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두 번 죽는’ 의료사고 피해자들

사고발생부터 사후대책까지 피해구제시스템 총체적 부실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4-04-28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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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고도 ‘실체 없는 자작극’으로 결론난‘민경찬 펀드’ 사건. 사건 당사자 민씨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한때 그에게 의료소송 상담을 의뢰했다 정신적·금전적 피해를 당한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서글픈 현실은 그늘로 남았다. 이 땅의 의료사고 환자와 그 가족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들이 피해구제로 이르는 길은 ‘머나먼 정글’이다.
    ‘두 번 죽는’ 의료사고 피해자들
    “그날 이후의 삶은 제 인생이 아닙니다.”이행석(40·서울 신림동)씨는 2002년 6월6일 14개월 된 외동딸 효민양을 잃었다. 35세에 뒤늦게 결혼해 어렵게 얻은 딸인지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효민양은 이른바 ‘의료사고 사망자’다. 감기증세로 동네 소아과를 3차례 찾았던 효민양은 “호흡을 힘들어 하니 종합병원에 입원하는 게 좋겠다”는 소아과 원장의 권유로 B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효민양은 치료과정에서 계속 호흡곤란 상태를 보이다 입원 후 18시간 만에 숨졌다.

    B병원 전문의 K씨 등 담당의사 2명을 형사고소해놓은 이씨는 소아의 천식 또는 기타 호흡기질환에서 가장 중요한 검사가 동맥혈가스분석검사임에도 효민양이 호흡곤란을 시작해서 호흡부전-심폐부전-사망으로 진행되는 동안 의사들이 단 한 번도 이 검사를 시행하지 않는 등 적절한 진단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생업도 팽개친 채 딸의 의료사고 해결에 매달리느라 8000만원의 빚까지 져 생활고와 무력감에 빠진 이씨는 결국 지난 2월 부인과 이혼했고 끝내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 나버렸다. 삶의 의욕을 잃은 채 학원강사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는 이씨는 오로지 딸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겠다는 단호한 결심만 하루하루 굳혀가고 있다.

    “병원측이 위로금 조로 1억5000만원을 주겠으니 형사고소를 취하해달라는 제의를 해왔지만 거부했습니다. 내가 아버지로서 바라는 건 돈이 아니라 딸의 허망한 죽음에 대한 병원측과 담당의사들의 진정한 사과입니다. 끝까지 법적 투쟁을 벌일 겁니다.”

    의료사고 사망자 한 해 4500∼1만명 추정



    대한민국에서 의료사고 피해자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피해를 제대로 구제받을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구축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이 ‘두 번 죽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선 국내에서 의료사고가 얼마나 발생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2001년 발표된 울산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이상일(44) 교수의 논문 ‘의료의 질과 위험관리’에서 국내에서 해마다 의료과실로 숨지는 환자가 4500∼1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이 제시되긴 했지만, 이는 미국에서 개발돼 사용중인 의료사고 사망자 추정모델을 국내 현실에 적용해 산출한 추정치다. 따라서 학자들은 미국보다 의료비를 훨씬 덜 쓰는 국내 현실을 감안할 때 실제 의료현장에서 발생하는 의료사고 건수는 더욱 많을 것으로 분석한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이하 소보원)에 접수되는 의료서비스 불만관련 상담 및 피해구제요청(괄호 안) 건수만 봐도 이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연도별로 보면 2000년엔 9776(450)건, 2001년은 1만2139(559)건, 2002년은 1만1296(727)건, 2003년의 경우 1만2822(661)건으로 소보원이 의료서비스에 대한 피해구제업무를 시작한 첫해인 1999년(4∼12월 상담 5670건, 피해구제요청 273건)을 제외하곤 매년 1만건 안팎의 상담실적을 보이고 있다. 올해의 경우 1∼2월에만 상담 2098건, 피해구제요청 53건이 접수됐다.

    소보원 분쟁조정2국 권남희 과장은 “소보원을 통하면 의료소송에 의하지 않고도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예전엔 진료행위로 인한 부작용이나 후유증 등 비교적 경미한 의료사고와 관련한 피해구제요청이 많았는데 최근 2∼3년 동안은 사망, 장애 등 중한 사고에 관한 구제요청이 늘고 있다”고 밝힌다. 소보원에 대한 피해구제요청은 의료사고 피해자와 병원측간 합의가 성사되지 않을 때 소보원이 조정에 나서는 것이지만, 강제력이 없어 사실상 해당의사나 병의원이 조정에 불복하면 더 이상 도움을 얻기 힘들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의료사고 관련소송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사법연감의 의료소송 증가추이를 보면 1992년 82건에 그쳤던 의료소송이 2002년 882건으로 10배 이상 폭증했다.

    ‘더 이상 수사할 가치가 없다’

    의료소비자들의 권리의식이 향상되면서 이렇듯 의료사고 대응방식도 과거의 ‘체념’과 ‘포기’에서 ‘적극적 문제제기’로 급전환하는 추세다. 하지만 막상 의료분쟁을 직접 체감하는 피해자들은 피해구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신속’ ‘공정’과는 거리가 먼, 여전히 험난하기 짝이 없는 ‘가시밭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의료사고를 둘러싸고 대체 어떤 구조적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통상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피해자들이 밟을 수 있는 길은 대략 3가지로 귀결된다. 병원측과 서둘러 합의하거나, 소보원 혹은 보건복지부 등을 통해 분쟁조정을 도모하거나 아니면 담당의사나 병원을 상대로 형사고소 또는 민사소송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구제에 앞서 진상규명을 바라는 피해자측을 무력케 하는 걸림돌은 경찰과 검찰의 초동수사 단계부터 놓여 있다. ‘신동아’의 의료사고 관련취재 소식을 접하고 4월2일 경남 진주에서 급히 상경한 김승연(37·인쇄업)씨의 사례를 보면 이 같은 사정은 더욱 두드러진다.

    김씨의 장남 성우(당시 10세)군은 한·일 월드컵 개막식이 열리던 2002년 5월31일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소장이 파열돼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췌장에도 손상이 생긴 것을 알고 6월3일 담당의사의 권유로 의료진과 시설이 더 좋은 K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중 7월2일 부모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당시 K대 병원은 수술 대신 약물치료를 택했고, 물도 마시면 안 되는 ‘절대 금식’ 조치를 취했다. 일반 병실에 있던 성우군은 상태가 다소 호전되다가도 구토와 이상증세를 보였으며, 간성혼수상태에서 신경안정제를 투여받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패혈증으로 숨졌다. 당시 성우군 진료는 K대 병원 소아외과 K교수와 전공의 S씨가 맡았다.

    성우군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황망해진 아버지 김씨는 아들의 부검까지 치르며 경찰과 검찰의 수사에 적극 응했지만, 2003년 5월 날아든 검찰의 진정사건처분통지서를 보고 기가 막혔다. 거기엔 ‘더 이상 수사할 가치가 없어 내사종결’한다고 기재돼 있었던 것. 다시 한번 진정을 했지만 사건을 수사한 창원지검 진주지청은 결국 2003년 12월 의료진에 대해 무혐의처분을 내렸다.

    “검찰의 대질신문에서 아들의 특진을 담당한 전문의 K교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진료과정을 챙겼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단 한 번 아들을 봐준 것 이외엔 제대로 회진을 하지도 않았고 항생제 투여도 그의 지시 없이 중단됐다. 검찰이 이런 의문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수사해보지도 않고 무혐의처분을 내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김씨는 “전문의학지식이 없는 수사기관의 입장에서 ‘의료사고 수사는 어렵다’고 푸념하는 정도라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한 어린이의 의문스런 죽음에 대해 의료진의 말만 믿고 공식적으로 ‘수사할 가치가 없다’고 못박는 게 수사기관으로서 할 일인가. 의료사고 피해구제시스템 곳곳에 도사린 이런 장애물들이 피해자들을 더욱 악에 받치게 한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앞서 언급한 이행석씨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딸이 사고를 당한 지 20여일 만에 B병원 담당의사들을 의료과실로 인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형사고소했지만, 경찰은 8개월 뒤에야 피고소인 신문조서를 받고 1년6개월이 지나서야 대질신문을 벌이는 등 성의 없는 늑장수사로 일관했다. 더욱이 의료사고 수사의 기본절차라고 할 수 있는 의학적 자문조차 의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검 무용론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의 부검(剖檢)결과도 신뢰하기 어렵다고 외친다. 의료사고 사망자의 경우 정확한 사인(死因)을 가리기 위해선 부검이 필수다. 하지만 부검결과가 의료진의 과실을 철저히 밝혀내기보다는 두루뭉실하게 나옴으로써 되레 과실을 의심받는 의사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부검결과가 나오기까지 시일이 지나치게 오래 걸린다는 점도 이들에겐 불만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부검 무용론’마저 주장한다. 이에 대한 국과수의 반응은 어떨까.

    “국과수는 일반 변사의 경우 부검 후 15~20일, 의료사고로 인한 사망일 땐 1~2개월 만에 부검 종합감정서를 낸다. 의료사고 사망자 부검은 그 특성상 전문적 내용 검토가 필수적인 만큼 외국저널을 참조하고 외부 전문의의 자문을 거치는 경우가 많은 데다 해당인력마저 달려 부검결과 통보까지 다소 긴 시간이 걸린다. 또한 국과수의 부검결과는 의료행위와 사망간의 인과관계 유무를 따지는 의학적 판단으로 수사기관 등의 공정한 사건처리를 위한 ‘참고자료’이지 그 자체로 의사의 과실 유무를 판정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부검의도 의사이니 가재는 게편 아니겠냐’며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불필요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과수 법의학과의 한 관계자는 “부검결과를 조금 ‘깊이’ 써내면 검찰과 경찰에서도 싫어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의사의 과실 유무에 대한 최종 판단은 수사기관의 영역이란 이유에서다. 과실을 의심받는 의사로부터 항의를 받거나 심지어 해당의사가 같은 대학 출신일 경우 동문회에 나가서 부검의를 나쁘게 이야기하는 등 소위 ‘왕따’를 시키기도 한다”며 “부검의들이 가장 꺼리는 것이 의료사고 사망자 부검으로, 이를 맡게 되면 부검의들이 하루 종일 우울해한다”고 귀띔했다.

    지난한 ‘진실게임’

    의료사고로 인해 해당의사가 기소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홍정섭(당시 9세·경기도 고양시)군의 경우는 단일 의료사고로 의사 3명이 무더기로 기소된 국내 최초의 사례다. 홍군은 2002년 3월3일 갑자기 복통을 호소해 집 인근의 한 병원을 찾았으나 “급성 충수염이나 장중첩증으로 보이니 수술이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이 나오자 이튿날 가족은 홍군을 규모가 더 큰 일산 B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B병원측은 가족이 받아온 의사 소견서를 무시한 채 장염이라 진단하고 홍군을 일반 병실에 입원시키는 바람에 결국 홍군은 입원 사흘 만에 내부탈장으로 인한 장괴사로 숨졌다.

    ‘두 번 죽는’ 의료사고 피해자들
    홍군의 가족은 같은 해 3월11일 B병원의 담당 전문의와 전공의(레지던트) 등 3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형사고소했지만 경찰은 ‘의사의 과실을 찾기 어렵다’는 대한의사협회의 소견에 근거해 불기소의견으로 같은 해 11월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홍군의 진료기록을 재조사하고 관계자 진술을 통해 의사 과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확보, 사고발생 11개월만에 의사들을 불구속기소했다.

    당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현 의정부지검)에서 의료전담 검사로 홍군 사건을 맡았던 대전지검 서산지청 강수산나(36·여) 검사는 “의료사고 수사에선 진료과정에서 발생하는 의사의 과실을 과연 어느 선까지 입증할 수 있을 것인지가 가장 어렵다. 예전에도 의사를 약식기소한 예는 있지만, 여러 명의 의사를 한꺼번에 기소한 것은 홍군 사건이 처음”이라며 “사건 당시 관내 의료자문위원들의 도움을 받아 토론과 협의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홍군의 아버지 홍병록(41·조경업)씨는 “내 아들의 사례는 경찰이든 검찰이든 의료사고에 대한 수사의지만 있으면 상당부분 의사의 과실을 밝혀낼 수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며 “그러나 강력사건과 권력형 범죄의 틈바구니에서 민생관련사건 수사는 언제나 소홀히 취급되는 경향에서 보듯 의료사고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수사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내 아들의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였다”고 전한다.

    이처럼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의료진을 상대로 한 ‘진실게임’은 의료사고 피해자에게 지난하기만 하다. 이런 애로는 비단 피해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법무법인 한맥의 이경권(35) 변호사는 지난 2월 의료전문 변호사가 되기 위해 가톨릭의대에 편입했다. 2002년 1월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가 의대 편입을 결심한 것은 의료소송을 주로 맡는 동안 대학병원이 의료진의 과실을 숨기려 말도 안 되는 의학자료들을 내놓은 사례를 접한 뒤 의학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원·피고 대리하는 변호사들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맞닥뜨리는 장벽은 소송과정에서도 버티고 있다. 소송비용부터 과도하다. 통상 의료전문 변호사를 선임해 의료소송에 임하려면 착수금만 500만원에 승소시 성공 사례금이 승소금액의 20% 가량에 이른다. 여기에 인지대 등 기타비용을 합하면 못해도 얼추 1000만원 정도가 소송에 필요하다. 소송기간도 보통 2~3년은 걸린다.

    의료전문 변호사 중 상당수가 의료소송에서 원·피고 사건을 모두 소송대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불만 중 하나다. 자칫 변호인이 피해자측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의료전문 변호사의 말은 다르다.

    국내 첫 의료전문 변호사로 손꼽히는 신현호(45·법무법인 해울) 변호사는 “원·피고를 소송대리하는 관행은 외국도 마찬가지이며 법적으로 하등 문제될 게 없다”며 “모든 환자가 선(善)이 아니듯 의사도 무조건 악(惡)은 아니지 않은가. 변호인은 의료사고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법원의 재판에 조력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병의원 쪽 변호를 맡아보면 환자 쪽만 대리할 때에 비해 병의원이 환자 쪽에 당하는 사례가 의외로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며 “의사를 옹호하는 경향의 판결이 이뤄진다는 환자들의 주장도 있지만 아직 통계적으로 입증된 건 아니다. 대체로 재판부의 판결은 의사의 과실입증 책임을 환자측에 지우면서도 실제론 그 책임을 상당한 정도 경감해주는 방향으로 내려지고 있다. 원고 승소율은 61∼62%쯤 된다”고 덧붙인다.

    신 변호사 스스로 밝히는 자신의 의료소송 수임 건수는 300여건. 전체 수임사건의 50% 가량이 의료소송이다. 국내에서 의료소송을 가장 많이 맡는다는 그의 경우 원고(환자측) 대 피고(의사 혹은 병원측) 소송대리 비율은 6 대 4 정도다. 이런 사정은 의료소송사건을 주로 맡고 있는 의료전문 변호사 10여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대한의사협회의 법제이사 혹은 주요병원의 고문변호사를 역임했거나 현재 맡고 있다.

    의료전문 변호사들에 대한 불신 못잖게 의료사고 관련 시민단체들에 대한 의구심 또한 만만치 않다. ‘의료사고 경감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단체 본연의 순수성을 지키기보다는 점차 상업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최근들어 이런 단체들을 궁여지책으로 찾을 수밖에 없는 ‘필요악’쯤으로 치부하는 의료사고 피해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대부분 의료분쟁과정에서 ‘의료사고시민연합’ ‘의료사고가족연합회’ 등 의료사고 관련단체의 조력을 원한다. 의학 및 법률지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피해자에겐 이런 단체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2000년 2월 설립된 의료사고시민연합의 경우 의학지식과 소송절차에 대한 법률자문 등 의료사고 관련상담을 해주는 한편 부설로 운영하는 ‘솔로몬 번역분석원’을 통해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진료기록을 번역하고 병원측의 과실 여부를 분석한 뒤 피해자가 소송에서 쟁점으로 내세울 만한 사항들을 짚어주고 있다. 연평균 2000여건의 의료사고 상담이 이뤄지고 진료기록 번역분석 의뢰는 200∼300건 가량 들어온다.

    의료사고시민연합 강태언(40) 사무국장은 “정회원 회비와 기부금, 진료기록 번역분석료가 수입의 전부인 데다 이마저 사무실 임대료 등으로 충당하다보니 의료사고 추방운동엔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힘이 닿는 대로 관련 캠페인 등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갈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강 국장 역시 의료사고 피해자다. 1995년 5월 당시 23세로 결혼한 지 11개월의 신혼이었던 그의 부인은 서울 B병원에서 분만 도중 뇌손상을 당해 식물인간이 됐고, 아이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사망했다. 사고원인을 환자 탓으로 돌리는 병원측에 맞서 의료소송을 제기한 강 국장은 4년여에 걸친 눈물 겨운 노력 끝에 승소했다.

    의료사고 관련단체들이 사고 이후의 경과 등 관련정보를 인터넷 사이트나 회보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도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불만사항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피해자들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그 대표격이 ‘마루타(http://cafe.daum.net/maroota)’다. 2002년 4월 개설한 이 카페엔 4월11일 현재 1590여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다.

    운영자 최정옥(43·강원도 원주시)씨도 의료사고 피해자다. 그는 2000년 12월 아들 김모(당시 10세)군이 뇌종양으로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병원감염균인 메티실린 내성 포도상구균(MRSA)에 감염돼 사망하자 병원측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지루한 재판 끝에 지난 1월 일부승소했다. 최씨는 이 과정에서 한때 ‘법의학사무소’를 운영하며 의료사고 피해자들을 상담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의 처남 민경찬(44)씨를 찾는 바람에 돈을 떼이고 자칫 소송을 망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최씨는 “피해구제시스템만 잘 갖춰져 있다면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민씨와 같이 범법행위를 일삼는 비윤리적인 의사를 찾지도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한편으로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의 의료사고 진료기록 감정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협 학술국에 따르면 피해자측이 의료사고와 관련해 의료소송을 제기하면 법원은 의협에 의료사고 환자의 진료기록을 감정해달라는 ‘의료사안 심의’를 의뢰하고, 의협은 각 진료과목별 학회로 기록을 보낸다. 그후 학회별로 선정돼 있는 감정의의 검토와 진료심의위원회의 회의를 거쳐 도출한 감정결과를 의협에 통보하고 의협은 이를 토대로 답변서를 낸 뒤 법원에 회신해주는 절차를 거친다. 하지만 의료사안 심의에 대한 의협의 내부결재가 나는 데만 한 달 이상 걸려 답변서가 회신되기까지는 최소 한 달에서 수개월씩 걸린다.

    독립적 감정기관의 필요성

    의료분쟁은 ‘증거 싸움’인 만큼 환자 진료기록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의료사고가 의사 과실에 의한 것인지 불가항력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들의 이익단체인 의협이 내주는 감정결과는 학연과 무관하지 않은 만큼 객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의사가 다른 의사의 과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직역(職域)집단주의에 의한 ‘침묵의 공모’가 이뤄질 여지가 크다는 것. 따라서 그 대안으로 의협으로부터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감정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의협 학술국 관계자는 “학회는 감정의가 누군지조차 의협에 밝히지 않는 등 최대한 공정성을 기하는 데도 환자측이 전문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감정결과의 신뢰성을 의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의사를 ‘두 번 죽이는’ 꼴”이라고 항변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선 이처럼 첩첩산중으로 걸림돌이 산재한 것이 바로 의료사고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피해구제를 위해선 이른바 ‘작업’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귀띔하는 피해자마저 있다. ‘작업’이란 의료분쟁 발생시 병원측과의 합의나 조정은 물론 부검, 형사고소나 민사소송 단계에서 그야말로 각종 인맥을 총동원해 병원에 맞설 일종의 압력수단을 찾는 것을 말한다.

    의료사고가 환자의 사망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피해구제가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오히려 사망사고일 때보다 사정이 더 딱한 경우도 있다. 의료소송에 드는 비용이 웬만하면 1000만원을 넘으므로 소송가액이 낮은 경우 소송을 해봐야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김모(34·여·대구시 산격동)씨는 부모가 모두 의료사고 피해자인 경우다. 김씨의 아버지(62)는 2003년 3월6일 서울의 한 병원 정형외과에서 요추협착증 수술을 받았으나 24시간도 안 돼 혼수상태에 빠진 이후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되고 언어장애, 사물에 대한 인지능력 상실 등의 증세를 보여 같은 해 9월 퇴원했다. 그후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8개월 가까이 재활치료에 매달렸지만 결국 1급장애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합의가 여의치 않자 병원측을 형사고소했지만, 손해배상을 위한 민사소송은 경제적 이유로 엄두를 내지 못해 발만 구르고 있다.

    1993년 대구 D의료원에서 고관절치환(골다공증으로 오른쪽다리의 고관절을 인공관절로 교체) 수술을 받은 김씨 어머니(58)의 경우도 2001년 9월 같은 병원에서 닳은 인공관절을 교체하는 2차 수술을 받은 뒤 수술이 잘못됐음을 곧 발견했으나 병원비 일부만 돌려받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3급장애 진단을 받게 됐다. 김씨는 현재 아버지의 병 구완을 위해 7년간 다니던 직장마저 그만둔 상태다.

    의료분쟁조정법 제정 서둘러야

    그러나 의료사고 피해자들을 난망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의료분쟁조정법안의 표류에 있다. 1989년 처음 논의된 의료분쟁조정법안은 16년째인 지금까지도 입법화되지 못하고 있다. 의료분쟁조정법안은 14대 국회부터 16대 국회까지 매번 제출됐음에도 ▲필요적 조정전치주의(의료사고 피해자가 의료소송 제기 전 분쟁조정위원회의 사전조정절차를 거치도록 함) ▲무과실 의료사고의 보상 ▲의사의 형사처벌특례 등 몇몇 쟁점사항을 두고 이해당사자간 이견 대립이 첨예한 실정이다. 사실상 16대 국회 회기도 끝난 것이나 다름없어 의료분쟁조정법 제정 논의는 다시 원점에서 시작돼야 할 판이다.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과 관계자는 “의료분쟁조정법 제정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현안이지만, 의료계와 시민단체는 물론 행정자치부, 기획예산처, 법무부 등 정부 관계부처 내에서도 쟁점사항들에 대한 의견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며 “올해중 다시 입법화를 추진하겠지만 언제 제정될지는 불투명한 상태”라고 말한다.

    취재과정에서 의협의 권용진 사회참여이사는 “의협은 의사를 편드는 단체가 아니다. 의협의 의료사안 심의에 대해서도 환자측의 불신이 큰데 그것은 의심 많은 사람들의 문제다. 의협보다 더 심의를 잘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맡기면 될 것 아니냐”며 “의사들이 좀더 친절해야 한다는 지적 정도라면 수용할 수 있지만, 진료환경 개선과 의료수가 인상은 해주지 않은 채 무조건 의료사고를 의사 탓으로 돌리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의사들에게도 물론 고충은 있다. 특히 전공의의 경우 전문의에 비해 업무숙련도가 떨어지고 근무환경이 열악한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의학이 불완전한 과학이고, 의사가 신(神)이 아닌 이상 의료사고를 100% 예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애꿎은 국민이 피해를 입고 다른 한편에선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인 데도 의사가 ‘다쳐야’ 하는 후진적인 의료사고 피해구제시스템은 바꾸어야만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의사들이 의료사고 발생시 무조건 은폐부터 하고 보는 의료계의 오랜 관행에 순치(順治)되다시피한 피해자들의 이런 반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의사 당신 혹은 당신 가족이 병을 고치려 두 발로 걸어들어간 병원에서 차디찬 주검이 되어 나온다면 과연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건가. 당신도 언제든 피해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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