사회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은 합리적 소통이다. 아마겟돈의 전장 속에서 당파의 차이를 떠난 합의의 장은 설자리를 잃고, 객관성을 유지하며 그 ‘공론의 장’을 확보하려는 이들은 이 넓은 사회에서 졸지에 철거민 신세가 된다.

    싸움은 있어도 심판은 없다. 신문방송학과 없는 학교 없고, 언론학회가 한 둘이 아니고, 언론학자의 칼럼을 안 싣는 신문이 없다. 그런데도 ‘미디어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학자들은 미디어가 제공해주는 ‘상징자본’을 먹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입술 서비스’나 해주고 있다. 이러니 언론감시라는 게 있을 수 없다. 송두율 교수 사건 때 보수언론은 검찰의 피의 사실을 마구 공개했다. 하지만 이 반칙을 제지하는 언론학 교수는 거의 없었다. 외려 그들은 칼럼을 통해 송두율을 성토하기에 바빴다. 이걸 보고 나는 경악했다.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송모씨의 영부인 모독 발언을 편집 방송해 논란이 된 MBC ‘신강균의 사실은’.

    ‘공론의 장’을 수호하는 게 소위 ‘지식인’의 역할이다. 우리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소심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기회주의적이다. 이미 200년 전에 쉴러는 “지식인은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하는 얘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적군’을 비판하는 것은 안전한 일이다. 적군의 반격을 받아도 그 반대편에는 자신을 지켜줄 ‘아군’이 있다. 적어도 자신의 진영을 가진 자는 그 안에서 안전하며 심지어 존경까지 받는다. 하지만 아군을 비판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른다. 적군으로부터는 이용당하고, 아군으로부터는 배척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인들마저 공론(公論)이 아니라 당론(黨論)을 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줄줄이 입당해서 공천이나 받고.

    당파를 떠나서 이쪽저쪽에 쓴 소리 하는 것처럼 쉬워 보이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거기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아군으로부터는 비난을 당하고, 적군으로부터 이용을 당하기 때문이다.

    MBC ‘신강균의 사실은’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나의 글이 조선일보 사회면에 인용되자, 당장 ‘아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대한민국 지식인이라면 “조선일보에 이용당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기사를 올렸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적을 이롭게 하는 자, 처벌받아야 한다.’ 이게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 규정과 뭐가 다른가. 적을 이롭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이쪽의 잘못에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나는 어떤 권력의 작동을 본다.

    조선일보에서는 공익적 관점의 나의 문제제기를 자기들의 당리당략에 맞춰 악용하고, 오마이뉴스에서는 내부의 입단속을 위해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응징한다. 조선일보 독자의 눈에는 오마이뉴스의 잘못만 들어오고, 오마이뉴스의 독자에게는 조선일보의 잘못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렇게 두 패로 갈린 사회에서 두 매체의 잘못을 동시에 보는 사람은 설자리를 잃고, 그 중 어느 한편을 들도록 강요받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진영 멘탈리티’가 강한 것은 그저 생각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오랜 사회 생활을 통해 한 진영에 확실하게 속하지 않을 경우 어떤 보복이 따르는지 몸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

    도대체 이런 사회에서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코드’를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당파로 쪼개진 사회에서 합의된 코드가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와 갈등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그럼 그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되고, 그 갈등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합의된 코드가 없는 한, 공공성의 영역이 없는 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합리’와 ‘정의’의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각자 자기의 ‘하리’와 자기의 ‘정의’를 갖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는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사회적 갈등은 정의롭게 해결될 수 없다.

    이런 사회에서 소통은 ‘정의’가 아니라 벌거벗은 ‘힘’의 대결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파시스트적이다. 오늘날 군부 독재와 같은 거시적 규모의 파시즘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하지만 군부 독재가 무너졌다고 그 잔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파시스트들은 이 사회 곳곳에 제 형상을 복제해놓고, 그 작은 독재자들을 통해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힘을 찬양하는 미시(微視) 파시즘은 이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MBC에서 영부인 모독 발언 장면을 노컷으로 방영했을 때 그것을 보고 나는 모든 논란이 해결됐다고 믿었다. 제작진이 문맥을 고약하게 왜곡했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사이트에 들어가니 네티즌 상대로 여론조사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응한 네티즌의 90%는 문제의 화면이 왜곡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기가 막혔다. 이쯤 되면 종교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모든 종교는 그렇게 포교에 열을 올리는가. 그것은 종교적 진리성은 그것을 신봉하는 신도의 수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왜곡도 90%가 왜곡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공정보도가 된다고 믿는 것일까.

    오마이뉴스가 내 인성을 문제삼았을 때, 나는 거꾸로 그들의 인성구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솔직히 나는 그들의 인성이 대단히 ‘중세적’이라 느낀다.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지적하듯이, 합리적 사유가 등장하기 전 서양 사람들의 인성은 대단히 불안정했다. 우리가 아직도 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이를 처음 느낀 것은 강준만이라는 분을 통해서였다. 이 언론학자는 자기가 조선일보와 외롭게 싸울 때 제 편을 들어줬다고 나를 ‘이 사회의 의인’ 반열에 올려놓았다. 도대체 이 시대에 의인이 어디 있고, 악인이 어디에 있는가. 다 고만고만하지. 그러다가 내가 그를 비판하자, 그는 책 두 권 분량의 욕설을 퍼부으며 나를 천하의 악당으로 격하시켰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 인성이 아니라 이 사회에 널리 퍼진 어떤 보편적 인성이다. 왜 이렇게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걸까. 천국과 지옥의 두 극단 사이에는 합리성의 현세가 존재한다. 그러나 적(敵)과 아(我)로 갈린 사회는 중간의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은 천사 아니면 악마로 분류된다. 물론 자기편은 천사요, 상대편은 악마다.

    천사가 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용서되고, 악마의 역사는 그 어떤 것도 응징의 대상이 된다. 세계는 선과 악이 부딪치는 종말론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4, 5년마다 반복되는 선거는 매번 어떤 궁극적 사건, 즉 인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아마겟돈의 최후결전이 된다. 종교적 광신으로 차 있던 중세 말의 상황과 뭐가 다른가.

    그들은 나를 보고 “가슴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유를 심장으로 하는지 몰라도, 나는 사유를 머리로만 한다. 아마도 그들은 나와 다른 해부학적 구조를 가졌거나, 심장과 뇌를 오가는 공감각의 능력을 가진 모양이다. 그들은 내 글에 “감동이 없다”고 말한다. 당연한 일이다. 내 글은 감동을 위한 게 아니라 생각을 위한 것이다. 그들이 연출하는 값싼 키치는 내게 역겨움을 주고, 그들이 표출하는 파토스의 과잉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감동’을 잘 먹는 그 섬세한 감성들이, 왜 노동자가 분신하고, 농민이 음독하고, 소녀가장이 투신할 때에는 발동하지 않는 걸까. 내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와 그들은 감정이입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동일시와 정체성

    이런 사회의 인간은 자신을 집단과 동일시함으로써 정체성을 획득한다. 이때 개인은 완벽하게 집단에 종속되어, 권력체의 톱니바퀴가 된다. 정체성의 획득이 자아의 ‘발견’이 아니라 자아의 ‘소외’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집단은 개인이 자신에게 충성을 할 때 그에게 상을 내린다. 하지만 거역하는 자에게는 가혹한 벌을 내린다. 피아를 가릴 것 없이 이게 권력의 일반적 속성이다. 권력은 내부의 이물질을 제거하여 내적 동질성을 극도로 강화하고, 다른 집단에는 강한 외적 배타성을 보인다. 내적 동질성과 외적 배타성이라는 권력의 속성은, 곧바로 개인의 개별적 속성으로 복제된다.

    이것은 합리성이 등장하기 전의 전근대적인 인성구조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떠나, 일단 이 낡은 주형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파성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공공성의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얼마든지 특정 당을 지지할 수 있다. 자기 당이라도 잘못하면 비판하고, 남의 당이라도 잘하면 인정하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가. 그럴 때 비로소 정당들이 건강함을 유지하고, 정치적 소통이 원활해지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자세를 지닌 진정한 당원이 아닐까. 제 당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감싸고, 남의 당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공격하니, 정치가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의 이전투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노예의 도덕, 주인의 도덕

    ‘안티조선’으로 시작된 언론운동은 그 동안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스포츠조선 노동조합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조선일보는 이 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구석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이 사회 언론의 수준이 얼마나 향상되었는가. 당파적 저널리즘의 폐해는 외려 더 심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선일보를 견제하는 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새로운 언론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제 언론비평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당파적 저널리즘의 폐해는 또 다른 당파적 저널리즘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떠나 비평의 공정한 기준부터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

    푸코의 말대로 권력은 도처에 있다. 정말 중요한 권력은 바로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관계의 망이다. 진짜 억압은 여의도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오는 것이다. 악마는 한나라당도 아니고, 열린우리당도 아니다. 조선일보도 아니고 오마이뉴스도 아니다.

    악마적인 것은 자기를 둘러싼 인간관계, 다시 말해 당신의 친구들과 나아가 당신 자신이다. 권력은 수많은 거미줄로 인간의 몸을 얽어매어 충성을 강요한다. 사람들은 권력에 충성함으로써 그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바로 ‘노예의 도덕’이다. 진정한 권력이란 남에게 행사하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행사하는 것이다.

    디오게네스의 말대로 제 존재를 배려하고, 저 자신을 다스리는 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주인이다. 촘촘한 권력의 망을 비집고 다니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도처에서 싸움을 걸어야 하고, 또한 도처에서 걸려오는 싸움에 응해야 한다.



    “싸움이, 싸움이 몹쓸 싸움이, 허망하다 말하지 마라.” 내가 벌이는 싸움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의 존재미학이 다른 것보다 더 강하고, 더 유연하고, 덜 폭력적이라 믿는다. 요즘은 하루라도 욕을 먹지 않으면 혀에 바늘이 돋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버티는 나의 뻔뻔함은, 언젠가는 나의 것이 이 사회의 보편적 윤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의 건방짐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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