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2020년 땅값·물가·금리 내리고 ‘과밀 서울’ 저절로 해소된다

  • 글: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초빙교수·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입력2004-04-28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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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땅값·물가·금리 내리고 ‘과밀 서울’ 저절로 해소된다
    20세기는 5000년간 계속된 인간의 생활을 근본부터 송두리째 바꿔버린 100년이었다.

    한국을 예로 들면 서울 종로 네거리에 전기 가로등 세 개가 처음 점등된 것이 1900년(광무 4년) 4월10일이다. 그러니 한국의 20세기는 전기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DDT와 페니실린이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부터다. DDT, 페니실린, 마이신 등의 항생물질은 한국인의 수명을 2배 가까이 연장시켰다. 경구 피임약과 세탁기·청소기 등의 가전제품은 여성을 가사노동과 육아 부담에서 해방시켰다. 여성의 생활상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이다.

    1가구 1전화의 실현과 ‘휴대전화’의 등장이 인간의 생활공간을 얼마나 확장시켰는지는 실로 계측할 수 없을 정도다.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간의 공간거리·의식거리가 거의 ‘제로’에 가깝게 되는 날이 이렇게 빨리 다가오리라고는 10년 전만 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숱한 변화 요인 중에서도 한국을 변화시킨 가장 큰 요인이라면 20세기 전반의 전기와 전차, 20세기 후반의 자동차와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은 지난 세기는 자동차로 대표되는 대중소비시대였다. 한국에 자동차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11년. 그해 조선총독부는 관용 승용차 2대를 들여와 한 대는 총독용으로, 다른 한 대는 왕실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공식 기록인 동시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후 일제강점기(1911~45년)에 걸쳐 자동차는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1년에 겨우 수십대에서 수백대씩 늘어난 것이 고작이다. 1945년 광복 당시에도 남북한을 통틀어 자동차 수는 겨우 7000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자동차, 도시체계를 무너뜨리다

    그러다 1960년대 초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그리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난 1966년 말부터 ‘보릿고개’니 ‘춘궁기’니 하는 말이 없어졌다.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이른바 대중소비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자동차 증가현상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7일. 그해 12월말 현재 전국 각 시도에 등록된 차량(승용·승합·화물) 총수는 12만5409대, 서울시에 등록된 차량 총수는 5만9000대였다. 자가용 승용차는 전국 2만8687대, 서울 2만2043대, 부산 2223대,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가 1140대였다(교통통계연보 1971).

    그러던 것이 30년이 지난 2000년 말에는 전국의 차량 합계가 1205만9276대, 서울이 244만992대로 집계됐다. 자가용 승용차는 전국 합계가 779만8452대, 서울 170만9948대, 부산 52만274대, 인천(42만6612대)과 경기도(165만2112대) 합계가 207만 8724대(건설교통통계연보 2001)였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30년간 전국의 자동차 수는 96배, 자가용 승용차에 국한해 보면 전국이 272배, 서울이 78배, 부산이 234배, 인천·경기도가 1823배라는 놀라운 신장세를 보였다. 1970년 당시는 인구 531.4인당 자동차 1대꼴이었는데,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는 37.6인당 1대, 2000년 말에는 5.8인당 1대가 됐다.

    결론적으로 1971~2000년의 30년 동안 한국의 전국토에는 자동차에 의한 공간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앞으로도 당분간 자동차 증가 추세는 멈추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자동차가 늘어나고 도로가 정비되어 시간거리가 단축되면서 한국사회 전반에는 실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는 생활권의 확장이다.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해 목포나 진주, 삼천포까지 하루에 왕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농촌-중소도시-대도시라는 도시체계가 무너진 것은 벌써 옛일이다. 체계니 계서(階序)니 하는 과정이 붕괴된 것이다.

    농어촌이 먼저 와해됐고 이어 중소도시가 무너졌다. 수많은 중소도시가 공중분해되어 인구의 절대수 감소 현상에 허덕이고 있다. 또한 허다하게 많은 도시에서 인구의 절대수는 감소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난 10~20년간 인구증가 현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이 자동차 때문만은 아니지만 자동차가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농촌에서 중소도시를 거쳐 대도시로’라는 질서가 무너졌기에 중소도시의 존재가치가 사실상 무너져버린 것이다.

    도시의 형태에도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모든 대도시의 외연(外延)이 거침없이 확대됐고 저층-중층-고층의 계서도 무너졌다. 도심부, 교외부를 가릴 것 없이 건물들은 고층만을 지향하고 있다. 도로공간과 주차공간 확보가 그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개개인 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자동차라는 이름의 노예가 생겼으니 상전 된 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시에 그 노예 때문에 입게 되는 생활상의 제약(制約) 또한 적은 것이 아니다. 늘 ‘몇 시까지’라는 시간의 압력을 받아야 하고 주행공간과 주차공간 등 공간상의 압력도 받는다. 보다 좋은 자동차를 가져야 신분 상승을 과시할 수 있다는 대외적 압력 또한 작은 것이 아니다. 자동차라는 노예를 부리면서 실제로는 점점 자동차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보다 도로·교량 밀도 높아

    그러니 20세기 말~21세기 초의 한국 사회를 ‘자동차 사회’라고 표현하더라도 크게 잘못된 지적은 아닐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시작해 호남·남해·영동고속도로로 이어진 박정희 대통령의 고속도로 건설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에도 그대로 계승됐고 김영삼·김대중 시대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30년 전에는 자동차로 속초·강릉·삼척 등 영동지방으로 가기 위해선 대관령을 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진부령·미시령·한계령·대관령·조침령·구룡령·삽당령·백봉령으로 넘어갈 수도 있고, 조금 규모가 작은 것으로는 진고개·닭목재·댓재·화방재·피재도 있다. 30년 전에는 한 개뿐이던 길이 지금은 열두세 개가 됐으니 편리하다 못해 헷갈리기까지 한다.

    도시 내부도로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60년대 후반의 ‘불도저 시장’ 김현옥, 1970년대의 ‘두더지 시장’ 양택식, ‘황야의 무법자’ 구자춘을 비롯해 지난 30여년간 이 나라 방방곡곡의 시장·군수치고 도로·교량 건설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행정가는 한 사람도 없다. 어찌 행정가뿐이랴. 여·야 국회의원, 도·시·군의원, 건설업자, 수많은 남녀 노무자들도 있다.

    그간 얼마나 많은 돈과 피와 땀이 도로와 교량 위에 뿌려졌는가를 생각하면 실로 아득하기만 하다. 한국은 일본보다 도로·교량의 밀도가 높고, 이는 세계적으로도 예가 드문 것이다. 간혹 지방에라도 갔다 오게 되면 마치 도로왕국을 헤메다 온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도로를 만들고 또 만들어도 자동차의 증가를 따라가지는 못한다고 한다. 전국의 자동차 보유대수가 10만대를 넘은 것은 1969년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를 겨우 넘었을 때다. 1985년에는 100만대를 넘었는데,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달러 정도였다. 그런데 자동차 보유대수 1000만대를 돌파한 1997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가까스로 1만달러를 넘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1년간 증가대수가 1만여대에 불과했지만, 1980년대가 되자 10여만대로 뛰어오르고 1990년대, 특히 1990년대 후반기부터는 100여만대씩 늘고 있다.

    1996년 이루어진 한 조사에 의하면 ‘집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차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 사람이 50%를 넘었지만 아마도 요즘 조사를 하면 ‘배우자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차 없이는 못 산다’는 사람이 50%쯤 되지 않을까.

    인구감소 사회가 온다

    지난 4월1일 서울-부산간, 서울-목포간 고속철도가 개통됐다. 일찍이 “어느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그 도시에서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라고 한 라벤슈타인의 법칙은 아직도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이니 고속철도 개통은 서울로의 인구집중을 더욱 가속화하겠지만, 그보다도 수도권의 범위를 훨씬 더 넓히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수도권이라고 하면 서울·인천 그리고 경기도를 지칭하는 개념이었는데, 앞으로는 수도권이 충남 천안·아산지역, 충북 오송·청주지역, 대전광역시, 그리고 강원도 영서지방 전역이 포함되는 광역 수도권이 될 것이다. 그런 광역의 수도권에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모여 살게 되어 ‘수도권=대한민국’과 같은 국토질서가 형성될 전망이다.

    그러나 교통수단 고속화에 의한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은 이미 고속도로 건설에 힘입어 거의 다 이뤄졌으니 고속철도가 그런 측면에서 미칠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보다는 DNA 관련 기술이나 바이오 기술에 의한 기술혁신이 초래할 생활혁명이 21세기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2020년 땅값·물가·금리 내리고 ‘과밀 서울’ 저절로 해소된다

    고속철도 개통은 서울로의 인구집중을 가속화하겠지만, 그보다는 수도권의 범위를 휠씬 넓히게 될 것이다.

    21세기는 과연 어떤 미래를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인가. 향후 20~30년 안에 도달할 이노베이션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암, 에이즈 등의 난치병이 거의 사라진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100세를 넘는다 ▲가솔린 자동차가 자취를 감추고 전기 자동차가 일반화된다. 목표지점만 설정해두면 자동차 스스로가 찾아가는 소위 ‘자동 자동차’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쓰레기가 자원화된다 ▲인체의 거의 모든 장기가 인공으로 만들어져 장기 이식이 일반화된다 ▲입체화상 TV, 개호(介護)용·가사용 로봇이 대중화된다 ▲서울-뉴욕간을 두 시간 정도에 연결하는 초음속 항공기가 취항한다 ▲사막의 녹지화가 가능해져 중국의 황사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인공 강우(降雨) 기술이 현실화된다.

    물론 이는 다가올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전망한 것이다. 반대로 아주 어둡게 보는 견해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가령 암이나 에이즈 치료제가 개발될 수도 있겠지만, 공해가 원인이 되어 새로운 난치병이 나타날 수도 있다. 지구 온난화로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 넓은 육지가 수몰될 수도 있다. 쓰레기 자원화가 실현되기 이전에 온 세계가 쓰레기로 뒤덮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바로 당면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문제가 인구감소 사회의 도래가 아닐까 싶다

    2020년 5000만명이 피크

    ‘신동아’ 1977년 5월호는 ‘국토개발의 종합적 검토’라는 특집을 실었다. 그때 필자에게 주어진 글의 테마는 ‘과연 우리 국토는 좁은가’였다. 이 글에서 필자는 “우리나라 인구가 피크에 달하는 것은 1960년에 0세이던 여자아이가 50세에 달해 가임기를 벗어나게 될 때, 즉 2010년경이라 생각되며 그때의 우리나라 인구는 5000만명을 약간 넘는 선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도시문제’ 1984년 1월호에서 필자는 위의 내용을 약간 수정해 “우리나라 인구가 피크에 달하는 것은 1970년에 0세이던 여자아이가 45세가 되어 가임기를 벗어나게 될 때, 즉 2015년경이라 생각되며 그때의 우리나라 인구는 5000만이 약간 넘는 선이 될 것이다”고 내다봤다.

    이러한 예측은 많은 전문가들, 특히 인구문제를 전공하는 분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첫째 우리나라 인구의 절대수가 피크에 도달하는 시점을 2015년경으로 본 것은 너무 이르다는 것이며, 둘째 우리나라 인구가 피크에 달했을 때 인구총수가 5000만을 약간 넘는다고 한 것도 너무 적게 봤다는 것이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필자가 인구문제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인구문제 전문가가 아닌 자가 인구의 미래상을 예측하는 것도 문제이고, 예측하는 방법론 같은 것도 전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2015년을 10년 정도 남겨놓은 2004년 시점에서 필자가 1977년 또는 1984년에 예측한 내용이 어느 정도 맞느냐 틀리느냐를 염두에 두면서 한국의 인구감소화 시대를 고찰해보자.

    우리나라의 인구 변화상도 외국에서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소산다사(小産多死)-다산다사-다산소사를 거쳐 오늘날 소산소사의 시대에 이르고 있다. 우리의 어머니 세대, 즉 60~70년 전의 어머니들은 대개 7~8명에서 10명 전후의 자녀를 낳아 그 가운데 3분의 2 정도를 잃고 겨우 둘 내지 셋을 얻었다. 5~6명 정도를 얻으면 다복한 집이었고, 특히 남자아이를 셋 정도 얻으면 크게 유복한 것으로 칭송됐다.

    1945년 광복 후 우리나라는 세 차례의 베이비 붐을 경험한다. 그 첫 번째가 광복 직후인 1945년부터 1949년까지다. 징병·징용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간신히 돌아온 청장년들이 그 동안 집을 지켜온 부인들, 또는 새로 맞이한 부인들에게 열심히 사랑을 쏟은 결과였다.

    두 번째는 1956년에서 1960년까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군대에 갔던 청장년들이 돌아와 역시 열심히 사랑을 쏟은 결과가 제2차 베이비 붐이었다. 당시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2.88%에 달해 일찍이 맬서스가 염려한 최악의 인구현상과 같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세 번째 베이비 붐은 1963년부터 1970년 사이에 일어났다. 경제개발계획의 성과가 나타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젊은이들이 ‘아기 만들기’에 정력을 쏟은 결과다. 1970년대 들어 인구, 특히 어린이 인구가 크게 늘자 정부가 앞장서서 강력한 가족계획·산아제한 운동을 전개했다.

    2020년 땅값·물가·금리 내리고 ‘과밀 서울’ 저절로 해소된다

    땅값, 집값이 약세로 돌아선 후 다시 회복되지 않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서울 용산의 주상복합아파트 시티파크 당첨자 명단을 보고 있는 청약자들.

    한 여성이 평생 동안 낳은 출생자수의 평균을 ‘합계특수출생률’(이하 출생률)이라고 한다. 아기는 여자 혼자서는 낳을 수 없고 반드시 남자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 사회의 인구수가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려면 출생률은 항상 2를 약간 넘겨야 한다(부모보다 먼저 죽는 자식도 있기 때문에 출생률 2로는 인구 규모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출생률이 ‘2+α’라야 일정한 인구 규모가 유지된다).

    제3차 베이비 붐이 끝나던 1970년의 1인당 출생률은 4.5 정도였다. 그런데 이를 기점으로 그후 해마다 출생률이 낮아지기 시작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출생률은 1.30~1.34라고 한다. 2000년 현재 영국은 1.63, 프랑스는 1.90, 미국은 2.13이니 얼마나 낮은 수준인지 알 수 있다.

    그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유아 사망률이 낮아져 미리부터 많은 아기를 낳을 필요가 없어졌고, 주택사정, 교육여건에 따른 출산과 육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나 둘만 낳자는 생각이 일반화됐다. 심지어는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아예 갖지 않는 ‘딩크(DINK·Double Income No Kids)족’이 나타나기도 했다.

    출산·육아에 대한 만족감도 떨어졌다. 자식을 낳아 길러봤자 잘 자라서 출세하고 효도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국가·사회의 장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와 고학력화, 비혼(非婚)화 경향과 이혼율 상승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성비(性比)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출산율저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성비란 여자 100명에 대한 남자의 비율인데 2000년 현재 100.78을 나타내고 있으나 20∼30대의 성비는 더 높은 경향을 보인다.

    이같은 출생률 저하, 이른바 소자화(少子化) 현상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첫째, 유치원 및 각급학교의 공(空)교실화, 폐교화를 들 수 있다. 지방, 특히 농어촌에서는 이미 많은 초등학교가 문을 닫았고 폐교 직전에 있는 중·고등학교도 허다하다. 전국의 고등학교 졸업생 수는 1996년부터 줄기 시작해 해마다 감소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전문대학·4년제 대학을 합쳐 300개가 넘는 대학이 있는데, 아마 향후 20년 이내에 그 중의 4분의 1 이상이 폐교 상태가 될 것이다. 특히 지방의 사립대학은 대부분 극심한 경영난에 봉착할 것이다. 일본의 지방도시에서는 통학하는 대학생이 격감해 전철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둘째, 어린이용품, 완구산업, 학교와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재산업, 교과서·참고서 산업 등이 쇠퇴한다.

    셋째, 산부인과·소아과 의사 지망생이 격감한다. 지금도 산부인과·소아과 개인병원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넷째, 어린이들의 왕자화(王子化) 경향이 생겨난다. 아이를 하나나 둘밖에 낳지 않으니 왕자나 공주 다루듯 하게 된다. 최근 중국에서는 군에 입대한 젊은이들이 양말을 빨 줄 몰라 여기저기 쑤셔넣는 통에 내무반에 악취가 진동했다고 한다. 정책적으로 아이를 하나만 낳게 한 데 따른 왕자화 경향의 일단이다.

    소자화 현상이 진행되는 한편에선 고령화 현상도 진행되고 있다. 고영양화, 의료기술 발달,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 사회보장제도 등으로 고령자가 계속 늘고 있는 것. 그러나 소자화 현상으로 감소되는 인구가 고령화로 인한 노인층 인구의 증가보다 많아지면 인구의 절대수는 감소하게 된다.

    일본 땅값 하락이 實例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선 언제부터 인구의 절대수 감소현상이 나타날 것인가. 2000년 인구센서스 결과 밝혀진 한국의 인구는 4613만6101명. 이는 0.8% 정도의 증가율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증가율이 점점 더 낮아져 2020년경까지는 거의 표나지 않을 만큼 완만하게 증가하다가 2020년을 고비로 해서 마이너스로 돌아설 전망이다.

    근대적인 인구조사가 시작된 1925년 이후 한국의 인구는 꾸준하게 증가해왔다. 특히 1945년 광복 이후 2000년까지는 매우 큰 폭의 인구증가가 계속됐다.

    토지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인구는 계속 늘었으니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일반 물가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른바 성장신화가 이어진 것이다. 서울 강남의 땅값은 1960년대 초에 평당 300원 하던 것이 2000년대 초에는 평당 300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실로 무서운 성장이다.

    그러나 이제 지난날과 같은 성장신화는 계속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어느 시점이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부터(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다) 땅값, 집값이 보합상태에 들어가고 또 어느 날부터는 약세로 돌아서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 그런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른바 인구 감소화 사회라는 무서운 현실이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2020년경이면 한국의 인구가 피크에 달하고 그때부터 인구 감소화 사회로 진입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2020년까지는 땅값도 집값도 떨어져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15년 정도 앞서 인구 감소화 사회로 들어갈 전망인 일본의 경우를 보면 비록 인구 감소화는 2007~2008년경에 시작된다 해도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고 일반 물가가 저하되는 이른바 디플레 현상은 인구 감소화 전환 시점보다 13~14년 먼저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에서 부동산 가격 하락현상이 나타난 것은 지금부터 정확히 14년 전의 일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버블 붕괴현상’이라고 설명하지만, 실은 인구 성장 사회에서 인구 감소화 사회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구조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일본에서 부동산 가격 및 물가 상승 현상이 재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을 실증하기 위해 지난 10여년간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 현청 소재 도시나 그보다 작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례를 볼 수 있었다.

    일본 국민들도 그러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다수 국민도 너무나 오랜 기간에 걸쳐 성장신화에만 젖어 있었기 때문에 쇠퇴화 현상은 실감할 수도 전망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행정수도를 충청권으로 옮긴다고 하니 충청권 전체의 집값과 땅값이 크게 올랐다고 한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서울 강북에 뉴타운 조성계획을 발표하자 최초의 뉴타운 후보지로 거론된 왕십리·은평·미아리 일대의 땅값이 급등했다고 한다.

    이렇게 집값, 땅값이 오르는 것은 지난날의 성장신화에 젖어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인구 감소화 사회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실감하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행정수도 이전이나 강북 뉴타운 조성계획 자체가 다가올 인구 감소화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인구 감소화 사회에 대비하려면 어떤 형태가 됐든 성장을 전제로 한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본다.

    서울은 그대로 둬라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여러 언론매체가 ‘2020년 서울’ 관련 소식을 보도하고 있다. 지난 4월1일 서울시가 ‘2020년 서울도시기본계획안’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강서 마곡지구에 첨단산업단지 조성’ ‘마곡지구에 10만평 영어타운 만든다’ 등의 소제목 아래 ▲중심지 체제를 1도심 5부도심으로 해 용산, 청량리·왕십리, 상암·수색, 영등포, 영동을 부도심으로 조성한다 ▲지하철이 들어가지 않는 지역에는 경전철 등 신교통수단을 도입할 예정이며 신림·난곡선(여의도-서울대), 미아·삼양선(상계-신설동) 등 6개 노선을 상정하고 있다 ▲김포공항에 동북아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국제노선을 신설하고 공항과 인접한 마곡지구에 30만평의 첨단산업단지를 만들어 DMC(디지털미디어시티)가 들어가는 상암지구와 함께 첨단 산업벨트를 조성한다는 등의 계획이 공개됐다.

    서울에서는 1990년대 이래 인구의 절대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인구 증가에 대비하는 등의 장래예측은 일절 들어 있지 않으나, 역시 아름다운 장밋빛 미래로 장식돼 있다. 그런 미래를 위해 향후 20년간 매년 7조7000억원씩 총 153조8000억원을 투입한다고 한다. 여전히 성장신화에 입각한 미래계획임에 틀림이 없다.

    발상의 전환 필요

    인구 증가가 계속된 기간에는 성장신화도 계속됐지만 인구 감소화 시대에는 그와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토지·주택자원에 여유가 생기고 디플레 현상이 일어나고 금리는 오르지 않게 된다.

    한국이 인구 감소화 시대에 들어간 것을 입증하는 단적인 예가 있다. 1991년부터 13년간이나 계속해온 새만금 간척지 사업이 그것이다. 4만ha에 이르는 땅의 용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농토로 쓰려니 농토 과잉 상황이고, 제조업 단지로 쓰자니 굴뚝산업 시대가 지나간 지 오래다.

    새만금에 조성될 허허벌판의 용도를 결정하기 어렵듯이 현재 우리나라에 세워져 있는 경제계획, 국토·도시계획의 대부분은 성장신화 시대에 수립됐거나 아니면 적어도 성장신화와 맥을 같이하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거 때만 되면 수도권에 몇십 개의 뉴타운을 짓는다는 식의 계획이 남발되는 게 좋은 예다.

    행정수도를 새로 만들어 서울의 과밀을 해소한다는 것도 같은 발상이다. 서울은 그대로 둬도 인구가 줄고 과밀이 해소된다고 봐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발상을 해야 할 때다. 경제계획, 국토·도시계획 등 전반에 걸친 재검토가 필요한 시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인구 감소화에 따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은 있는가. 이는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피해를 줄이는 방안으로 ▲고령화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시스템 연구 ▲각종 연금제도의 근본적 재검토 ▲연간 5만~10만명 정도의 이민을 받아들이는 방안 검토 ▲다채로운 교육제도로 여러 가지 가치체계가 꽃피울 수 있는 사회여건 조성 등을 고려해볼 수 있다. 아울러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일본 등 인구 감소화 선진국들의 연구사례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장장 20년 또는 그 이상에 걸쳐 전개될 과도기적 현상에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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